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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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쾅!’ 하는 소리가 났으면 제격일 텐데. 아프나이델이 마법을 걸어버린 공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꼭 이렇게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해야 되나?
“소리를 들려줄 필요는 없지. 우리 위치를 알려주게 되니까.”
“그리고, 이왕이면 갑자기 이 꼴을 보고 놀라게 되는 것이 좋지 않겠어? 하하하.”
좀더 고상한 이유와 좀 덜 고상한 이유가 손을 잡은 모양이다. 어쨌든 칼과 제레인트는 그런 소리들을 하면서 우리 작업을 구경하고 있었다. 난 다시 한번 엑셀핸드의 도끼를 힘차게 당겼다가 나무에 박아넣었다.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울려퍼지지 않지만 도끼에서 전해져 오는 충격은 확실히 느껴진 다. 음. 기이한 기분이야.
“넘어간다!”
“와, 와, 와! 레니! 피해라!”
“난 여기 있어요, 네리아 언니.”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에서 뒷짐을 진 채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던 네리아는 호들갑을 떨면서 쓰러지는 나무를 피했다. 재미있나? 곧 나는 다른 나무 로 다가갔고, 네리아는 그 나무 앞에서 얼씬거리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나무가 쓰러지려고 하자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해내었고 나무가 쓰러지는 순간 날렵하게 피했다. 그러곤 쓰러지는 나무 옆에서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한숨을 쉬고는, 다시 날 졸래졸래 따라오는 것이었다.
“신경 쓰이니까 그러지 말아요!”
“재밌는데.”
말을 말자. 어쨌든 잠시 후, 우리가 타고 오던 마차와 십여 개의 통나무가 어우러져 호숫가의 통행로는 완전 봉쇄되었다. 통나무를 다 쌓아올리고 나 자 아프나이델도 마차에서 걸어나왔다.
“준비 끝났습니다.”
아프나이델은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 작업도 이제 슬슬 끝나가는군.
“이만하면 됐어요?”
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난 도끼를 어깨에 걸머지고 통나무 무더기를 우회해서 내려왔다. 흐음. OPG를 가진 일행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통나무를 가지고 길을 막아버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한편에선 샌슨과 길시언이 포도주 통을 가운데 놓고 앉아서는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길시언은 갑자기 솟구치는 흥취를 감당하지 못했는지 술잔을 든 손을 밤하늘을 향해 높이 들어올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흰 얼굴의 가인이 밤산책을 나섰지. 별의 노래에 홀렸다가 눈을 돌리니 뒤를 쫓는 남자가 가인을 부르네.
부끄러워 몸 돌리다 손수건을 흘렸네.
떨어진 손수건 물결에 두둥실
이슬 머금은 햇살이 무서워
가인은 서쪽으로 황급히 달려가고
뒤쫓는 사랑, 단검을 흘렸지.
손수건과 단검만
호수에 두둥실.
훌륭하군, 훌륭해. 하늘의 두 개의 달과 호수의 두 개의 달을 가지고 아주 멋진 연상을 해내었군. 좀 다듬어줄 필요가 많긴 하지만 연상 자체는 훌륭 해.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마셔대면 나무에 뿌릴 거 다 없어지겠어요.”
난 말을 꺼내놓고는 허락이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매정하게 술통을 들고 와버렸고 길시언의 노래에 박수를 치던 샌슨은 울상이 되었다. 난 눈 딱 감고 나뭇단에 포도주를 부었다. 아이고, 그런데 아깝기는 하다, 이거. 그런데 드워프의 노커는 어딜 갔지?
“엑셀핸드는?”
놔두고 떠나겠다는 엄포가 동원되고 나서야 엑셀핸드가 못마땅한 얼굴로 마차에서 나왔다. 아프나이델이 불안한 얼굴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지만 엑셀핸드는 그저 킥킥 웃을 뿐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잔을 비우고 입술을 닦던 샌슨이 말했다.
“할슈타일 일행이 불쌍하군.”
말은 저렇게 하지만 동정심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으니 말과 표정이 안 맞잖아. 킥킥 웃고 있던 엑셀핸드는 아쉬운 표정으로 마 차를 돌아보며 말했다.
“허엇 참!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근사한 작업을 할 수 있을 텐데.”
“아, 충분합니다. 더 수고하실 필요는 없겠지요.”
“그래. 쩝. 음? 이게 무슨 냄새지?”
잠시 후, 남은 술을 몽땅 통나무에 부어버리면 어떻게 하냐는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내용을 대단히 박력 있게 항의해 대던 엑셀핸드가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고 나자, 일행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호숫가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샌슨과 길시언의 경우엔 이왕 버릴 술 입가심이나 하자며 마신 술이 과 해 좀 휘청거리며 걸었다.
“흠, 흐흠, 루루루.”
