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0권 11화 – 미투랑 요새 전투
미투랑 요새 전투
미투랑 요새에는 지난 며칠간 엄청난 토목 공사를 위해 수많은 인부들이 동원되었다. 타이탄까지 동원된 이 거대한 토목 공사는 그 규모로 봤을 때, 매우 단기간에 끝이 난 역사상 기록에 남을 만한 공사였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얕보면 큰코다치십니다. 특히나 상대방이 타이탄을 동원하는 만큼 그에 걸맞은 대비를 하셔야지요.”
“그래도…….”
“거기에다가 될 수 있다면 로체스터 전하께 연락해서 필요한 만큼의 지원군도 요청해야 할 것입니다.”
“될 수 있다면 지원군 없이 끝낼 수 있도록 해 보게.”
“예, 그렇게 노력은 하고 있사오나…, 저도 적의 공격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감히 예상할 수가 없는지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것만 가지고도 충분하지 않을까?”
다리엔 후작은 자신이 계획한 것보다 더욱 규모가 커져 버린 방어 진지에 혀를 내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처 요새들을 모두 뒤져 타이탄에 타격을 줄 만한 대형 몬스터용 공격 장비들은 모두 다 끌어 모았다. 그리고 본국에 애걸해서 최신형 타이탄 공격 장비도 몇 가지 가져왔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타이탄들이 빠지기에 충분한 거대한 구덩이를 서른 개나 팠다. 구덩이 안은 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기름종이로 세심하게 바른 후 물과 지푸라 기를 가득히 채워 넣었다. 단순히 물만 채워 두는 것보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수렁처럼 되어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후 그 위를 튼튼한 나무로 덮고 흙을 깨끗하게 깔아 놨다. 수십 톤이나 되는 타이탄을 겨냥한 함정이었기에 사람이나 마차가 지나다녀도 상관없을 정도로 튼 튼하게 만들었다.
후작은 면밀한 계획 하에 함정이 완성되었을 때쯤 이곳에 대한 정보가 흘러 들어가도록 조작했다. 물론 그 조작은 후작이 가한 것이었고, 그 역할을 해야 하는 부 하들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기에 일이 잘못될 수도 있었다.
“마그레인 백작이 일을 잘해 주어야 할 텐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후작을 향해 성주는 재빨리 말했다.
“잘될 것입니다. 마그레인 백작님은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니까요. 솔직히 이런 일에 소모해 버리기에는 아까운 분입지요.”
“내가 하는 말은 그게 아닐세. 자기가 무슨 영웅쯤이나 되는 듯 입을 다물고 있거나, 또는 자살해 버렸으면 처음부터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말이지. 젠장, 오 히려 부하가 술술 털어놓기를 바래야만 하다니. 이미 예정일보다 하루나 지체되고 있지 않은가? 슬쩍 마그레인 백작의 주둔지에 대해서 놈들에게 정보를 흘렸고, 놈들이 그를 잡아간 것이 3일 전인데, 왜 이렇게 늦는지 이해를 못 하겠군. 나라면 벌써…
다리엔 후작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예를 잘못 들었던 것이다. 자신이 단순무식하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으니 그로서는 입을 다문 것이 당연했 다. 그것을 눈치 챈 성주도 노회한 너구리답게 슬쩍 말문을 돌려 다리엔 후작을 도왔다.
“참, 본국에서 도착한 신형 타이탄 병기를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1백 대 정도 도착했는데, 도무지 신뢰가 안 가더군요. 보통 보던 것보다 덩치가 너무 작아 서…….”
성주의 말에 다리엔 후작도 흥미를 느꼈다. 타이탄을 때려잡는 병기는 예로부터 몇 종류 되지 않았다. 거대한 나무 말뚝에 강철 촉을 붙여 놓은 것을 발사하는 대 형 쇠뇌라든지, 대형 투석기 등등, 대부분이 공성전(攻城戰)에서 자주 사용되는 병기들이었다.
보통 기계 장치의 덩치가 크면 클수록 파괴력이 좋아지기에 대타이탄용이라면 성이나 요새에 배치할까 들고 다니기에는 벅찬 병기들뿐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사 이엔가 타이탄용 공격 무기라면 거창한 덩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모두들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각하.”
신무기를 처음 본 다리엔 후작의 소감은 이랬다.
“흐음……. 괴상하게도 생겼군.”
아무리 신형 무기라도 타이탄을 향해 발사하는 도구는 똑같았다. 2미터는 됨직한 큼직한 나무 말뚝의 끝 부분에는 강철로 된 거대한 촉이 붙어 있는 초대형 창 같 은 것이다.
그런데 신형 무기는 거창한 기계 장치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 거대한 창은 쇠로 된 원통 같은 곳에 꽂혀 있었는데, 그 원통은 나무틀로 만들어져 있는 곽에 고정되 어 있었고 움직이기 편리하게 밑에는 몇 개의 바퀴가 붙어 있었다.
