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8권 – 제14부 : 정답이 없는 선택 9화

드래곤 라자 8권 – 제14부 : 정답이 없는 선택 9화

9

“멈추시오!”

칼은 두 팔을 휘저으며 풀숲에서 뛰쳐나왔다. 그러다가 그는 풀잎에 발이 걸려 앞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으악!” 쿠당탕! 그러나 칼은 앞으로 한 번 구르더니 번개 같은 동작으로 다시 일어나며 외쳤다.

“크라드메서! 멈추시오! 라자가 왔소! 아이고, 무릎이야.”

칼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무릎을 문지르면서도 저 대사를 당당하게 말했다. 왜 우리 고향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희한한 동작을 잘하는 거 지?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당당하게 말한다는 것은 꽤나 난이도가 높을 거 같은데.

뒤이어 제레인트가 휘익 뛰쳐나왔다. 제레인트는 마치 크라드메서를 막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두 팔을 위로 들어올린 채 고함을 질렀다.

“잠깐! 성급함은 드래곤과 인간 모두 경계해야 할 악덕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라자가 왔습니다! 기대하시고 고대하시던 라자가 도착했습 니다!”

이, 이 황당한 내 동료들. 그리고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가 보다 품위 있게 천천히 걸어나왔다. 아프나이델은 별말 없이 두 손을 모아쥔 채 크라드메 서를 흘끔 바라보고는 곧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태연한 안색과 달리 그가 입을 열자 숨길 수 없는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사했군요. 다, 다행입니다.”

“왜 안 달아났습니까!”

샌슨의 외침에 엑셀핸드는 눈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우리는 계약을 하러 온 거지, 크라드메서를 구경하고 달아나려고 온 것은 아닐세.”

이윽고 네리아와 운차이가 레니를 가운데 둔 채로 걸어왔다. 네리아는 걸음을 제대로 옮기지 못할 정도였지만 레니는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레 니는 우리들보다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서서 크라드메서를 올려다보았다. 일행들이 놀라서 레니를 바라보는 가운데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드래곤 라자로군.”

“그렇습니다.”

레니의 대답은 한가롭기까지 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렇게 무서워하던 레니가 왜 저렇게 태평한 거지? 그녀의 표정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기이한 표정이었다. 그때 운차이의 뒤를 이어 마지막으로 에델린이 길시언을 부축한 채 걸어나왔다. 크라드메서는 중얼거렸다.

“트롤 프리스티스?”

에델린은 다른 손으로 젖은 후드를 천천히 뒤로 넘기고는 크라드메서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습니다. 크라드메서.”

“어떤 손길이 그대를 그렇게 이끌었소?”

“당신도 짐작하실 분입니다. 트롤을 신의 지팡이로 이바지하게끔 만들려고 결심하실 수 있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핸드레이크로군.”

“그렇습니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군. 그런데 크라드메서도 핸드레이크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가? 그는 다시 길시언에게 말했다.

“당신이 길시언 바이서스인가.”

“쿨럭! 예…………, 그렇습니다. 위대한 드래곤이여.”

크라드메서는 갑자기 고개를 조금 낮추더니 길시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창백한 얼굴이나마 당당하게 마주보려고 애썼다. 크라드메서 는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는군. 저 독수리는? 당신을 맞이하기 위해 온 아샤스의 전령이오?”

뭐야? 일행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길시언은 차분히 대답했다.

“저로선, 쿨럭!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쿨럭.”

“알았소. 당신들의 목적은 라자의 계약이겠지?”

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내가 먼저 고함을 질렀다.

“안 돼요!”

일행들의 눈길이 각자의 의심을 담은 채 내게 쏟아졌다. 난 고개를 들어올려 크라드메서를 바라보며 외쳤다.

“먼저, 먼저 제 질문에 대답하세요! 우린 크라드메서와 계약을 맺으러 온 것이지, 미친 드래곤을 우리나라로 끌고 가려고 온 것은 아니에요!”

“네, 네드발 군?”

칼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난 칼에게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다시 크라드메서에게 외쳤다.

“제가 지금 엄청난 무례를 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제 의심이 온당하다고 느껴진다면 절 용서하시고 제 질문에 대답해 주세 요!”

이건 초장이 후보에 지나지 않는 17세 소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도박이야. 하지만 내겐 으뜸패가 있다구. 여기 드디어 드래곤 라자가 도착했 어. 레니가 왔다구. 그렇다면, 크라드메서가 미치지 않았다면 내가 무례하다는 이유만으로 날 죽이려 들지는 않겠지. 그의 라자가 될지도 모르는 소 녀가 내 동료니까. 그리고 만일 그가 정말로 미쳤다면? 어차피 그럴 경우엔 아무 도리가 없다.

크라드메서는 대답했다.

“내 정신은 곧고 올바르다.”

샌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샌슨. 물레방앗간 아가씨의 얼굴을 봐서라도 제발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아줘. 미친 사람이 자기가 미쳤다고 대 답하는 거 봤어?

“그렇다면 조금 전의 당신 행동은 뭐지요? 어떻게 우리와 ‘대화’를 나눈 거지요? 조금 전까지도, 아니, 지금까지도 당신은 라자가 없는 드래곤인데!” 칼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는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드메서는 대답했다.

“그렇다. 난 자유로운 드래곤이다. 그리고…………….”

크라드메서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느릿하게 말했다.

“자유보다는 구속을 더 사랑하게 된 드래곤이다.”

“예?”

“자네들의 구속을 동경하게 된 드래곤이지.”

무슨 말이지?

“나는………… 이그누스 드래곤.”

크라드메서는 독백처럼 말했다.

“만물의 관조자로 남아야 할 자. 행동하는 저울대로 있어야 할 자. 그러나 자네들은 나마저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자네들은 날 변화시켰지. 루트에 리노가 행사하는 손길은 시간을 문지방처럼 뛰어넘지.”

