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9화 – 차라리 전쟁터로 보내 줘!
차라리 전쟁터로 보내 줘!
다크 일행은 다음 날 아침 치레아 공국으로 돌아왔다. 일단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기에 산적한 문제들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다. 카르토 백작이 낑낑거리며 어 마어마한 서류 더미를 가지고 들어오자, 다크는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이게 뭐야?”
“전하께옵서 판단하시고 결재를 하셔야만 하는 서류들이옵니다. 아무래도 저 혼자서 독단적으로 처리하기에는 한계가…….”
다크는 한심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봐, 카르토 백작.”
“예, 전하.”
“그 한계라는 것은 누가 정한 것이지?”
카르토 백작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엄연히 공국의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사항이옵니다.”
다크는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이거 뭔가 잘 모르고 있군. 자네 어깨 위에 달려 있는 것은 뭐야? 그 머리통으로 생각해 보고 꼭 해야 될 일이면 알아서 처리하면 될 거 아니야. 이따위 자질구레 한 일들까지 일일이 내 결재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대공 대리인 자네가 알아서 처리해.”
“하, 하지만 저는 말단 관료…….?”
다크는 모질게 카르토 백작의 말을 잘랐다.
“물론 자네는 그 일이 처리된 이후에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만 책임지면 되는 거야. 알겠나? 아주 간단한 거잖아. 나는 자네를 믿어. 자네는 그 정도의 능력이 있 는 사람이잖은가? 그럼 그거 다 가지고 가 봐.”
카르토 백작은 암담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며 서류들을 챙겼다.
책임을 지라고? 내 직책이 뭔데, 이런 일들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거야? 이거 하나라도 잘못 처리했다가는 내 목숨은 물론이고 우리 가문 전체의 목숨을 걸어도 안 될 텐데……. 아마도 대공은 나를 죽이려고 작정한 모양이지?”
사실상 그는 행정부에서 일하는 관료였다. 지금 카슬레이 백작이 치레아 기사단을 모두 거느리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억지로 대공 대리라는 어마어마한 직함 을 받고 있지만, 그것은 우수한 인재들이 모두 다 기사단에 소속되어 자리를 비워 버렸기에 빚어진 결과였다.
말이 안 통하는 상관과 더 이상 실랑이를 할 마음이 사라져 버린 카르토 백작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서류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고 다크가 말했다. “밖에 나가면 실바르를 불러 주게.”
카르토 백작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예? 드미트리 실바르 경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 녀석 말고 실바르가 또 있나?”
“이곳에 도착하셨을 때, 제가 보고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치레아 기사단은 황제 폐하의 칙명에 의해 전장에 투입되었다고 말이옵니다. 그러니 당연히 실바르 경 도…….”
다크는 이마를 살짝 치면서 말했다.
“아아, 깜빡 잊었군. 그래, 자네가 보고했었지.”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어깨가 축 늘어져서 나가는 카르토 백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크는 짐짓 능청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참,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지?”
결재 서류를 황급히 챙겨 오느라고 바빴던 카르토 백작이 아르티어스의 행방을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고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카르토 백작은 오 랜 관료 생활을 통해 몸에 밴 모범 답안을 무의식중에 즉시 내뱉었다.
“예? 예, 곧장 알아 보고 보고드리겠사옵니다.”
“그래? 그럼 자네는 그 서류들 여기에 놔두고 아버지부터 빨리 찾아와.”
“옛, 알겠사옵니다.”
상관의 의중을 읽은 카르토 백작은 그 한마디에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가 얼마나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인지 말이다. 아무리 많은 서류를 쌓아 놔도 하룻밤새에 깔끔하게 끝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아르티어스의 밑에서 일해 봤기에 인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그 엄청난 능력을 직접 보기까지 했던 것이다. 방금 전과는 달리 희색이 만연하여 활기찬 걸음걸이로 나가려는 카르토 백작의 뒤통수에 대고 다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참, 루빈스키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보게. 한참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안 가 볼 수는 없겠지.”
