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0권 1화 – 호비트족의 욕심

호비트족의 욕심

전쟁은 이제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미란 국가 연합의 세 배가 넘는 광대한 토지를 갑자기 손에 넣은 크라레스 제국은 그 넓은 땅덩어리를 감당 하지 못하고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얘기가 약간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크루마에서 보내온 5만 5천 명과 미란에서 보내온 4만 명. 도합 9만 5천 명의 새로운 병력이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병력들이 주요 병참선을 지키기 위해 투입되기 시작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코린트 제국이었다.

크라레스 제국의 점령지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9개 사단급의 병력들. 그 갑옷 위에 산뜻하게 그려진 문장으로 봤을 때, 바로 며칠 전에 그려 넣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갑옷 한쪽 구석에 용병(傭兵)을 뜻하는 꺾어진 버드나무 문장이 그려져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신분을 숨기고 있는 다른 나라 에서 보내준 지원군일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군대에 소속된 수준 낮은 병사들인 경우 이 녀석이 어떤 국가 소속인지 알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또 운 좋게 소속된 국가를 알아냈다 하더라도, 그 국가에다 그쪽의 병사들이 아니냐고 문책해 봤자 아무 소용없었다. 그놈은 얼마 전에 군대에서 해고되었다거나 그만뒀다고 발뺌을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 상대가 기사급이라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키운 인물이기에 해고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용병이나 하급 병사들의 경우 이리저리 떠도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자신이 태어난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라든지 또는 그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있다고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일부 귀족들이 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 있는 이런 국가 체계에서 평민들에게까지 그런 소속감이나 충성심 따위를 바란다면 오히려 그게 더 우스운 일이다. 평민이나 농노들의 경우 될 수 있다면 세금이 적고 영지의 주민들에게 살뜰하게 대해 주는 인자한 영주가 오기만을 바랄 뿐,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물론 바라는 것이 없는 만큼 그들이 뭔가를 솔선해서 해 줄 가능성 또 한 없었다.

이렇듯 크라레스가 거의 10만에 가까운 병력을 추가로 배치하자 코린트 남부집단군 사령관인 다리엔 후작은 이제 본격적으로 크라레스 침공군을 향해 압력을 가 해 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적의 병참선이 더욱 든든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바짝 땅바닥에 엎드려 몸을 숨긴 채, 망원경을 통해 앞을 살피던 사내가 옆에 있던 사내를 향해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한 놈들이야. 전에도 한 번 봤지만 도대체 저 녀석들의 저 살기 넘치는 만행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구먼. 안 그래, 맥스?”

사내의 망원경에는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춘 몇 명의 기사들이 엄청난 속도로 돌아다니며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적들은 고작 10여 명이었다. 그나마 다섯 명 정도는 뒤에서 쉬고 있고, 학살극을 자행하고 있는 것들은 나머지 다섯 명이었다.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검이나 창, 혹은 활 따위로 무장을 하고 어설프 게 그들을 향해 저항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원체 강하다 보니 그것은 그야말로 헛된 발악이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이 죽어 나자빠지자 이들은 아예 헛된 저항을 포기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악착같이 쫓아다니며 그들을 죽이고 또 죽이고 있었 다.

사내와 함께 아래쪽에서 펼쳐지고 있는 지옥도(地獄圖)를 감상하고 있던 맥스 또한 그와 같은 의견이었는지 이 갈리는 듯한 목소리로 내뱉듯 말했다. “지독한 놈들!”

사내는 눈에서 망원경을 떼고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우우윽…, 속이 메슥거려서 더는 못 보겠군.”

하지만 맥스는 질리지도 않는지 아래쪽을 계속 바라보면서 이죽거렸다.

“저 녀석들 기사 맞아? 도대체가 제정신이 박힌 놈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말이야.”

“저놈들은 기사도 아니야. 제기랄! 그냥 달려 내려가서 저것들을…….?

분노에 찬 음성을 내뱉으며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갈 듯한 사내를 맥스가 붙잡았다.

“이봐! 참으라구. 자네 혼자 내려가서 될 일이 아니야. 그래듀에이트만 다섯 명이야. 우리 둘 다 내려간다고 해도 저 밑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 숫자만 더 추가해 주 는 꼴이 될 거야.”