크라드메서는 하늘을 향해 말했다.

“종족의 의미로서 드래곤은 죽었어.”

“도대체 무슨……..”

“그만.”

크라드메서는 나직하지만 강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크라드메서는 레니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라자의 운명을 가진 소녀여.”

“예. 크라드메서 님.”

돌아본 레니의 모습은 상상을 뛰어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레니는 약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 슬픈 듯한 미소였지만 분명 미소다. 도대체 어 떻게 된 일이지?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몇 번 죽었다 깨도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도 못할 거라는 사실 말이야.

레니의 대답이 나오는 순간 우리들은 모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한두 걸음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우리들은 완전히 제외되어 버렸다. 마 치 주인 어르신과 손님의 대화에 놀라 황급히 물러나는 하인이 된 기분인걸. 이제 분지엔 크라드메서와 레니만이 남겨진 것처럼 보였다.

크라드메서는 읊조리듯이 말했다.

“반갑군. 오느라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레니는 고개를 숙이지도,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그대의 숙명과 내 숙명이 여기서 만났으니, 그대는 드래곤 라자가 되어 나를 저 인간들과 연결지어 줄 수 있다. 그대는 정당한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혹은 그대와 나 양자의 요구에 의해서 우리의 숙명이 서로 다른 길로 갈릴 때까지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대의 임무에 대해 이해 했다면 그 임무를 받아들이겠는지 말해 보라.”

레니는 따스한 얼굴 그대로 말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제, 제가 묻겠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뒷부분의 말에 우리들은 크게 놀랐다. 레니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당신은 받아들이겠습니까?”

아아, 그래. 맞아. 상호 동의였지. 레니, 꽤나 똑똑하네? 칼이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는 대답했 다.

“받아들이지 않겠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놀랍게도 엑셀핸드였다.

“왜! 왜?”

엑셀핸드의 고함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아직도 머릿속이 멍하다. 지금 크라드메서가 뭐라고 말했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요. 크라드메서!”

털썩. 고개를 돌려보니 땅바닥에 주저앉은 네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네리아는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팔을 휘저어대다가 운차이의 다리를 붙잡고는 거기에 매달려 덜덜 떨었다. 하지만 운차이는 네리아를 내려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입을 조금 벌린 채 크라드메서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난 참지 못하고 외쳤다.

“어째서! 당신은 그랬잖아요. 레니가 어쩌면 유피넬이 정한 당신의 짝일지도 모른다고………….”

“유피넬이 정한 것이지 내가 정한 것은 아니다.”

크라드메서의 대답은 단조로울 정도였다. 하지만 대답할 말이 없다. 세상이 유피넬이 정한 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 헬카네스가 있으니까. 그 리고 개개인의 의지가 있으니까. 칼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위대한 드래곤이여…………….”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예?”

“정말 나를 위대한 드래곤이라고 생각하오? 나를 존경하는 거요?”

“당신은 존경받을 만한 위대한 생물이지 않습니까. 심원한 지혜, 그 지혜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강력한 힘. 당신은 그 모든 것을 갖춘 자입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라자를 통해 나에게 도달하려는 것이오, 아니면 라자를 통해 날 그대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오?”

“예?”

어, 어라? 이건 생각도 못했던 질문인데? 아니, 상상도 해본 적이 없어. 드래곤 라자에 대해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 크라드메서는 말했 다.

“서로 다른 두 지성이 접촉하게 되면, 분명 변화는 일어나는 법이오. 당신은 인간이니까 그 사실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 설마 당신은 서 로가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며 접촉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낭만주의자인 거요?”

“아니오.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잘 아는군. 난 더 이상의 변화를 원하지 않소. 더 이상 인간과 관계되지 않겠소. 이미 충분히 인간화되었으니까. 조금 전 저 소년이 지적한 대로, 난 그대들과 대화할 수 있을 정도까지 당신들을 닮아버렸지. 라자가 없이도 말이오. 대화라. 굉장한 일이지. 말해 보시오, 인간이여. 저기 있는 전사는 자이펀인으로 보이는군.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열사의 바람이야.”

크라드메서는 갑자기 운차이를 지적했다. 우리들은 당혹해서 운차이와 크라드메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운차이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크라드메 서를 올려다보았고 크라드메서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이펀 전사. 당신은 바이서스 여성과 대화할 수 있소?”

“……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것 같았소. 그 옆의 여인, 당신에게 기대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소. 난 당신들보다 더 빨리, 훨씬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거든. 자, 이제 묻겠소. 자이펀 전사여. 당신은 변화하지 않았소?”

운차이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무서운 얼굴. 그는 갑자기 고개를 내려 자신의 다리에 매달린 네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네리아는 젖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운차이를 올려다보았다. 운차이는 고개를 조금 가로젓고는 다시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변화했습니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조금 움직이더니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거의 인간처럼 보이는군. 프리스티스여.”

“그렇습니까? 이 외모에도?”

“난 드래곤이오. 외모는 나에게 별로 의미가 없소. 당신 스스로가 대답해 보겠소? 당신의 행동거지는 트롤의 것이오, 아니면 인간의 것이오?” 에델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당신도 변화한 것이군.”

“아뇨. 전 태어날 때부터 인간과 함께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닮게 된 것이죠.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피의 본능은? 프리스티스여. 신이 세상을 만들고 종족을 구분지으실 땐 태어나면서 그 종족임을 구분할 수 있도록 만드셨지, 자라나면서 종족성을 띠도록 창조하지는 않으셨소. 당신은 트롤로서 태어났고, 인간 때문에 변화한 존재요.”

