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6권 18화 – 싸움 구경이 최고

싸움 구경이 최고

다음 날 아침, 아르티어스는 심심한지 하품을 길게 한 다음 묵향에게 말을 걸었다. 묵향은 명상을 하는 듯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얘야, 우리 산책이나 할래? 어제 보니까 내성 안쪽으로 꽤 근사하게 정원을 만들어 놨던데 말이야.”

“혼자 가시면 안 되겠어요? 나는 지금 바쁘다구요.”

“바쁘기는 뭐가 바빠? 새벽부터 계속 그러고 있었잖냐? 그리고 이 애비를 위해서 시간을 좀 내줄 수도 있잖냐?”

묵향은 뭐라고 한마디 쏘아 줄까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에구, 알겠어요. 가시죠.”

아르티어스와 함께 간 정원은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잘 가꾼 나무들로 둘러싸인 정원이 중앙 부분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옆에는 석탑이 놓여져 있었다. 그야말로 한눈에 쏙 들어 올 정도로 아기자기한 느낌이었다. 중원이나 저쪽 세계에 있었을 때는 마치 숲과 같은 울창한 모습의 정원을 숱하게 보아 왔던 묵향이었기 에 이런 형태의 정원이 신기하게만 보였다.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재미있다는 듯 두리번거리며 정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너를 이 꼴로 만든 게 저놈이냐?”

묵향이 돌아보니 그쪽에는 어제 자기에게 실컷 두들겨 맞은 유스케라는 사내가 난처한 듯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자루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롭게 보이는 사내가 함께 서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웬 인상 험악한 놈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자, 곧 눈치를 채고 느긋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아니라 이쪽이야. 얘가 그랬지.”

그 말에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유스케에게 물었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냐?”

유스케는 순간 얼굴이 벌개졌지만, 스승의 날카로운 눈을 속일 수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푹 숙이며 웅얼거렸다.

“예, 맞습니다.”

그 말에 사내는 유스케의 뒤통수를 호되게 갈기며 꾸짖었다.

“이런 병신 같은 자식! 저따위 계집에게 당했다는 말이냐? 내 얼굴과 유파에 먹칠을 하다니.”

사내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 이름은 사사키 겐지라고 합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찾아와 소란을 피우고,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런 다음 사사키 선생은 사색이 되어 있는 수제자에게 냉혹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바보 같은 놈, 따라오너라.”

유스케는 마지못해 사사키 선생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제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유스케는 절뚝거리며 힘겹게 스승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묵향은 궁금한 듯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왜 저러는 거예요? 뭣 때문에 왔다가 인사만 하고는 그냥 가는 거예요? 되게 웃기는 놈들일세.”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만약 이 사실을 알면 묵향이 또다시 사내의 모습으로 돌아가겠다고 강짜를 부릴 것이 뻔한데도…….

“아, 어제 너한테 박살 난 데 대한 복수를 하려고 왔던 모양이야.”

묵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런데 왜 그냥 가는 거죠?”

“저 녀석이 스승인 모양인데, 네 모습을 척 보더니 계집에게 박살 났다면서 저렇게 펄펄뛰는 거란…, 억?”

한참 얘기하던 아르티어스는 그제서야 어제 묵향의 반응이 떠올랐는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묵향은 이미 모든 것을 다 듣고 난 다음이었다. 묵향은 큰 소 리로 외치며 그 망할 놈들을 쫓아갔다.

“야, 새꺄! 거기 섯! 이거 알고 보니 제자라는 놈이나 스승이라는 놈이나 똑같은 놈들 아냐? 그래, 너 오늘 기분도 꿀꿀한데 잘 걸렸다.”

사사키 선생은 뒤가 소란스럽자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노랑머리의 외국 계집이 삿대질을 해 대며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쫓아오는 꼴을 보아하니 결코 좋은 뜻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무례함에 대한 사과는 충분히 했다. 그런데 왜 따라오는 것이지?”

뭔가 말을 하려고 하던 묵향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투덜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이거 말이 통해야 뭘 해 먹지.”

이런 때는 아르티어스밖에 없지 않은가? 묵향은 뒤에서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날카로운 어조로 외쳤다.

“아빠! 이리 빨리 와욧!”

그제서야 아르티어스는 허겁지겁 달려와서 물었다.

“왜 그러냐?”

“저 자식이 분명히 내가 계집이라면서 투덜거렸다고 했죠?”

“물론이지.”

묵향은 팔짱을 끼고 사사키라는 사내를 노려보며 말했다. 표정으로 보아 어지간히 화가 난 듯했다.

“저놈에게 나는 남자라고, 계집이라고 부른 것을 사과하라고 해요.”

“어? 으응, 알았다.”