샌슨의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들으며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과 호수에서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갔다. 풀잎 사이사이로 싱그러운 밤내음 이 풍겨나오는 길을 걸어갔다. 그렇게 호숫가를 따라 한참 돌아가다가 언제 호수를 떠났는지도 모르게 산등성이로 올라오게 되었다.
밤하늘로 불쑥 튀어나오는 것 같은 검은 산등성이의 그림자가 우리 머리 위로 펼쳐졌다. 셀레나의 보름달빛이 있는데다가 중부 대로의 길이기 때문 에 밤길을 걷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일행들은 모두 조용한 숨소리만 내면서 산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갑자기 운차이가 말했다.
“저기.”
고개를 돌려 보니 호수는 이제 발 아래로 꽤 멀리까지 보였고 옆에서 튀어나온 봉우리들에 그 모습이 많이 가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메드라인 고개에서 내려오고 있는 횃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시언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꽤나 빨리 쫓아오는데. 훈련이라면 질색…………, 훈련이 잘된 전사들인 모양이군.”
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만한 인원이 레인저들의 눈에 들키지 않기는 어려웠을 텐데요.”
“후작이 있으니, 어떻게든 둘러댈 수는 있었겠지요.”
“그렇군요. 자, 레니 양.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올라가면 쉬기 좋은 곳이 있습니다. 거기까지 올라가서 쉬도록 하지요.”
“아, 하악, 하악. 예.”
레니의 숨가쁜 대답을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다시 묵묵히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때때로 고개를 돌려 바라볼 때마다 횃불들은 재미있을 정도로 죽죽 다가오고 있었다. 상당히 빠른데. 밤중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무시무시할 정도야.
말들의 터벅거리는 발굽 소리, 그리고 조용한 일행들의 발소리. 산속의 밤은 모든 소리를 선명하게 울리게 하고 있었다. 내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선 더라이더였다. 선더라이더의 시커먼 몸은 조금도 반사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의 갈기는 달빛을 받아 환하게 떠올랐다. 이윽고 레니의 숨소리가 더 욱 거세게 바뀌었을 무렵, 길시언이 일행들을 멈추게 했다.
“여기서 쉬도록 합시다. 새벽이 올 때까진 잠시 눈을 붙이도록 하지요.”
우리가 멈춘 곳은 레브네인 호수에서 한 3000큐빗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산속에서 밤길을 걸은 것 치곤 우리들도 꽤 빨리 걸어왔는데, 길에서 약 간 벗어난 공터에 자리를 잡고 말을 묶어둔 다음,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들은 모두 하나같이 호수를 내려다보기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난 산의 사면에서 불쑥 튀어나온 거대한 바위 위로 올라가 앉았다. 바위 위에 자리를 잡자마자 뒤에서 졸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치. 나도 올려 줘.”레니의 목소리였다. 난 손을 내려 레니를 붙잡아 올렸다. 레니는 바위 위에 앉자 내게 어깨를 기댄 채 저 아래의 호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나 머지 일행들도 모두 바위나 나무에 기대어앉아서, 또는 네리아 같은 경우에는 나뭇가지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나와 레니가 앉아 있는 곳은 산의 사면에서 튀어나온 바위라 허공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주위는 캄캄하고 산들은 우리 뒤로 슥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별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것 같은데? 가을보다는 겨울에 가까운 날씨라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허공의 자유로운 악사 는 풀잎과 나뭇가지를 악기 삼아 멋진 야상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서석 우서석 위이이잉.
갑자기 어깨가 눌리는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레니가 작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졸리지 않아?”
레니는 옷소매로 눈을 비비며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냠, 쩝. 그래도 보고 싶은걸. 잠 못 잘 거야.”
레브네인 호수의 표면은 시커먼 주위의 산들 사이에서 유달리 반짝거렸다. 멀리 호수 반대편으로 나란히 내려오던 횃불은 호숫가로 내려오다가 잠 시 멈췄다. 잠시 후 횃불은 모두 일렬로 늘어섰다.
“뭐하는 걸까?”
“음. 호숫가로 들어오기 전에 페어리퀸에게 허락을 구하는 거야. 눈 크게 뜨고 봐.”
잠시 후 호수 가운데서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달빛을 받아 거울처럼 반짝이던 호수가 갑자기 거대한 꿈틀거림으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호수 가운데에서 붉은 광선이 쏘아져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두운 산중의 호수에서 검은 밤하늘을 향해 쏘아져 올라가는 붉은 광선은 오금이 저리도록 환상적이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횃불이 갑자기 어지럽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난 그들의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정중하게 부탁을 했는데도 거부의 표시가 나왔으니 꽤나 당황하고 있겠지? 하하하. 레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와아……, 저건?”
“통과할 수 없다는 거지. 다레니안께서 우릴 도와주시는 거야.”
“음. 그럼 아까 낮에 우리는?”
“우리? 우리야 사고 때문에 아무런 허락을 구하지도 못한 채 마구 들어갔으니까 거부의 붉은색이 나온 거야.”
