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8권 – 제15부 :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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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8권 – 제15부 :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 1화


…그리하여 휴리첼 가문 최후의 라자는 쓰러졌다. 넥슨휴리첼을 납치하여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나라를 전복시키려 했던 정체 불명의 무리는 아직껏 역사의 베일 속에 숨어 그 정체가 묘연하다. (중략) 죽음으로써 넥슨 휴리첼의 계약을 막아 나라를 구한 할슈타일 후작 역시 행방 불명되었고 30년 후 왕자로 추서…… (중략) 전쟁은 바야흐로 막바지에 이르렀으나 바이서 스-자이펀 전쟁 최후의 몇몇 시기는 그 이전의 군소 전쟁과 비교했을 때 많은 점에서 차별되는 독특한 전쟁이었다. 위대한 종족 드래곤의 힘이 더 이상 인간의 전쟁에 그 힘의 그늘을 드 리우지 않았던 것이다. 자이펀의 악몽이었던 지골레이드, 캇셀프라임의 이름은 공포의 전설로 그 영광을 누리게 되었・・・・・・ (중략) 인간이 인간의 역사를 책임짓게 된 전쟁으로서 이 시기, 우리는 바이서스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빛날 이름, 영웅 샌슨 퍼시발과 대현자 칼 헬턴트를 만나게 된다. (중략) 드래곤 슬레이어 루트에리노 대왕과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이름을 잇는 이들의 등장은 당대인들의 무수한 관심을 집중시키는 기이한 것이었으니・・・・・・ (중략) 그리하여 귀족들은 영웅 샌슨 퍼시발과 대현자 칼 헬턴트의 이름 하에 일치 단결하여 바이서스 왕가의 어전에 그 검을 바쳤다. 그것은 루트에리노 대왕의 영광에 기생하던 대왕의 종속물인 바이서스 왕가가 국가의 수장으로 거듭난 것이며 이로써 바이서스는 비로소 근대적 의미의 왕국으로 일어날 수………….. (중략) 이전의 바이서스가 루트에리노 대왕이라는 영웅의 조직화된 추모자들의 집단이라는 애덜튼 드리어즈의 언명은 참으로 되새겨 볼 만한 것이니…… (중략) ………었으나 닐시언 대왕의 시기부터 진정한 영웅은 사라지고 진정한 국가가 일어나게 된다……………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추발렉의 도움으로 출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 도 가치 있는 이야기」 돌로메네 지음, 770년, 제34권 12-134쪽.


1

겨울 밤의 숲은 어두웠다.

주전자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모닥불빛에 붉게 물들었다. 난 몸에 두르고 있던 모포를 목까지 끌어올리며 주전자를 들었다. 찻잔에 물을 따르는 소 리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따르르르,

차 향기를 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숲. 별로 볼 것이 없지. 코를 얼게 만드는 싸늘한 바람이 불며 잠시 모닥불에서 불티가 튀어오른다. 온통 시커먼 숲 속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 은 바알갛게 타오르는 모닥불빛, 그리고 밤하늘에 번뜩이는 별빛.

그리고 번쩍이는 글레이브의 반사광.

“에휴…….”

한숨부터 나온다. 멍청한 녀석들. 도대체 실수에서 배울 줄을 몰라. 비반사 처리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 재만 좀 바르면 되는 거 아냐.

난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넣으며 말했다. “어이, 오크들. 같이 마실래?”

곧 숲 속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취이이익! 들켰다!”

“무, 무서운 놈. 어, 어떻게? 취익, 취이이익!”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말하지. 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어 입김을 후후 불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들 사이에서 오크들의 모습이 하나 둘 나타났다. 후루룩거리며 차를 몇 모금 마시는 사이에 대략 60개쯤 되는 글레이브가 번쩍거리는 빛을 뿜 게 되었다. 흐음. 그런 대로 정확한 숫자로군. 모두들 덩치가 좋은 것이 아무래도 고르고 고른 놈들인 모양인데.

오크들은 글레이브를 마치 활이나 되는 것처럼 내게 겨냥하고 있었다. 30큐빗쯤 떨어져서 글레이브를 겨냥하고 있으니 활이라고 할 밖에. 난 모포 를 내려놓고는 찻잔을 든 채 천천히 일어났다. 삽시간에 나와 오크들의 거리는 50큐빗 정도로 떨어졌다. …못 말리겠군.

“던질 거냐?”

“취, 취익? 뭐라구?”

“후룩. 흐음. 그 글레이브 던질 거냐구.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멀리서 어떻게 날 공격할래?”

오크들은 커다란 딜레마에 빠진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딴에는 기습을 하겠다고 몰래 다가오다가 습격하기에는 먼 거리에서 발각되어 공격하지도, 달아나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난 태연하게 모닥불에서 불 붙은 장작을 하나 꺼내들었다. 오크들은 흠칫거렸지만 난 아랑곳 않고 장작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오크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놈들 중 하나가 눈에 익었다.

“아그쉬? 반갑군.”

검은 투구를 쓴 아그쉬는 글레이브를 사납게 휘둘러댔다.

“취, 취이익! 괴물 초장이! 오늘에야말로 기필코 네놈을, 취익! 끝장내어 주겠다!”

“아, 그래. 그럴 속셈이었군. 빨리 하지 그래? 밤이 깊었으니 오늘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아그쉬는 휘두르던 글레이브를 늘어뜨리고는 눈을 심하게 껌벅거리며 어이없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난 장작을 다시 내려놓고는 차를 마시며 아 그쉬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그쉬는 간신히 할말을 떠올린 모양이다.

“어, 취익! 잠깐! 나머지 놈들은 다 어디 있지?”

“후루룩 쩝. 나머지?”

“괴물 눈알! 그리고 엘프, 취익! 트라이던트를 든 여자! 활쟁이! 취이이익! 오거 전사! 취익! 나머지 놈들은 어디 있냐!”

난 피식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 나머지라고 하기에 혹시 그 사람들이 들킨 것인 줄 알았지.”

“취익? 들키다니?”

“내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 말이야.”

아그쉬는 잠시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그의 얼굴은, 그리고 나머지 오크들의 얼

굴은 사색이 되었다. 긴장된 그들의 손에서 글레이브가 미세하게 떨렸다.

저벅저벅. 발소리도 요란하게 나타난 자들은 내 옆에 주욱 늘어섰다. 인원이 정말 많기도 많군. 난 좌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개하지. 왼쪽부터 네츄, 빌츄, 하이츄, 파빌츄. 그리고 다시 여기서부터 날라츄, 리츄, 도츄, 스마락츄, 한탈츄, 기츄, 에츄! 훌쩍. 마지막은 아냐.”