“예, 전하.”
“그리고 오랜만에 루빈스키와 만나는데, 쓸 만한 포도주나 한 병 준비해 주게. 그리고 자네는 출세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는군.”
그때서야 카르토 백작은 방금 전 자신에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기회가 왔다가 사라졌는지를 깨달았다. 다크는 자신에게 그 정도는 처리할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고 일을 맡긴 것이다. 아마도 그것을 자신이 다 처리해 낸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행정 관료들 중에서는 최고의 위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르토 백작은 다시금 어깨가 축 늘어지며 힘 빠진 어조로 말했다.
“아, 알겠사옵니다, 전하.”
잠시 후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도착했다. 그는 아들이 무슨 일로 자신을 불렀나 싶어서 희색이 만연한 상태였다.
“내 아들아, 나를 찾았다고?”
“예, 아빠. 제가 부하들의 보고를 받고 있는 동안 심심하셨죠?”
다크가 생글거리며 물어보자, 아르티어스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 녀석이 저렇게 애교를 떨 때는 뭔가 꼼수가 있음을 수많은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속으면 내가 드래곤이 아니지, 음.
“아, 아니다. 뭐 심심할 것까지야 있겠느냐. 나도 나름대로 할 일이…….”
그런데 바로 이때, 다크의 시종인 세린이 고풍스럽게 생긴 포도주병을 하나 가져다가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주인님, 카르토 백작이 부탁하신 포도주를 가져왔습니다.”
한참 허공을 내젓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손이 황급하게 내려갔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들놈이 기특하게도 자신과 한잔하기 위해 부른 것을, 자신은 아들 의 깊은 속마음도 모르고 거절할 뻔한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황급하게 덧붙였다.
“물론 나도 일이 있긴 하지. 하지만 네가 부탁하는 일이라면 없는 시간도 내야지, 암.”
“정말이에요?”
“그럼그럼.”
다크는 세린이 놓고 간 포도주병을 집어 들며 부탁했다.
“저는 지금 루빈스키를 만나러 갈 거거든요. 그동안 저기 있는 서류 좀 부탁해요.”
아르티어스는 포도주병을 빤히 쳐다보며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다면 그 포도주는…….”
“아, 이거요? 루빈스키한테 줄 거예요. 오랜만에 만나는데, 이 정도 선물은 줘야죠.”
아르티어스는 분개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자신의 일은 애비에게 맡겨 놓고, 자기는 술 마시러 가겠다고?
“뭐? 네가 술 마시러 가 있는 동안 나보고 저따위 일이나 하고 있으라는 말이냐?”
“에이이∼ 아빠, 좀 해 줘용. 오늘 밤 저녁 식사는 근사하게 둘이서만 하자구요, 예?”
슬쩍 애교 어린 말투로 부탁하자, 아르티어스는 정신이 홀랑 빠져 버린 듯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럼, 내가 누구냐. 골드 일족의 위대한 후예라는 것은 나를 두고 하는 말 아니겠냐? 식사 시간 전까지 확실하게 처리해 놓으마. 마음 푹 놓고 놀다 오너라.” “그럼 부탁드려용~.”
다크가 사라지고 난 후 정신을 차린 아르티어스는 탁자를 쾅 치며 투덜거렸다.
“젠장! 또 당했군. 어떻게 된 게 저놈의 미소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겠단 말이야.”
크라레스군의 지휘부의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마법진에 번쩍하는 빛과 함께 다크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는 바쁘게 움직이는 기사나 마법사, 병사들로 북적 거리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보던 팔시온은 어깨에 힘을 주어 건들거리며 말했다.
“야, 역시 남자의 로망은 전쟁이야, 전쟁, 봐, 활기가 넘치잖아?”
그 말에 미디아도 동감한다는 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
“확실히 전쟁터가 그리워. 요 근래에 너무 편안한 생활만 했더니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아. 안 그래, 가스톤?”
