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4권 9화 – 라나의 시녀가 된 다크

라나의 시녀가 된 다크

다크 일행이 고용인의 안내를 받아 실내로 들어서자 콧수염을 매우 짧게 다듬은 단정한 모습의 사내가 아는 척을 했다. 너무 말라서 그런지 약간 허리가 구부정한 것이 흠이었지만, 그는 일행을 안내한 고용인과 달리 매우 고급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주 잘 어울리는 인상 좋은 사내였다. 그는 중개인의 설명을 듣자 섬세한 시선으로 라나를 이리저리 뜯어본 후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외모와 어울리게 목소리 또한 부드러운 저음이었다. 아마도 지 체 높은 귀족 집안의 집사인 만큼 그런 식으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으리라.

“과연! 이 정도면 공녀님의 마음에 드실지도 모르겠군요. 자, 이리로 오시죠.”

집사가 일행을 안내한 곳은 공녀가 묶고 있는 방이었다. 공녀는 호화로운 물건들을 잔뜩 쌓아 놓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집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투덜거 렸다.

“알카사스에서 전쟁이 벌어졌다고 하더니, 영 물건이 마음에 안 들어. 전에 왔을 때보다 형편없는 것 같아. 크라레스와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 데 말이야.”

최고급 물품들은 대부분 알카사스에서 제작된 것이 많았다. 알카사스는 그 뛰어난 마법 실력을 십분 이용하여 산업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 알카사스에 서 전쟁이 벌어졌으니, 자연히 최고급 물품들의 공급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저, 공녀님. 부탁하신 호위병이 도착했습니다.”

“호위병? 저 엘프 말이야?”

“예.”

공녀는 찬찬히 라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소문으로 듣던 대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알카사스라면 노예 시장에 가서 손쉽게 엘프를 구경할 수 있을지 모 르지만, 코린트는 공식적으로는 엘프를 노예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보기가 매우 어려웠다. 물론 비공식적인 밀매 루트를 통해 변태 성욕자라든지, 뭐 그런 놈들에게 공급되기도 하지만 아무튼 ‘공식적’으로 엘프는 ‘비매품’이었다. 그렇기에 여태껏 자신에게 허락된 제한된 공간에서만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공녀는 여 태껏 엘프를 구경한 적이 없었다. 공녀는 그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한참을 바라보며 이모저모 뜯어보다가 이윽고 결정한 듯 말했다.

“좋아, 저 정도면 그 얄미운 엘리리아의 콧대를 꺾어 놓을 수 있겠어. 전에 만났을 때 자기 호위병이 얼마나 품위가 있는지, 아름다운지… 별의별 자랑을 다 늘어 놨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앙갚음을 해 줘야지. 당장 계약해.”

“예, 공녀님.”

공녀의 말을 들은 다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공녀는 대체 호위병의 존재를 뭐로 생각한다는 말인가? 호위병을 무슨 장난감쯤으로 생각하지 않고서 야 저따위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호위병 선택 요건중의 첫 번째는 외모가 아닌 실력이었다. 호위병이라면 그 어떤 극악한 조건이 닥쳐와도 주인을 지켜 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집사는 일행을 임시 집무실로 데리고 돌아갔다. 집사는 집무실의 한쪽에 놓인 책상에 앉은 후, 서랍을 열고 서류들을 꺼내 들며 말했다.

“공녀님께서는 당신이 마음에 드신다고 하니, 서로 조건을 따져서 좋은 방향으로 계약을 맺었으면 좋겠군요. 그래, 금액은 얼마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라나는 잠시 생각을 한 후 집사에게 되물었다. 라나는 용병들을 따라서 여행을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듯 귀족의 집에 고용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대충 어느 정도 선에서 월급이 책정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집사님은 얼마 정도를 예상하고 계십니까?”

“일단은 한 달에 50골드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영지로 돌아갈 때까지만 그렇게 하고, 일단 영지에 도착한 후에 장기 계약을 맺기로 하죠. 공녀님의 마 음에 들도록 행동한다면 어쩌면 두 배, 혹은 세 배까지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보통 용병들의 경우 한 달 10골드, 혹은 그 작전에서 살아남았을 때 50골드 하는 식으로 급료를 책정했다. 물론 후자가 전자의 경우보다 조금 더 후한 급료를 주게 되지만, 작전이 실패했을 때는 땡전 한 푼도 못 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 것을 따지고 본다면 50골드면 꽤 후한 월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고용할 용병 의 실력 테스트는 한 번도 해 보지 않고 말이다.