기츄는 킬킬거렸다. 으윽. 내가 오크가 된 것 같군. 이 사람들의 이름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인지. 아그쉬는 입을 쩍 벌리고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기어 코 그의 입에서 무서운 고함 소리가 터져나왔다.

“부, 부, 취, 북부 목동!”

리츄는 킬킬 웃으며 말했다.

“이야, 이거 오크가 오륙십 마리는 되겠는데? 북부의 방목장 근처에선 저 녀석들 구경한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구. 안 그래, 한탈츄?”

한탈츄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놈들은 요즘 우리 소를 습격하러 오지를 않으니까. 우리가 너무 거칠게 대해서 그럴까? 어쨌든 오래간만에 만나니 반가운데.”

그리고 하이츄는 싸늘하게 웃으며 큼직한 쇼트 소드를 뽑아들었다.

“그래. 그리고 이걸로 오크 가죽을 벗겨본 지도 너무 오래되었어.”

하이츄가 검을 뽑아드는 것이 신호가 되어 다른 목동들도 모두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스르릉. 60마리의 오크들은 백옥 같은 피부를 과시하며 떨기 시작했다.

“제, 젠장! 취이익! 북부 목동이 여기 왜! 취칙!”

찻잔을 마저 비우고 천천히 아래에 내려놓는 동안 오크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그쉬는 좌우를 보더니 발작하듯이 외쳐대었다. “이놈들! 괴, 괴물 초장이와, 취익! 북부 목동이라고 해도, 취이이익! 우리는 저 녀석들의 다섯 배다! 떨지 마라! 취치칙!”

멍청하긴. 다섯 배가 아니라 여섯 배야. 아쉽게도 아그쉬의 용기는 아무 효과를 얻지 못했고 오크들은 당장이라도 달아날 듯한 모습이었다. 누가 고 함이라도 한번 지르면 곧장 줄행랑을 놓을 태세군. 안 되겠어. 좀 부드럽게 대해야겠는데?

자, 목을 조금 떨면서 애틋하게.

“아아, 사랑하는 오크 제군들.”

아마도 아그쉬가 기절하지 않은 것은 오크이기 때문이리라. 리츄는 딸꾹질을 시작했고 날라츄는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난 앞으로 나서며 두 팔을 펼쳐보였다.

“그대 멋진 이빨의 친구들이여. 아아,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잠시 그 걸음을 멈추고 이 몸의 말을 좀 들어주오.”

“후, 후치? 조금 전에 마신 게 뭐지?”

하이츄의 겁에 질린 질문이 나오자 빌츄는 내가 내려놓은 찻잔을 들어올려 조심스럽게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난 그들을 무시하면서 아그쉬에게 말 했다.

“제발 부탁이니 잠시만 내 말을 들어보오. 우리들의 불운한 관계는 너무 오래되었고 그 청산의 시기는 오히려 늦은 바가 되었으니, 이제라도 그대들 과 나의 관계에 한 조각 봄의 향기와도 같은 아름다운 빛을 던지는 것이 어떠하겠소?”

“췻! 뭐, 무슨 말이냐?”

이것도 꽤나 힘든 일이군. 슬슬 본론을 말해야 되겠는데.

“야, 야. 간단하게 말할 테니 잘 들어. 너희들도 가장 힘 좋은 녀석들 끌어내서 이 계절에 돌아다니면 곤란한 점이 많을 거 아냐? 월동 준비에 차질이 클 거 아냐. 그러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겨울을 날 식량을 주겠다. 대신 우리 관계는 잊자.”

“뭐야?”

“뭐라구?”

리츄와 아그쉬가 동시에 외쳤다. 두 사람이 어릴 때 헤어진 형제라도 되나? 음. 이 의문은 가슴속에 파묻어 둬야겠군. 난 리츄를 향해 어깨를 으쓱여 보인 다음 아그쉬에게 말했다.

“소가 400마리다. 어때? 400마리의 소를 줄 테니까 이제 날 그만 쫓아다녀라.”

오크들의 뒷걸음질이 멈췄다. 아그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사, 사백? 취익! 취익! 소 사백 마리라구?”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리츄가 북부 방언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야, 이 자식아! 그럼 너 오크 주려고 우리 소를 산 거야? 말도 안 돼! 오크놈들에게 우리 소를 준다고?”

“이봐요. 내가 대금 지불했으니 그건 내 소잖아요.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 그런 경우가 어디 있냐! 오크놈들에게, 오, 맙소사, 생그렐이여!”

리츄는 두 팔을 하늘로 들어올리며 절규했다. 난 피식 웃으며 바이서스 임펠의 스트레이트 헤븐에서 리츄를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리츄는 스트레이트 헤븐에 죽치고 앉아서는 하트 브레이커를 죽을 둥 살 둥 마셔대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지골레이드가 전선에서 사라져 그 식량으 로 쓰려고 했던 400마리의 소를 계약 파기당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세피아파인 고개에서 시간을 지체하느라 계약 기간에 늦어서 보상금 같은 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소를 모두 사겠다고 제안했을 때 리츄는 내 발등에 키스라도 할 태세였다. 지금 저러는 것은 그저 오크에게 소를 넘기는 것이 속상해서 해보는 짓이지 진심은 아니겠지. 맞장구를 좀 쳐줘야겠는데?

난 팔짱을 끼고 약간 전투적인 눈길로 리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면 지금이라도 내가 지불한 보석 돌려주고 소를 끌고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가면 되겠군요?”

과장된 동작을 취하고 있던 리츄는 찔끔하면서 날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좀더 능글맞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아, 실수.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가 봐야 어차피 그 소는 못 팔 테니까. 으음. 북부까지 저 많은 소들을 끌고 가야겠군요? 어려울 텐데. 어려워. 이젠 소 뜯을 풀도 거의 없어졌으니까. 아마 가는 길에 다 죽게 될지도 모르지. 음. 안타까운 일이야. 오크들은 당신들 뒤만 졸래졸래 따라가면 소 400마리 를 그냥 얻겠는데? 그럼 난 돈 굳어서 좋고, 오크들은 소 400마리를 얻어서 좋고. 당신들은 좀 손해를 봐서 가슴이 아픈…………….”

아그쉬는 귀가 번쩍 뜨인다는 얼굴이었다. 리츄는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네 마음대로 해라! 이 고얀 녀석.”

“좋군요. 그럼, 아그쉬? 내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시지?”