미디아가 자신의 허리를 쿡 찌르자 찔끔하며 가스톤도 재빨리 동의했다. 남자 나이 마흔 다섯. 멋으로 먹은 게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동료 둘이 하려고 하는 일을 눈치 챈 것이다.
“그, 그럼. 당연하지. 우리는 여태껏 전쟁터를 주름잡은 용병들 아니겠냐?”
동료들이 한마디씩 하자 팔시온이 다크에게 물었다.
“이봐, 다크. 지금 치레아 기사단이 어디에 있지?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잖아. 우리들도 거기 소속 오너인데 동료들만 고생하게 놔둘 수는 없잖아. 아, 우리들 도 가서 화끈하게 몸 좀 풀어 볼까?”
팔시온의 말에 다크가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냐, 너희들 오랫동안 크루마의 감옥에서 고생했잖아. 나하고 좀 더 있으면서 휴식을 취하라구. 뭐 하려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 가려고 그래?”
다크가 점잖은 어조로 거절하자 팔시온의 표정은 약간 다급해졌다. 어제저녁 자신들을 바라보던 아르티어스의 그 살기 어린 눈동자……. 이상하게 그날 저녁에는 아무 일 없었지만,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이제 더 이상은 맞고 싶지 않았다.
“아냐, 우리를 전쟁터로 보내 줘. 꼭 가고 싶단 말이야. 응?”
“좀 더 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얼마 전에는 아버지한테 많이 맞았잖아. 아무리 신관이 치료했다고 하지만, 아직 회복도 다 안 됐을 텐데.
“제발 우리들을 보내 줘. 아니면 오늘 저녁 어르신에게……. 흑흑, 이제 더 이상 맞으면 정말 죽어 버릴 것 같단 말이야.”
팔시온의 절규에 다크는 그들이 왜 전쟁터로 가고 싶어 하는지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다크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으며 말했다.
“너희들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루빈스키한테 말해 둘게.”
“우와! 살았닷!”
다크가 총사령부 건물에 도착했을 때, 널찍한 실내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각종 복장의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게다가 실내 한복판에는 아주 널찍한 탁자가 하나 놓여 있고, 그 탁자에는 엄청나게 넓은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상관의 지시에 따라서 지도 위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도형들을 재빨리 이동시키거나 없애 고 있었다. 그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 전장의 모든 상황을 이 지도를 한 번 봄으로써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줬다.
실내의 한쪽 구석에는 마법사 10여 명이 통신 마법진을 그려 놓고 수정구슬에 나타난 상대와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마법사 한 명이 뒤로 고개를 돌 려 루빈스키에게 보고를 했다.
“전하, 발칸 폰 크로아 후작 각하로부터 통신이 도착했사옵니다.”
“그래? 어떻게 되었나?”
“론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적의 3개 성기사단을 유인, 섬멸했다는 보고이옵니다.”
병사 한 명이 지도 상의 론도 지역에 꽂혀 있던 세 개의 작은 푸른색 깃발을 치워 버렸다. 대신 그곳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섞인 깃발 하나와 ‘2’ 자가 쓰인 녹색 깃발 하나가 놓여졌다. 스바시에 기사단과 제2기사단을 뜻하는 표식이었다.
“그래? 잘되었군. 피해는 어떻다고 하던가?”
“테세우스 다섯 대 파괴, 드라쿤 한 대 파괴, 기사 두 명 전사이옵니다. 그리고 몬스터들 쪽의 피해도 크다는 보고이옵니다.”
“으음, 동쪽으로 가는 관문을 연 것치고는 피해가 그렇게 크다고 볼 수는 없군. 노획한 타이탄들의 이동에 제3기사단을 동원해라.”
루빈스키 대공의 옆에 서 있는 장군 하나가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작전관으로서 전장의 총지휘를 담당하는 인물이었다.
““전하, 지금까지는 몬스터들을 이용해서…….””
“그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현재 겉으로 드러난 주력은 몬스터들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형 몬스터들을 고철 수송에 쓸 수는 없다. 그리고 제3기사단 대신 근위 기사단에게 출동 대기 상태를 유지하도록 지시해라.”