그것만 보면 쇠로 된 원통만으로 그 거대한 창을 날리는 모양이니, 믿음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작은 장치로 과연 타이탄을 박살 낼 만한 힘과 속도를 낼 수 있 을까하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예, 신무기와 함께 조작 인원도 2백여 명 정도 함께 도착했사온데, 그들의 설명으로는 대단한 위력이라고 하더군요. 그들의 말로는 여기 있는 이 심지에 불을 붙 이면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다리엔 후작은 의심스런 표정으로 그것을 훑어보며 말했다.
“흐음……. 이거 발사 시험은 거친 제품인가? 도저히 이따위 걸로 타이탄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구먼.”
“글쎄요, 그건 모르지요. 실전에 배치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가? 역시 그로체스 공작 전하셔. 최신 무기라면 동부 전선으로 우선 배치되어야 할 텐데도 이곳으로 먼저 보내오신 것을 보면 말이지. 아무튼 놈들이 언제 공 격해 들어올지 모르니 발사수들은 항시 대기하라고 일러라.”
“옛, 각하.”
자신의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총총히 사라지는 성주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리엔 후작은 신형 무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봐도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 사실 부하의 앞이기에 애써 좋은 방향으로 해석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부하의 입에서 그만큼 이쪽 전투가 중요하지 않다든지, 아니면 그로체스 공작의 힘이 약하니까 아직 테스트도 못 해 본 무기를 이쪽에 보내어 실전 테스트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 나올 염려도 있었기 때문에 원천봉쇄를 한 것에 지나 지 않았다.
아무튼 머리 하나는 비상한 놈인 것 같으니까 말이다. 사실 이런 공인되지 못한 시험 무기는 아주 신뢰도가 떨어지기에 가급적이면 지휘관들이 사양하는 품목 중 의 하나였다.
산꼭대기를 깎아서 거창하게 지어놓은 성. 어떻게 보면 한 폭의 그림처럼 장엄했지만, 거기에 쳐들어가야 한다고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루빈스키 공작은 손가락 으로 그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미투랑 요새인가?”
“옛, 전하.”
“산꼭대기에 잘도 만들었군.”
“예, 엄청난 인력이 동원된 작업이었다고 들었사옵니다. 산을 깎아서 만든 데다가 북쪽과 동쪽을 40미터 정도 되는 절벽이 막아 주고 있는 천험의 요새입지요. 요 새 부근의 나무들은 가지치기를 해 놨기에 기습을 당할 염려도 없사옵니다.”
“겨우 몬스터나 상대하려고 만든 성치고는 규모가 너무 크구먼.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야.”
“슬슬 준비를 하라고 지시할까요?”
“그러세. 일단 다섯 대만 꺼내라고 지시하게.”
공작의 지시에 따라 오너들은 각자의 타이탄을 불러냈다. 그에 따라 대량 생산을 위해 단순한 형태를 한 타이탄 테세우스들이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성 아래 저 먼 곳에서 갑자기 타이탄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본 성의 경비병들은 요란하게 경종을 울려 댔다. 적군이 아니라면 이렇듯 타이탄을 끄집어낼 이유가 없 었기에 울려 댄 경종이었고, 성내의 모든 인원들은 그 경종이 뜻하는 바가 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맡은 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새 벽에 시작된 갑작스런 경종이었기에 모두들 자다가 일어난 듯 복장들이 엉망진창인 것은 당연했다.
특히 그 복장 상태가 엉망인 사람들은 대타이탄용 공격 무기를 다루도록 지시받은 인물들이었다. 일반 병사들이나 기병들은 침착하게 자신의 무장을 갖춘 후에야 자신의 구역으로 이동했다.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타이탄의 이동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이었다.
“적의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후작 각하.”
“어디?””
“저곳에 있습니다. 여기 이걸 사용하시지요.”
다리엔 후작은 성의 상당히 높은 위치에 마련되어 있는 중앙 지휘탑에 서 있었다. 이곳은 매우 높은 곳에 위치했기에 사방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전망 이 좋았고, 또 성의 곳곳에 마련되어 있는 각종 무기들과 병력을 총괄 지휘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는 곳이었다.
성주가 내미는 망원경을 받아 들고 후작은 여명 아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타이탄들을 관찰했다. 성을 중심으로 반경 3킬로미터 주위로 낮은 관목 정도만을 남겨 두고 키 큰 나무들은 전부 없애 버렸고, 그나마 1킬로미터 근방에는 그런 관목조차도 없애 버렸다. 그렇게 해야만 교활한 오크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기 때문 이었다.
후작은 성주가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관찰해 본 결과 여명 아래 숲을 뚫고 솟아올라 있는 다섯 개의 시커먼 물체들을 볼 수 있었다.
“겨우 다섯 대뿐인가?”
“그렇습니다.”
“으음, 투르넨 후작을 불러라.”
투르넨 후작을 불러오라고 지시할 누군가를 찾기 위해 뒤를 돌아보던 성주는 수행원 두 명을 거느리고 느긋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투르넨 후작을 보 고 급히 다리엔 후작에게 속삭였다.
“저기 오고 계십니다, 각하.”
“그래?”