아그쉬는 급반전한 사태에 잠시 어이가 없는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잠깐. 그런데 저놈이 내 제안을 무시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까? 즉, 1) 아그쉬는 내 제안을 무시한다. 2) 나는 리츄에게 보석을 돌려받고 소들을 돌려준다. 3) 리츄와 목동들은 소들을 데리고 북부로 돌아가 야 한다. 4) 가는 길에 소들은 다 죽어버릴 테니, 5) 오크들로서는 목동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좋다! 취익!”

·화렌차여. 정말 수고가 막대하십니다. 저놈들을 돌보실 수 있다는 거,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역시 신이시라 뭐가 달라도 다르시군요?

오크들에게 소를 모두 넘겨주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먼저 소들을 숨겨둔 계곡으로 60여 마리의 오크들을 데리고 가는 일이 문제였고 (목동들은 자신들의 여섯 배나 되는 수효의 오크들을 능수능란하게 겁주고 있었고 그래서 오크들은 머뭇거리며 따라왔다), 계곡에 도착하자 리츄가 시간을 무진장 끌 기 시작했다. 리츄는 400마리나 되는 소들과 일일이 작별 인사를 나누려고 들었던 것이다.

“좀 그만 해요, 예?”

“잠깐 잠깐만. 저 녀석은 내가 받아낸 놈이야. 그때 난산이었거든. 내가 저 녀석 어미 몸 속에 손을 집어넣어 저 녀석 몸에 밧줄을 묶어서 끌어내야 했단 말이야. 아이고, 이놈아! 오크에게 끌려가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그냥 널 포기하는 건데!”

・알았어요. 끝났어요?”

“자, 잠깐! 저 녀석, 저 부룩소 녀석! 저놈이 늑대에게 잡혀갈 뻔한 걸 내가 구해낸 걸 생각하면………….”

리츄는 부룩소를 끌어안고 온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밤이라서 소떼들은 별소리 없이 고요했고 리츄의 웅얼거리는 소리만이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오크들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지만 나머지 목동들이 모두 살벌한 시선으로 오크들을 감시하고 있었기에 그저 조바심만 내면서 취익거렸다. 아 그쉬는 아예 바위에 걸터앉아서는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아그쉬는 계곡을 가득 메운 소떼들의 모습을 훑어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드래곤에게 잡아먹히든 오크들에게 잡아먹히든, 어차피 저 소들 최종 목적지는 누군가의 입 속이잖아. 똑같은 걸 가지고 참 희한하게도 구분한다. 드래곤에게 잡아먹히면 좋고 오크에게 잡아먹히면 안 좋은 건가?

결국 여명이 희뿌옇게 번져갈 때쯤에야 리츄가 물러났다. 아마 졸음을 더 못 견딘 것이겠지. 리츄는 연신 하품을 하면서도 다시 처량한 눈길로 계곡 을 가득 메운 소떼들을 바라보았다.

“잘 가……………, 잘 가……………..”

닭 되겠군, 정말! 아그쉬는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제 가도 되나, 취이익?”

“아, 그래. 오래 기다리느라 수고했다. 약속은 지켜야 돼?”

“취이익! 물론이지! 복수는 종결되었다!”

“좋아, 좋아.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조건이 있는데.”

“칙! 뭐라구?”

“이봐, 너희들 겨울철 날 양식도 얻었으니, 너희들 동굴에 붙잡혀 있는 기술자들을 모두 풀어줘라. 어때?”

아그쉬는 사나운 눈길로 날 쏘아보기 시작했다. 헤헷. 네가 날 눈길로 어쩌겠다고? 이봐. 난 열두 마리 드래곤들의 싸움을 두 눈으로 봤던 자야. 아 그쉬는 으르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취에엑! 좋다!”

“좋아. 됐어. 그럼 리츄 씨?”

리츄는 그때까지도 궁상스러운 얼굴로 소들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한 번 더 불러야 했다.

“뭐?”

“소떼들을 몰아서 오크들이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주세요. 그리고 오크들이 기술자들을 모두 잘 풀어주는지 감시하고.”

“뭐, 뭐, 뭐야? 우리더러 오크놈들 뒤치다꺼리까지 하라구?”

목동들은 모두 씨근거리며 날 바라보았다. 하하. 누군가에게 배운 수법이지. 직접 배운 것은 아니지만. 이건 타이번 하이시커라는 작자의 수법이야. 억지로라도 함께 행동하게 만드는 것.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저 오크들이 저 많은 소떼를 어떻게 데리고 가겠어요? 소떼에게 밟혀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 그리고 저 소들도 당신들이 데리고 가야 안심할 테고. 자, 이걸로 내 조건은 끝입니다. 그리고 소떼들을 끝까지 몰아다주고 오크들의 동굴에 납치된 기술자들이 풀려나는 것을 감시해 준다면 내가 내놓았던 보석과 똑같은 보석 하나 더 내놓을 수 있는데. 어떻겠어요?”

“뭐야? 하나 더?”

난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를 하나 꺼내어 위로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해 보였다. 목동들과 오크들의 눈이 똑같이 위로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두 무리는 입을 쩍 벌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강렬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네 번째인가 위로 던졌을 때 리츄는 공중에서 다이아몬드를 확 낚아챘다. 난 씩 웃었고 리츄는 뭐 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좋다구! 제길, 돌아가자마자 생그렐에게 푸닥거리라도 부탁해야겠군. 이번 여행은 저주받은 게 틀림없어.”

“하하. 수고해 주세요.”

난 목동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아그쉬에게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목동들은 일그러진 얼굴로 인사를 받았지만 아그쉬는 아예 날 보지도 않은 채 목동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난 어깨를 으쓱이고는 내 말로 돌아왔다.

아, 이거 정말. 말의 키가 워낙 커서 등자에 발을 얹는 것이 쉽지 않은데. 아무래도 등자끈을 좀 조절해야겠어. 난 말 위에서 다시 한번 계곡을 주욱 둘러보았다.

서로 불편한 시선으로 마주보고 있던 목동들과 오크들의 등 뒤로는 400마리의 황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계곡 반대편, 그러니까 동쪽에 서는 아침놀이 바알갛게 물들고 있었다. 소들의 강인한 어깨가 붉게 물들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잠에서 깨어나는가 보지?

“자, 그럼 난 갑니다? 화목한 여행길 되세요!”

그때까지도 아그쉬와 눈싸움을 벌이고 있던 리츄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날 돌아보았다.

“악담을 해라, 이 녀석아! 잘 가라!”

다른 목동들도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난 크게 웃으며 등자를 살짝 걷어찼다.