“에잇! 제기랄. 지원군은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느려 터진 놈들!”

“그러게 말이야. 이봐, 쟈크! 아직도 멀었나?”

쟈크라고 불린 사내는 간단하게 무장한 무사처럼 차려입고 있었다. 그는 마법진에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예, 통신은 벌써 끝냈습니다. 아마 2, 3분 내로 공격대가 도착할 겁니다.”

“빨리 와야 할 텐데……. 전처럼 일이 다 끝난 후에 도착한다면 큰일이야. 저 녀석들은 떼거리로 옮겨 다니니까 우리들만으로는 어떻게 기습을 가할 수도 없고 말 이지.”

맥스가 투덜거리고 있을 때, 망원경을 들고 있던 사내가 급히 말했다.

“이봐, 저놈들 벌써 끝냈어. 전처럼 곧장 공간 이동해 버리면 큰일인데…….”

맥스도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이미 전에도 한 번 이런 식으로 놓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설마…. 하지만 그럴지도 몰라. 제발 빨리 와라, 굼벵이들아!”

“어어? 저 마법사 녀석 공간 이동 마법진을 그리고 있어. 어딘가로 공간 이동하려는 모양이야.”

“제기랄! 이번에도 실패인가?”

그들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저 아래쪽 산중턱쯤에서 뿌연 빛이 일렁이더니 10여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료들이 나타난 것을 재빨리 알아본 사내는 얼 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는 아직까지 망원경으로 적들을 주시하고 있는 동료의 어깨를 툭 치면서 반갑게 말했다.

“이봐, 맥스! 도착했어. 도착했다구.”

“어디?”

동료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맥스가 급히 시선을 돌렸을 때, 공격대는 이미 여섯 대의 타이탄을 꺼내 탑승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네 명의 기사들은 두 명의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상대방 마법사를 사냥하기 위해 밑으로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 재빠른 동작에 감탄했다는 듯 맥스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야~! 굿 타이밍이야. 놈들은 아직도 도망 못 쳤어. 이제 느긋하게 구경하는 일만 남았군.”

“도와주지 않아도 될까?”

맥스는 동료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듯 신랄한 표정으로 맞받아 쳤다.

“너 미쳤냐? 네 실력을 알아야지. 우리는 여기서 구경만 하고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도 그렇겠지.”

맥스와 그의 동료가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적들도 이미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급조해서 만든 것처럼 투박하게 생긴 큼직한 세 대의 타이탄을 꺼내 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법사나 기사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어딘가로 피신해 버렸을 것이다.

“저 녀석들, 훈련을 아주 잘 받은 놈들이야. 실력도 대단히 뛰어나고 말이지. 방금 소탕하는 것 봤지? 순식간에 수십 명을 죽여 버리잖아.”

맥스의 말에 사내는 히죽거리며 답했다.

“헤헤…, 아무리 그래도 은십자 기사단의 정예들에 견줄 수 있겠어? 저놈들 타이탄이 덩치가 조금 큰 것 같지만 저 모양을 보라구. 철판을 덕지덕지 붙인 것이 그 냥 대충 만든 것처럼 보이잖아. 크라레스 같은 작은 국가가 우수한 타이탄을 만들 능력이 있겠어?”

그의 말에 맥스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과연 무식하게도 생겼군.

“거기다가 숫자도 이쪽이 훨씬 많잖아. 압승일 거야.”

곧이어 양쪽의 타이탄들이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참 전투를 지켜보던 사내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어? 그렇지도 않은데? 6대 3인데도 저 녀석들 아주 잘 버티고 있잖아. 확실히 덩치가 크니까 유리한 면도 있는 모양이군.”

“설마? 내가 듣기로는 표준 중량을 벗어날 정도로 무겁게 만들어 봐야 동작만 굼떠진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놈들 타이탄에 붙은 엑스시온이 상당히 강력하다는 말인가?”

“글쎄…, 그거야 알 수가 없지.”

더 이상 할 일이 없자 살금살금 그들의 옆으로 다가와서 같이 구경하고 있던 쟈크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저쪽 타이탄이 훨씬 더 강력합니다. 동작을 봐도 저 덩치 큰 타이탄이 오히려 더 빨라요. 상대 쪽 타이탄이 속도나 파워 면에서 월등합니다. 하지만 이 쪽이 숫자가 원체 많으니까 밀리고 있는 것이죠.”