다리엔 후작은 뒤를 돌아보며 느긋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시오, 투르넨 후작. 기사단에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오는 길이오?”
투르넨 후작은 다리엔 후작의 속을 태우려고 일부러 늑장을 부리면서 천천히 나타났는데도, 상대가 그걸 무시하고 준비 운운하자 인상을 찡그렸다. 상대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보니 꼭 자신이 다리엔 후작의 충실한 부하인 듯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늑장 부리다가 왔다고 맞받아 말하기도 껄끄러웠다. 명목상이기는 했지만 상대는 자신의 상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투르넨 후작은 일 부러 다리엔 후작을 무시하고 옆의 수행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찰조로부터 보고는 없었나?”
자신의 말이 묵살당하자 다리엔 후작의 눈꼬리가 올라갔지만 투르넨 후작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수행원은 급히 답한 후 그들의 앞쪽에 삐죽이 나와 있는 금속제 관(管, Pipe)이 있는 곳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금속제 관은 두 개나 솟아나와 있었는데, 혹시나 비 가 올 때를 대비해서 위쪽에는 작은 뚜껑이 붙어 있었다. 관을 통해서 대화하면 말을 훨씬 더 멀리 전달할 수 있기에 이런 장치를 붙여 놓은 것이다. 물론 아무리 관 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 거리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기에, 중앙 지휘탑 내에 위치해 있는 통신실과 사격 통제실, 이 두 곳에만 연결되어 있었다.
관 위의 뚜껑은 벗겨져 있었기에 그는 관에다가 대고 곧장 외쳤다.
“통신실! 정찰조로부터 들어온 보고가 있소?”
그러자 관 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찰조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적은 70명 정도로 구성된 부대라고 합니다. 아직 주위가 어두워서 적들의 정확한 구성은 알 수 없답니다.”
관 속에서 들려온 말을 수행원은 재빨리 복창(復唱)했다. 그 말을 듣고 다리엔 후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적군의 정확한 구성을 모른다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70명? 그렇다면 70대의 타이탄을 거느리고 왔다는 말인가?”
투르넨 후작은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내는 다리엔 후작에게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대는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니 인원 구성을 이해하기 힘들 거요. 보통 타이탄 한 대가 움직이려면 최소한 두 명의 기사와 한 명의 마법사가 타이탄을 서 포트하기 위해 움직이게 되지. 그러니까 대략 네 명에 타이탄 한 대라고 보면 맞을 거외다. 물론 이것은 통상적인 전투에나 맞는 인원 대비이고, 이렇듯 목표가 단순 하게 정해져 있는 경우에는 정찰을 위한 인원이 감소한다고 보면 맞겠지.”
투르넨 후작의 태도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 그에게서 정보를 획득해야만 했기에 다리엔 후작은 최대한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경의 의견대로라면 17대 정도라는 말이오?”
투르넨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간단하게 답했다.
“아니, 17대 이상이라는 말이오.”
일부러 말을 짧게 짧게 끝내는 바람에 자신이 계속 질문을 하도록 만드는 상대를 향해 다리엔 후작은 짜증 어린 어조로 다시금 물었다.
“그렇다면 상한선은 얼마요?”
“돌아가기 위해 최소한 마법사 한 명. 그렇다면 적 인원이 70명이라면 69대가 되겠지.”
“흐음, 17에서 69라. 오차가 너무 크군. 좀 더 오차를 줄일 수는 없소?”
이번에는 돌아온 대답이 좀 더 길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리엔 후작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투르넨 후작은 이번 작전이 자신을 제외하고 다리엔 후 작 혼자서 몇몇 부하들만 데리고 쑥덕공론을 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갑자기 대규모 토목 공사를 하면서 적의 타이탄이 이곳에 쳐들어온다는 간단한 통보만 나에게 했소. 그토록 야단법석을 부리며 준비를 했을 정도 라면 적 타이탄이 이곳에 쳐들어온다는 정확한 정보를 그때 입수했다는 말일 것이오.
만약 경이 그런 정보를 정보부에서 얻어 들었다면 나에게도 통보가 왔을 텐데, 정보부에서는 아무런 보고도 없었소. 그렇다면 경 혼자서 일을 벌인 것이 분명한데, 도대체 무슨 공작을 한 거요? 나도 정보가 있어야 그놈의 오차를 줄일 수 있을 것 아니오?”
“이쪽이 본거지라고 정보를 흘렸소.”
다리엔 후작도 상대의 질문에 간단하게 답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예의에 어긋날 정도로 투박한 것이었다.
“당신 정신 나갔소? 그렇게 하면 놈들은 최고 정예를 이끌고 와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게 당연한데.”
“물론 제정신이오. 대신 놈들은 이곳에 대타이탄 병기라든지 또는 타이탄을 상대하기 위한 그런 준비는 없다고 들었을 거요.”
다리엔 후작은 변명하듯 주절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니 슬며시 자존심이 상하는지라 따지듯 트루넨 후작에게 말을 이었다.
