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1권 23화 –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
“미네르바 전하, 방금 지발틴 기사단 제3전대장인 쟈드 백작으로부터 통신이 도착했사옵니다.”
“제3전대라면 쟉센 평원 주둔군일 텐데……?”
쟉센 평원이라면 6년 전 전쟁에서 크루마가 코린트로부터 빼앗은 영토였다. 현재 쟉센 평원에는 지발틴 기사단 제3전대와 제네리아 기사단의 제5, 6전대가 주둔 중이었다. 그곳이 아무리 코린트와 접해 있는 최전방이라고 하지만 적의 선제 기습 공격을 피하기 위해 소수의 병력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예,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래 뭐라고 하던가?”
“코린트로부터 비밀리에 사신이 도착했다고 하옵니다. 그는 전하와의 단독 회담을 원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하명해 주시옵소서.” “그래? 그 녀석이 나하고 직접 회담할 자격이 있던가? 그렇지 않다면 외교 담당관을 보내라.”
약간은 거만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부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신으로 온 기사는 로젠 드 발렌시아드 대공이라고 하옵니다.”
“로젠이라고? 으음……. 그 녀석이라면 만나야 하겠군. 이리로 불러들여라.”
“옛, 전하.”
10분 후 로젠은 그의 수행원들과 마법진을 통해 크루마의 수도 엘프리안에 도착했다. 수행원이라고 해 봐야 겨우 기사 두 명과 병사 두 명뿐이었지만 말이다. “발렌시아드 대공께서 도착했사옵니다.”
“이리로 안내해라.”
“옛, 전하.”
잠시 후 로젠이 그녀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로젠은 미네르바의 경비병들이 문을 열어 주자 안을 힐끗 바라본 후, 안에 미네르바 혼자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부 하들에게 명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옛, 전하.”
로젠은 기운찬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켄타로아 공작.”
“어서오세요. 발렌시아드 대공. 자, 그쪽으로 앉으세요.”
미네르바는 로젠이 자리에 앉자 생긋 미소를 보내면서 말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오셨지요?”
“로체스터 전하의 명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그래, 무슨 일인가요?”
미네르바는 자신이 상대에 비해 월등히 나이도 많고 또 지위도 높았지만 존대어를 써 줬다. 그만큼 코린트 발렌시아드 가문의 후계자라는 지위는 높았던 것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거대한 발렌시아드 공국의 주인이기에 얻어지는 것이었지만.
“공작께서는 본국과 크라레스 제국 간에 전투가 몇 번 벌어진 것을 알고 계십니까?”
“예, 부하들로부터 보고는 들었어요. 뭐, 서로가 큰 피해 없이 휴전 협정을 맺으신다고요?”
“그렇다면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미네르바가 궁금하다는 듯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로젠은 말을 이었다.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본국의 파견군을 기습했습니다. 은십자 기사단과 철십자 기사단이 괴멸당했지요.”
이건 미네르바로서도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에 그녀의 어조는 차가워졌다. 상대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진실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사실인가요?”
“알아 보시면 아실 겁니다. 탄벤스 국경선에 본국의 타이탄들이 고철이 되어 즐비하게 뻗어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로체스터 전하께서는 크라레스가 치레아 대공 을 선두에 세워서 공격을 감행해 올 경우 본국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저를 보내신 거지요. 이제, 로체스터 전하께서는 켄타로아 공작님 의 선택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호호호, 무슨 선택을 하라는 거지요?”
“코린트가 멸망한 후 크라레스의 다음 먹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지금 힘을 합쳐서 건방진 신흥 대국을 멸망시킬 것인지..”
미네르바는 상대의 속셈에 쉽사리 걸려들지 않았다. 3국 체제가 유지되려면 서로 간의 힘의 균형이 유지되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밀리는 국가를 뒤에서 도 와줘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체제는 곧 깨지기 때문이다.
“로체스터 공작의 뜻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것을 나 혼자서 단독으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일단 부하들과 상의도 해야 하고, 또 폐하의 윤허도 받아야만 해요. 그러 니 결정을 내리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텐데, 어떻게 하겠어요? 기다리겠어요?”
“아닙니다. 돌아가겠습니다.”
로젠은 즉시 일어서더니 미네르바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그는 로체스터 공작의 모든 지시를 이행한 상태니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선택은 이제 미네르바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상관의 생각대로 미네르바가 크라레스가 위험한 강국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녀는 머지않아 허락의 메시지를 보내올 것이다. 그러니 그는 구태여 여기에 남아 있을 필요 없이 발렌시아드 공국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기사단을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로젠이 밖으로 나가는데도 미네르바는 그를 잡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이며, 또 적국인 코린트에 중요한 인물인지를 잘 알면서도 그녀는 그를 순순히 보내 주는 것이다. 동맹군을 청하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로젠. 그러면서도 사실만을 말하면서 절대로 상대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 고지식하면 서도 강인한 무인의 모습. 그야말로 군침이 흐르는 인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를 사로잡아 세뇌하여 자신의 부하로 삼는다든지, 또는 그를 붙잡아 둠으로 인해 코린트에 간접적인 타격을 입힐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가는 로젠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미네르바는 6년 전에 전사한 자신의 부하 루엔을 아련히 떠올렸다. 아마 살아 있었다면 저 녀석보 다 훨씬 더 근사한 기사가 되어서 자신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줬을 텐데……. 생각하면 너무나도 잃은 것이 많았던 전쟁이었었다.
