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1권 18화 – 들개와 까마귀의 밥이 되게 하겠노라
들개와 까마귀의 밥이 되게 하겠노라
탄벤스 공국(國)은 동쪽으로는 드보레크 산맥을 끼고 있는 그렇게 크지 않은 국가였다. 드보레크 산맥이 끝나는 부분에 위치한 토리아 왕국이 알카사스와 코린 트, 크라레스와의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것에 비한다면 탄벤스는 상업이 그렇게 잘 발달한 국가는 아니었다.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고 있는 탄벤스 공국은 공왕(王)이 다스리는 국가다. 공왕이라는 것은 전제 왕권(專制王權)이 발달하기 전의 과도기적인 국가에서 나타나 는 왕이다. 전제왕권의 왕위가 아들이나 혹은 딸에게 세습되는데 반하여, 공왕의 경우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는 것이다.
탄벤스 공국의 경우 세 개의 가문이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 가문에서 돌아가면서 왕이 배출되고 있었는데 이것을 보고 공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공 왕이 다스리는 국가를 공국(共國)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적인 선출에 의해 탄생된 왕이 다스리는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국가인 것이다.
탄벤스 공국은 공왕이 다스리는 만큼 전제 왕정보다는 왕권이 떨어지고 귀족들의 권한이 강하다.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주어지지 않고, 기득권층인 귀족들이 그 권세를 장악함으로 인해 대단히 보수적인 성격이 짙은 국가가 되었다. 귀족들의 경우 될 수 있다면 변화를 싫어했기에, 타국에 대한 침략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 다. 그러던 와중에 재수 없게도 과거 약소국으로 깔봤던 트루비아의 침략을 당하게 된 것이다.
탄벤스 공국의 군대는 트루비아군이 침공해 들어오자, 국경 수비군이 트루비아 침공군을 저지하고 있는 사이 뒤로 후퇴하여 일단 전력을 정비했다. 여러 군데에 흩어져 있던 부대들이 한 곳에 집결을 완료한 후에야, 탄벤스군은 트루비아군과 감히 싸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일단 전력이 정비된 후 탄벤스군은 트루비아군의 힘을 알아 보기 위해 간단한 탐색전을 펼쳤다. 그런데 막상 전투를 해 본 결과 상대방의 군사력이 보통이 넘는다 는 것을 알아내고는 재빨리 자신들의 맹방인 코린트에 구원병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벤스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 철십자 기사단장 가가린 후작이다. 그는 철십자 기사단을 거느리고 전선에 도착한 후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체스터 공작은 가가린 후작에게 트루비아군을 전멸시켜 크라레스를 자극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고, 서서히 트루비아 군을 압박하여 그냥 국경 밖으로 내 쫓으라고 명령했기에 가가린 후작이 거느린 철십자 기사단도 상당히 수동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트루비아 군대는 코린트의 강대한 기사단 앞에 서 거의 피해 없이 후퇴에 성공할 수 있었다.
“흐음…, 아직도 후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인가?”
“옛, 각하. 트루비아군의 진형으로 봤을 때 일전을 벌일 각오인 것 같습니다.”
부단장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가가린 후작은 잠시 궁리를 했다. 놈들이 과연 무엇을 믿고 일전을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뭔가 속임수가 아닐까? 일전을 하는 듯 보이면서 실제로 주력 부대는 뒤로 빠지는 것 말이야. 놈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쪽에서 서둘러서 공격을 안 하는 것을 보고 뭔가 감춰진 수가 있다고 지레 짐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안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각하.”
“그렇다면 놈들에게 이쪽에서 전투를 벌일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어떨까?”
“각하, 만약 그것을 공왕이 안다면 우리들의 저의를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맞아. 그걸 생각 못 했군. 그렇다면 어떻게 한다?”
“일단 위력 제압부터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껏 밀어붙여 버리면 놈들은 도망칠 겁니다. 그걸 추격해 섬멸하지만 않으면 상관없지 않을까요?”