자신들보다는 타이탄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는 마법사 쟈크가 그렇게 말하자 맥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뭐야? 그렇다면 저놈들을 상대하려면 금십자 기사단 정도가 동원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기야, 뭔가 믿는 것이 있으니까 감히 본국을 침공할 생각을 했겠지.”

“아무리 그래도 크라레스의 군사력은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경우에도 실력이나 타이탄의 성능은 어떤지 모르지만 숫자에서 밀리고 있지 않습니까?” “크흐흐흐, 그건 그래. 그래도 녀석들 제법 버티는군.”

“아마 오래지 않아 결판이 나겠죠.”

“정말 대단하군. 흐흐흐…, 며칠 동안 여기서 죽치고 앉아 있으면 놈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

“대단하죠? 타이탄들끼리 치고받는 것은 정말 돈 주고도 보기 어렵죠.”

바로 이때 그들의 시야에 공간 이동을 해 오는 또 다른 무리들이 잡혔다. 희뿌연 빛이 번쩍이더니 10여 명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맥스가 그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봐! 저것들은 또 뭐지? 쟈크 자네는 도대체 증원군을 얼마나 요청한거야?”

“그, 글쎄요.”

그들은 새롭게 나타난 인물들이 과연 어느 편인지 몰라서 허둥대고 있었다. 새롭게 나타난 녀석들이 아군이라면 모르지만 적이라면 엄청나게 곤란한 사태에 직면

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새롭게 나타난 인물들 중에서 약간 체구가 작아 보이는 인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자신들을 향해 가리키자, 그들은 가슴이 덜커덕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 작은 체형의 인물이 자신들 쪽을 가리키자 건장해 보이는 무사 한 명이 그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인물들의 뒤편 공간이 활짝 열리면서 아홉 대의 타이탄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공간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는 타이탄 들이 모두들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단순한 형태의 타이탄들인 것을 보고 맥스가 놀라서 외쳤다.

“저, 적이닷!”

“모두들 튀어!”

자신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기사가 적이라는 것과 그 달려오는 속도로 봤을 때 자신들보다 한참 윗줄에 놓이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을 눈 치 채자마자, 그들은 이제부터 벌어지게 될 ‘돈 주고도 못 볼 구경거리’를 구경할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죽자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추격자가 단 한 명이었기에 자신들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서 각기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야 최소한 50퍼센트 정도 생존율을 끌어올 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사 두 명은 무력한 자신을 내팽개치고 죽어라 도망쳐 버리고, 이제 홀로 버려진 쟈크는 자신을 향해 계속 달려오는 기사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정신이 흐트러지 는 것을 억누르며 정신을 집중해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에이비에이션(Aviation : 비행 마법)”

다행히 거리가 꽤나 많이 떨어져 있었기에 쟈크는 상대가 도착하기 전에 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고,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곧이어 방금 전까지 쟈크가 있던 위치까지 도착한 상대방 기사는 재빨리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어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얄미운 마법사 녀석을 향해 던졌다.

그런 후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둘 중 한 녀석을 택해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 버렸다. 기사의 행동이 원체 재빨랐기에, 쟈크는 기사가 자신을 향해 뭔가를 던졌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계속 고도(高度)를 올리다가 사타구니 쪽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지독한 고통에 비명을 터뜨렸다.

“으아아악!”

쟈크는 거의 수십 미터 이상의 높이로 비상하고 있던 상태였기에 고통에 의해 정신이 흩어지며 마법이 깨진 순간, 쟈크의 몸은 땅바닥을 향해 급속도로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퍽!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지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고, 비통하게도 쟈크는 자신의 생애를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살 길을 찾아서 튄 둘 중의 한 명에게도 쟈크 와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떠그랄! 더럽게 빠르군. 하필이면 왜 내 뒤에 붙은 거야? 맥스나 따라가지.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억!”