횃불들은 심각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붉은 광선은 아래 부분부터 희미해지면서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 버렸고 호수는 다시 검게 변했다. 저 사람들은 지금 무슨 말들을 나누고 있을까?
“어떻게 할까요?”
“아무리 후작이라도 다레니안의 의지를 거스르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한 번 시도해 볼 수야 있겠지요.”
길시언의 질문에 칼의 대답이 들려왔다. 흠. 그렇긴 하지.
머뭇거리고 있던 횃불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다레니안의 의지의 강도를 시험해 보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횃불이 다시 호수 옆 의 길로 들어서자, 호수가 갑자기 터지듯 요동쳤다.
퍼퍼퍼퍼펑!
호수에서는 낮에 본 것과 같은 수백 가닥의 붉은 광선이 쏟아져 올라갔다. 조금 전 고요하게 올라간 한 가닥의 붉은 광선이 신비로웠다면 이것은 공 포스러웠다. 호수 위에 수백 개의 파문이 그려졌고 물보라가 솟구쳐 올랐다. 호수가 뒤집어지는 굉음은 우리들이 서 있는 장소까지 들려왔다.
곧 호숫가에 있던 숲에서 어린 소녀의 비명소리 같은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꺅꺅꺅! 폭발음과 불빛에 놀란 새들이 잠에서 깨어 일제히 날아 오르고 있는 것이다. 검은 그림자들이 무수히 날아오르는 모습은 마치 숲이 통째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푸드드득!
츠핏, 츠핏, 츠핏! 솟아오른 붉은 광선들은 그대로 호수의 수면에 비쳐 물빛을 기괴하게 변화시켰다. 수면 전체에 붉은 선이 수평으로 마구 그어지는 모습 때문에 호수는 달아오른 석쇠처럼 보였다. 그리고 주위의 나무들이 붉게 비쳐서 가을이 다시 찾아온 것처럼 보였다.
“와우우우!”
오른쪽 하늘로 뻗은 나뭇가지 위에선 커다란 부엉이가 울듯이 네리아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호숫가의 길로 들어서려던 횃불들은 황급히 뒤로 물 러났다. 하하하. 횃불들이 굉장한 속도로 멀어지자 붉은 광선은 다시 하나둘 사그라들었다. 이윽고 횃불들이 필요할 듯한 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물 러났을 때 붉은 광선은 모두 사라졌다. 횃불은 호수에서 충분히 떨어진 거리에 모여서더니 다시 불안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후작은 지금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까? 정중히 요청했는데도 다레니안이 허락하지 않으니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지금 부하들과 무슨 말을 나누고 있을까?
나무 위에서 네리아가 킬킬거리는 웃음소리 외에는 모두들 조용했다. 모두들 후작의 다음 행동을 궁금하게 여기면서 지그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 었다. 레니는 내 팔을 부둥켜안고는 볼을 내 어깨에 비비고 있었다. 꽤나 졸린 모양이야.
꽤 긴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별로 많은 시간이 지나진 않았을 때, 횃불들 가운데 하나가 갑자기 호숫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멀 리 떨어진 거리에서는 간신히 확인할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뭘까? 칼은 나직하게 말했다.
“다시 부탁해 보려는 건가.”
다른 횃불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후작의 부하들은 짓눌리는 듯한 공포와 명백한 충성의 의무 사이에서 갈등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믿는 모양이 다. 그들은 떨면서 후작의 등을 바라보고 있을까? 따로 떨어져 나온 횃불은 이제 호수의 물결이 주위의 모래를 적시는 부분까지 와 있었다. 그 횃불은 그곳에서 멈추어 섰다. 운차이는 낮은 목소리로 모두가 짐작하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밤색 머릿결에 새치머리, OPG. 저건 후작이군.”
“히에엑? 저게 보여요?”
“횃불을 들고 있으니까.”
아니, 어둠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말은 거리를 말한 거라구. 원 참. 이 거리에선 횃불들도 가물거리는 별빛처럼 보일 지경인데 말이야. 다른 사람들이 모두 탄성을 올리고 나서 다시 잠잠해졌을 때까지 후작은 여전히 호숫가에 서 있었다. 뭔가 꽤나 기다란 말을 하는 모양이지?
후작은 꽤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리고 갑자기 등 뒤에 있던 횃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지? 횃불들은 이제 다시 열을 맞추어서 두 번째로 호 숫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달려오던 속도나 조금 전의 속도에 비교해 볼 때는 엄청나게 느린 속도였다. 움직이고 있는 것이 확실한 가? 움직이고 있었다.
내 눈은 자연스럽게 호수를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호수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거세게 움직이던 파도도 잠들었고 날아오르던 새들도 흥분
을 가라앉히고 다시 보금자리로 날아들었다. 고요뿐. 다레니안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호숫가를 따라 걸어오는 횃불들만이 살아 움직 이고 있었다.
레니가 하품에 섞어 말했다.
“아함. 다레니안께서………… 가만히 계시네?”