아르티어스는 사내를 향해 빈정거리는 투로 천천히 야마토어로 말했다. 하지만 그가 통역한 말은 묵향이 전해 달라고 한 말과는 완전히 달랐다. 왜냐하면 아르티 어스는 싸움 구경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설혹 뒤에 어떤 식으로 묵향이 강짜를 부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 그건 또 그때 해결하면 될 것이 아니겠는 가? 그만큼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심심했던 것이다.

“이봐, 이 아이가 그러는데 자네 지금 이 아이와 싸우는 게 무서워서 도망치는 건가?”

사사키 선생은 콧방귀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말에 대꾸할 값어치도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흥!”

“이 아이는 선생이 밸도 없는 겁쟁이가 아닌가 묻고 있어. 안 그러면 겨우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선생이 도망칠 이유가 없다면서 말이야.”

아르티어스의 은근한 도발에도 사사키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정도로는 힘들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아르티어스는 결정적인 사실 하나를 덧붙였다. “사실, 이 아이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거든.”

그 말을 듣고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사사키 옆에 서 있던 유스케였다. 그는 이 순간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바뀌었다. 계집에게 패했다는 치명적인 오명에서 벗어 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사사키의 눈빛은 더욱 냉혹하게 바뀌었다. 사사키는 오랜 수련을 쌓은 무사답게 화가 치미는 것을 최대한 억누르 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소?”

“분명히 책임질 수 있지. 사메지마 상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사내가 확실해. 좀 계집애처럼 생기기는 했지만 나중에 성장하면 나처럼 사내다운 모습이 드 러날 거야.”

사사키는 아르티어스를 잠시 노려봤다. 확실히 이 붉은 머리의 외국인 사내도 굵직한 목소리와 선이 굵은 얼굴 생김새를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상당히 여성스러 움을 간직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마도 저 계집애처럼 생긴 소년도 나중에 성장하면 반말 짓거리를 주절거리는 저 무례하기 그지없는 빨강머리와 같은 놈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느껴졌다.

‘저런 잡초의 싹은 아예 처음부터 철저히 짓밟아 버리는 게 최고지.’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지자, 사사키는 아르티어스에게 냉혹한 어조로 말했다.

“남자라고 하니 다행이오. 내가 없을 때 나는 물론이고 유파를 모욕한 저 소년에게 징계를 가하고자 하오. 통역을 해 주시겠소?”

“물론이지.”

뒤로 돌아선 아르티어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도저히 씨알도 안 먹힌다. 계집애처럼 생겼으니 계집이라고 하는구나. 그리고 자기 수제자가 너한테 몽둥이찜질을 당한 것에 대해 아주 극심한 앙심을 품고 있어.”

“젠장, 그런대로 참아 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참겠군.”

잠시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의 사이에는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심부름 보낸 하인의 보고를 받은 사메지마는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뭣이라고?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옛, 사사키 겐지 선생께서는 지금 몸이 몹시 안 좋으셔서 주인님의 초대에 응하실 수 없다고 합니다.”

“이상하군. 어제만 해도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몸이 안 좋다는 말이지? 도대체가 이방인들이 온 후로 왜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는 거 야. 젠장!”

사메지마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반 토막이 난 술병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그런 다음 하인에게 물었다.

“누구에게 그 말을 들었느냐?”

“옛, 사사키 선생의 수제자인 사카이 상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더불어 주인님의 초대에 응할 수 없어서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 Ct.”

사메지마는 더 이상 하인과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곧장 하녀를 불렀다. 그런 다음 병문안을 갈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병문안 가기에 적당하도록 격식에 맞게 옷 을 입은 사메지마는 선물할 과자를 준비하라고 하녀에게 지시했다.

사메지마가 도장에 도착하자, 다케시는 선물로 건네는 과자는 받았지만 그가 실내로 들어서려는 것을 최대한 말렸다.

“선생님께서 사메지마 상을 직접 맞이하는 것이 옳겠지만, 지금 형편이 그렇지 못합니다. 의원이 선생님께 최대한 방문객을 맞지 말고, 안정을 취하라는 처방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사메지마는 눈살을 슬쩍 찌푸리다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다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병인데 그런 것인가? 자네 말을 듣기에 아주 심각한 병이라도 되는 것 같구먼.”

사메지마의 말에 다케시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쩔쩔매다 겨우 말했다.

“저…, 그게 전염병…, 인 것 같기도 하고, 그게…….”

뭔가 가케시가 숨기는 게 있다는 느낌을 받은 사메지마는 다짜고짜 실내로 들어섰다.

“이러시면 안 되십니다, 사메지마 상.”