“옛, 그렇게 전하겠사옵니다. 전하.”
“그리고 크로아 후작에게는 좀 더 동쪽으로 진출해도 괜찮다고 전해라.”
“옛, 전하.”
이때 또 다른 마법사가 외쳤다.
“아그리오스 후작 각하로부터 전문이 도착했사옵니다. 기뻐하소서, 전하. 적군을 격파하고 칸타르시를 점령했다는 보고이옵니다.”
병사 한 명이 그 말에 따라 알카사스의 동쪽 외곽에 있는 칸타르시에 꽂혀 있던 독수리와 매가 그려진 깃발들을 치워 버렸다. 그런 후 ‘1’ 자가 쓰인 녹색 깃발과 황 금색 깃발이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루빈스키 대공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점령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비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어쨌든 대단한 공을 세웠다. 적국의 2개 기사단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것이 아니옵니다, 전하. 전문에 따르면 적 1개 사단이 주둔 중이었을 뿐, 기사단과의 전투는 없었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현재 적 기사단이 어디로 이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 보고이옵니다.”
루빈스키 대공은 이마에 주름 세 개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어디로 갔지? 혹시 적들의 기만 작전은 아닌가? 작전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작전관은 즉시 대답했다.
“옛, 전하. 일단 적 기사단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사옵니다. 그리고 적들의 위치가 파악될 때까지 기사단은 뒤쪽으로 후퇴시키는 편이 좋을 것 같사 옵니다. 사실상 본국 기사단이 최전선에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옵니다.”
“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일단 적들에게 본국이 뒤에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는 것이 선결 요건이니까 말이야.”
루빈스키 대공은 전령에게 전했다.
“아그리오스 후작에게 전해라. 한시라도 빨리 기사단을 이끌고 뒤로 후퇴하라고 말이야.”
“옛, 전하.”
지금까지 루빈스키 대공이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다크는, 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이봐, 루빈스키!”
고음의 목소리에 루빈스키의 시선이 다크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다크는 포도주병을 손가락 위에 올려놓고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자네 생각이 나서 왔지. 한잔 어때?”
여태껏 다크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루빈스키 대공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녀가 크라레스를 끝까지 도와줄 것인지에 대해서 루빈스키는 조금 미심 쩍게 생각했었고, 나름대로 그에 대한 대비도 충실히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그녀가 지닌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고 있었기에 취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능력에 대해서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믿고 있던 루빈스키였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루빈스키는 그녀를 보자마자 반색을 하고 달려 내려왔다.
“돌아왔군. 어떻게 지냈나?”
“응, 사연이 좀 복잡하지. 그건 그렇고 시간 좀 있나?”
그 말에 루빈스키는 작전관을 향해 외쳤다.
“나는 좀 나갈 테니까 자네가 알아서 지휘하도록 하게.”
“하지만 전하…….?”
루빈스키는 더 이상 들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다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자네 얼굴을 보니 정말 반갑군. 그래,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지금껏 소식이 없었나?”
다크는 간략하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루빈스키에게 말했다. 크루마에 찾아가서 미네르바에게 복수한 것까지도.
“그래서 내가 곧바로 엘프리안에 찾아가서 미네르바를 줘 패버렸지. 그녀도 태어나서 처음 그렇게 무작스럽게 맞아봤을 거야.”
루빈스키는 기가 막힌 듯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거 복수 한번 거창하게 했군. 자네였군. 갑자기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와서 안 그래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제야 그 사건의 전모를 알겠네 그려. 정말 큰일을 해 주었어.”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말에 다크의 눈이 둥그레졌다. 자신은 결코 엘프리안을 파괴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둥그레졌던 다크의 눈이 곧이어 실쭉하게 변 했다. 범인이 누군지 순간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다크의 순간적인 표정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루빈스키는 포도주잔을 들고 그 영롱한 붉은색을 감상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미란의 일도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미란?”
다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하자, 루빈스키는 약간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설마, 미란의 문제에 대해서 미네르바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건가?”