“나도 이곳이 본거지라고 알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소. 하지만 당신의 그 잘난 부하들이 패배한 것도 모자라서 몇 명 생포당했으니 자연히 이쪽 정보가 샐 것이 분 명하단 말이오. 그런데 딴 곳이 본거지라고 거짓 정보를 흘렸다가는 금방 들통 날 것이 아니겠소?”
“내 부하들은 입이 무거운 놈들이오. 겨우 고문 정도 한다고 해서 그렇게 정보를 술술 얻어 낼 수 없소.”
투르넨 후작은 급히 변명을 했다. 하지만 다리엔 후작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몰아붙였다. 이제 주도권이 자신에게 넘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고문을 하겠지. 그동안에 자살하지 않았다면, 결국은 불게 되어 있소. 마법사들은 폼으로 기르고 있는 줄 아시오?”
마법사까지 동원한다면 당연히 불 것이다. 그건 의지와는 상관없는 고문술이니까 말이다. 투르넨 후작은 할 말이 없어지자 슬쩍 화제를 바꿨다.
“으음…, 그때라면 나머지 은십자 기사단이 도착하기 전이니까, 대략 50대 정도의 타이탄이 있다고 한거요?”
“물론이오. 은십자 20대에 철십자 30대라고 했지.”
“그렇다면 50대 이상 69대 이하로 보면 비교적 정확할 거요. 놈들이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감이 있다면 50대 정도만 가져왔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좀 더 가져왔겠 지.”
“그런데 왜 다섯 대밖에 안 보이는 거요?”
“그거야 당연히 이 좁은 곳에서 치고받자니 힘들 테니까 작은 숫자만 꺼내 놓고 이쪽을 꾀고 있는 거지. 그건 그렇고, 대타이탄 공격 무기는 얼마나 준비했소?” 갑자기 또 화제가 바뀌자, 다리엔 후작은 상대의 저의가 뭔지 생각해 보며 퉁명스레 답했다.
“그게 지금 중요하오?”
“물론 중요하오. 아무리 쟈크렌 요새에 있던 남은 기사단이 며칠 전에 모두 도착했다고 하지만 철십자까지 전부 다 합쳐도 70대뿐이오. 그중에서도 은십자는 50 대밖에 없다는 말이오. 그런 상황에서 이쪽 50대를 확실하게 박살 내겠다고 온 부대라면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왔을 테니 대략 짐작해 본다면 빠듯한 전투가 될지 도 모르기 때문이오.”
“만약 대타이탄 공격 무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면?”
다리엔 후작의 물음에 투르넨 후작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싸워야지. 그래야 상황이 불리해지면 후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다리엔 후작으로서는 매우 황당한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인원들은 어쩌라는 말인가?
“여기 있는 모든 인원들을 버려 놓고 탈출하겠다는 말이오?”
“당연히 당신도 전황을 지켜보다가 여차하면 이동 마법으로 튀면 될 것 아니오?”
“그렇다면, 방어 무기가 제대로 갖춰져 있다면 어쩔 거요?”
“그렇다면 당연히 여기서 싸워야지. 그편이 훨씬 더 유리할 거요.”
요란한 경종이 울려 대면서 성 위쪽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데도 정작 상대방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공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타이탄이 나와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이지?”
“글쎄요……. 혹시, 성내 전투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옆에 서 있는 마법사의 말에 공작은 무표정하게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내 전투라……. 성안에서 싸우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것은 없지만, 어떤 대비가 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뛰어드는 것이 과연 현명한 행동인지 조금 생각 해 봐야겠군.”
“하지만 대타이탄용 방어 장비도 없다고 알려진 성이옵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야. 대타이탄용 공격 무기가 없다면 왜 구태여 저 좁은 성에서 싸우려고 들겠나? 저렇게 좁은 곳에서는 만약 전세가 불리해져도 도망치 기가 아주 힘들 텐데.”
“하지만 타이탄이라면 저 높은 절벽에서라도 뛰어내려 탈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론 40미터 정도의 절벽이야 뛰어내릴 수가 있겠지. 하지만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라면 그 충격을 소화하기 힘들어. 그리고 뛰어내리면서 타이탄의 몸체가 절반 이상 땅바닥에 푹 박힐 텐데, 그건 어떻게 처리할 건가? 전투 중이 아니라면 상관없겠지만, 적을 코앞에 두고 그따위 짓을 한다면 위험천만하지.”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있을 수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쩝…. 이런 식으로 일이 찝찝하게 전개될 줄 알았다면 로니에르를 데려오는 건데 그랬군. 그렇다고 지금 불러오기도 뭣하니까 강행 돌파를 해 보기로 하지. 마법 을 준비해라.”
“예? 마법이라 하시면?”
“공격 마법 말이다. 마법사면서 공격 마법 한 가지도 할 줄 모른단 말이냐?”
“저…, 알고는 있습니다만, 타이탄을 상대로 마법은 무용지물에 가까운지라…….”
마법사의 말에 공작은 조용한 어조로 질책했다.