에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조금 숙였다. 크라드메서는 뒤로 조금 물러나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하늘을 바라보자 머리는 보이지 도 않고 대신 다리와 가슴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루트에리노여………….”

크라드메서는 신음하듯이 말했다.

“그대의 행동은 순간이었지만, 그 영향은 3세기를 넘어서도 계속, 아니 더욱 커져만 가고 있소.”

칼이 앞으로 나서며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다. 크라드메서의 가슴 위로부터 갑자기 그 얼굴이 다시 드러났다. 크라드메서는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말 했다.

“돌아가시오.”

“예?”

“돌아가시오. 계약은 거부되었고 난 당신들에게 볼일이 없소.”

칼마저도 더 이상 말을 꺼낼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다. 그는 뭐라고 외칠 듯이 팔을 들어올렸지만 곧 힘없이 팔을 떨구었다. 그는 격하게 고개를 가 로저었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최후의 최후에, 크라드메서로부터 거절을 당하다니? 그 질주와 그 모험, 그 역경들은 다 뭐가 되는 거지? 이대로 돌아 가야 하는 건가? 크라드메서가 거절했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지?

아냐. 뭐, 특별히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어. 우리가 왜 레니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나. 크라드메서가 다시 한번 바이서스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잖아. 하지만 지금 크라드메서의 모습에선 그런 걱정은 왠지 잊어버려도 상관이 없을 것 같군. 그렇다면, 비록 우리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목적은 달성된 것인가?

그때였다.

“크라드메서 님.”

레니였다. 어느새 레니는 앞으로 더 걸어가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뒤로 한껏 젖힌 채로 크라드메서를 올려다보았다. 크라드메서는 긴 목을 우아하 게 휘어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레니는 말했다.

“어제 저녁, 전 핸드레이크 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핸드레이크의?”

“예. 핸드레이크 님은 저기 계시는 에델린을 통해서 제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제가 당신을 찾아가는 것 때문에 제게 조언을 주시려고 하신 거죠.” “어떤 조언이지?”

어? 그 말을 하려고? 그 웃기지도 않는 에델린의 전언을? 아프나이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바뀌었다. 레니는 가슴을 크게 부풀리더니 곧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핸드레이크 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자가 되는 거, 별로 대단하게 생각하지 마라. 친구를 하나 사귄다고 생각해. 비록 그 친구가 덩치가 좀 주체 못할 정도로 크고 트림을 잘못하면 불덩어리가 튀어나오는 습관이 있지만, 친구 사이에 그 정도는 눈감아 줘야지..”

아아앗! 예상이 틀렸어. 샌슨이 크라드메서를 화나게 만들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레니가 그러다니! 제레인트는 이 와중에도 고개를 돌리고 킥 킥거리기 시작해서 주위의 거센 항의성 눈총의 과녁이 되었다. 그런데 크라드메서는?

크라드메서는 아무 말없이 레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그대로 레니를 밟아버리는 것은? 내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달려나가려고 할 때 레니는 말을 이어나갔다.

“전 그 말씀이 그저 제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농담인 줄 알았어요.”

그럼 그게 농담이지 뭐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레니? 레니는 고개를 조금 가로젓더니 두 손을 위로 조금 들어올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크라드메서 님. 전 라자가 맞는 모양이에요. 지골레이드를 만났을 때도 그랬는데, 지금도 당신의 감정이 느껴져요. 혹시………….”

감정을 느낀다고? 레니가 크라드메서의 감정을 느낀다고? 레니는 말했다.

“외롭지 않으세요?”

퐁.

기다란 풀잎에 영글었던 빗방울이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위는 고요하고 하늘을 받치고 선 드래곤은 드래곤 라자를 내려다본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들었다.

퓨우우욱! 휘몰아치는 강풍이 다시 온몸을 덮쳤다. 극한 혼란, 일행들이 내지르는 아비규환 속에서 정신이 나가버리는 혼란을 겪는 동안 폭풍은 사 라졌다.

그리고 크라드메서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크라드메서는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으음.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도 워낙 커서 아직도 레니는 머리를 한껏 든 채 그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레니는 놀란 눈으로 크라드메서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크라드메서 님?”

크라드메서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라자여. 드래곤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단다.”

“아,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저, 전 어린 계집애라…………….”

“그리고 내 감정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는 라자지. 그렇잖은가?”

레니는 붉어진 얼굴을 숙였다.

제레인트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흥분해서 헐떡거리고 있었다.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는 거의 같은 크기로 입을 벌리고 있었고 칼은 경탄스러워하 고 있었다. 크라드메서는 우리 일행을 주욱 둘러보고는, 다시 레니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대 앞에서는 내 감정에 대해 거짓말할 수가 없지. 불공평한 일이지만, 라자여. 원래 숙명이라는 것은 공평이라든지 불공평이라는 말이 닿지 않는 영역에 있는 것이지.”

레니는 눈만 살짝 들어 크라드메서를 올려다보았다.

“외롭냐고 물었는가?”

“예…….”

“알고 있는 사실, 이미 짐작하는 사실을 묻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대화 방식이지,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대화 방식은 아닐세. 라자여.”

“………그렇네요. 물어볼 필요가 없군요. 당신은 외로우세요.”

“어느 정도로?”

“사무치게.”

크라드메서는 미소 띤 얼굴을 조용히 가로저었다.

“틀렸어. 레니 양. 내 외로움은 인간이라는 그릇에 담기엔 너무 크지만, 드래곤이라는 그릇에는 충분히 담을 수 있는 것이지.”

“드래곤이시라서, 더 잘 견딘다는 말씀이세요?”

“그렇다.”

레니는 입가로 주먹을 가져갔다. 그녀는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을 내리깔았다. 눈을 내리깐 채로, 레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크라드메서는 별말 없이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허어, 이것 참. 아까부터 윗분들의 화난 대화를 듣는 아랫사람의 기분이 뭔지 정말 실감하겠는데? 레 니는 말했다.