“그래. 거부도 없지만 허락도 없어. 후작 부하들은 꽤나 마음이 무거울걸.”
“흐음. 쩝. 그도 그렇네.”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횃불은 다시 멈추어 섰다. 횃불들의 움직임이 조금 활발해지는 것을 보면서 바위 아래에 기대어 서 있던 엑셀핸드가 킥킥거 렸다.
“자아, 어서 와랏!”
음. 원초적이군. 레니는 이제 똑바로 앉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꾸 바위 끄트머리로 나가려 해서 주의를 좀 주어야 했다.
횃불이 멈춰 선 것은 우리들이 마차를 세워둔 장소였다. 아마도 길이 막힌 것을 보면서 화를 내고 있겠지? 일행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 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퍼퍼펑!”
폭음, 호수에 거센 파도가 일어날 정도의 폭음이 들려왔다. 맙소사! 도대체 무슨 조치를 해놓았기에? 아무리 고요한 산속이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떨 어진 위치까지 폭음이 들려오는 것이지?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치밀어오른 불꽃은 이제 수십 큐빗 높이로 뿜어올랐고 자욱한 연기를 날렸 다. 솟아오른 검은 연기에 불기운이 어려 밤하늘에 기괴한 무늬를 만들어내었다. 연기와 불티가 멋들어지게 호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호숫가의 새 들에게는 참으로 약오르는 상황이겠군. 새들은 요란한 불평을 퍼부어대면서 다시 날아올랐다. 꺅꺅꺅꺅!
호수 수면에도 붉은 불기둥의 모습이 길게 어리었다. 아프나이델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왜 저렇게 폭발력이 센 거지? 엑셀핸드!”
“아, 드워프의 술책이야.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니요? 저런 무시무시한 폭발이…………….”
엑셀핸드는 태평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만 거창하게 나게 한 거야. 특별히 다치는 일은 없을걸? 뭐, 설령 불이 붙었다 해도 바로 옆이 물이잖아. 괜찮아. 염려 없어.”
“이런, 정말 안전한 겁니까?”
엑셀핸드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상당히 젠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 있는 자들 중 누가 죽음 앞에 안전할 수 있지? 음핫하하하!”
“이이이런…….”
마차 주변은 난장판이었다. 횃불은 이리저리 황급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뭔가가 물로 뛰어드는 소리도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풍덩, 풍덩, 말들의 비명소리와 사람의 비명소리가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보자, 내가 쌓아둔 통나무가 못 돼도 열 개는 넘을 텐데. 그 많은 통나무들과 마차에 불이 붙어 호수 옆에는 불의 장벽이 만들어졌다. 쿠르르릉! 갑자기 산 전체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구잡이로 쌓아놓았던 통나무들이 불타오 르면서 무너지고 구르는 모양이다.
“와와와와와!”
네리아의 기괴한 고함소리와 함께 이번엔 호수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다레니안, 감사합니다! 횃불들이 놀라서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호수에서는 광선 대신 물기둥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솟아오른 물기둥들은 불길에 붉게 물들어 뭐라 말할 수 없이 기괴한 모양이 되었다. 그 물기둥들은 허공 에서 자유롭게 꺾어지더니 그대로 후작 일행들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갔다.
운차이가 상당히 싸늘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제레인트는 안달복달하면서 질문했다.
“어떻습니까? 어떻게 되고 있는데요?”
“불에 그슬리고, 폭발에 놀라 넘어지고, 날아오는 물기둥에 맞아 나가떨어지고 있지. 방패로 막으려는 멍청한 녀석도 보이는군. 그 방패와 함께 날 아가 버리는데?”
운차이는 차분히 설명하다가 일행들이 모두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일행들을 돌아보더니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타인의 재난은 역시 즐거운 것이군.”
일행들은 헛기침과 함께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횃불들은 호수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거의 메드라인 고개를 도로 넘어가 버릴 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불길은 하염없이 타오르고 있었고 다레니안은 마지막으로 깔끔한 뒤처리를 보여주었다. 고오오오오!
“무슨 소리야?”
“파도다!”
호수 반대편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호수 전체가 뭍을 향해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싶은 굉장한 파도, 파도는 그대로 달아나고 있던 횃불들을 뒤쫓아 갔다. 오, 페어리퀸, 저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 다가가는 파도에 비해 볼 때 달아나는 횃불은 너무 불쌍하게 보일 정도였 다. 이윽고 거침없이 달려간 파도는 호숫가를 강타했다. 쿠왕! 그것은 마치 맹수가 아래턱을 휘둘러 희생물의 몸에서 고기를 떼어내는 듯한 광경 이었다. 파도는 땅을 후려쳤고, 후작 일행들의 뒷부분에 있던 불행한 몇몇 병사들과 함께 땅의 일부분을 떼어가 버렸다. 온 산이 진동하는 굉장한 소 리가 한참 동안 울렸다.