실질적인 정면 전쟁에서 오는 피해보다 패배하여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피해가 더 크다는 것은 거의 상식에 가까울 정도로 간단한 문제였다. 철십자 기사단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타이탄까지 보여 주며 은근히 압력을 가했는데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국경을 넘어 도망칠 생각을 안 하고 꼭 일전을 겨루겠 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말로 해서 안 듣는 상대라면 일단 이쪽의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가린 후작에게 떠올랐다.
적을 전멸시키지만 않는다면, 혹은 전멸시킨다고 하더라도 토리아까지 침공해 들어가면서 전쟁을 확대시키지만 않는다면 크라레스는 묵인해 줄 것이다.
“좋아, 부하들에게 전투 준비를 하라고 지시해라.”
“옛, 각하.”
“천천히 이동하는 속셈을 모르겠단 말이야. 자네 생각은 어때?”
“글쎄…, 혹시 이쪽에서 그냥 순순히 물러나 주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순순히 물러나 주기를 원한다면 저쪽에서 전령이 ‘빨리 물러나지 않는다면 전멸시켜 버리겠다.’하는 포고문을 가지고 달려왔겠지.”
“그럼 뭐지? 혹시 함정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딱히 함정을 만들 만한 것이 없으니까 우리들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듀런보고 부하 몇 명 데리고 가서 퇴로를 확보하라고 지시하는 게 좋겠군.”
“그게 안전하겠지.”
트루비아군과 크라레스군이 적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당황하고 있는 사이, 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는 천천히 이동해 와서는 트루비아군과 20킬로미터 정도 떨어 진 곳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양국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상대방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저마다 부산하게 움직이며 상대의 뒷수가 뭔지를 궁리했고, 또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며 날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양군은 서서히 이동하여 상대방과의 거리를 4킬로미터 정도로 줄인 후 진형을 짜기 시작했다. 탄벤스 공국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코린트군으로서 는 타이탄을 숨길 이유가 없었기에, 그것들을 모두 다 밖으로 꺼내어 배치하고 있었다. 코린트 쪽에서야 자신들의 강력한 타이탄을 상대가 보고, 알아서 도망쳐 줬 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라?”
“왜 그래?”
“저거 34대 맞지?”
쟈므란 백작의 물음에, 라테민 백작은 상대방 진형에서 코린트의 타이탄을 찾아서 헤아리기 시작했다. 코린트의 미노바-P2의 경우 탄벤스 공국이 보유하고 있는 타이탄보다 훨씬 덩치가 컸기에 판별하기는 쉬웠다.
“맞아, 34대야.”
코린트가 이번 전쟁에 투입한 타이탄은 34대가 다였다. 하지만 갑작스레 코린트의 타이탄들을 만난 정찰조의 기사들이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상대방 의 타이탄 수를 혼동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 적의 타이탄들이 달려올 때 앞의 타이탄들이나 자세히 볼 수 있지, 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따라오 는 것들이 코린트의 것인지, 탄벤스의 것인지 알기는 힘들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것 때문에 미묘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럼 16대가 어딘가로 갔다고 보는 게 옳겠군. 안 되겠어. 자네가 9대를 더 가지고 뒤로 가. 자네가 뒤에서 퇴로를 막아 준다면 든든할 것 같아.”
“내가 뒤에서 꽁지 빠지게 막아 주는 동안에 너 혼자 영웅이 되겠다는 거냐?”
“히히, 그럴지도 모르지. 안 그러면 내가 뒤로 갈까?”
“아니, 내가 뒤로 가지.”
“고마워. 무슨 일이 있으면 빨리 연락해.”
쟈므란 백작의 말에 라테민 백작은 빙긋이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잘해 봐라.”
라테민 백작은 서둘러서 자신이 지휘하던 8전대에서 아홉 명을 추린 후 마법진을 이용해서 부하들이 포진하고 있는 후방으로 가 버렸다. 그렇게 하여 쟈므란 백작 은 8전대의 남은 열 명까지 합해서 40대의 타이탄을 가지고 코린트와 정면대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쟈므란 백작은 20대의 타이탄을 퇴로 확보를 위해 30킬로미터 후방에 배치시킨 후, 면밀하게 적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34대 40이라면 그런대로 해 볼 만한 싸 움이 될 것이다. 거기에다가 상대방의 경우 탄벤스 공국이 보유한 19대의 타이탄을 믿을 수 없는데 반해서, 이쪽의 경우 트루비아가 가지고 있는 14대의 타이탄을 믿을 수 있었다.