“좋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 아이는…….”

라나가 다크를 가리키며 서두를 꺼내려고 하는데 집사가 그것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공녀님께서는 당신만을 고용하기를 원하신 겁니다. 당신의 동료가 아니구요. 물론 시종은 두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시종의 급료까지 제가 지불해 줄 수는 없 다는 사실은 잘 아시겠지요? 일단 급료가 만족스러우시다면 여기다가 서명을 해 주십시오.”

집사의 말인즉슨, 저 새파란 무녀를 하녀로서 두는 것은 상관없지만, 동료로서는 절대로 둘 수 없다는 뜻이었다. 라나는 잠시 다크를 바라봤다. 그녀의 의향을 물 은 것이다. 다크는 여태껏 그래왔듯이 결과만을 생각할 뿐, 그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든지 별로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 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것을 본 라나는 재빨리 집사가 내민 계약서에 서명했다.

집사는 유려한 필치로 계약서를 작성해서는 라나에게 건네 서명을 받아 냈다. 집사는 라나의 서명이 된 계약서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바라본 후 그것을 서

랍에다가 집어넣으며 밖에다가 대고 외쳤다.

“한스!”

“예.”

“새로 오신 공녀님의 전속 경비다. 내가 비워 두라고 했던 남쪽의 그 방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해라.”

“예, 집사님.”

그런 다음 집사는 라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계약서에 서명함으로 인해서 이제 그녀도 이 집안의 고용인이 되었기에, 그녀에게 하는 말투는 어느새 하 대로 바뀌어져 있었다.

“한스를 따라가게. 자네의 방을 안내해 줄 거야.”

‘루비의 눈’이라는 고급 호텔은 중간에 있는 큰 규모의 본 건물과 여러 채의 호화 주택들로 이루어진 별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체 높은 귀족이라면 당연히 그 에 딸린 식구들이 많다. 호위 기사, 호위병, 시중들 시녀나 시종들, 짐꾼들, 그리고 호위 기사의 시종들 등등……. 그리고 그들의 수는 주인의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증가했다. 꼭 법으로 어떤 지위에서는 호위병이나 수행원의 수를 얼마만큼만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정해 놓을 필요도 없었다. 주인의 지위가 높다면 좀 더 비옥하고 더욱 넓은 영지를 차지할 수 있었고, 그것은 곧 그들의 부(富)와 직결되었다. 일단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호화롭게 돌아다니고 싶어도 돈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간혹 산적이나 몬스터들이 출몰하기도 했지만 지위가 높은 자일수록 그 호위병의 수는 엄청났을 뿐만 아니라 코린트의 변방도 아니고 이런 중심부에서 그런 걱정 을 할 이유는 없었다. 호위병과 시종들을 대규모로 이끌고 다니는 것도 다 자신들의 지위와 풍요로움을 과시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이런 지체 높은 귀족들이 애용 하는 호텔이라면 당연히 귀족이 이끌고 다니는 호위병이나 시종들에 대한 배려도 해야 했다. 그리고 귀족들은 호텔의 치안 상태가 아무리 좋아도, 혹은 아무리 서비 스가 좋다고 해도 자신의 호위병이나 시종들과 따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곧 자신의 힘과 권력을 과시하는 방법이었고, 오랜 시간 자신을 모셔 온 시종들이 훨씬 더 눈치가 빠를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급 호텔일수록 최고급 귀빈들을 위해서 호텔의 다른 손님들과 격리된 독립된 거 대한 주거구역을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나와 다크가 한스라는 사내에게 안내된 방도 그것들 중의 하나였다. 귀족의 고용인이 사용할 방이라서 그런지 별로 크지도 않았고, 방금 전 공녀라는 소녀의 방 처럼 고급스런 가구도 없는 간단한 구조의 침실이었다. 라나는 자신들의 짐을 차곡차곡 간소한 모양의 옷장에다가 세심하게 챙겨 넣으면서 말했다.

“일단 달리 숨을 곳도 없으니까 이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수색 작전이 시작된다고 해도 귀족을 상대로 함부로 뒤지기에는 무리가 있을 테 니까요.”

“좋을 대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