이제 메드라인 고개의 중턱까지 도망쳐버린 횃불들은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길시언은 그 모습을 보면서 결코 친절하다고 는 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흠. 다시 우리 뒤를 쫓아오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겠군요.”
나무 위에 앉아 있던 네리아는 까르르 웃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그대로 가지를 잡고 빙글 돌더니 아래로 내려섰다. 칼은 운차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쪽의 피해 상황은 어떻습니까?”
“3분의 1 정도는 불에 그슬렸고, 3분의 1 정도는 물에 맞았군요. 그리고 그 사람들 중 상당수가 물에 쓸려가 버렸고. 지금 나머지 일행들이 물에 빠 진 자들을 구하고 있소. 부상자는 꽤 보이지만 사상자로 보이는 자는 없소. 물에 빠진 자들은 실종자라고 해야 될지.”
“흐음. 익사자들이 생길지도 모르겠군요.”
제레인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좀 모진 말 같습니다만 그건 페어리퀸께서 결정할 일인 것 같군요. 두 번이나 거부 표시를 했는데도 들어왔으니 다레니안께서 적절한 응징을 하실 겁니다.”
“음. 알겠습니다. 그런데, 운차이 씨. 넥슨과 자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칼의 질문에 운차이는 다시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참 동안 굳어버린 듯이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혀를 차며 말했다.
“멍청하긴. 못 달아났군. 잡혀들 있소.”
칼은 다행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럼 안전하다는 말이군요. 자! 그럼 여러분. 이만 잠자리에들 드십시다. 후작 일행에게도 좋은 밤이 되길 바라긴 어렵겠지만.” 곳곳에 서서 아래의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웅성거리며 잠자리로 몰려들었다. 난 고개를 돌려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레니? 우리도 이제 내려…………가려면 먼저 잠에서 깨어야겠네?”
음. 항구의 소녀는 저런 폭음과 불꽃, 그리고 범람하는 호수의 굉음 속에서도 얼마든지 잠들 수 있나 보군.
그런데 어떻게 한다? 이렇게 피곤하게 잠들어 있는 것을 깨우려니 안쓰럽군. 그런데 갑자기 귓가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치야.”
안 자고 있었나? 잠꼬대인가? 둘 중 어느 것인지 알기 위해서라면 간단한 방법이 있지.
“왜 그래?”
“별이 참 곱지?”
“윽. 별은 원래 참 고운 거야. 레니의 눈이 보고 있어서 더 예쁘긴 하겠지만, 당연한 말을 왜 하는 거지?”
“……나, 말을 잘 못 꺼내겠는데. 음. 저게 우리 아버지니?”
그렇다고 생각해.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레니는 머리를 더 세게 누르며 물어왔다. 헤. 그런다고 내 어깨가 아프겠니.
“확실한 거야, 아니야?”
“내 생각이지만 그건 아무도 확인할 수 없어. 너도 알다시피 넌 아주 어릴 때 아버지와 헤어진 거야. 그리고 후작은 네 얼굴도 보지 못했고. 아, 제레 인트에게 물어보는 것이 차라리 낫겠는데.”
“신께 개인적인 용무를 물어보고 싶진 않아.”
“그래? 어, 신께서는 우리들의 개인사에 관심이 많으실 텐데?”
“다른 방법은 없어?”
“다른 방법? 글쎄. 아, 어떤 여행자가 널 델하파의 항구로 데려갔다고 그랬지? 해답이 있다면 그 여행자가 가지고 있겠지. 그 외에 다른 사람은 없 “어.”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아, 네리아가 들려줬어.”
“그래? 또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줬는데?”
레니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아래만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질러놓은 불길은 거대한 통나무를 송두리째 태우며 기세 좋게 춤추고 있었다. 바람이 차다……………, 왠지 신경 쓰이는 바람이다. 레니는 그 바람에 자신의 대답을 실어보냈다.
“다 들려줬어. 전부 다.”
“그래?”
“이상해. 난.”
“뭐가?”
레니는 여전히 머리를 내 어깨에 얹은 채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저분은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인 거지? 그럼 난 지금 우리 아버지를 골탕먹이는 일행에 속해 있고, 그리고 여기 전망 좋은 곳에서 우리 아버지 가 골탕먹는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어. 이 정도면 기분이 이상해도 괜찮은 거 아냐?”
윽. 그런 식으론 생각해 보지 못했는걸. 맞는 말인데.
“미안해.”
“뭐가? 후치가 미안할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그래도 미안하고 싶어지는걸.”
다레니안. 죄송합니다. 난 뻔뻔스러웠어요. 우리 인간도 결국 다른 사람 속을 그렇게 잘 알 수는 없는 것인가 보지요. 그러니까 예의범절이라는 잘 조율된 형식도 있는 것이고. 내가 느꼈다고 생각한 핸드레이크도 전부 엉터리일지도 모르겠군요. 내가 어떻게 핸드레이크가 될 수 있을까.
“기분이 나쁜 거니?”
“모르겠어. 난 이렇게 생각해. 아빠는 델하파에 계신 그분이 나의 아빠야.”