근위기사단 소속의 3대가 트루비아의 수도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시드미안이 거느리고 있는 14대 중에서 12대가 카프록시아급이었기 때문이다.
양국 군대의 전투 진형이 완전히 갖춰지고 나자, 관례에 따라 탄벤스 공국의 전령이 백기를 들고 트루비아군 진형으로 달려왔다. 전령은 시드미안이 있는 곳까지 달려와서는 두루마리를 펼쳐 놓고는 거만한 목소리로 읽었다.
“본국의 영명(英明)하신 라미네르 그론티어 공왕 전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너희 침략의 무리들이 지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물러간다면 목숨만은 살 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노라! 너희 침략의 무리들은 목숨이 아까운 줄 알면 이곳 탄벤스 영토에서 조용히 물러가라. 그렇지 않다면 너희들의 시체를 들개와 까마귀 의 밥이 되게 하겠노라.”
전령의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들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 수작이 빤히 보였던 것이다.
“헛소리하고 있군. 전쟁 준비를 완전히 갖춘 후에 물러가라니, 말이 되나? 만약 어젯밤 정도에 사신을 보내왔다면 몰라도……. 후퇴하면 뒤통수를 치겠다는 말이 겠지.”
쟈므란 백작의 말에 시드미안 후작이 덧붙였다.
“그렇지 않다면 탄벤스 지휘관들의 상상력이 부족해서일 겁니다. 탄벤스를 침공하면서 모든 전투에서 이와 똑같은 포고문을 들었으니까 말입니다. 아마도 탄벤스 에서는 지휘관들에게 포고문에 대한 공식 책자라도 나눠 주는 모양이지요. 어떻게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지, 원..
시드미안은 툴툴거리면서 자신의 부하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 부하는 말을 달려 나가 전령의 백기를 낚아챈 후 그것을 높이 들어 올린 다음 꺾어 버렸다. 헛 소리하지 말고 전쟁이나 하자는 표시였다.
“적들이 깃발을 꺾었습니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라미네르 그론티어 공왕은 자신도 눈으로 적의 기사가 깃발을 낚아챈 후 깃대를 꺾어 버리는 것을 봤으면서도 아직까지 못 본 척하고 있다 가, 부하가 보고를 올리자 짐짓 허세를 부리면서 외쳤다.
“이런 천인공노할 녀석들. 이쪽에서 자비를 베푸는데도 그것을 못 알아듣다니. 여봐랏! 저 극악무도한 놈들에게 맛을 보여 줘라.”
공왕의 옆에 서 있던 노장군이 외쳤다.
“기사단 돌격하랏!”
코린트의 기사단은 트루비아의 기사단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을 알기에 탄벤스 공국의 타이탄이 돌격해 들어갈 때, 그들을 따라서 돌진하기 시작했다. 코린트 쪽의 입장에서는 적들에게 호된 맛을 보여 준 후 적들이 후퇴하기 시작하면 그냥 놔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에서도 타이탄을 꺼내 놓기 시작하자 철십자 기사단장 가가린 후작은 경악했다. 삼두의 드래곤 문장을 달고 있는 크라레스의 타이탄들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가가린 후작은 매우 당황했다. 그들은 탄벤스 공국 군대에 코린트의 기사단이 지원 나와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 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면 승부로 나온 것을 보면 진짜로 한판 해 볼 작정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후퇴할 충분한 시간 여유를 줬음에도 아직까지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은, 코린트군을 이길 자신감의 표현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사정 봐주지 마라. 돌격!”
가가린 후작은 상대방과 격전을 벌이면서도 매우 찝찝했다. 상대방 타이탄은 분명히 크라레스군 중앙 기사단 소속의 7전대와 8전대가 분명했다. 적 타이탄에 그 려져 있는 전대 문장(戰隊紋章)을 무시하고 생각한다고 해도 트라노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5전대부터 8전대까지였다. 그리고 저 문장들은 7전대와 8전대를 뜻하는 것이었다.