다크는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사실상 그녀가 크루마에 억류된 것도, 미란에 대한 침입을 중지하고 다시금 동맹을 맺자고 요청하러 갔다가 당한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깜빡했어. 사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거든.”
“사실 자네가 실종되었을 때, 미란은 크루마에 완전히 통합되어 버렸어. 지금 미란을 독립시킬 수만 있다면, 크루마는 최전선과 본국이 분리되면서 상당한 전력 감소를 당할 수밖에 없지. 그런 실리적인 목적 외에도, 미란은 제1차 제국 전쟁 때 본국을 열성적으로 도왔었네. 도의적인 관점에서도 미란의 몰락을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럼, 내 조만간에 시간 내서 다시 한 번 크루마에 가 보지 뭐.”
루빈스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하찮은 일로 자네를 번거롭게 할 수는 없지. 내일 당장 크루마로 와리스 후작을 보내겠네. 유능한 친구니까 잘 알아서 처리하겠지.”
“그리고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정색을 하고 다크가 부탁하자 루빈스키는 그녀가 무리한 부탁을 하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뭔데?”
“나하고 같이 갔던 동료들이 치레아 기사단에 복귀하려고 하거든. 자네가 좀 도와줘야겠어.”
큰소리는 쳤지만 어려운 부탁이면 어쩌나하고 속으로 염려하고 있었던 루빈스키의 안색이 환해졌다.
“물론 도와주지. 타이탄 세 대의 전력을 전쟁터로 보내는 일인데, 그걸 거절할 수 있나?”
“부탁해.”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지금 아주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태산같이 쌓인 서류를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 모두 다 마무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서류를 검토해 보지 도 않고 대충 서명해 버린다면 일은 순식간에 끝나겠지만, 그런 식으로 처리했다가는 나중에 아들놈에게 어떤 잔소리를 들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일 하나라도 대충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도 노회한 드래곤이었다. 옆에서 아들놈이 지켜보고 있을 때나 열심히 하지,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머리가 터져라 일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말씀이다.
아르티어스가 널찍한 집무실에 수십 명의 인원을 데려다 놓고 그들에게 열심히 일을 시키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책상에 다리를 얹어 놓고 가끔씩 포도주를 마시 면서 그들이 일하는 것을 감독하고 있었다.
“야, 거기 너 말이야, 너. 한눈팔지 말고 열심히 안 해? 죽고 싶어?”
아르티어스가 으르렁거리며 그들의 능력을 쥐어짜 일을 시키고 있는 가운데, 검토를 거친 서류는 카르토 백작의 책상에 쌓였다. 카르토 백작은 그 서류들을 최종 단계까지 검토한 후 다시 아르티어스에게 넘기는 것이다. 그러면 아르티어스는 카르토 백작이 넘긴 서류를 거의 보지도 않고 ‘쓱쓱’ 서명하면서도 으르렁거렸다. “이거, 서류가 올라오는 속도가 느린 것 같아. 다시 한 번 정신 교육을 실시한 후에 새 마음으로 산뜻하게 일을 시작할래?”
한쪽 눈두덩에 퍼런색 잉크를 뿌려 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카르토 백작은 진저리를 치며 정신없이 대답했다. 처음 몇 번 올라간 서류를 면밀하게 검토한 아르티어스에게 계산이 틀렸다고 모두 다 집합당해서 정신이 아득해질 때까지 두들겨 맞았을 때 생긴 멍이었다. 아르티어스는 어쩌다 하나씩 그런 식으로 검토를 했기에, 모두들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닙니다, 어르신.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발 믿어 주십시오.”
“그럼 빨리 가 봐. 일거리가 쌓이고 있잖아.”
“옛!”
씩씩하게 대답하고 자신의 책상을 향해 뛰어가는 카르토 백작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후 중얼거렸다.
“역시, 호비트는 쥐어짜면 짤수록 더욱 열심히 일하거든. 머리 나쁜 드워프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다니까.”