“찬성해 줄게.”
“푸훗, 고마워. 하지만 저기서 우리들을 쫓아오는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도 틀린 것은 아니잖아. 사실을 모른 척해야 될까? 글쎄. 그건 쉬운 일 도 아닐 뿐더러 옳은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잖아?”
“그래. 후작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는 어렵겠지. 하지만 옳은 일에 대한 것은, 글쎄.”
“응?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야?”
“아버지는…………….”
난 잠시 말을 멈추고는 멀리 떨어져 있는 레브네인 호수를 바라보았다. 불길이 그 수면에 이글거리고 있어 주위에 펼쳐진 산들은 검게 물러나고 있 었다. 그리고 가물거리는 횃불들. 물에 빠진 사람들 구조하고 부상자 치료하느라 정신들이 없겠지.
“난 길시언을 왕이라고 생각해.”
“무슨 말이지?”
“길시언을 왕이라고 생각한다구. 물론 실제의 왕은 닐시언 전하고 길시언이 왕홀을 들고 있거나 비단에 둘러싸여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있어 길시언은 왕이야. 이해하기 어렵지?”
“어려워.”
“동감이야.”
“애개?”
“하하하. 그래. 나도 이해하기 어려워. 흠. 그런데 말이야. 내가 보기엔 길시언이 왕이고 왕다워. 모르겠어. 닐시언 전하를 많이 사귀지 못했기 때문 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보고 내가 왕으로 생각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는 없으니까, 난 계속 길시언을 왕으로 생각하겠어. 부탁이니까 이유를 물어봐 줘.”
“이유가 뭔데?”
“그가 백성들 앞에서 자신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나라의 백성, 아니 그의 친구라고 해도 좋고……………, 어쨌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는 거대한 위험이 있을 땐 언제든지 그 위험과 자기 친구들 사이에 서려는 사람이야. 그는 등을 보여주는 사람이지.”
“등을 보여준다?”
“등을 보여주려면 어떻게 하지? 그래. 앞에 서야 돼. 앞에 서서 이끌고, 앞에서 오는 위험과 불안을 묵묵히 막아줘야 되지. 그게 등을 보여주는 거야. 그리고 등에는 표정도 없어. 따라서 사람들을 속일 수도 없지. 그런데 길시언은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 있고, 거기에 덧붙여 더 중요한 문제는, 자기 가 그렇게 한다는 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이야. 그래서 난 길시언을 왕으로 생각해.”
레니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내 볼을 바라보았다. 뭐지? 고개를 돌려 똑바로 바라보자 레니는 다시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반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아니지?”
“엥? 어, 어, 이봐! 내가 닐시언 전하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길시언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뭐 그런 평가할 말도 찾기 골치 아픈 상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니지?”
“아냐! 어, 그러니까 말이야. 이건 내 마음의 문제야. 내 생활의 문제가 아니고, 내 생활이야 기반이 딱 잡혀 있으니까 특별히 고민할 필요는 없단 말
이야. 지금 당장 결혼해도 아내를 먹여살릴 자신은 있다구.”
“후후훗! 제미니 양은 좋겠네…”
바위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우으으윽.
“악! 네리아가 그것도 이야기했어?”
“말했잖아. 다 했다니까.”
“어쨌든,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의 고삐를 잡아 돌리자구. 흠. 어쨌든 길시언을 왕으로 생각하는 것은 내 마음의 문제야. 그건, 글쎄. 신 앙과 비슷한 것일까? 마음의 안정을 위해 신앙을 가지는 거지, 생활을 위해 신앙을 가지는 것은 아니잖아?”
“흠. 겉으론 닐시언 전하의 충성된 신하. 하지만 속으론 길시언이야말로 나의 왕. 정확하니?”
“차갑도록 정확해. 아니, 정확해서 차가운가 보지.”
“그런가.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면 되묻지는 마.”
그렇게 말했지만, 레니는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다.
“실제의 아버지와 내 마음의 아빠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말인 거니?”
“고민을 안 할 수는 없지만 시간 정하고 장소 정해서 본격적으로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거지. 내가 이렇게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래? 빨리 대답해. 아름다우신 레이디. 귀양이 어느 가문의 기쁨인지를 여쭤볼 영광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레니는 웃었다. 밝은 웃음이다.
“전 델하파에서 웨일즈 본야드라는 상호 아래 요식업을 하시는 그레이든 씨의 여식입니다.”
“고민 끝?”
“당분간은 고마워.”
“천만에. 당분간이라는 그 유동적인 시간 단위가 이번엔 꽤 길어졌으면 좋겠는데.”
“꽤 길어야 될 거야. 일스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 ‘한 집안에 아이는 둘 있을 수 없다..”
“무슨 뜻이지?”
“어떤 사람에게 자식이 생기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누구의 자식이 아니라 누구의 어버이로 통하게 된다는 말이야. ‘이봐요, 후치 아버지!’ 이런 식으 로.”