“가자, 선더라이더!”

“이힝힝힝힝!”

선더라이더는 맹렬히 울부짖으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치렁치렁한 은빛 갈기가 흩날리며 삽시간에 계곡이 등 뒤로 사라졌다. 잠시 후 난 중부 대로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야, 이 속도는 아무래도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어?

“자, 선더라이더! 오늘 하루, 또다시 태양과의 경주다. 가자, 서쪽으로!”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쳐도 죽지 않고서는 인생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선더라이더라 해도 태양을 앞서 달려갈 수는 없었다. 으음. 어째 비 교가 우울하다? 난 내 생각에 스스로 우울해하면서 이라무스 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피곤하군. 역시 여행은 동료들과 함께 해야 돼. 혼자 하는 여행은 훨씬 더 빨리 지치게 되는 것 같아. 자기 혼자서 자신을 감당해야 되니까. 동료들이 있다면 서로가 서로를 감당해 주고 서로가 서로를 나누니까 힘들 것도 없겠지. 드래곤은 도대체 어떻게 ‘혼자’서 ‘혼자’를 감당하는 것일까? 확실히 우리들과 드래곤은 반대쪽 극단임에 틀림없는…, 젠장. 쓸데없는 생각을.

망할 드래곤 녀석들, 망할 인간들.

휘우우웅.

싸늘한 바람이 이라무스 시의 밤길을 스치고 지나갔다. 탈가닥, 탈가닥. 선더라이더의 발소리도 왠지 무겁게 느껴진다. 조금 이른 저녁이었지만 겨 울의 짧은 해는 이미 진 지 오래다. 두꺼운 창문들과 투박한 문들은 모두 굳게 닫혀 방랑자의 시선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주위는 고요하고 캄캄 하고 무엇보다도 오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길을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기억을 더듬어 찾느라 시간이 꽤나 걸렸다.

그래서 ‘트라모니카의 바람’ 앞에 도착한 것은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으슬으슬 떨리는군. 불쌍한 방랑자를 위해 따스한 스튜라도 좀 남겨두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선더라이더를 멈추고 내려설 때 안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년! 어딜 도망가, 어딜! 죽어라, 이년! 죽어!”

“아아아악! 삼촌, 잘못했어요, 잘못했어…………, 아아악!”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에 이어 뭐가 깨지는지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난 말에서 내려선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채 주점 안에서 들려오던 소음

에 귀를 기울였다.

“이 화적 같은 년아! 오갈 데 없는 것을 거둬 키워주고 입혀줬는데, 은공을 갚을 생각은 안하고 장사 훼방을 놔? 너 오늘 죽어봐라. 에이이익!” “아아악!”

“그만해요, 마스터. 그러다가 애 죽겠어요!”

“그래, 애 완전히 잡겠네. 그만하지?”

“놔라, 이것들아! 놔! 이런 년은 죽어야 해! 에라이, 정신 나간 년아! 네가 그러고 있는다고 그 잘난 서방이 돌아올 것 같아? 왜 손님을 못 받겠다는 거야, 왜!”

“아악! 꺄아아악!”

·우울한 기분이 싹 가시게 해주는군. 정말 고마운데? 대신 다른 감정이 뭉클뭉클 일어난다는 점이 문제지만. 난 다시 선더라이더에 올라탔다. 선 더라이더가 의아한 듯이 푸르릉거렸다.

말 위에 똑바로 앉은 다음, 호흡을 가다듬고, 그리고 바스타드를 뽑아들었다. 스르릉. 멋진 소리가 들리는군. 바스타드를 앞으로 들어 트라모니카의 바람의 입구를 겨냥했다.

후우, 후우. 이봐, 주인장. 당신은 오늘 영업 시작하고 나서 가장 화려하게 들어오는 손님을 맞게 되었어. 그리고 어쩌면 당신이 맞이하는 마지막 손 님이 될지도 몰라. 내일 아침까지 이 여관 건물이 남아 있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거든.

난 선더라이더의 배를 걷어찼다.

“이랴아아앗!”

“이힝힝힝힝!”

트라모니카의 바람의 스윙 도어를 박살내며 말에 탄 채 홀 안으로 뛰어드는 짧은 시간 동안, 난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 하나를 흘려보냈다. 차라리 드래곤처럼 혼자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어디 봐. 어디…….”

“아야야야………….”

“아, 미안미안. 많이 아파? 조금만 참아봐. 이거 바르면 금방 나을 거야.”

메리안의 이마에 힐링 포션을 살살 펴발랐다. 상처를 입자마자 치료하는 것이긴 하지만 자칫하면 흉터가 생길지도 모르겠는데, 이거 정말 불안하군. 메리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내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어깨를 흠칫거렸다.

온통 박살이 난 홀 안에서 변변한 의자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난 술통을 가져와 메리안을 앉히고 상처를 치료했다. 세상에 부 지깽이로 계집애 이마를 갈기는 개자식이 있다니. 그것도 자기 조카를.

‘자기 조카딸의 이마를 부지깽이로 갈길 수 있는 작자가 고함을 질렀다.

“훠이! 훠이! 저리가, 이놈의 말아! 이, 이, 이거 보십시오, 나리! 다, 당근이 다 떨어져가는데요?”

“그래? 당근이 다 떨어지면 다른 거라도 깨물겠지.”

“나, 나리! 아이고, 제, 제발! 훠이, 훠이이!”

“이봐. 그건 말이라구…………. 황소였던 적은 있지만 최소한 닭은 아니었어. 훠이가 뭐람.”

주인장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부림을 쳤다. 지금 이 비인간적인 작자의 상황을 볼 것 같으면, 온몸이 묶인 채 벽에 있는 횃불걸이에 걸려 있었는데 그 혁대에는 내가 주방에서 가져온 당근 몇 개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선더라이더가 그 앞에 서서는 우아한 자세로 당근을 베어먹고 있는 것이었다. 쩝쩝 소리가 커질수록 주인장의 얼굴에선 빠른 속도로 핏기가 빠져나갔다.

난 붕대를 꺼내면서 진심어린 목소리로 주인장을 위로했다.

“말한테 거시기를 깨물리는 경험은 예사롭지 않은, 상당히 오랫동안 뇌리에 남는 기억일 거야. 몸부림치지 말고 순순히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시 지? 당신은 새로운 체험에 대한 호기심도 없어?”

“나, 나리! …………으악!”