“누가 타이탄을 잡으라고 했나? 저기 있는 성을 박살 내란 말이다. 물론 대마법사 정도라고 해도 성을 박살 내기는 힘들다는 것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들의 실력으로도 저 성에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는 있지 않은가? 그런 다음 녀석들의 반응을 보기로 하세. 놈들이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타이탄을 꺼내서 밑으로 달려 내려올 거야.”
“옛, 전하.”
마법사들은 저마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전번의 사건 이후로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기사단에 투입되는 마법사들의 수는 최소한으로 줄어 버렸지만, 그 질은 월등하게 상승했다. 신참 마법사들은 모두들 본부에 배속되거나 타이탄 공장에서 잡무를 보는 식으로 대폭적인 교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마법사들이 저마다 날려 댄 마법으로 미투랑성은 굉음을 발하며 폭발을 일으켰지만, 요란함에 비했을 때 별로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몇 명의 병사들이 불에 타죽기도 하고, 성벽의 위쪽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기에 처음 잠시 동안 성 위에 보이는 병사들이 잠시 허둥지둥하는 것 같이 보였다. 하지 만 그들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잠시 후 성 위에서 붉은 화염 덩어리들이 직격하듯 공격대를 향해 쏟아졌다.
콰앙!
굉음을 내며 터지는 화염 덩어리들을 보며 공작은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은 어떤지 몰라도 마법사에 있어서는 저쪽이 질과 양에서 한 수 위였던 것이 다.
“젠장! 되는 일이 없군.”
마치 벌집을 쑤셔 놓듯 겨우 여섯 개의 화염 덩어리를 날리고, 수십 개를 두들겨 맞았으니 이건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었다. 먼저 꺼내 놨던 다섯 대의 타이탄들 이 날아오는 화염 덩어리를 보고 재빨리 막아 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상당한 곤욕을 치를 뻔했던 것이다.
마법사들은 적들의 엄청난 반격에 질려서 아예 마법을 구사할 의욕을 상실한 듯 더 이상의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되로 주고 말로 받았으니까 말이 다. 그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마법사가 다시금 공작에게 다가와 송구스럽다는 듯 말했다.
“공격을 재개할까요? 전하.”
“아니, 그래 봐야 별 소용도 없을 것 같군.”
실망스런 어조로 공작이 말하자 마법사는 대안을 제시했다.
“본국에 마법사들을 지원해 달라고 연락을 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아니, 이 정도 대 부대를 이끌고 와서 마법사를 지원받는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또 그런 요청을 해 봐야 토지에르에게 더욱 무거운 짐을 지우는 일이 될 뿐이 야.”
노마법사에게 그렇게 대답해 준 뒤, 공작은 뒤쪽에 서 있는 기사들 중의 한 명을 호명했다.
“이보게, 하인드!”
“옛, 전하.”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한다.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라고 지시하도록! 내가 앞장서겠다. 이쪽에서 위력 제압으로 나간다면 무슨 꿍꿍이속인지 곧 알 수 있겠지.”
“적들이 타이탄을 모두 꺼낸 것 같습니다. 수효는 50여 대 정도!”
망원경으로 적진을 관찰하고 있던 다리엔 후작의 수행원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걸 듣고 투르넨 후작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꺼내는 정도의 행동인데 도 저렇듯 놀라다니, 실전 경험이 없는 다리엔 후작과 마찬가지로 그의 부하들도 역시 실전 경험이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 수행원이 자신의 부하였다면 당연 히 질책을 했겠지만, 다른 사람의 부하였기에 참아야 했다.
투르넨 후작은 자신의 명령을 침착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듬직한 자신의 수행원에게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전 기사단 성내 전투 준비. 걸리적거리는 것은 뭐든지 박살 내도 상관없다. 마음껏 싸우라고 전해라.”
“옛, 각하.”
수행원은 이번에는 사격 통제실과 연결된 관에다가 외쳤다.
“사격 통제실! 전 기사단 성내 전투 준비!”
그렇게 외친 후 그는 재빨리 옆쪽에 마련된 탁자로 다가갔다. 그 탁자 위에는 종이와 펜, 그리고 잉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곧장 펜을 들고는 투르넨 후작의 명 령을 휘갈겨 썼다. 그런 후 종이를 구겨 가지고는 아래쪽으로 던졌다.
아래쪽에는 그 종이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연락병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은 그 종이를 펴 본 후 명령을 전해야 하는 곳으로 곧장 달려갈 것이다. 이런 식으 로 하는 것이 후작의 명령을 들은 사람이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기에 취해진 조치였다.
이렇게 자세한 전달 사항에 종이를 이용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격 통제실은 성의 각 지점으로 연결된 로프가 집결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약속된 신호에 따라 로프를 잡아당김으로 인해 명령이 효율적으로 전달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치열한 성내 전투가 벌어지고 나면 곧장 그 명령 체계는 박살 날 것이 분명했지만, 그 정도 상황이 벌어질 정도면 이미 외곽의 타이탄 공격 무기는 필요가 없어지기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하고 있었지만 막상 투르넨 후작이 명령을 내리는 것을 듣고 성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투르넨 후작의 명령은 최악의 경우에나 내리는 것으로, 전투만을 우선시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인정사정없이 싸우는 아군 타이탄에 깔려 압사하는 병사들이 매우 많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성주의 표정은 본체만체하고 투르넨 후작은 다리엔 후작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휘는 계속 그대가 할 거요? 이건 병정놀이가 아니니 본인에게 양도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만.”