“아, 그래? 그럴듯한 말이네. 그럼 레니는 시집간단 말이네?”
“어마, 아냐! 시집 안 갈 거야! 난 오랫동안 그레이든 씨의 여식으로 있겠다는 말이라구! 그래서 길어야 된다고 말한 것이고.”
“바이서스의 속담엔 이런 말이 있어. ‘세상에 믿을 말 많지만, 늙은이 이제 죽어야겠다는 말, 장삿꾼 이문 없다는 말, 그리고 처녀가 시집 안 갈 거란 말은 절대 믿을 수 없다..”
“난 안 간다구!”
“누가 뭐래?”
“안 간다니까!”
“강한 부정은 긍정과 일맥상통하고 이웃지간이며 10년 전에 헤어진 쌍둥이 형제라던데?”
“후치야!”
“알았어, 알았다구! 꼬집지 말아, 내 살결이 얼마나 연약한…………, 으악!”
한참을 쥐어뜯긴 다음에야 난 레니에게 넌 피곤하며 따라서 지금 당장 잠들어야 한다는 내용을 간신히 납득시킬 수 있었다. 레니는 마치 잊어먹었다 가 생각난 듯이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내려줘.”
난 레니의 손을 붙잡으며 그녀가 내려가도록 도와주었다. 땅에 내려선 레니는 치마를 정리하더니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안 내려와?”
“아, 난 여기서 불침번 서야지. 길시언이나 샌슨은 모두 취해 버렸는걸. 먼저 자도록 해.”
레니는 모조리 자리 깔고 누운 우리 일행들을 돌아보더니 다시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거기 굉장히 추울 텐데. 불침번 설 필요 있을까? 그냥 내려와서 자.”
“하하. 괜찮아. 졸리면 가서 운차이나 네리아를 깨우지 뭐. 걱정 말고 가서 누우렴.”
“그러지 말고 그냥 자지 그래.”
“그냥, 생각 좀 해볼 것도 있고. 염려 마. 여기서 얼어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별로 춥지도 않은 날씨인걸.”
·빨리 내려와야 돼?”
“응.”
레니는 일행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곧 주위는 고요해졌다. 난 바위 위에 앉은 채 무릎을 당겨 가 슴에 안았다. 음. 괜찮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군. 꽤나 싸늘한 바람인걸? 으으으
자, 머리 좀 휘두르고. 목도 좀 꺾고. 으랏차!
호수 건너편에 있는 횃불들을 굽어보았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이리저리 일렁거리고 있었다.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서인지 커다란 모닥불을 지피는 모습도 보였다. 꽤나 먼 거리다. 운차이는 어떻게 저렇게 떨어진 곳을 볼 수 있을까.
할슈타일 후작은 레니의 아버지고, 레니는 그레이든 씨의 딸이고, 이 앞뒤의 말이 서로 나뉜 채 바이서스와 일스로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문제가 없 었다. 하지만 레니가 바이서스로 오게 되고, 후작을 먼빛으로나마 보게 되면서 그녀가 이 문장을 인식하게 되자 문제가 발생해 버리는 것이다.
내가 옳은 조언을 한 것인지 모르겠군.
자, 다레니안 앞에서 잘난 척하던 후치는 어디로 갔지? 인간은 뭐라고? 하하하. 자, 생각을 해보자구. 레니는 아직 뚜렷하게 뭘 기획하는 것은 아니 다. 그녀의 행동이나 말을 요약해 보면 이런 거지. ‘왜 싸워야 되지. 그래도 우리 아버지라는데.’ 이렇게 되는데 여기서 레니는 아직 할슈타일 후작을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않았지. 레니가 하고 있는 고민은 ‘그래도……’ 하는 수준인 것이다. 흠. 그렇게 보인다.
모닥불이 잘 붙은 모양이군. 메드라인 고개의 일부분이 바알갛게 물들고 있다.
넥슨의 아버지는? 갑자기 이 문제가 생각나는군. 넥슨의 아버지는 누구지? 넥슨은 카뮤 휴리첼의 아들이고, 동시에 로넨 휴리첼의 아들이다. 넥슨은 그것을 구분지을 줄은 알지만 거기에서 갈등을 느끼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레니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지금으로선 ‘그래도……………’ 하 는 수준의 고민이고 그 고민을 계속 감싸안고 부풀리지 않는다면, 곧 그런 고민 잊게 되지 않을까.
쳇쳇쳇. 내가 레니의 속마음을 어떻게 안담.
“후드드득.”
무슨 소리지? 날갯짓 소리라기엔 좀 이상한 소리다. 마치 날기가 몹시 힘든 새가 날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밤눈이 어두운 밤새인가?
“핫하하하.”
밤눈이 어두운 밤새라. 그거 웃기는 말이군.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추위가 느껴지질 않는다?
이게 뭐지?