부우욱!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깨물렸나? 만세를 외쳐주기 위해 고개를 돌려보니 바지춤이 반쯤 뜯긴 주인장의 모습이 보였다. 바지춤이 찢어지면서 당근들이 전부 떨어져서 선더라이더는 머리를 숙인 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헤이, 주인장. 괜찮아. 바지만 찢어진 거야. 거시기는 아직 괜찮은…………, 응? 어라? 이봐, 기절한 거야?”

주인장은 입에서 거품을 보골보골 뿜어내면서 기절해 있었다. 메리안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바지춤이 찢긴 채로 벽에 걸려 기절한 남자’를 오랫동안 안쓰럽게 바라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큭!”

“어, 어. 웃지 마. 붕대 감아야 된다구. 자, 그리고, 음. 붕대 묶고…, 됐어. 자, 어때. 괜찮아?”

메리안은 눈을 뜨더니 이마에 칭칭 감긴 붕대를 살짝 만지며 눈썹을 찌푸렸다.

“아파? 어, 못 견디겠어? 잠깐. 어디 깨지지 않은 술병이 없나?”

진통제 대신으로 쓸 술을 찾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메리안은 이마를 만지던 손을 내려 내 손을 붙잡았다. 햐, 이거 손등에 촛농 떨어지는 것 같은 데? 무슨 손이 이렇게 뜨거운 거야?

“메리안?”

“후치…………, 후치……?”

메리안이 내 손을 끌어당김에 따라 내 몸은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잠시 후 난 엉거주춤하게 상체를 숙인 채 술통에 앉아 있는 메리안에게 안겨 있는 모습이 되었다.

“메리안?”

메리안은 내 등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진짜구나……. 진짜 돌아왔어. 고마워.”

“고맙긴 뭘. 더 빨리 돌아오지 못해서 미안하지.”

“빨리 돌아온 거야. 그럼. 정말 빨리 돌아온 거라구.”

난 메리안의 어깨를 토닥여주고는 그녀를 살짝 밀어내었다.

“머리를 그렇게 자꾸 내 어깨에 비비적거리면 상처 덧나는 것도 문제거니와 시집갈 때 핸디캡으로 작용할지도 몰라?”

“……어차피 술집 계집애인걸.”

“오늘까지는 그래.”

“응?”

“내일 설명해 줄게.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 배가 고파 죽겠다. 점심도 걸렀는데 너무 움직였어. 어디 깨지지 않은 그릇이 없는지 살펴봐야지.” “아, 내가 해줄게.”

“이봐, 이봐! 날 좀 믿어봐. 난 상당히 쓸 만한 요리사라구? 엘프도 내 요리에 넘어갔다면 믿을 수 있겠어?”

메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피식 웃었다.

“아, 그때 그분. 술꾼들에게 별별 모험담을 다 들어봤지만 엘프에게 음식 대접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아, 그래? 나도 처음이었어.”

난 씩 웃으며 아궁이를 조사했다. 간신히 불은 피울 수 있겠군. 아무런 죄책감 없이 테이블과 의자를 박살내어 장작을 만들었다. 메리안은 눈을 동그 랗게 떴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와지끈 뚝딱거리는 소음이 잠시 일어나고 나서 곧 아궁이에는 새빨간 불꽃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난 재료를 찾아 흥얼거리며 다듬기 시작했다. 메 리안이 피식 웃었다.

“정말 칼질 잘하네.”

“그래? 하하. 내 칼질은 말이야. 검의 신 레티의 프리스트들도 인정해 준 것이거든?”

“레티의 프리스트? 호호.”

농담인 줄 아나 보군. 하지만 정말이라구. 검의 신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온몸으로 내 검을 인정해 주었단 말이야.

“제기랄! 레티의 프리스트들이다아!”

샌슨의 고함 소리는 온 산에 올려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운차이는 롱소드를 뽑으며 낮게 말했다.

“가르쳐줘서 고맙군.”

운차이의 핀잔에 샌슨은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후작은 싸늘한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서 있는 언덕 뒤쪽에서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하나 둘 검을 뽑아들며 나타났다. 이윽고 언덕 위에서는 후작과 30여 명의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길시언은 으르렁거렸다.

“쿨, 쿨럭! 너 이놈, 후작! 죽을 자리를, 죽을 자리를 찾아왔나…………?”

후작은 길시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프리스트들에게 말했다.

“처치해. 한 놈도 남겨선 안 돼.”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대답이 없었다. 후작은 그대로 언덕 뒤로 사라졌고,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천천히 우리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칼이 다급하

게 외쳤다.

“당신들, 무슨 속셈인가! 왜 후작의 명령을 듣는 것이오!”

그들은 아무 대답 없이 계속해서 걸어왔다. 그때 아프나이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안 보입니다.”

“예?”

“레티의 입……, 그 백발 프리스트가 안 보입니다. 혹시 인질로 붙잡혀 있는 것 아닐까요?”

“아!”

정말이다. 그 꼬장꼬장하게 생긴 백발 프리스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어쩔 수 없이 덤벼드는 것인가? 그렇다면…………, 칼 은 고함을 질렀다.

“이봐요, 당신들! 그렇다면 우리들과 협력해서 인질을 구하도록 하십시다. 어떻소?”

프리스트들의 걸음이 멈추었다. 하지만 그중 금발 프리스트가 앞으로 나서더니 음울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길시언 바이서스.”

길시언은 험상궂은 얼굴로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금발 프리스트는 씁쓸하게 말했다.

“저희들은 할슈타일 후작을 선택했습니다.”

“그래, 알겠다.”

다행이군. 길시언은 알았다니. 그런데 난 모르겠단 말이야. 난 길시언을 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오른 적의 때문에 난 헛바람을 삼켰다. “쿨럭. 우리들만 모두 처치해 버리면 된다는 말이군? 그럼 할슈타일, 쿨럭, 후작의 죄상을 증명할 자가 없어지니까…………….”

금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시오.”

“나라를…………… 위한?”

“당신네들이 수도로 돌아가게 되면 왕가와 후작 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오. 그러나 후작은 귀족원의 원로이며, 따라서 왕가와 귀족원 전 체가 서로 대립하게 될지도 모르오. 전쟁 중인 나라 안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지요.”

길시언이 고함을 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길시언은 격한 기침을 토했고 대신 칼이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반란은 연좌죄이니만큼 아미앙스 수도원도 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말이오?”

“솔직히 그런 점도 있다는 점을 부인하진 않겠소. 생각해 보시오. 왕가가 귀족원과 종교계와 대립하는 일이 지금의 이 나라에 어떤 도움이 될 것 같소? 천만에. 오히려 극도의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오. 왕가는 현재 자이펀과의 전쟁만 해도 힘겹게 버티고 있소.”