커다란 유리창이 붙어 있고 그 창문의 바깥쪽에는 두 명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제임스였고, 또 한 명은 그를 상대하게 된 알카사스의 외교 담당관이었다. 유리창 바깥에는 안쪽에 있는 두 사람을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의자들이 놓여져 있었고, 그 위에는 다섯 명의 노인들이 앉아서 저마다 한마디씩 해 대고 있었다.
“허허…, 우리들을 만나겠다고 청한 것이 저 젊은이인가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대단한 젊은이로군요.”
“그렇지요. 마스터급의 강자가 사신으로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는데..
“그것도 부하 네 명만 거느리고 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웅성웅성 노인네들이 떠들어 대자, 그들 중에서 한 노인이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제지했다.
“자자, 모두들 조용히 하게나. 저 젊은이의 말도 들어 봐야지.”
노인들이 앉아 있는 방과 제임스가 앉아 있는 방은 매우 특이한 방이었다. 그 두 방의 사이에 놓여 있는 유리창은 마법을 이용해서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써 제임스 가 봤을 때는 그냥 벽으로 보였지만, 노인들이 봤을 때는 유리와도 같이 투명해서 저 반대편을 완전하게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저쪽에서 말하는 것은 이쪽 에 들리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저쪽에 들리지 않았다. 이곳은 약간은 위험할 듯한 인물을 다수의 사람들이 관찰하며 심문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 놓은 장소였 다.
“그러니까 후작께서는 본국에서 동맹군을 파병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소.”
“본국은 귀국과 매우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개국 이래 여태껏 중립을 지켜 왔기에 아마도 그건 어려울 겁니다.”
“귀국의 노선은 잘 알고 있소. 타국 간의 전쟁에는 절대적으로 간섭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다르오. 크라레스가 과거 본국과 겨룰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제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과거일 뿐, 지금은 한낱 신흥 제국일 뿐이오. 그런 신흥 제국이 코린트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귀국과 아르곤, 크 루마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소. 과거 본국이 선제공격을 가해 왔던 크라레스를 무너뜨리고 대 제국이 되었을 때, 세계의 평화를 위협한 적이 있었소? 본국은 그때부 터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해 왔었소. 그렇지 않소?”
제임스는 상대의 대답을 들으려는 듯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크라레스는 잃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있소. 6년 전에 대 전쟁을 통해 본국으로부터 크로나사 평원을 되찾 았는데도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번에는 자신들의 동맹국들을 충동질해서 사방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소. 그 때문에 지금 멸망한 국가가 다섯 개나 되오. 그동안 본국은 될 수 있다면 크라레스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참고 있었으나,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었소.”
외교담당관이 자신의 얘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제임스는 말을 이었다.
“크라레스가 본국과의 휴전회담 중에 기습 공격을 가해 왔기 때문이오. 아무리 기습 공격이었다고 하지만, 본국의 기사단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고 생각했었소. 그렇지만 이번 기습으로 본국의 은십자 기사단과 철십자 기사단이 전멸당했소.”
“이런…….?”
“내 말은 사실이오. 적이 엄청난 수의 타이탄을 동원한 것도 절대로 아니오. 보고에 의하면 겨우 60여 대 남짓밖에 안 되는 수였소. 그런데도 그들이 거의 1백여 대 의 본국 타이탄을 괴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이라는 검호가 있었기 때문이오. 아마도 이대로 계속 나간다면 본국은 곧 멸망할지도 모르오.”
“그래도 설마…, 너무 상대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아닙니까?”
상대의 지적에 제임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절대로 아니오. 그녀는 아마도 지금 세계 최고의 검객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소.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를 전사케 했고, 6년 전에는 겨우 60 여 대의 타이탄으로 2백 대가 넘는 본국과 동맹국의 타이탄 부대를 괴멸시켰소. 이건 절대로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닌 사실이오.”
“그럴 리가……?”
여기까지 말이 나왔을 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대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조사해 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 그래, 코린트가 그들을 그렇게 위험하다고 한다면, 어쩌면 지금 동맹군을 파병하는 것도 좋을지 도 모르지. 그런데, 우리가 동맹군을 파병한다면 그대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나?”
이제야 숨어 있던 노인들이 미끼를 문 것이다. 제임스는 상대방이 잘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약간 더 크게 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스바시에와 치레아 지방을 우리에게 줄 수 있겠나?”
제임스는 잠시 생각했다. 그 두 지방은 대단한 가치가 있었다. 알카사스와 아르곤, 그리고 저 동쪽의 여러 왕국들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가 그 두 나라였던 것이 다. 하지만 그것이 아깝다는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되는 문제였다. 정 주기 아까우면 그때 가서 한판 해도 늦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공작 전하께서는 아마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좋아. 그리고 또 한 가지. 크라레스의 근위 타이탄이 청기사라는 초강력 타이탄이라면서?”
“예.”
“만약 그것의 설계도가 노획된다면 우리들에게 넘겨줄 수 있나? 물론 원본을 넘겨 달라는 것은 아니고 복사본을 달라는 것일세.”
제임스는 그것 또한 어렵지 않게 허락했다. 뭐 남의 것 가지고 인심을 쓰는 것인데 그렇게 박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아쉬운 판에, 말로는 뭔들 못 하겠는가? “예, 그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네. 그 모든 것을 너무 쉽게 허가하는 거 아닌가?”
상대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임스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자신 있게 답했다.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설마…, 크라레스가 그 정도로 어려운 상대였는가?”
“한번 맞붙어 보시면 제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