“거짓말이세요. 당신은 외로움을 느낄 수 없는 드래곤이에요. 드래곤이라서 더 잘 견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요. 오히려 드래곤이라서 더 아프게 느끼시는 거예요. 당신은………….”

“라자여.”

“인간을 사랑해요.”

크라드메서의 말에도 불구하고 레니는 칼로 자르듯 말했다. 크라드메서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레니의 말은 크라드메서의 입을 다물게 한 것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멍해진 머릿속으로는 오만가지 상념들이 와글거린다. 인간을 사랑한다고? 드래곤이? 어떻게? 그들이 보기엔 한없이 어리석고 가냘픈 존재에 지나지 않는 우리들을?

크라드메서는 갑자기 레니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제 그와 레니의 눈 높이가 비슷해졌다. 레니는 얼굴을 붉혔지만 이번엔 고개를 숙이지 않 았다. 크라드메서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채 레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니 양.”

“예.”

“생각해 보아요. 레니 양. 보다 저급한 것이 보다 고급한 것에, 보다 단순한 것이 보다 복잡한 것에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필멸

자들은 당연히 불멸자를 사랑하는 법 아닐까?”

그것인가? 인간이 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들은 불멸의 종족. 나 같은 초라한 드래곤이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종족 아닌가.”

우리가 불멸의 종족이라고? 당신이 초라한 드래곤이라고? 레니는 입을 조금 벌린 채 정신없이 크라드메서의 말을 듣고 있었다.

“카뮤 휴리첼이 타이번과 함께 날 찾아온 날이 바로 어제 같군.”

타이번! 헬턴트 사나이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레니를 바라보고 있던 크라드메서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결말은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지. 레니 양. 나는 자네 인간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이를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나는 예상할 수 없었어. 카뮤와 함께했던 날들에 대해 그리워하고 인간들의 모습을 동경하게 될 줄은. 내가 인간을 사랑하게 될 줄은. 하지만 이젠 똑똑히 이해한다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조금 갸웃하면서 웃었다.

“강물이 바다를 그리며 달리듯, 난 인간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지.”

크라드메서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칼을 바라보았다.

“나는 말했소. 서로 다른 두 지성이 접촉하게 되면, 분명 변화는 일어나는 법이라고. 바다를 그리워하며 달려간 강물은 결국 바다가 되어버리지. 그 대들은 나에겐 너무 벅찬 존재들이었고, 라자가 찾아옴으로써 난 막다른 길에 몰리고 말았소. 한 때는 당신들과 관련지어지고도 나 스스로를 지킬 자 신이 있었지. 그래서 카뮤와의 계약을 받아들였던 것이고.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지 보시오.”

크라드메서는 하늘을 향해 말했다.

“난 정신적 호메오스타시스를 잃어버렸소.”

저런! 그걸 잃어버리다니. 이름이 저렇게 긴 걸 봐서 퍽 중요한 것인가 본데. 그러나 칼은 알아듣는 모양이다. 이제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 한결 바 라보기 편한 크라드메서를 향해, 칼은 메마른 음성으로 말했다.

“믿기 어렵습니다. 당신은 최고의 생물이십니다.”

“아니오.”

크라드메서는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단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시오. 이 가증스러운 자기 확인을 샌슨? 당신은 조금 전에 내게 물었소. 내가 왜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당신이 아 무도 보지 않는 골방 안에서 수음을 해본 적이 있다면 내 행동을 이해할 것이오.”

켁! 저런 뻔뻔한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다니. 길시언의 기침소리가 갑자기 높아졌고 네리아와 레니,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질겁하면서 물러났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얼굴을 붉혔다. 그 와중에도 제레인트와 에델린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에델린은 이해하지만 설마…………, 제 레인트? 샌슨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 말씀이 좀 고상하면 좋겠군요?”

크라드메서는 미소를 지었다.

“난 당신네들의 예법이나 윤리에 대해선 이해는 하지만 감정은 느끼기 어려우니 용서하시오. 난 당신들이 마치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처럼 굴며 공공연히 행동하거나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는 것들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소.”

샌슨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어쨌든 이건…………, 그렇소. 자위 행위나 마찬가지요. 아무도 없는 이 분지에서, 난 인간의 모습을 해보며 자기 확인을 해볼 수밖에 없게 되었소. 드래 곤으로서의 내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말이오. 당신들이 날 얼마만큼이나 바꿔버렸는지 보시오.”

갑자기 난폭한 감정이 느껴진다.

목에서 뜨거운 것이 확 치밀어오르는 기분이 느껴졌다. 이건 배신감이로군. 그래. 우습지도 않지만 이건 배신이야. 그만큼의 공포, 그만큼의 역경을 참아내면서 마침내 만난 드래곤이, 그 드래곤이 겨우 이런 드래곤이었나? 대륙을 박살내는 드래곤의 공포, 만인을 떨게 하는 드래곤, 어떤 이에겐 나 라를 배신하고 육친을 도구로 이용해서라도 만나야 할 드래곤이란 게 겨우 이건가? 할슈타일 후작. 차라리 당신이 불쌍하군. 당신이 그토록이나 가지 고 싶어한 드래곤이 어떤 드래곤인지 보란 말이야.

자기 연민에 빠진 드래곤이라고옷!

“그래서요?”

내 입이란 놈은 항상 말썽이야. 크라드메서는 날 돌아보았다.

“그래서요? 더 이상 인간과는 관련되지 않겠다는 건가요? 우리들이야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고 내팽개친 채, 이 깊은 산 속에서 위대하신 드래곤 답게 우리는 이해할 수도 없는 심원한 성찰과 자기 관조를 계속하며 억겁을 희롱하시겠다는 건가요?”