사내는 뒤쪽에서 점차 거리를 좁혀 오고 있는 상대편 기사를 향해 투덜거리다가, 상대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서 던지자 다급한 신음을 삼키며 재빨리 피했다. 하 지만 그가 단검을 피한다고 무리하게 진행 방향을 튼 사이 상대와의 거리는 더욱 좁아지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생각될 때까지 달아나던 사내는 이윽고 검을 뽑아 들며 반전했다. 하지만 그가 채 반전을 끝내기도 전에 뒤에서 쫓던 상대는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들며 그를 지나쳐 버렸다. 뒤쫓던 상대는 달리던 속도가 워낙 빨라서였는지 재빨리 반전하지 못하고 크게 원을 그리며 뒤로 돌아 뛰어가 버렸다. 그리고 남아 있던 사내는 그제야 자신이 이미 상대의 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독하게 빠른 검……. 으욱!”

사내가 쓰러지자 그 충격으로 옆구리에 길게 나 있던 상처가 더욱 넓게 벌어지며 피를 폭포수처럼 토해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내가 숨을 거두자 피는 더 이상 세차게 흘러나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동료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죽자고 도망쳤고, 가공할 만한 실력을 지녔을 거라 느껴졌던 상대방은 운 좋게도 동료를 쫓아가 버 렸다.

맥스는 죽자고 달려가면서 무력한 자신에 대해 회의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자신이 아닌 자신의 동료를 뒤따라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나 하는 일말의 회의감이 들었지만 맥스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그 감정을 쫓아 버렸다. 동료들의 희생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맥스는 혼란한 와중에 자신의 달리는 속도가 느려졌다는 것을 깨닫고 사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죽은 동료들을 대신해서 상부에 상황을 보고해야 하 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 기사 녀석이 얼마나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는지, 첫 번째 놈을 황천에 보낸 후 돌아왔을 때 이미 녀석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놈의 흔적을 대충 뒤지다가 잡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직도 쿵쾅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타이탄들끼리의 전투는 상당 히 오래 끄는 것이 정석이었기에 서둘러 달려간다면 자신의 먹잇감이 한 대 정도는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격전지로 돌아갔을 때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기사들의 실력도 이쪽이 약간 앞서는 상태에서 등급이 앞서는 타이탄을 가지고 12대 10으로 싸웠으 니 이렇듯 결과가 빨리 나와 버린 것이었다.

“제기랄! 내 것도 하나 남겨 둬야지. 그렇게 빨리 끝내 버리는 법이 어디 있어?”

사내의 투덜거림에, 자신의 타이탄을 이용해서 뒤처리를 하고 있던 동료가 낄낄거렸다.

“헤헤, 미적거리다가 지금에야 나타난 녀석이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 그건 그렇고 잡으러 갔던 놈들은 어떻게 됐어?”

“그놈들 어찌나 재빠르던지 한 놈은 놓쳤어.”

쓰러져 있는 적 타이탄을 들어 올리고 있던 타이탄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며 경악스런 외침이 들려왔다.

“설마?”

“아니야. 내가 뛰어가니까 아예 저항할 생각도 안 하고 바로 튀더라구. 그것도 한 놈은 이쪽, 한 놈은 저쪽! 내 몸이 두 개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었어. 자식들 반항 이라도 좀 했으면 모두 다 황천길로 보낼 수 있었는데……..

“뭐, 다음에는 기회가 오겠지.”

“그건 그렇고 대장은?”

“저쪽에서 포로를 심문 중이야. 뭔가 괜찮은 정보라도 건지면 좋을 텐데 말이지.”

“정말 거창하게도 해치웠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시체 더미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내린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소감이었다.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들어선 곳은 제법 큰 마을이었는데, 식사나 하고 갈까 하는 생각에 들어선 후 그들이 본 광경은 반쯤 썩어 버린 수많은 시체들뿐이었다. 그런데 이 시체들이 문제였다.

군인들끼리 싸우다가 서로가 죽었다고 한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이건 아무런 힘도 없는 마을 주민들을 학살해 놓았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행해진 이 학살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쓰러진 시체들 외에 광장 한복판에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인물의 시체가 가로수에 거꾸로 매달 려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반란 분자들에게 협조하면 이렇게 해 주겠다는 명확한 포고문까지 붙어 있었다.

다크는 이리저리 둘러본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좀…, 심하네요. 아무리 보급 상태가 안 좋아지고, 또 게릴라들 때문에 힘들다고 해도 이런 방식은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아요. 이건 최후에나 쓰는 방법이지, 지 금 크라레스에는 충분히 힘이 있는데..”