“귀공은 기사단을 인솔하는 것에만 신경 쓰시오. 내 지휘권까지 넘보지 말고.”
“정 그렇다면 좋을 대로 하시오.”
투르넨 후작은 슬쩍 비웃음을 흘린 후 수행원들을 이끌고 아래쪽으로 내려가 버렸다. 여기에 있어 봐야 별로 할 일도 없을 게 분명했고, 저따위 똥고집을 부려 대
는 녀석 근처에 있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투르넨 후작이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격 진형을 갖춘 적의 타이탄 부대들이 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리엔 후작은 거대한 적 타이탄들이 돌진해 오는 것을 창백한 안색으로 바라봤다. 상대와의 거리가 1킬로미터 정도 남았는데도 땅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 전장에 선 그로서는 거대한 적 타이탄들이 돌진해 오는 장면이 엄청난 중압감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후작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타이탄이라면 이쪽에도 많았고, 또 철저하게 준비까지 되어 있지 않던가? 만 약 저 많은 타이탄들을 제압할 수만 있다면, 전세가 역전되는 정도를 아예 넘어서서 크라레스의 항복까지도 받아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모든 사수 발사 준비.”
후작의 말에 따라 수행원은 떨리는 어조로 사격 통제실로 연결된 관에다가 외쳤다.
“사격 통제실! 모든 사수 발사 준비!”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리엔 후작은 창백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제 적 타이탄은 거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발사.”
“발사!”
그와 동시에 벼락치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울려 퍼졌고 그것에 놀란 다리엔 후작은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뭐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놈들이 또 마법을 쓴 거냐?”
다리엔 후작은 성벽의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놈들이 뭔가 화염계 마법을 써서 공격을 가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수백 개도 넘는 거대한 나무 말뚝들이 상대방 타이탄들을 향해 날아갔다. 적들도 이 요란함에 놀랐는지 다급하게 방패로 상체를 가리면서 자신들에게 직격해 오는 말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갑자기 날아든 말뚝의 양은 엄청난 숫자였고, 몇 대의 적 타이탄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렸다. 그중에는 장갑이나 방 패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타이탄도 있었다.
쟈크렌 요새처럼 처음부터 타이탄을 막기 위해 건설한 요새의 경우, 엄청나게 많은 타이탄 공격 무기를 보유하고 있기에 한 번의 공격으로 치명상을 입는 타이탄 이 대거 나올 가능성이 많았지만, 미투랑 요새는 그렇지 못했다.
다리엔 후작이 급히 무기들을 끌어 모았다고 하지만 거의 태반 이상이 몬스터 퇴치용이었기에 타이탄들에게 치명적일 정도의 타격을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쏟아지는 화살의 비. 혹시나 상대방 타이탄의 머리 쪽에 나 있는 구멍을 통과해서 기사를 다치게 할 수 없을까 하는 망상에서 쏘아 대는 것이었다. 물론 기사가 맞을 확률은 정말 적었지만 수천 개가 날아드니 약간은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상대방 타이탄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괜히 지체해 봐야 화살 세례나 대타이탄 병기들의 세례를 한 번 더 맞아야 하는 것이 다.
그러던 순간, 거의 일곱 대 정도의 타이탄들이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파놓은 함정이 제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것은 타이탄의 발목을 잡고, 그 안의 기사를 익사시키려는 의도였다. 다리엔 후작과 성주의 의도대로 물과 지푸라기로 뻑뻑해진 물에 잠긴 그 순간, 타이탄은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엄청난 쇳덩어리의 무게에다가 물이라는 저항체가 있다 보니 그렇게 높게 도약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동료들이 빠지고 나자 적들은 더욱 진격 속도를 높여서 달려들었다. 이것 외에는 동료들을 살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렇게 물속에 빠진다 고 해서 마법 생물인 타이탄이 익사할 리는 없었고, 그것을 꺼낸다고 난리를 칠 필요도 없었다. 그냥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리라고만 한 다음, 그 구덩이에서 탈출해 서 다시 불러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탈출한 기사가 물 위로 나올 때가 가장 위험한 때다. 왜냐하면 이때가 가장 좋은 화살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적의 궁수들은 기사들이 물 위로 생쥐마냥 기어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동료들이 탈출하기 전에 이들을 침묵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알프레드는 이 성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서둘러서 수리를 했다고 하지만 이 성은 처음부터 몬스터 정도만을 막을 수 있도록 구축된 곳이었다. 그렇기에 성벽이 타이탄을 상대하기에는 좀 약하다는 것은 둘째 치고, 초대형 병기들을 놔둘 만한 장소로는 비좁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병기를 수납할 공간도 별로 넓지 않은 이곳 73보루(堡壘)에 무려 8개의 대형 쇠뇌와 7개의 신형 무기를 쑤셔 넣어 놨으니 비좁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초가을인데도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좁은 장소에서 벅적거리니까 땀방울이 절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신형 무기는 발사할 때 꼭 불을 필 요로 했다. 그렇기에 보루 내는 한증막을 연상시킬 정도로 찜통이 되어 있었다.