“후치. 자네는 나를 오해하고 있어.”

“오해라. 훌륭한 관계지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오해가 생기는 법인데, 드래곤과 인간 사이에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웃기는 일일 거 예요. 그런데 당신의 공포는 뭐죠?”

“공포라구?”

“뭘 두려워하는 거죠? 우리 인간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약한 모습인가요?”

아버지. 어쩌면 헬턴트 초장이의 대가 끊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 속에 못 담아두는 것은 네드발 가문의 전통 아닌가 요? 샌슨이 바람처럼 몸을 날려 내 입을 틀어막을 때까지 난 크라드메서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샌슨은 뒤에서 날 끌어안으며 외쳤다.

“이 녀석의 정체를 알아차리셨죠? 예! 생각하신 대로입니다. 이 녀석이 바로 돌아버린 인간의 대표적 예입니다. 음핫하하하!”

“웁! 웁! 이이웁!”

“으아악!”

샌슨은 깨물린 손을 절절 흔들다가 내 엉덩이를 걷어차려고 다리를 높이 들어올렸다. 난 옆으로 피했고, 샌슨은 허공을 차면서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아이고!”

“작작 좀 해! 난 질문했고, 대답을 들어야겠어!”

샌슨은 주저앉은 채 옆의 풀을 거칠게 뜯어 나에게 확 집어던지며 외쳤다.

“이 얼빠진 녀석아! 맘대로 해!”

샌슨이 집어던진 풀 조각들은 바람을 타고 떠올랐다. 난 다시 몸을 돌려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분다.

분지 가득한 풀잎이 파도를 쳤다. 사르락거리는 메마른 풀잎의 휘파람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풀잎의 파도 위로 떠다니는 은초록빛 반점 속에서 그와 나는 서로를 똑바로 응시했다. 흐린 하늘 아래 크라드메서의 얼굴은 하얗게 보였다. 그의 앞머리가 바람에 쓸려 그의 얼굴을 잠시 덮었다. 크라드메서가 절대로 대답을 하지 않으려 든다고 느껴지는 순간,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나의 약한 모습이네.”

일행들의 숨소리도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더 이상 자네들을 동경할 경우, 난 나의 정체성을 잃고 자네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네. 그것은 이그누스 드래곤 의 규칙을 기본부터 파괴하는 일이지.”

“균형을 지키는 것? 선악의 균형을 지키는 것 말씀입니까?”

“그래.”

“왜죠? 당신은 당신 자신을 과소평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수많은 드래곤이 드래곤 라자와 함께했지만, 전 지금까지 사람을 동경해서 사람처럼 되 어버린 드래곤의 이야기 같은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드래곤은 항상 드래곤으로 남는………….”

“자넨 또 나에게 인간의 관점을 강요하는군.”

“예?”

“수많은 드래곤이라구? 고작 300년의 기간 아니었던가? 그건 우리들에게는 한 계절 정도의 의미밖엔 없다네. 어쩌면 이것이 드래곤이라는 종족 의………… 마법의 가을일지도 모르지.”

마법의 가을!

너무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머리 끝이 좍 곤두선다. 마법의 가을이라구?

“루트에리노에서부터 닐시언까지의 바이서스 왕가의 역사는, 드래곤들에게는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작은 일화에 불과하다네. 하지만 그건 마법의 가을이라고 할 수도 있는, 다른 300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300년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테지.”

그래. 그럴 수 있어. 드래곤이니까. 60년 정도를 하루처럼 살아가는 드래곤이니까. 생각해 보면 정말 길지도 않은 세월이었군. 바로 내 옆에 300년 전의 드워프가 있잖아? 그리고 300년 전의 대마법사는 아직껏 살아서 우리들의 여행에 영향을 주고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지.

“난 지쳤다네. 후치. 선악의 중심점을 찾는 것만도 내겐 벅차. 인간이라는 짐까지 떠맡은 채 세상의 중심으로 있을 자신이 없네.”

크라드메서의 깊은 눈빛 속에서 드러난 것은, 불굴의 종족이 느껴야 했던 막대한 피로의 증거인가? 인간의 수십 배의 연륜, 수십 배의 지혜, 그리고 수십 배의 세월을 살아가면서 느껴야 했을 수십 배의 고통과 갈등.

“하지만…………….”

“네드발 군.”

고개를 돌렸다. 칼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하게나.”

“예? 칼!”

“크라드메서 님은 원래 세상을 관조하시는 이그누스 드래곤이시지.”

칼은 드래곤을 바로 앞에 두고 3인칭으로 이야기하는 재미있는 재주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그 행동의 강인함에 있어서는 무적에 가까운 위력을 가지신 분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분의 본래 성품은 아니네. 그분의 스스로를 다그치는 모습을 보고 배우게나. 선악의 중심에 자신을 둔다는 것은…………, 글쎄. 극한으로 치닫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이야. 하지만 중도를 지킨다는 것은 양쪽 의 극한으로 달려가는 것보다 두 배로 힘든 일이지. 양쪽을 모두 경계해야 되니까.”

크라드메서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고 난 입을 다물었다. 그래. 크라드메서는 가장 힘든 드래곤일 거야.

“저분은 사랑하시는 인간의 곁을 떠나서까지 자신의 중도를 지키려고 하신다네. 난 그 중도성에 대해선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겠지만, 자신이 옳다 고 믿는 바를 지키려고 애쓰시는 저분의 모습에는 찬성하겠네.”

“쿠, 쿨럭, 칼…….”

이번엔 길시언이 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길시언. 당신의 마음은 압니다. 당신은 지골레이드의 실종으로 약해진 바이서스의 국방력을 위해 저분의 도움을 원하시겠지요. 하지만 내 생각을 말하라면, 저분의 뜻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칼은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는 깊은 눈으로 칼을 마주보았다.