“그건 아니야. 나도 오래전에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지. 이런 광경을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말이야. 이건 크라레스라는 나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야. 이 나라만 이런 식으로 행했다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만, 다들 그러는 것 같거든. 왜 호비트란 종족들은 이렇게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쓸데없는 곳에 정력 을 낭비하지? 왜 쓸데없이 적을 만들어서 전쟁을 벌이는지 이해를 못 하겠구나.”

“글쎄요. 아마도 욕심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겠죠.”

“욕심이 많다고? 그건 무슨 말이냐?”

“아버지는 그런 거 못 느껴 봤어요? 예를 들어 그러니까 으응…, 아버지가 예전에 살던 곳 주변에 혹시 다른 드래곤의 레어는 없었나요?”

원래가 생각이란 것을 깊게 하지 않던 인물이 뭔가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한 예를 찾아내려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물음에 아르티어스는 자부심 가득한 어 조로 말했다.

“없어. 오래전부터 말토리오 산맥은 나 혼자만의 것이었지. 그 때문에 다른 드래곤들은 나를 말토리오의 지배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겠냐?”

“말토리오 산맥은 아주 넓은 곳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혼자서 사세요?”

“우리 드래곤들의 경우 누군가가 먼저 둥지를 틀고 살고 있는 곳 주변에 새로이 정착하고자 하는 녀석이 생겼을 때는, 새로 정착하는 녀석이 그곳에 먼저 둥지를 튼 드래곤을 찾아가서 정중하게 부탁을 해야 하지. 여기에 둥지를 틀고자 하는데 괜찮겠느냐고 말이야. 그때 먼저 살고 있던 드래곤이 좋다고 허락을 해야 둥지를 틀 수 있는 거지.”

다크는 미심쩍은 시선을 아르티어스에게 던지며 비꼬았다.

“그렇다면 다른 드래곤들에게 허락을 안 했다는 말이에요?”

아르티어스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변명을 늘어놨다. 아들이 자신을 그렇게 속 좁은 드래곤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나는 그렇게 속 좁은 드래곤이 아니야. 이웃이 하나쯤 있어도 좋을 텐데, 이상하게도 우리 골드 일족 주변에는 다른 드래곤들이 잘 정착하지 않아. 아마도 녀석들이 봤을 때 지혜나 힘에서 모두 다 우리 골드 일족에게 밀리니까 근처에 살기에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거겠지. 하하하핫!”

다크는 호기스럽게 웃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마도 골드 드래곤들은 모두 다른 드래곤보다는 자신들이 훨씬 잘났다고 생각 하는 모양이고, 또 그것을 유감없이 다른 드래곤들에게 표현을 하니까 모두들 “에잇, 재수 없어”하면서 그 주변에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충 그 전말을 짐작한 다 크는 헤시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헤헤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렇다면 옆에 드래곤의 레어가 있다고 가정하자구요.”

“그래, 그렇게 가정한다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 레어에 가 보니까 아버지의 레어보다 훨씬 근사하고 쾌적하더라 이거죠. 그때는 어떤 생각이 들어요?”

아들이 말하는 의도가 뭔지 잘 알 수 없었기에 아르티어스는 얼떨떨한 어조로 답했다.

“그…, 글쎄? 나도 드워프 몇 마리 잡아다가 이렇게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

“아니, 그렇게 말구요. 이 녀석을 해치우든지 아니면 내쫓아 버리고 이 둥지를 뺏고 싶은 생각은 안 들어요?”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말을 서슴없이 해 대는 아들을 보고, 아르티어스는 그녀의 정신 상태를 의심한다는 듯 질책했다.

“뭐?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냐? 드래곤들끼리 겨우 레어 하나 뺏자고 집안싸움을 벌이라는 말이야? 그냥 드워프들을 찾아가서 족치는 편이 훨씬 쉬운데 뭐 하 려고 그러냐? 또 우리들에게 있어서 레어가 크든 작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렇기에 일부 드래곤들은 그냥 동굴에서 살기도 해.”

“으음, 주택 문제로는 해결이 안 되는군’하고 생각하면서 다크는 뭐 또 다른 것이 없을까 궁리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르티어스의 창고 가 득히 쌓여 있던 그것.