땡땡땡… 땡땡땡….
종이 약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두 번 울리자 발사수들은 모두들 긴장감을 가지고 각자의 무기를 발사할 준비를 했다. 이것은 발사 준비의 신호였고, 보루의 벽 틈 새로 적이 먼 곳에서 돌진해 오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신형 무기의 발사수였기에 오른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다. 이제 종이 한 번 더 울리면 그때 발사하 면 되는 것이다.
땡땡땡..
종이 울림과 동시에 알프레드는 큼직한 쇠통의 위쪽에 삐죽이 솟아 있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푸지지직……..
묘한 소리를 내면서 심지가 타 들어가자 먼저 설명을 들은 신형 무기 사수들은 모두 귀를 틀어막았다. 곧이어 굉음이 울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쇠뇌의 사수들은 얘기가 달랐다. 그들은 곧이어 굉장한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옆의 동료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손으로 귀를 틀어막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발사와 동시에 다음 발사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쇠뇌 발사수들이 발사를 끝내고 막 시위를 뒤쪽으로 당기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때 천지가 뒤집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면서 신형 무기가 발사되긴 했지만, 그건 여섯 발뿐이었다. 나머지 하나 남은 신형 무기는 발사되기는커녕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파편과 충격을 주위로 퍼뜨렸다.
알프레드는 운 좋게도 자신의 옆에 있던 동료가 그 파편을 막아 주는 그야말로 인간 방패의 역할을 해 줬기에 충격만 받고, 옆쪽으로 밀리다가 벽을 들이받고 기절 해 버렸다.
쾅! 쾅!
거대한 성벽을 허물듯 박살내고 돌진해 들어오는 적 타이탄들을 향해 성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타이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달려들었다. 이제 성안은 그야 말로 난장판이 되고야 말았다. 상호 1백 대가 넘는 타이탄들이 집단전을 벌여 대니 성 내부가 무사할 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기사단을 책임지고 있던 트루넨 후작은 생각해 보지 않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돌진해 들어온 적들 중에서 가장 거대한 타이탄의 존재였다. 그 거대한 타이탄은 단순무식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방패로 막고 검을 휘두르는 타이 밍이 매우 기가 막혔기에 순식간에 다섯 대의 은십자 기사들을 피의 제물로 삼아 버렸다. 그것을 봤을 때 아무리 봐도 자신이 직접 나선다고 해도 상대하기가 벅찬 괴물로 보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기사들의 실력은 어떤지 몰라도 저쪽 타이탄의 덩치 및 출력이 이쪽보다 월등하게 우세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넓은 대지 위에서 치고받 는다면 숫자가 월등하게 많은 이쪽이 유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좁은 성안에서 치고받자니 자연히 장애물이 많았고, 큰 덩치와 그에 따른 강력한 파워를 지 닌 타이탄이 월등하게 유리한 것이다. 그리고 이쪽이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성내의 건물들에 막혀서 행동에 지장을 받다 보니 수적인 이점을 별로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성내 곳곳에서 아직 생존해 있는 대타이탄 무기들이 적 타이탄을 향해 공격을 가하고는 있었다. 그중 몇 대의 신형 무기는 발사 때 폭발을 일으키며 사수들을 전멸 시키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좁은 공간에서의 공격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쪽에 처진 적 타이탄들이 공성 무기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박살 내기 시작했고, 눈에 띄는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기 시작하면서 대타 이탄 무기들은 하나씩 하나씩 침묵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가자 트루넨 후작은 억눌렀던 분노를 터뜨렸다.
“제기랄! 탁상공론이나 하던 놈이 생각해 낸 작전이니 뻔하지.”
그는 슬쩍 타이탄을 돌려 오른쪽에 솟아 있는 곳곳에 상처가 생긴 중앙 지휘탑을 바라봤다. 타이탄 몇 대가 그곳에 그 덩치를 가지고 비비적거렸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벌써 도망쳤나? 이런 식의 전투라면 여기서 개죽음당할 필요가 없잖아?”
트루넨 후작은 탑 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슬며시 분노를 느꼈다. 아무리 명목상이라고 해도 사령관이 도망쳤다면, 자신도 여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 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타이탄을 몰아서 좀 더 앞쪽으로 나간 후 적 타이탄과 접전을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자신이 나설 단계가 아니었지만, 그 에게는 지금 한 가지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기에 앞으로 나선 것이다.
투르넨 후작은 적과 몇 차례 검을 겨누다가 상대의 검이 묵직한 공격을 가했을 때, 그걸 기회로 뒤쪽으로 밀리는 듯 쿵쾅거리며 후퇴하여 그대로 중앙 지휘탑을 등 판으로 밀어 버렸다.