“크라드메서 님. 저 소년이 말했듯이, 우리는 당신이 혹시 과거의 그때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혼란을 겪으시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당신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소?”

“예. 그래서 당신이 바이서스에 대해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것을 미연에 막기 위해 드래곤 라자의 계약을 맺어 당신을 설득해 보려고 찾아온 것입니 다. 하지만 전 이제 당신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칼의 말에 엑셀핸드까지도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약속드리겠소. 난 21년 전과 같은 광증으로 바이서스를 파멸시키려 들지는 않겠소. 오히려 여기 있는 길시언에게 그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은 것이 내 심정이오. 사과를 받아주겠소?”

길시언은 이를 악문 채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가 ‘사과를 받아주는 대신 라자의 계약을 맺자!’고 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지만 나의 왕께서는 조용히 말했다.

“사과하실, 쿨럭. 필요 없습니다. 카뮤는, 카뮤는 인간의 일 때문에 죽었습니다. 오, 쿨럭! 오히려 인간으로서 제가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소.”

칼은 만족한 얼굴로 두 손을 조금 벌리며 말했다.

“라자의 계약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들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감사합니다. 크라드메서 님.”

“먼 길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군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때 제레인트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어, 크라드메서 님. 저 말입니다. 옛이야기에서 선량한 모험가들이 위대한 드래곤을 만나면 대개 귀한 선물이나 뭐 축복 같은 거라도 받지 않습니 “까?”

으으윽! 이런 개망신이! 제레인트, 그렇게까지? 당신 대미궁에서 보물 많이 챙겼잖아? 크라드메서마저도 좀 얼떨떨한 미소를 지으며 제레인트를 바 라보았다. 네리아가 당황하여 뭐라고 말하려 할 때 제레인트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전 오늘에서야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셨습니다. 크라드메서께서는 인간을 영원토록 축복하신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샌슨과 아프나이델, 그리고 난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크라드메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내 생각엔 말이오. 인간은 특별한 축복이 없어도 될 만큼 훌륭한 생물이오. 왜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가 모두 그대들을 바라보겠소?”

“바로 그걸 확인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에델린이 말했다.

“화염의 창, 크라드메서여. 중도를 지키시는 그 노고를 어떻게 위로해 드릴지 모르겠습니다. 허락하신다면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감사하오. 어려운 수행의 길, 트롤의 발걸음으로 더욱 어려울 듯하지만 에델브로이가 항상 그대를 이끌어주길 바라오.”

에델린은 환히 웃었다. 음. 이제 에델린의 저 웃는 표정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샌슨은 쭈뼛거리며 말했다.

“저, 서쪽으로 한번 여행 오시겠습니까? 저희 고향 마을에는 말입니다. 아무르타트라는 아주 고약한 블랙 드래곤이 살거든요? 그놈은 정말 세상의 선악의 균형을 깨도 이만저만 깨는 녀석이 아니라서…………….”

“퍼, 퍼시발 군!”

칼의 고함소리와 동시에 크라드메서는 허허 웃었다.

“여보시오, 샌슨. 미안하지만 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동족의 영역권을 존중해 주고 싶소. 그리고 선악의 기준은 내게도 따로 있소만.” “아, 아차!”

드래곤의 악덕에 대해 드래곤에게 고자질하려고 들던 샌슨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엑셀핸드는 빙긋 웃으면서 샌슨의 허리를 툭 쳤다. 그러고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했다.

“큼, 크험. 크라드메서여. 난 드워프의 노커로 엑셀핸드 아인델프라 하오. 우리에겐 특별한 문제가 있거든.”

“말씀해 보시오. 노커여.”

“갈색 산맥에는 드워프들의 터전이 있단 말이오. 당신께서 이제 활동기에 들어섰으니, 다시 하늘을 날기 위해선 상당히 많은 보석을 잡수셔야 하지 않소? 그래서 여기 인간들과는 또 다른 특별한 걱정이 있단 말이오. 당신이 여기서 살겠다면, 어, 서로 화목을 다지는 차원에서 우리들이 보석을 선물 할 용의는 있소. 물론 당신이 우리를 공격하여 빼앗으면 더 쉽게, 더 많이 얻으실 수 있을 거라는 점은 인정하겠지만…………….”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의 걱정은 이해하지만 잘못 알았소. 엑셀핸드. 하늘을 날기 위해 보석을 먹진 않소.”

“뭐라구?”

“나도 보석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 무거운 보석을 먹고 하늘을 날 순 없소. 당신이 굳이 선물하고 싶다면, 당신들에겐 그다지 가치없는 광석인 황화 철, 황화동 정도를 선물해 주면 좋겠군.”

“황화철? 아니………, 황산이라도 만드시게?”

그때 아프나이델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는 자기 행동에 스스로 놀라더니 급히 허리를 굽히며 엑셀핸드에게 말했다.

“알 듯합니다.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황산을 이용해서 수소를 만드시는 겁니다. 묽은 황산과 금속과의 반응에서 수소 채집이 가능할 겁니다. 그걸로 비행이 가능할 정도로 체중을 줄이시는 것이겠지요.”

엑셀핸드는 깊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못 알아들은 거겠지. 하하하.

“그래?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선물할 수 있소.”

“고맙군요. 나 또한 이웃의 예의를 잘 지키도록 노력하겠소.”

그리고 크라드메서는 갑자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엑셀핸드는 잠시 당황하더니 곧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는 크라드메서의 손을 마주잡았다. 물론 엑셀핸드는 품위 있게 발돋움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점이 다시 확인되었다. 칼은 환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이제 돌아가 볼까요?”

일행은 모두 크라드메서를 향해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주욱 늘어섰다. 흐음.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잘 움직이네. 하하하.