사메지마가 방문을 드르륵 열자, 거기에는 사사키 선생이 처참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발에 부목이 대어져 있는 걸로 보아 아마도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물론 아무리 무술의 고수라고 해도 불의의 사고를 당해 발이 부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사키 선생의 몰골은 이것이 전혀 사고가 아니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 다. 여기저기 누군가에게 마치 몰매라도 맞은 듯 타박상의 흔적이 뚜렷했고, 오른쪽 눈에는 시꺼먼 멍 자국까지 선명하게 찍혀 있었던 것이다.

사메지마가 갑자기 방 안으로 들어서자, 순간 사사키 선생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다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메지마 상. 이런 몰골이라 직접 맞이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메지마는 일단 놀라움이 사라지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따지듯 물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사사키 선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까?”

사사키는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고 사메지마는 더욱 화가 났다. 사사키 선생과 같은 뛰어난 병법자를 이 지경으로 만들려면 상 당히 많은 인원이 매복하여 공격을 가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지의 치안 상태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무리 해적 때문에 세상이 뒤숭숭해졌다고 하지만, 이렇듯 무뢰배들이 날뛴다는 것은 도저히 나로서는 좌시할 수가 없는 일이오. 당장 영주님께 고하여 치안 책 임자들을 문책해야겠소. 어떻게 영지 내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단 말이오?”

사메지마의 분노도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메지마가 이 사실을 영주에게 고하겠다고 하자, 사사키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메지마 상.”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도전했다가 패해서 이 지경이 된 것입니다. 당신이 데려왔던 그 노랑머리의 야만인에게 말이오. 그런 젖비린내 나는 것에게 이렇듯 무참하게 패하여 영주님 의 체면에 먹칠을 했으니,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사사키 선생의 말에 사메지마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아마도 사사키 선생이 제자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섰던 모양이다. 그 결과가 이것 이고…….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사건을 원만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인지 사메지마는 고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상대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사사키는 자신의 머리맡에 놔뒀던 편지를 사메지마에게 건네주며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사메지마 상께서 영주님께 이 편지를 좀 전해 주시겠습니까?”

“이것이 뭡니까?”

“사메지마 상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이런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도 영주님의 병법 사범으로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사실 곧바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지만, 보시다시피 몸이 이 모양이라서…….”

이제서야 사메지마는 사사키 선생이 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떠나고 나면 또 어디서 이토록 뛰어난 사범을 찾아낸단 말인가? 그렇지만 사 메지마로서도 그를 만류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였다.

보통 자신이 직접 무술 도장을 운영하는 경우에는 그 도장의 소유권을 놓고 결투를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 승자가 무술 도장의 운영권을 접수했다. 하지 만 영주가 직접 무술 도장을 차려 놓고, 그 권리를 위임하는 경우는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영주가 직접 물색하여 선임하는 만큼 뛰어난 실력자를 영입하게 되기에 사범이 패배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원래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패배한다고 해서 도장의 소유권이 바뀌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도장의 소유주는 영주이기 때문이다. 물론 타 유 파와의 대결에서 패배하고도 뻔뻔스럽게 그냥 눌러앉아 있는 사범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범들은 조용히 도장을 떠났다. 자신을 믿고 도장을 맡긴 영주의 은혜를 배신한 죄책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사키 선생을 어떻게 하면 이 도장에 눌러앉아 있게 할 수 있을까? 이때 사메지마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급히 자신의 품속을 뒤적이며 사사키에

게 말했다.

“선생께서 떠나시는 것을 만류하기는 힘들겠지요. 하지만 떠나시기에 앞서, 이것을 좀 봐 주시겠습니까?”

사사키는 사메지마가 내미는 꾸러미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것이 뭡니까?”

“한번 펼쳐 보면 아실 겁니다.”

사사키는 종이로 싸놓은 꾸러미를 풀어봤다. 그 속에는 작은 술병이 하나 들어 있었다. 그것도 반 토막이 난 채로. 그것을 보자마자 사사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잘린 술병을 집어 들며 물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한 것입니까?”

사메지마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질문을 던졌다.

“왜요? 뭔가 특별한 것이라도 발견하셨습니까? 이걸 어떻게 구하기는 했지만, 도무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는 부분이 있었기에 사사키 선생에게 물어보려고 가져 온 것입니다.”

사사키는 매끄럽게 잘려나간 부분을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기도 하고, 만져 보기도 하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것은 저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쌓은 검객이 자른 흔적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는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인물이 존재하는 모양이군요. 도 대체 이것을 자른 사람이 누굽니까?”

하지만 사메지마는 대답을 회피하며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오오, 사사키 선생께서는 이 흔적만 보고도 그것을 아시겠습니까?”

“그 정도는 저뿐만 아니라 웬만큼 수련을 쌓은 자라면 누구나 눈치 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것은 사사키 선생의 겸손 어린 말이었다. 웬만한 실력에 올라서지 못한 사람이라면 잘린 흔적만으로 상대의 실력을 짐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이것을 자른 사람과 사사키 선생이 대결한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혹시 그런 세밀한 부분까지도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까?”

