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4권 7화 – 헬프로네의 새로운 주인
헬프로네의 새로운 주인
까미유는 황당하다는 듯 외쳤다.
“어? 어? 잠깐! 왜 나한테는 안 주는 거야? 응?”
잠시 제임스가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까미유는 음흉스레 미소 지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너, 나 놀리려고 괜히 그러는 거지?”
하지만 제임스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여기에 너한테 줄 타이탄은 없어.”
“그럼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거구나. 괜히 사람을..
“그것도 아니야.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분명히 전하께 지시를 받았어. 여기 있는 적기사들을 로젠 형하고 메글리, 오스카, 스칼에게 전해 주라는 거였지. 하지만 너한테 적기사를 주라는 지시는 들은 것이 없어. 그리고 너한테 줄 타이탄은 생산 중이라는 말도 들은 바가 없고 말이야.”
제임스의 말에 까미유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에게 타이탄이 없다면 뭐가 된단 말인가? 그것도 자기처럼 뛰어난 기사에게 말이다. 이건 뭔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럼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타이탄도 없이 검만 들고 전장을 뛰어다니라는 말이야?”
“글쎄,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제임스는 자신에게 할당된 각각의 적기사와 계약을 끝마친 기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려 외쳤다.
“형! 오랫동안 쉬었을 테니 밖에 나가서 몸이나 푸는 것이 어때요?”
“좋지, 너무 오래 쉬었더니 몸이 근질거리는군.”
“자, 함께 나갑시다. 제가 상대해 드리죠.”
“그럼, 나는?”
“너는 어디 구석에 처박혀서 왜 너한테만 타이탄이 배당되지 않았는지 무릎 꿇고 반성해 봐.”
“뭣이?”
까미유는 우울한 얼굴로 적기사 네 대와 적기사II 한 대가 드넓은 대지에서 굉음을 울리며 치고받고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물론 적기사II는 제1근위대장인 제임스의 것이었다. 제임스의 타이탄은 제1근위대 소속의 타이탄답게 여러 가지 문장들이 붙어 있었다. 왼쪽 어깨에는 발렌시아드 가문을 상징하는 노란색 히아신 스가 그려져 있었고, 오른쪽 어깨에는 코린트를 뜻하는 백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 외에 흉갑에는 제1근위대를 뜻하는 ‘I’이라는 숫자가 그려진 불을 뿜는 레드 드 래곤의 문장이 흉폭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렇듯 제임스의 타이탄에 각종 문장들이 그려져 있는데 반해 다른 타이탄들은 흉갑에 제2근위대를 뜻하는 문장 하나만이 달랑 그려져 있었다. 원래 비밀 작전에 많이 동원되는 만큼 기밀유지의 필요성 때문에 그려 넣지 않은 것이다. 6년 전의 전쟁 때 적기사가 사용되기 전에는 아예 문장 자체를 하나도 그려 넣지 않았었지 만, 지금은 적기사가 코린트의 타이탄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기에 근위 기사단의 문장만 그려 넣은 것이다. 물론 그 적기사에 누가 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가문의 문장은 빼 버리고 말이다.
로젠이 검술로는 까미유보다 조금 뒤진다고 하지만, 발렌시아드 가문의 우두머리이자 지금은 없어진 발렌시아드 기사단장이었다. 까미유는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는 적기사들을 보며 우울한 시선을 던졌다. 아마도 자신에게 적기사를 주지 않고 로젠에게 준 것을 보면 로체스터 공작은 로젠을 제2근위대장으로 점찍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제2근위대를 파멸로 몰아넣은 자신은 좌천된 것이 확실하리라.
“젠장!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살짝 귀띔이라도 해 줬어야 할 거 아냐! 그리고, 나만 부하들을 다 잃었나? 그건 로젠 형도 마찬가지잖아!’
화가 난 김에 벽을 너무 세게 후려 쳤는지 까미유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벽에 둥근 구멍이 뚫린 다음이었다. 뒤에서 병사 하나가 놀란 눈초리로 보고 있는 가 운데 까미유는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훈련을 마친 후 로젠 형이나 제임스가 이것을 보면 뭐라고 할 것인가? 그것까지 생각하면 자신에게 더욱 화가 났다. 겨우 그 정도를 참지 못하고 애꿎은 벽에다가 화풀이를 하다니…….
“제기랄!”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까미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이탄들끼리 싸우는 굉음을 들을수록 괜히 더 신경질만 나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숙소 뒤편, 까미유는 그곳에서 하늘을 봤다가 땅을 봤다가를 반복하다가 그것도 지루해지면 애꿎은 땅바닥을 몇 대 쳤다가 하면서 울화를 삭이고 있었 다. 타이탄들끼리 격투를 벌이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원체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크게 들려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까미유는 자신의 못난 꼴을 병사들에게 보이기 싫었기에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서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공간의 한쪽 귀퉁이가 열리면서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이탄의 몸체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울퉁불퉁한 기하학적 흔적들. 자세히 봐야 알 수 있는 흔적이었지만, 그것만 봐도 그 타이탄에는 미스릴이 입혀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타이탄은 거대한 몸체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멍한 표정으 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까미유에게 다가갔다. 까미유는 타이탄의 흉갑에 그려져 있는 레드 드래곤의 문장을 보고 경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째서 헬 프로네가 여기에…….”
아무런 숫자 표시도 없는 레드 드래곤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타이탄은 이 세상이 아무리 넓고, 타이탄이 많다고 하지만 단 두 대뿐이었다. 하나는 코린트의 총사령 관용과 또 하나는 황제 전용이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그 문장을 달고 있는 타이탄이 여기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네 녀석은 나의 주인이 될 충분한 조건이 갖춰져 있는 상태다. 나와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골렘의 맹약을 맺고 싶으냐?>
매우 건방지게 울려 퍼지는 나지막한 저음의 투박한 말소리. 그제서야 까미유는 왼쪽 어깨에 그려져 있는 노란 히아신스의 문장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타이탄 의 주인이 누군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바로 코린트 최강의 검객인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이었다.
“설마,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께서 돌아가셨나?”
키에리는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났을 뿐, 소문처럼 전사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까미유였다.
<그놈은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나와의 계약을 파기했다. 그러면서 네놈을 추천했지. 일단 네 녀석의 실력도 나쁜 편은 아니니 제안하는 거다. 좋으냐? 아니면 싫으 냐? 싫다면 새로운 주인을 찾아서 머나먼 여행을 떠나야 하니 빨리 대답해라.>
그제서야 까미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자신에게 적기사가 주어지지 않았는지를 말이다. 그에게는 적기사 대신 키에리로부터 물려받은 헬 프로네의 주인이라는 명예로운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까미유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것이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다. 그만큼 헬 프로네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인이 꿈꾸는 최고의 영광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