“비, 빛의 탑은 가만 있을 것 같소?”

아프나이델이 온힘을 짜내어 외쳤으나 금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문에라도 더욱 당신네들은 돌아가서는 안 되오. 당신은 마법사이며, 길드원일 테지? 당신이 빛의 탑으로 돌아가 사건의 전모를 말하게 되면 지금껏 고요히 있었던 빛의 탑이 이 대립에 참가하게 되겠지. 그러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거요.”

아프나이델은 입을 쩍 벌린 채 프리스트를 마주보았다. 금발 프리스트는 피로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드워프들의 노커이신 엑셀핸드 아인델프 역시. 이 나라 안의 드워프들이 들고 일어나게 된다면 바이서스는 안팎으로 뒤흔들리게 되오.” 엑셀핸드는 잔인하게 웃었다.

“그래? 내가 할슈타일 녀석을 눈감아 주는 꼴을 보느니 바이서스를 뒤집어 엎을 것이라는 점은 잘 안다는 말이로군?”

“드워프시니까.”

그때였다. 길시언이 말했다.

“그래서 ・・・・・・ “

길시언의 얼굴은 더 이상의 핏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전 격렬한 기침 이후로 그가 더 이상 콜록거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시언은 차분하게 말했다.

“어차피 폐태자, 그리고 나머지들도 모두 볼품없는 모험가들이니, 그런 작자들이 나라를 뒤흔들게 내버려둘 필요는 없다, 이 말이겠군?”

“비정하게 결론짓는 취미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네놈들이 왕가를 그 정도로 업수이 여기느냐.”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울하게 말했다.

“바이서스는 국왕의 나라가 아니오. 그 영토 안에 엘프나 드워프들처럼 국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종족들이 있다는 점에서 이미 그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소. 진정한 왕은 제4대 에리네드 대왕 이후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소. 바이서스는 귀족들의 나라란 말이오.”

“너희들은 내게 경배했지………….”

길시언의 말은 낮았지만 금발 프리스트는 검에 찔린 표정이 되었다. 그는 관자놀이를 부르르 떨면서 길시언을 내려다보았다.

“그 때문인가. 그 때문에 그렇듯 왕가를 무시하려고 애쓰는 것인가?”

“당신이 정의라는…………… 것은 인정하오. 그리고 우리가 하려는 일이 정의가 아니라는 것도………….”

금발 프리스트는 힘들게 말을 꺼냈다. 계속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그의 어깨가 내 눈길을 붙잡는다.

“정의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곁에 힘이 함께 있을 때에만 그 아름다움이 살아나는 덧없는 이름이오. 길시언 바이서스.”

“네놈들은 인간의 정의에서 자유롭단 말인가. 신의 검이라서?”

“그렇소. 당신 말대로 당신네들은 모두 볼품없는 모험가들이오. 귀족원들이 과연 궁성 밖을 떠돌아다니다 돌아온 악명 높은 왕자와 어디서 굴러왔 는지도 모를 방랑자들의 말만 믿고 명망 높은 귀족인 할슈타일 후작가를 핍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 우리는 바이서스를 혼란에서 막으려는 것 “이오.”

“그, 그건 사실이잖아요! 후작이 한 짓은 모두 사실인데…………….’

네리아가 애처롭게 외쳤지만 금발 프리스트는 얼굴을 더욱 찌푸렸을 뿐이었다.

“사실 유무는 아무 상관이 없소.”

“예?”

“레이디. 아마도 당신 동료들은 당신의 순진함에서 매력을 느낄 것이라 추측합니다.”

네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눈을 가늘게 뜨면서 금발 프리스트를 노려보았다.

“……멍청하다는 말을 고상하게 하시네요. 무슨 뜻이죠?”

“그 사실 유무와 관계없이, 왕가의 명령에 의해 명망 높은 귀족이 처형되는 것은 귀족원으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란 말이오. 그것은 귀족원이 왕가에 굴복하는 것이기 때문이오. 귀족들은 모두 이런 전례가 만들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귀족들은 할슈타일 가문과 같은 명문가가 간단히 처 리되는 전례를 만들게 되면 왕가는 언제라도 귀족들을 마음대로 핍박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여기게 될 거요.”

네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기사 중의 기사인 국왕이고 태어나면서부터 국왕의 기사인 귀족들이라구? 말이 좋다! 서로 조금이라도 틈을 안 보이려고 들고, 권력의 한조각이라도 뺏기지 않으려고 견제하고! 그리고…………, 그리고 넌 또 뭐냐? 신에게 바친 몸으로서 아주 자상하게 정치에 대 해 설명해 주는 너 성직자는 도대체 뭐냔 말이다! 너 그거 모르지? 네리아에게 설명해 주는 그 태도가 상당히 많은 것을 설명한다는 것!

금발 프리스트는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크라드메서를 저지하려다가 죽은 것으로 처리해 주겠소. 나라의 은인으로 말이오. 최소한 당신들의 명예는 빛날 것이오.”

금발 프리스트는 로브 자락을 어깨 뒤로 넘겼다. 곧 번쩍이는 롱소드가 그의 손에 들려진 채로 우리를 겨누게 되었다.

“자살을 제안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테지요?”

나와 샌슨, 그리고 운차이가 동시에 검을 내밀며 앞으로 나섰다. 칼은 뒤로 빠지며 활을 들었고 아프나이델은 곧장 캐스팅을 시작했다. 네리아는 트 라이던트를 들어올렸다. 금발 프리스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통이 없도록 단숨에 목을 쳐줘라.”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앞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이 자식들!”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간 순간 난 내가 오묘한 자세로 허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비행의 감각을 제대로 음미하기 도 전에 바닥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콰당! 아이고, 머리야.

머리를 문지르며 일어나자 무척 재미있어하는 시선이 날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묘하게 일어나네?”

창문에서 비스듬하게 떨어지는 아침 햇살 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메리안이었다. 메리안은 무릎에 두 손을 올려놓은 채 바닥에 주저앉은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 꿈이었군. 제길, 지독한 꿈이야. 머리 안팎이 모두 쑤시는군. 후우우.

난 한 손으론 머리에 난 혹을 만지작거리고 다른 손으론 차가운 방바닥을 짚으며 말했다.

“여기서 뭐하는 거지?”

“자는 거 보고 있었어.”

“하하. 내가 이렇게 볼 만하게 일어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

메리안은 배시시 웃더니 말했다.

“자면서 계속 끙끙거리더라. 악몽 꾼 거야?”