그런데 그때 한 사람만이 일행과 다른 동작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레니였다. 레니는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크라드메서와 일행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올리더니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칼은 고개 를 갸웃하면서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 양?”

“저, 저 칼 아저씨? 이제 돌아가는 거예요? 이대로?”

“그렇습니다. 뭐 잘못된 거라도?”

“아뇨……. 잘못된 것은 없어요. 하지만………… 저도 물론 돌아가고 싶어요. 아빠에게 돌아가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데………… 왠지 이렇게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칼은 의아한 표정만 지을 뿐 아무 말없이 레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돌려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일이라면 드래곤 라자 가 잘 알겠지. 그렇다면 거꾸로 드래곤 라자의 일은 드래곤이 가장 잘 알겠지?

크라드메서는 다시 레니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레니를 올려다보았다. 레니는 눈을 내리깔고는 손톱만 깨물면서 크라드메서의 얼굴을 피했다. 크 라드메서는 말했다.

“레니 양.”

“크, 크라드메서 님!”

레니는 고개를 들어 갑자기 외치더니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크라드메서는 참을성 있게 레니의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레니는 띄엄띄엄 말을 시작했 다.

“당신을 이렇게 혼자, 혼자 내버려두고 가면…………. 어, 저, 말이 안 되는 거 같지만, 꼭………….”

“꼭?”

“어린애 혼자 남겨두고 가는 것 같은…….”

레니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발갛게 된 볼을 거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운차이는 신음을 흘렸고 어느새 운차이의 팔을 껴안고 있던 네리아는 숨막히는 소리를 내었다.

크라드에서는 그러나 화를 내지 않았다.

“레니 양. 선량한 마음 고맙게 생각하겠네. 하지만 레니 양이 느끼는 나의 외로움에 대해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난 이렇게 보여도 레니 양의 나 이보다 수십 배나 더 살아온 드래곤이지.”

“제, 제가………… 무례한가요?”

“아니. 레니 양이 드래곤 라자라는 것, 그리고 선량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 때문이니까 무례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오히려 고맙다고 느끼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게.”

“예?”

“드래곤 라자와 드래곤의 만남일세, 이것은 비록 계약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특별한 인간, 세상에서 드래곤을 이해할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인간을 만난 기념으로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하고 싶군. 원하는 것이 있는가?”

레니는 눈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다.

“원하는 것? 그런 건 없어요. 전 당신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파서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크라드메서는 따스하게 웃더니 천천히 두 팔을 펼쳤다. 레니의 눈이 한없이 투명해진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툭. 레니의 하얀 볼 위로 눈물이 또르르 굴렀다. 기어코 레니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크라드메서에게 달려들었다.

“크라드메서 님! 와아아앙!”

크라드메서는 거대한 팔을 부드럽게 움직여 레니를 안았다. 레니는 크라드메서의 목을 껴안은 채 목놓아 울었다.

“안 돼, 안 돼! 너무, 너무 슬퍼요. 어흑! 그렇게 슬픈 건 싫어요! 크라드메서 님은 그렇게 슬퍼하면 안 돼요! 크라드메서 님 같은 고귀하시고 위대한 분이, 그렇게 선량하시고 마음이 넓으신 분이! 불공평해요, 이건 불공평하다구요! 와아앙! 선악을 지킨다고, 그것 때문에 크라드메서 님이 왜 이렇게 외로워해야 돼요! 그런다고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잖아요!”

“레니 양, 레니 양.”

크라드메서는 별말 없이 단조롭게 레니의 이름만을 반복해서 불렀다. 레니는 숨이 막히도록 울었고 크라드메서는 그녀를 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 다. 차츰, 레니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레니 양.”

“크라드메서 님. 전, 전 당신의 라자가 되고………….”

벼락이 친 것인가, 아니면 길시언의 눈에서 빛이 번득인 것인가?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레니는 숨이 막혀 꺽꺽거리느라 말을 제대로 못 이었다. 크라드메서는 갑자기 두 팔로 레니의 어깨를 붙잡아 밀어냈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크흐흑!”

그의 입에서 폐부를 찢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레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숙인 채 부르르 떨었다. 잠 시 후, 조금 안정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제발 그만해. 라자여.”

“크라드메서 님?”

“난 거부의 뜻을 밝혔다. 라자여. 제발 이 이상 날 유혹하지 마라.”

크라드메서의 목소리는 미미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레니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크라드메서의 얼굴을 들여 다보던 레니는 다시 앙탈을 부리며 크라드메서에게 안기려고 들었지만 그녀의 어깨를 쥐고 있는 크라드메서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크라드메서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호흡을 골랐다. 잠시 후 고개를 숙인 그에게서 상당히 메마른 음성이 들려왔다.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가 이래서는 안 돼. 우리는 상호 동의하는 관계야. 저 엘프들처럼 한없이 자신을 바꿔가며 조화를 이루지도, 혹은 인간처럼 한없이 타인을 바꿔가며 조화를 이루지도 않는 것이 우리들의 관계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바꾸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라자여, 눈물을 멈춰 라.”

레니는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머리가 마구 나풀거렸다.

“이대로 당신을 두고 가면 전 일생 동안 후회할 거예요!”

레니의 외침소리는 처절했다. 저게 겨우 열대여섯 되는 소녀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인가? 크라드메서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그래. 드래곤 라자라 해도 결국 인간이지. 하하하. 이 어린 소녀마저도 위대한 드래곤에게 자신을 투영하려고 드는군. 저열한 욕망이 아닌, 순수한 애정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는 유혹. 그래. 라자여. 당신은 드래곤이 불쌍해서, 돌보아주고 싶고 아껴주고 싶다는 것이지? 그런데 이 유혹 아닌 유혹보다 더 웃기는 것은 뭔지 알아?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다는 거지.”