보통 타이탄이 상대의 검에 밀려 중심을 잃은 것이었다면 여태까지처럼 탑에 큰 충격을 주지는 않고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투르넨 후작은 아예 탑을 박살내려고 힘껏 뒤로 밀어붙였기에 탑은 그 엄청난 중량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트루넨 후작은 아예 내친김에 뒤로 자빠지면서 밀어붙인 후, 일어서면서 탑의 잔해를 지근지근 밟아 버렸다. 혹시나 다리엔 후작이 도망치지 않고 탑 안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투르넨 후작은 자신의 행동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목격자들에게 매우 우연히 벌어진 일인 것처럼 보였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중에 그걸 상부에 적 타 이탄의 힘에 밀렸기에 벌어진 매우 불행한 사고였다고 진술할 생각이었다.
투르넨 후작은 완전히 탑을 박살 내 버린 후 마나를 힘껏 끌어 모아 외쳤다.
“전원 후퇴!”
트루넨 후작은 후퇴하라고 외쳤지만 정작 자신은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목격자가 한둘은 살아남기 마련이었다. 그 렇기에 그것을 생각한다면 자신은 후퇴하면서 최고로 모범적인 상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투르넨 후작과 몇몇 기사들이 사력을 다해 막고 있는 사이 부하들은 뒤로 빠지면서 일부 성벽을 허물어 버리고는 아래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40미터 정도 높이 의 절벽이었기에 상당한 충격이 오기는 하겠지만, 그건 각자가 지닌 재주껏 억누르면 되는 것이다.
부하들이 차례로 빠져나가는 사이 투르넨 후작은 정말이지 후퇴 작전에 있어서 모범적인 상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거기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적의 사령관이 탑승했을 것으로 보이는 그 거대한 청색 타이탄을 직접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수들은 고수들끼리 겨뤄야 서로 간의 피해가 줄어드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투르넨 후작도 저 청색 괴물하고 싸워서 이길 자신은 아예 없었다. 그리고 또 잘못해 서 상대가 상상 이상의 고수라면 자신은 그놈에게 발목을 잡혀서 아예 탈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가능성마저 있었기에 그는 일부러 거대한 청색 타이탄의 근처에 는 가지도 않았다.
3분의 2가 넘는 부하들이 절벽 밑으로 뛰어내린 후 그들의 퇴로를 지켜 주던 후작도 아래로 뛰어내렸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탈출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론 자신의 부하들처럼 타이탄을 타고 그대로 뛰어내릴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타이탄에 탄 채로 땅바닥에 박히게 된다면 해답이 안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뛰어내리기 직전 타이탄의 머리를 뒤로 젖혔고 타이탄이 땅바닥에 격돌하려는 순간, 타이탄에서 위로 뛰어올랐다. 그런 다음 땅바닥에 처박혀 있는 자신의 타이탄에게 공간의 저편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남기고 쏜살같이 도망쳐 버렸다.
크라레스의 기사단은 끝까지 퇴로를 사수하고 있던 상대방 타이탄 다섯 대를 해치운 후 절벽 쪽으로 달려갔다. 상당수의 타이탄은 벌써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도망 쳤지만 아직 몇 대는 도망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검이나 철퇴 등의 무기를 아래쪽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타이탄들을 향해 던졌다. 그런 후 성벽의 일부를 뜯어내어 그대로 아래 쪽을 향해 던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다섯 대의 타이탄이 아래쪽으로 뛰어내렸고, 끝내는 여섯 대의 적 타이탄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일단 더 이상 적 타이탄을 상대할 필요는 없었기에, 루빈스키 공작은 자신의 타이탄 프루토에서 서둘러 내려왔다. 공작은 더 이상 타이탄이라면 탑승하기도 질린 다는 듯 끔찍한 표정으로 프루토를 바라봤다. ‘로니에르는 청기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던 루빈스키 공작이었다.
그만큼 프루토는 지독스럽게도 말을 듣지 않는 타이탄이어서, 공작은 눈앞의 적과 프루토를 함께 상대해야 했기에 다른 전투보다 피곤이 배로 몰려오는 듯한 느낌 이었다.
공작은 프루토에서 내리자마자 부하들에게 피곤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우렁찬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쓸 만한 서류가 있는지 뒤져라. 그리고 적의 마법사나 기사가 보이면 생포하도록! 그리고 그 외의 포로는 필요 없으니 모두 본보기로 처형하라.”
“옛, 전하.”
부하들은 공작의 명령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 그야말로 사냥을 시작했다. 몇몇은 타이탄에 탑승한 채였지만, 대부분은 성안을 뒤지기 위해 타이탄을 돌려보낸 후였 다.
사방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공작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부하를 향해 말했다.
“참, 그 우렛소리를 내던 적의 대타이탄 병기 기억하나?”
“예, 전하.”
“혹시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는지 뒤져 봐라. 그리고 사수들 중에서 살아 있는 녀석도 몇 명 잡아와라.”
“옛,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