이런 식으로 열심히 호비트들을 쥐어짠 덕분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저녁 식사 전까지 모든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돌아오는 다크를 향해 환한 미 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헤헤, 사랑하는 아들아. 일은 다 끝내 놨다. 그리고 근사한 식사까지 준비해 뒀어. 자, 식사하러 가자, 응?”
“예, 아빠. 정말 고마워요.”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빙그레 웃으며 고맙다고 하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뭘, 그 정도 가지고……. 으헤헤헤, 뭐 어려운 일 있으면 모두 다 아빠한테 부탁해. 뭐든지 다 해 줄 테니까 말이다.”
“지금도 충분히 저한테 잘해 주고 계신데요, 뭘.”
잠시 대화를 주고받던 아르티어스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크에게 물었다.
“참, 그런데 너하고 같이 있던 그 떨거지들은 왜 안 보이냐?”
떨거지라는 말에 다크의 눈이 순간적으로 실쭉 가늘어졌다.
“떨거지라뇨? 그들은 제 친구들이라구요.”
“그래, 그 녀석들 말이야.”
“몸이 근질거린다며 제발 전쟁터로 보내 달라고 사정하기에 소원대로 보내 줬죠. 아마 지금쯤 아르곤 전선에 도착했을걸요?”
어제저녁에는 다크가 미카엘을 데리고 밤에 뭔가 하고 있었기에 아르티어스는 그들을 교육시킬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밤을 벼르고 있었는데, 그들 이 미리 알고 튀어 버린 것이다.
“그래? 이놈의 자식들이 도망쳤단 말이지.”
아르티어스가 다시는 도망칠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반쯤 죽여 놓겠다고 훗날을 기약하며 다짐하고 있을 때, 다크가 의도적으로 되물었다.
“도망쳐요?”
“아, 아냐. 헤헤헤, 늙으면 한 번씩 헛소리가 튀어 나온다니까…….”
“그건 그렇고, 저 몰래 엘프리안을 파괴했다면서요?”
뭔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마냥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아르티어스였지만, 노회한 그답게 재빨리 정색을 하며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누, 누가 그딴 헛소리를 하더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걸리기만 해 봐라. 헛소리를 해대는 그놈의 주둥아리를 그냥…….”
아르티어스가 짐짓 울분 어린 어조로 말했지만, 다크는 속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가 말했는지는 아실 필요 없어요. 이미 소문이 쫙 퍼졌는데,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어요? 다시는 저 모르게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예?”
의외로 아들이 화를 내지 않는 데 대해 안도한 아르티어스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그래, 헤헤헤.”
“분명히 약속했어요?”
“그래, 알겠다. 내 약속할게.”
“그리고 그 약속에는 제 친구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 거예요.”
다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풀이 죽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쩝, 내 스트레스 해소용인데. 에이, 좋아. 약속하지.”
하지만 풀이 죽은 것도 잠시, 아르티어스는 다시금 활기찬 어조로 물었다.
“그건 그렇고, 내일은 뭐 할 거냐? 같이 놀러가자. 오늘은 나 열심히 일했잖아.”
“내일은 크루마에 가 볼까 해요.”
“크루마에는 왜?”
“몰라서 물어요? 수도를 박살 낸 아빠의 처사는 너무 심했다구요. 그런 만큼 가서 사과라도 해야죠.”
다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천장을 쳐다보며 딴청을 피웠다. 물론 속으로는 그따위 호비트 도시 하나 박살 낸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이러는지 의아해하면 서 말이다.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오랜만에 단 둘이서 오붓하게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을 때, 카르토 백작은 멍든 눈에 열심히 계란을 굴리며, 왜 오늘 아침에 다크의 말을 듣 지 않았는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어차피 아르티어스에게 줘 터져가며 자신이 다 처리할 일이었는데, 차라리 그때 자신이 하겠다고 했으면 진급이라도 했을 것 아닌가? 카르토 백작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눈가에 문지르고 있던 계란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울부짖기 시작했다.
“내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