“모르면 몰라도, 저 같은 사람 열 명이 덤빈다고 해도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세상에, 이런 고수가 존재하고 있다니……. 역시 세상은 넓군요. 나는 오늘 비로소 내가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절실하게 알았소이다.”

한숨을 푹 내쉬던 사사키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혹시 이걸 자른 사람이 새로이 영주님의 병법 사범으로 오시게 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누구의 가신입니까? 알고 있다면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얼굴만이라 도 한번 보고 싶군요.”

사메지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얼굴은 이미 보지 않으셨습니까?”

“에에?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얼굴을 보셨을뿐더러, 치열한 대련까지 해 보셨다니 이미 알고 계실 것이 아닙니까?”

사메지마의 말에 사사키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이제 그는 이 술병을 반 조각 낸 사람이 누군지 눈치 챈 것이다. 하지만 사메지마는 계속 말을 이었다.

“주군께서도 그 소년의 실력을 시험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계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사키 선생께 소년과 대련을 주선해 볼까하는 생각도 했었지요. 그런데 어제 의 결과로 그 소년의 실력이 어느 정도 드러난 것 같습니다. 이것도 다 사사키 선생이 아니셨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영주님을 대신해서 선생께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습니다.”

“무슨,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아닙니다. 그 소년은 대국에서 건너온 검의 고수인 데다가, 그의 밑에 있는 부하만 해도 수만 명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수만 명의 부하가 있다는 사메지마의 말에 사사키 선생은 왠지 반색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정도 고수라면 자신이 졌다는 것이 그리 창피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 다. 어째 어제 묵향이 계집이 아니라는 말에 반색을 하던 유스케와 그 표정이 묘하게 닮은 사사키 선생이었다.

“흐음, 그렇군요.”

“그래서 사사키 선생 같은 분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사사키 선생은 그 소년이 야마토 전체를 뒤져 봐도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증언하셨지 않습니까? 그 것도 소년이 가볍게 수도(手刀)로 잘라 버린 술병만을 보시고 말입니다.”

수도로 잘라 버렸다는 말에 사사키의 안색은 완전히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설마 사사키로서도 그걸 맨손으로 잘랐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이 추정한 실력보다 몇 곱절은 더 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사키 선생. 선생께서는 주군을 위해 몸 바쳐서 그 소년에 대한 정보를 얻느라고 헌신하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몸을 조금 다쳤다고 해서 사범 자리를 내 놓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사키 선생이 말씀하셨듯, 그렇게 강한 상대라면 패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강자와 대결했다는 것이 영광은 될지언정, 결코 수치스러운 일일 수는 없겠죠.”

사메지마는 사사키가 줬던 편지를 바로 그에게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안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 대신, 주군께는 그 소년에 대한 정보 수집에 사사키 선생께서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그,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주군께의 충성에는 뭔가 대가가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몸조리 잘 하십시오.”

사메지마가 나간 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사사키는 멍한 표정으로 천장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얘야, 아무리 열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무자비하게 호비트를 두들겨 팰 수 있는 거냐? 하기야, 보는 내 속 시원하게 두들겨 패기는 하더라 만은…..

아르티어스는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는 듯 히죽이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그것이 묵향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방금 전에 싸웠던 무사는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거의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에 다가간 뛰어난 무사. 그토록 수련을 한 무사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계집이니 뭐니 하며 상대를 이유 없이 조롱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묵향은 방으로 돌아가며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아빠, 사실대로 말해 봐요.”

“뭘 말이냐?”

“그 무사가 내가 계집처럼 생겼다는 둥 어쩌구 한 거 다 거짓말이었죠? 사실대로 털어놔 봐요. 화 안 낼 테니까.”

안 그래도 언제 들통이 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찜찜해하던 터라 아르티어스는 반색을 하고 급히 물었다. “정말이냐?”

“그럼요.”

묵향이 생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티어스는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누군가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었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좋다. 헤헤, 사실 그 녀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지. 내가 싸움 구경 좋아하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래서 내가 싸움을…, 어? 너 표정이 왜 그래? 화 안 낸다고 했잖아.”

그 말에 묵향은 아르티어스를 갈아 마실 듯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도 아빠처럼 거짓말한 거였어요.”

“이런 젠장,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아르티어스는 행여 묵향에게 붙잡힐까 쏜살같이 도망쳐 버렸다. 이 곳은 성안인 데다가 하늘 위쪽으로 순식간에 공간 이동해 버린 아르티어스였기에 묵향은 쫓아 갈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아빠고 뭐고 나중에 잡히기만 해 봐라! 나를 그렇게 가지고 놀다니. 젠장! 마사코에게 술이나 달라고 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