가가린 후작의 머릿속은 급속도로 회전했다. 크라레스 기사단의 1개 전대는 타이탄이 30대였다. 그런데 저 앞에서 돌진해 들어오는 것은 40여 대. 그렇다면 최소 한 20대 이상이 이곳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적들은 이쪽에 코린트의 기사단이 있다는 것을 알고 덤비는 이상,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을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 면?
‘포위 공격인가??
가가린 후작은 뒤에 적의 타이탄이 나타날 가능성을 따져 보기 시작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겨우 34대밖에 안 되는 철십자 기사단을 둘로 나눈다 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정면의 적을 박살 내 버린 후 도주하는 적을 뒤쫓지 않고, 180도 반전하여 탄벤스군을 학살하는 크라레스의 별동대 를 무찌르는 것뿐이었다.
‘젠장! 더럽게 걸렸군.
이제 가가린 후작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최소한 눈앞의 적이라도 박살 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뒤로 포위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황제 폐하로부터 지휘권을 하사받은 이 철십자 기사단이 오늘 전멸당할 가능성까지 있었던 것이다.
“돌격! 황제 폐하께 영광을!”
이어서 벌어진 대규모 타이탄 전투는 놀랍게도 코린트 기사단의 압승이었다. 트루비아 연합군 쪽의 주력 부대인 크라레스 기사단은 대충하고 끝내려고 든 것에 반 해서, 위기를 느낀 코린트의 기사단은 대충할 생각은 아예 때려치우고 총력전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수십 대의 타이탄들이 고철이 되어 나뒹구는 가운데 가가린 후작은 패퇴하는 크라레스 기사단을 추격하지 않고, 곧장 반전하여 공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적 의 별동대가 언제 들이닥칠지 알지 못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만약 가가린 후작이 뒤의 적을 생각하지 않고, 패퇴하는 크라레스 기사단을 전멸시키기 위해 추격전을 감행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가가린 후 작은 크라레스군의 퇴로를 지키고 있었던 라테민 백작의 별동대와 패주(敗走)하던 쟈므란 백작의 양쪽 부대에게 협공을 당해서 되려 전멸당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렇듯 전쟁에 있어서 가장 큰 변수를 차지하는 것은 전략도, 전술도 아니고 운(運)이었다. 그렇기에 예로부터 가장 뛰어난 장수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운이 들어 가는 것이다.
크라레스 파견군이 대패(大敗)했다는 보고는 재빨리 각국에 보고되었다. 루빈스키 폰 스바시에 대공은 그 급보를 받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마시고 있던 포도주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와 황제가 2개 전대를 트루비아에 파견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트루비아의 체면을 살려 주는 것이었을 뿐, 승리도 패배도 원하지 않았다. 적당한 수준에서 트루비 아와 탄벤스 공국의 체면을 살려 주면서 은근슬쩍 ‘후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파견군을 내보내 놨더니 그가 가장 원하지 않던 행위, 즉 ‘정면 대결’을 펼쳐서는 결국은 대패를 했던 것이다.
“이런 제기랄!”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황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뭐라고? 추가적인 파병이 필요하다고?”
“예, 폐하. 원래는 적당한 수준에서 후퇴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사옵니다. 본국이 대패를 한 이상, 동맹국들이 본국의 능력을 의심하며 흔들 리기 시작할 것이옵니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사옵니다.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여 흔들리는 본국의 위상을 바로 세워야 하옵니다. 그렇게 큰 승리는 필요 없지만, 어느 정도 ‘우세한 상황으로 전세를 몰고 가야만 하옵니다.”
루빈스키 대공의 말을 다 들은 황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경의 말이 옳구려. 그렇다면 얼마나 파병을 하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꼭 파병을 더 한다고 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승리를 거두도록 해야지요. 아르곤 국경에 주둔 중인 제1전대를 투입하겠사옵니다. 제1전대장인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이라면, 지난번 전쟁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 웠던 만큼, 충분히 임무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이라면 루빈스키 대공의 먼 친척이었다. 루빈스키는 크로아 후작이 젊었을 때 검술을 가르쳐 준 적도 있었기에, 그의 차분한 성품이라든지 꼼 꼼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는 실력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6년 전에 벌어졌던 제국 전쟁에서 크로아 후작은 미란에 파견되었던 살라만더 기사단 부단장의 직분을 훌륭하게 완수해 냈고, 또 그에 뒤이어 벌어진 코린 트와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그 덕분에 지금은 후작으로 작위가 한 단계 상승한 상태였다.