“그렇다면 황금은 어때요? 전에 둥지에 가 보니까 많이도 쌓아 놨던데. 다른 드래곤의 레어에 아버지가 모은 것보다 더 많다면 그걸 뺏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 요?”

하지만 이번에도 아르티어스의 대답은 전과 동일했다.

“드래곤의 것을 탐내는 것보다는 드워프나 호비트를 족치는 쪽이 빠르고 더욱 쉽지. 또 겨우 황금 따위 뺏자고 그렇게 치고받을 필요는 없어. 많이 쌓아 둬 봐야 그 거 1년에 한 번 구경할까 말까 하는데 그렇게 많이 모아 봐야 별 소용이 없거든.”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요. 그렇다면 관점을 바꿔서 이렇게 생각하기로 하죠. 사람들이 만약 황금이나 토지 따위를 원한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드래곤 을 잡아다가 족칠 수도 없으니까 만만한 상대를 고를 거 아니에요? 드워프 따위 족쳐 봐야 모아 놓은 황금도 별로 없을 거고, 이웃 나라를 박살내서 황금을 뺏는 게 더 쉽죠. 뭐 그런 식으로 서로들 치고받는 거예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아르티어스가 끄덕거렸다. 그리고 다크의 말을 통해 몇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드래곤이 드래곤들끼리 싸우지 않고 호비트나 드워프, 또는 엘프를 족치는 이유는 동족인 드래곤을 족치는 것보다 그편이 편하고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비트나 드워프, 또는 엘프가 만약 드래곤보다 더 강력하다면? 그렇다면 당연히 족치기 쉬운 드래곤을 택하겠지.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드래곤도 동족 들끼리는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뿐, 호비트보다 욕심이 적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닌가?

“흐음, 그러니까 호비트들이 이렇듯 난리를 치는 이유가 욕심 때문이라 이거지?”

“그럼요. 욕심에는 아주 많은 종류가 있죠. 재물에 대한 것, 권력에 대한 것, 무술에 대한 것 등등 별별 것들이 다 있다구요.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움을 걸고, 남을 중상모략하고…….?”

다크가 줄줄이 나열하기 시작하자,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아. 만약 그런 식으로 엉망진창인 종족이라면 오래전에 멸망의 길로 들어섰어야 해. 하지만 호비트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발전해 가고 있 거든.”

“아뇨, 욕심이 없다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죠. 하지만 모두들 그렇게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했다가는 엉망이 되기에 법이라는 것을 만들었지요. 남을 이유 없이 죽이든지, 또는 물건을 훔치든지, 폭력을 가했다든지 하면 잡아다가 벌을 주죠. 그 때문에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합법적인 노력을 하는 거죠.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이 탐난다면 훔치거나 빼앗지 않고 일을 해서 번 돈으로 구입하는 식이 되는 거죠. 전에 제가 살던 곳도 그랬고, 여기도 대충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하지만 국가들 간에는 제제를 가할 만한 다른 국가가 없으니 당연히 강한 국가가 마음대로 하게 되죠.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이제 모든 것이 이해가 간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흐음…, 대충은 이해가 가는구나. 그러니까 여기 내가 보고 있는 작품은 그런 이유로 만들어진 거로구먼?”

“그럼요, 당연한 거죠.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가 충돌하면 이 모양이 되는 거죠. 물론 이들이야 지키려는 자는 아니지만, 지키려는 자를 도와줬다든지 뭐 그와 비슷한 이유겠죠.”

“그건 그렇고, 식사는 어디서 하지? 시체들보고 밥해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뭘 그런 것을 가지고 걱정을 해요? 딴 마을로 가면 되죠. 이런 식으로 본보기를 보이는 것은 딴 사람들이 보라는 뜻인데, 주변에 있는 다른 마을들까지 몽땅 다 이 렇게 만들지는 않죠. 왜냐하면 와서 볼 사람이 꼭 있어야 ‘본보기’라는 것이 빛을 발하거든요.”

“그도 그렇군. 어디 보자.”

아르티어스는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어 뒤적거리다가 말했다.

“여기 있군. 저 길을 따라 한 10킬로미터쯤 내려가면 마을이 또 하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