악몽이라면 악몽이고. 난 맥없이 웃으며 메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옆에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그녀의 오른쪽 볼에 코의 그림자가 예리하 게 지나가고 있었다. 어쩐지 메리안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는데.

“기억은 밤의 제왕이고 꿈으로 현신할 때 만물을 지배한다는 이론을 몸으로 실험하고 있었지.”

“……악몽 꿨다는 말이지?”

“요약을 잘하는구나.”

메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서면서 말했다.

“일어났으면 씻고 내려와. 그리고 내려올 때는 옷 제대로 입어야 돼?”

으윽. 볼 거 다 보고 나서 말하는 거야? 의외로 응큼한 데가 있네.”

메리안은 문밖에서 까르르 웃으면서 말했다.

“전에도 본 건데 뭐. 어서 내려와 경비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어.”

“경비대원?”

옷을 챙겨입고 계단을 내려가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계단참에 서서 홀을 내려다보았다.

홀은 어젯밤의 난동의 흔적이 아직껏 남아 있었다. 햐. 내가 한 짓이지만 정말 시원스럽게도 박살내 놨다.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주위를 둘러 보니 그 폐허 속에 이라무스 시의 경비 대원들로 추측되는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엉망진창이 된 홀을 둘러보며 기막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에 벽에 걸어두었던 주인장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끙끙거리며 경비 대원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몇몇 경비 대원들은 홀 한 구석에 서 있는 선더라이더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히야, 이거 굉장한 말이네?”

그리고 다른 경비 대원 중에 하나는 우그러진 청동 촛대를 들어올리며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뭘로 치면 이렇게 되는 거지?”

그런데 그 사람들 출동 한번 빠르네. 어젯밤에 소란을 부렸는데 오늘 아침에서야 출동이라구? 그때 바닥에 앉아 있던 주인장이 외쳤다.

“저, 저기! 저기 내려왔소!”

그제야 경비 대원들은 어둑어둑한 계단참에 서 있던 나를 발견했다. 경비 대원들은 일순 당황하며 핼버드를 꼬나들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들으 며 아래로 내려서자 그중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남자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뭐야? 이거 새파란 꼬마잖아?”

흐음. 계단참이 어둑어둑해서 내 모습을 잘못 봤던 모양이군. 다른 대원들도 기막힌 표정으로 나와 주인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주인장은 끙끙거리 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우두머리는 꼬나들고 있던 핼버드를 늘어뜨리더니 턱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거야 원 참. 이런 난동을 부린 녀석이 달아나지도 않고 자고 있다는 것도 못 미더웠는데, 그 범인이 이런 꼬마라구?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 “야?”

난 그 남자의 턱을 만지작거리는 동작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아, 아침 일찍 출동하느라 수염 깎을 틈이 없었던 모양이군요. 난 후치 네드발이라고 합니다. 좋은 아침이죠?”

“어디서 헤헤거리는 거야? 너 이놈, 혼자냐?”

거 참 인사가 고약하군.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우두머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좋아. 일단 본부로 연행한다. 무기를 내놔.”

무기를 내놓으라구? 그거 좋지. 난 신중한 표정으로 혀를 길게 내밀어 그 상하 운동 성능을 시험했다. 즉, 혀를 날름거렸다. 갑자기 조롱을 받게 된 우두머리는 입을 조금 벌리며 얼빠진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혀가 내 최강의 무기거든. 세 치 혀가 검을 이기는 법이죠.”

“이 자식이!”

남자의 주먹이 곧장 앞으로 날아왔다. 딱! 흐음. 샌슨의 그것에 비해 보면 이 정도는 간지럽지. 남자의 주먹이 회수되는 순간 난 싸늘하게 웃으며 말 했다.

“먼저 쳤죠?”

“뭐야?”

“그 쪽이 먼저 쳤다구. 그러니 이건 정당방위야.”

놀란 남자가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난 곧장 남자의 멱살을 붙잡아 위로 들어올렸다. 주위의 비명 소리와 그보다 훨씬 절절한 남자의 비명 소 리를 들으며 난 남자를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바람 소리가 나도록 돌린 다음 바닥에 고이 내려놓자 남자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 다. 쿵.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머리를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저, 저자식!”

경비대원들이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핼버드를 들어올리는 순간 난 팔짱을 끼면서 외쳤다.

“국왕의 기사를 공격하는 것은 반란이다!”

“뭐・・・・・・야?”

경비대원들의 손에 들린 핼버드가 멈칫하더니 그들의 안색이 각자의 체질에 따라 다채로운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난 킬킬거리며 주머니에 쑤셔박 아 둔 훈장을 꺼내어 얼굴 앞에서 대롱거렸다. 훈장을 바라보던 경비대원들의 안색은 거무죽죽하게 변해 갔다.

그 거무죽죽한 안색들을 향해 일장 훈시를 시작했다.

“이봐요. 저 으리으리한 말만 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런 난동을 부리고도 태평한 걸 봤으면 진작 눈치를 챘어야지. 뭔가 믿을 만한 권력이 있으니까 요런 꼬마가 까불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에이, 빌어먹을 권력! 걸레처럼 쓰면 쓸수록 지저분해지는 것이 권력인데 가지고 있으면 꼭 쓰게 되더라구. 카아아, 퉤!”

경비 대원들은 내가 던진 의문에 버거워하며 힘들게 질문했다.

“구, 국왕의 기사? 귀족・・・・・・ 이십니까?”

“아아, 정말 익숙지 않은 이름이지만, 어쨌든 다시 내 소개를 하지. 네드발 백작가의 후치 네드발이오.”

아버지! 기뻐하십시오. 이건 네드발 백작가 최초의 선언이올시다. 그리고 네드발 백작가가 국왕을 대신하여 행한 국민에 대한 최초의 봉사이고. 국 왕의 국민인 메리안을 구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음하하하!

“난 국왕의 기사로서 국왕을 대신하여 조카딸을 괴롭히는 악덕 여관 주인을 응징했지. 이 작자가 조카딸을 혹독하게 부려먹었던 것에 대해서는 동 향인들인 당신들이 더 잘 아시겠지요? 자, 이제 묻겠는데, 국왕의 기사인 날 공격함으로써 왕가에 반역하시겠소?”

주저앉아 있던 경비 대원들의 우두머리가 못이라도 깔고 앉은 것처럼 부리나케 일어났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를 붙이는 그의 모습에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균형 감각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천부당 만부당입니다! 즉각 여관 ‘트라모니카의 바람’ 영업주를 체포하여 유소년 학대의 죄가를 치르게 하겠습니다!”