크라드메서의 어깨가 한번 거칠게 진저리쳤다. 갑자기 한없이 냉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인간들을…………, 모조리………….”

크라드메서는 말을 끝맺지 않은 채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형체를 가지고 피부를 찢어 뼈를 긁어내는 듯한 공포 때문에 주위의 아무

도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레니의 몸부림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크라드메서의 두 팔에 붙잡힌 채 레니는 꺽꺽거리는 숨소리만 내면서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는 갑자기 일어났다.

그는 레니의 어깨를 놓으면서 일어났다. 그 간단한 동작이 왜 저렇게 무서워 보이는가? 그는 화산이 폭발하는 기세로 일어났다. 그의 옷자락 전체가 아우성을 쳤다.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가라!”

모든 사람들이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엑셀핸드는 뒤로 걷다가 아프나이델에게 부딪혀 함께 나뒹굴기까지 했다. 네리아는 기어코 기절해 버렸고 운차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래턱을 떨고 있었다. 크라드메서의 눈은 타오르고 있었다. 선홍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가라! 이것은 조화의 적 헬카네스께서도 거부할 수 없는 이그누스 드래곤의 명령이다. 물러가라!”

하늘이 갈라지며 신이 얼굴을 내밀고 명령한다 해도 지금처럼 살 떨리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뼈라는 뼈들은 모조리 덜그럭거렸고 그대로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은 무력감이 전신을 휘감아돈다. 선과 악의 균형을 지키는 이그누스 드래곤의 명령이 떨어졌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바 람이 우리들을 뒤로 밀어내는 것 같았다.

“레, 레, 레니 야앙!”

칼은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거렸다. 레니는? 오, 맙소사!

저 항구의 소녀는 온몸을 떨면서 크라드메서의 명령에 저항하고 있었다. 앞뒤로 휘청거리는 몸은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핏기 없이 하얗 게 질린 얼굴이었지만 레니는 온 얼굴을 찡그린 채 크라드메서의 명령에 저항하고 있었다. 레니를 데려와야…………, 세상에!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 이 이토록이나 어려운 동작이었나? 이 멍청한 다리야, 먹여준 밥값은 해라! 겨우 다리가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발걸음을 떼고 나자 무의 식중에 나머지 동작들이 완성되었다. 난 레니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껴안아 올렸다. 레니는 크라드메서의 명령에 저항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을 소 진해 버렸는지 내 팔에 안기자마자 까무러쳐버렸다.

난 그녀를 안고 그대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나머지 일행들도 내가 레니를 안아들자마자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우아아아아!”

제레인트의 처절한 비명소리, 그리고 그에 뒤지지 않는 엑셀핸드의 고함소리도 들려왔다.

“비켜, 비켜어어!”

그렇게 외쳐봤자 엑셀핸드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뒤처지고 있었다. 네리아를 어깨에 둘러멘 운차이마저도 엑셀핸드를 훨씬 앞질러 아프나이델의 앞을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길시언을 둘러멘 에델린이 겅중겅중 달려가고 있었다. 와사사사삭! 거대한 바위가 뭉개고 지나간 것처럼 풀 밭에 길이 만들어져버렸다. 사방으로 풀잎이 나부껴 폭풍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때였다.

도망가다가 반드시 뒤를 돌아보는 멍청한 동물은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안타까운 것은, 사람도 그런 동물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크라드메서는 폭풍이 치는 풀밭 속에 외로이 서 있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단지 그의 호통에 놀라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나는 미력한 생물들에 대한 비웃음이나 경멸도 없이 서 있었다. 아니, 표정은 있었다. 자신이 쫓아버린 생물들에 대한 슬픈 애정. 갑자기 레니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의 비극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렇게 위대한 자가, 그의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하는 자들을 스스로 쫓아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니.

눈물을 쏟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달아나는 것은 달아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그의 뜻을 존중해서, 그에게 더 이상의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그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눈앞은 뿌옇게 변해 갔고 볼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풍덩, 풍! 물웅덩이를 밟으며 일행들 이 일으키는 물방울이 허공에 흩날린다. 눈물을 너무 흘려 콧속이 묵직하다.

“크흐흐흑!”

이건 아프나이델의 울부짖음인가. 그는 달리면서 소맷자락으로 눈을 닦고 있었다.

“울지 마! 이 멍청아, 울지 말라구!”

엑셀핸드가 젖은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하, 하, 하지만 엑셀핸드…………….”

“네가 울면 나도 울고 싶어지잖아, 이 멍청한 놈아아앗!”

엑셀핸드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쳐댔다. 샌슨은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외쳐대고 있었고 칼은 오열했다. 그리고 운차이는 입술을 꽉 다문 채 달려가고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바뀌며 주위에서 외치는 고함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창백한 오후.

하얀 아우성 위로.

하나의 검은 비명이 뚝 떨어졌다.

검은 얼룩이 주위로 번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에델리인! 모두 엎드려!”

샌슨의 고함소리다. 고함이라기보다는 포효에 가깝다. 난 레니를 안은 채 뒤로 누워버렸다. 하늘은 미칠 것 같은 하얀색이다. 그리고 그 위로 검은 선들이 휙휙 지나갔다. 난 태평한 기분으로 하늘에 그려지는 검은 선들을 바라보았다. 참 빠르군.

레니의 얼굴이 턱 바로 위에 떨어져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하얀 얼굴에 붉은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붙어 있었다. 난 한가로운 기분을 느끼며 그녀 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가 느껴졌다. 뭐지?

“머리 숙여! 머리 숙여! 풀밭으로 숨어어!”

칼의 계속된 다급한 고함소리. 하늘을 가르고 있던 저 검은 선은, 화살?

“후작 패거리다아앗!”

샌슨의 분노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러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