눈앞이 갑자기 밝아지는 것 같다. 이상하군. 밤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게 중요하나? 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지. 저 얼굴은 뭐지? 아름다워, 아름 다워. 내 눈앞엔 어느샌가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일어나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알았어. 일어나지. 그런데 당신은……………? 당신은 누구지?
“바위를 내려오세요.”
바위를 내려간다구. 그래. 내려가야지. 내가 왜 바위 위에 있는 것이람. 어서 내려가자.
“이리 오세요. 좀더 가까이 보고 싶어요.”
저 여자는 언제 바위 위에서 내려왔지? 눈빛이 아름다운 여자다. 밤하늘을 그대로 몸에 두른 것 같은 아름다운 검은 옷. 그리고 달빛에 떠오르는 하 얀 얼굴은 달맞이꽃처럼 보이는걸. 아름다운 얼굴이야.
“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세요?”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럼, 제게 오세요.”
아아, 시오네. 당신이 이다지도 아름다웠던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목구멍은 꽉 막히고 숨결이 너무 뜨겁다. 손끝에 감각이 없어.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것인가? 아름다워, 아름다워.
난 어느새 시오네의 앞에 서 있었다. 시오네의 반짝이는 눈이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뺨은 달빛으로 푸르게 빛나고 있다. 싸아한 밤바람이 그녀의 머릿결을 떠오르게 만든다. 더욱 깊어진 얼굴의 음영은 그녀의 얼굴을 한없이 애처롭게, 그리고 서글프게 만든다. 그녀는 울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무엇에 외로워하고 있는 것일까?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밤이군요.”
눈물이 그녀의 커다란 눈을 한없이 투명하게 만든다. 그녀는 추운 듯 외로운 듯 두 손을 모아쥔 채 내게로 한 걸음 다가온다. 세상을 가로지르는 한 걸음. 그녀의 한 걸음 속에 달빛이 부서지고 세계가 열린다. 달빛은 완전히 미쳐버렸다. 저토록 시퍼런 달빛이라니. 달빛에서 굉음이 들려오는 듯하 다.
“모두들 외로운 거죠.”
그래. 너무 길고 너무 외롭다. 그러면서도 삶을 바쁘게 만드는 백만 가지 쓸모 없는 일들 때문에 마주보고 웃을 시간도 없다. 하지만 내가 앞에 있잖
아요, 시오네. 당신은 외로워하지 말아요. 내 입에서 말이 나온다.
“외로워하지 말아요. 우린 하나니까.”
“그런가요? 절 받아들여 주겠어요?”
“난 이미 당신을 받아들였어요. 핸드레이크가 다레니안을 받아들였듯이, 핸드레이크가 바로 당신을 받아들였듯이. 그렇지 않으면………
잠깐. 이 기분은 뭐지?
시오네의 눈이 갑자기 가늘어진다. 뭔가 잘못 말했나? 그녀는 이제 대단한 사고를 저지르고는 아직 벌을 받지 않은 사람을 바라보는 눈으로 날 바라 본다. 창백했지만 부드러워 보이던 얼굴이 이젠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다. 대단히 나쁜 일을 저지른 느낌. 차라리 다 말해 버리고 용서를 받고 싶은 지 독한 욕구가 느껴질 때.
어린 시절, 제미니와 놀다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 시절의 대화가 그렇듯이 대개 앞뒤도 안 맞고 내용 도 없는 말다툼이었으니까. 홧김에 제미니의 얼굴을 쥐어박았다. 그래봐야 깡마른 꼬마의 주먹이 얼마나 아팠겠냐만,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봉변 을 당한 제미니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난 너무 놀라고 당황해 덩달아 울어버렸다. 덕분에 나는 제미니를 달래지도 못했고, 제미니는 눈이 시퍼렇 게 부은 채 엉엉 울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난 목에서 오리 소리가 날 때까지 울고는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집에 돌아왔다.
저녁도 먹지 않고 잠든 그날 밤은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는 밤이었다.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되어 자기 집 에 숨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꼬마였으니까. 꿈속에서 제미니 아버지가 영주님의 성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발이 땅바닥에 붙어버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곧 대노한 경비 대원들이 아무르타트를 잡기 위해 준비해 둔 무시무시한 비밀 무기를 질질 끌면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 였다. 경비 대원들의 어깨가 마치 위어울프의 그것처럼 보였다. 난 대로에 붙박여 선 채 몸이 부서져라 떨면서 그 무기를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게 뭔지는 몰랐다. 대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무덤이 보였다. 묘비명은 제미니 스마인타그. 내가 제미니를 죽였어. 내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아직도 굴러오고 있는 비밀 무기와 눈이 튀어나올 듯이 화난 경비 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제미니를 죽였어!
“제미니!”
다음 순간, 난 뒤로 튕겨지듯 물러나며 바스타드를 뽑아들 수 있었다. 얼마나 빠르게 뽑아들었는지 순간적으로 손끝에 몰린 피 때문에 손이 아파왔 다.
“시오네!”
“두 번째가 내 이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