음. 이럴 땐 후치식으로 대답하면 안 되겠지? 난 네드발 백작가의 초대 백작으로서 근엄하게 말했다.

“훌륭한 경비대원의 자세요. 이라무스 시의 앞날이 밝소. 내 잠시 후 시장님을 찾아뵙도록 하지요.”

장담하는데 제미니가 지금의 날 봤으면 웃다가 까무러쳐버렸을 거야. 하지만 경비 대원 우두머리는 다시 한번 이마가 부서져라 경례를 붙였다. “필승! 아, 아니, 감사합니다!”

잠시 후 여관 주인장은 파김치가 되어 경비 대원들에게 끌려갔고 난 거꾸로 놓은 술통에 앉아 다리를 대롱거리면서 그 광경을 감상하며 낄낄거렸다. 경비대원들과 주인장이 다 나가고 나서 고개를 돌리자 홀 한구석에서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는 메리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메리안?”

메리안은 자다가 일어난 것처럼 어깨를 흠칫하더니 곧 고개를 내리깔았다.

“배, 백작님…….”

으윽. 아무래도 ‘양초의 기사’라든지 ‘오크의 비극’은 어울려도 ‘후치 백작님’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난 다리를 들어 술통 위에서 반 바퀴 휘 익 돌았다. 윽! 엉덩이야.

“이봐, 그렇게 부르면 내가 좋아할 거라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

메리안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오른손 검지와 엄지로 아랫입술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렇다고 백작님이라는 거 알았는데 계속 후치야, 하고 부를 순 없잖아.”

“음, 그런가? 이제 한 번 불렀으니 됐어. 다시 후치라고 불러.”

“그래. 후치야.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백작이 된 거? 설명하면 길어. 그냥 나라에 공을 세우고 작위를 얻었다고 말하면 간단하겠지.”

“놀랍네…………, 정말. 넌 여기 다녀가는 엉터리 모험가 백 명을 모아놓은 것보다 더 대단한 모험가인가 봐. 진짜 모험가.”

난 한쪽 눈을 찡긋한 다음 메리안에게 손짓했다.

“하하. 자, 그럼 거기 앉아봐.”

“응?”

“거기, 응. 그 의자는 아직 괜찮겠네.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앉아봐. 아침은 뭐 먹을까 등의 복잡 미묘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안심하고.”

메리안은 해죽 웃으며 의자를 가져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난 말하기 전에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아침 나절이라 목이 칼칼한데.

“내가 네게 기회를 줄 수 있어. 나도 참 많이 컸다. 다른 사람에게 인생이 전환될 기회를 줄 수 있게 되다니. 흠. 기회를 포착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네가 알아서 잘 판단해.”

“기회라구? 무슨 말이니?”

“응. 먼저, 네가 이 도시를 떠나기 싫다면 이 가게를 네 소유로 옮겨줄 수도 있어. 아, 절대 불법적인 일은 아냐. 내가 이 가게를 사서 너에게 줄 수 있다는 말이지. 그리고 네가 여관 경영에 자신이 없다면, 하긴 네 나이엔 어렵겠지. 넌 다른 보호자를 찾을 수 없지?”

“…….”

“애인은?”

메리안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아. 내가 아주 훌륭한 사람을 하나 알고 있어. 그 사람에게 널 맡길까 하는데. 뭐 별로 부자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성격은 참 좋아. 호강하기는 어렵겠지만 마음은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야.”

“지금 중매하는 거니?”

“오우, 천만에. 보호자가 될 사람을 찾아주는 거라니까. 네가 충분히 성장해서 스스로의 길을 찾아갈 수 있을 때까지 널 부탁할 작정이야. 하하, 이 거 참. 이런 말은 늙수그레한 사람이 해야 어울릴 말인데 너랑 비슷한 나이의 남자애가 말하니까 꽤 이상하게 들리지?”

메리안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난 마주 웃어주면서 말했다.

“그도 저도 싫고 네게 어떤 다른 복안이 있으면 말해 봐. 내가 도와줄게. 일단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야. 어때?”

메리안은 다시 입술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의 대답은 좀 불분명하게 들렸다.

“난 모르겠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이해해. 천천히 생각해 봐. 난 지금부터 시장을 찾아가서 내 신분을 밝히고 주인장의 처벌을 의논할 생각이거든. 그동안 생각해 보렴.”

“알았어. 참, 아침은 먹어야지?”

“괜찮아. 시장 관사에 쳐들어가서 얻어먹지, 뭐. 이라무스 시장님에게 네드발 백작을 대접할 기회는 주자구.”

“아, 아. 그렇구나. 백작님이시니까………….”

“퍽 웃기지? 하하.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도시나 영지에 들르면 그 시장이나 영주에게 꼭 인사를 하는 것이 예법이라더군. 아, 그래. 같이 갈래?” “아, 아니. 난 괜찮아. 그러니까 이건 백작님이 시장님을 찾아가는 길인 거지?”

“뭐…………, 그렇지.”

“알았어. 내가 감히 어떻게 따라가겠니. 호호. 그런 미안한 표정 짓지 마. 잘 이해해.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난 대답하는 대신 술통에서 뛰어내리며 입에 손가락을 꺾어넣었다. 휘이익! 홀 구석에 서 있던 선더라이더는 기특하게도 곧장 걸어왔다.

말에 올라타 문을 나오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메리안은 휑뎅그렁한 홀 가운데 오도카니 앉아서는 많은 당황과 감탄이 섞여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 다. 폐허가 된 홀 가운데 외로이 앉아 있는 모습, 마치 지금의 그녀의 처지를 나타내는 것 같군. 안쓰러운데.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피어오른 희망은 날 뿌듯하게 만들었다. 하하, 저 희망의 원인은 바로 나일 테지? 메리안, 걱정 마. 내가 널 도와줄게.

어젯밤의 내 생각은 잠시 보류야. 우린 드래곤처럼 살 순 없어. 최소한 메리안은 그럴 수 없어. 타인의 친절에 저렇듯 기뻐할 줄 아는 것을 보란 말이 야. 이루릴이 도와주든 말든 신경 안 쓰던, 그리고 제레인트가 도와주려고 하자 화를 벌컥 내던 지골레이드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메리안 은 인간이니까.

폐허 속에서도 희망으로 웃는 인간 메리안은 손을 들었다.

“잘 다녀와.”

난 마주 손을 흔들어준 다음 신나게 출발했다.

“이랴아! 가자아, 선더라이더!”

윽! 실수다. 신바람이 나서 그냥 달려왔어. 난 시청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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