크라레스의 군 지휘부는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는 코린트와 ‘잠재적인 위험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는 아르곤의 국경에 중앙 기사단의 최고 정예들로 구성된 전대들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 코린트는 그렇다고 해도, 크로노스교가 통치를 시작한 이래로 여태껏 타국을 침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아르곤이 왜 ‘잠재 적인 위험 지역’으로 잡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아르곤의 군사력이 대단히 강력하고, 또 그 국력 또한 대단하기에 그렇게 설정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었 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6년 전 전쟁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크로아 후작이 지휘하는 제1전대와 역시 뛰어난 무훈을 통해 올라온 린넨 후작이 지휘하는 제2전대. 이들은 만약 큰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 ‘안전한 아르곤 국경’을 부담 없이 이탈하여 그곳에 투입할 수 있는 예비군적인 성격이 짙었다. 물론 이렇게 아르곤 을 위험 지역으로 선포해 두면 속사정을 잘 모르는 적들은 1, 2전대가 아르곤 국경에 꼭 매달려 있어야만 하는 줄 알고 이쪽의 유동 전력에 대해 오판하게 될 가능성 이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1, 2전대에는 그 예비군적인 성격 외에도 한 가지 임무가 더 있었다. 말토리오 산맥 끝자락에는 아르곤과 치레아로 갈 수 있는 산악 도로가 위치하고 있었 다. 바로 그 최고의 교통의 요지에 요새를 건설하고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이유는 최악의 경우 크라레스 제국에 가장 위협이 되는 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치레아 대 공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말토리오를 넘어 진격해 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치레아 대공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1, 2전대가 주둔하고 있는 말도른 요새를 통과하지 않는다면 스바시에 공국으로 진격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 란군이 말토리오 산맥을 곧바로 넘지 않고 스바시에 공국 쪽으로 진격한다면 그곳에는 스바시에 기사단과 제5전대가 주둔하고 있으므로 본국에서 증원군을 파병 할 동안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렇듯, 제1, 2전대는 크라레스 중앙 기사단의 최고 정예였고 그 목적에 맞는 위치에 주둔 중이었다. 그런 만큼 제1전대를 전장으로 보낸다면 충분히 그 지닌 실력 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처리하라.”
“옛, 폐하.”
이렇게 해서 탄벤스 공국을 무대로 거대 강대국들의 제2차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탄벤스 공국에서 벌어진 제2차 전투는 순전히 크라레스의 자존심과 국제적 지 위 하락을 염려해서 벌어진 전투였다.
그에 비해 코린트의 로체스터 공작은 가가린 후작으로부터 대승의 보고를 접하자마자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전해진다. 이번 전쟁을 대충 끝내라고 그렇게 신신당 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둬 버린 한심한 부하 때문에 쏟아져 나온 가슴 아픈 한숨이었다. 이렇게 되면 크라레스가 가만히 물러날 가능성은 더욱 없어지기 에 로체스터 공작은 추가로 30대의 타이탄을 파병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명령을 어기고 승리를 거둬 버린 멍청한 가가린 후작을 사령관직에서 박탈하고 대신 은십자 기사단의 부단장인 알프레드 드 크로데인 후작이 탄 벤스 전선의 사령관으로 즉위하게 된다.
알프레드 드 크로데인 후작은 6년 전에 벌어졌던 전쟁에서 전사한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을 배출한, 코린트의 유명한 3대 무가 중의 하나인 크로데인 가문의 기사로서 대단히 실력이 뛰어났다. 크로데인 후작은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로체스터 공작에게 불려가서 한 시간 동안이나 잔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그 잔소리의 요 지를 간단하게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적당한 수준에서 놈들에게 승리를 맛보게 해 주게나. 본국의 체면이 있으니 패배는 절대로 안 돼. 일단 치고받다가 적당한 순간에 슬쩍 전략적 후퇴를 하란 말이 야. 그래야 이놈의 망할 신경전을 끝낼 수 있다구. 알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