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10화 – 오해의 시작
오해의 시작
묵향과 진팔 일행이 자리를 뜬 후, 지금까지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자들이 꿈틀거리며 신음성을 흘리기 시작했다.
천풍검 곡추 또한 수하들과 다르지 않았다. 동전이 그의 몸을 꿰뚫었을 때 엄청난 충격파가 그의 온몸을 뒤흔들었다. 게다가 호신지기(護身之氣)가 순간적으로 붕 괴되며 몸 전체에 흩뿌린 충격의 여파 또한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동전이 꿰뚫리는 순간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기절해 버린 것이었다.
“으으윽!”
온몸의 뼈마디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곳곳에서 신음하고 있는 수하들 외에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곧장 자신의 상처를 살펴봤다. 뭐가 몸속을 뚫고 왔다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깨끗한 관통상이었다. 그것도 치명적인 사혈(死)에서 정확히 1촌 위.
‘우연인가? 아니면 인정을 베푼 것인가?”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털고 일어선 그가 수하들의 상처를 봤을 때, 흠칫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위치에 가해진 똑같은 상처.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 인가? 천풍검 곡추의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정도 고수를 상대로 못 본 것으로 해 주겠다느니, 빨리 가라느니 하며 까불었으니,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과도 같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곡추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참! 마교가 자랑하는 악마적인 암기, 천마구뢰(天摩九雷)라면 못할 것도 없겠지. 그렇다면, 장로급이 먼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마교가 자랑하는 전설적인 무기들을 마도 10병(魔道兵)이라고 부른다. 마도10병은 다양한 무기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 우열을 가늠할 수는 없다. 무기도 강력한 것들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주인들도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존재들이었다. 마교 교주와 9대 장로가 그 주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장진이 비틀비틀 다가와서 보고를 올렸다.
“두 명이 죽었지만, 그 외에는 그런대로 무사합니다.”
천풍검이 고개를 돌리니, 시체들은 모두 적이 있던 방향과 반대 방향을 보고 길게 누워 있었다. 최후의 돌격 때 도망치던 놈들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곧장 그곳으 로 달려가 시체의 상흔을 살펴봤다.
그들의 몸에도 암기에 의해 관통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입은 상처보다 정확히 1촌 밑. 사혈을 관통당한 것이 그들이 죽은 원인이었다.
천풍검 곡추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배신자들에게까지 인정을 베풀 필요는 없다는 말인가? 나는 오늘 진정한 무인을 만났구나.”
그는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자, 시신을 수습하고 빨리 본가로 돌아가자.”
“옛.”
조령은 객점에 들러 따뜻한 음식과 술을 앞에 두고 보니 마교 교주라는 작자한테 너무나도 무시당했던 것에 대해 뒤늦게 울분이 치솟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 다고 누구에게 분풀이를 한다는 말인가? 다시 돌아가서 그 당사자에게 하는 것이 원칙에는 맞겠지만, 사실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내일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을 가 능성이 전무 했다. 그렇다면 제일 만만한 상대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조령은 생존 본능이 강하다는 점 말고는 아무 잘못도 없는 진팔을 향해 이죽거렸다.
“그렇게 안 봤는데, 아부하는 실력 하나만큼은 타고난 것 같더군요.”
연거푸 술 몇 잔을 들이켠 후, 그다음부터는 천천히 마시고 있던 진팔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그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조령은 뾰족한 어조로 쫑알거렸다.
“나도 다 안다구요. 우리들을 그렇게도 괴롭혔던 남궁세가의 그 창궁 뭐라는 자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리는 것을 보면…….”
그때가 생각나는지 조령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사실 교주가 목숨을 건져 주고 치료까지 해 줬으니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은 셈인데, 전혀 고마움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한 잔 쭉 들이켠 후, 진팔이 말했다.
“그자는 성격이 아주 이상해. 한마디로 지랄 같지.”
“지랄 같다구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조령을 향해 진팔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하고야 말지. 그때, 상대의 의견은 철저하게 무시되지. 그게 지랄 같다는 거야.”
그 말에 조령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전혀 고마움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와 상관이 있는 것 같았다.
진팔은 과거 자신과 묵향의 만남에 대해 털어놨다. 그 말을 들은 조령의 눈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건 진 형에게 있어서 엄청난 복이 아닌가요? 무림인들이 말하는 기연을 만났다고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 말에 진팔은 신경질을 버럭 내며 소리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물론 무공이 강해졌다는 것은 인정해. 하지만 그 때문에 나는 지금 본문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떠도는 신세가 됐어. 그리고 본문의 경우도 그 빌어먹을 마교와 협정을 맺은 덕분에 완전히 박쥐 신세로 전락했지. 정파에도, 사파에도 끼지 못하고 떠도는 박쥐 말이야! 알겠어?”
그 말에 조령은 언젠가 정사(正邪)에 대해 물었을 때, 진팔이 양쪽을 다 씹었던 것을 기억했다.
‘맞아, 그 때문에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무림에서 회색이 존재했던 거였군.’
울분이 치솟는지 술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켠 후 진팔이 중얼거렸다.
“그와 만났을 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아부를 하는 것이 장수에 보탬이 되지.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 주는 것이 좋아. 안 그러면 그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걸 꼭 해내고야 마니까 말이야. 사실, 그렇게 강한 고수의 말을 거역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 무덤을 파는 짓이 아니겠어? 휴~, 그러고 보면 나 는 정말 어렸을 때부터 이놈의 무림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던 것이군.”
진팔은 잠시 뭔가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조령에게 물었다.
“혹시 암흑마제라는 명호를 들어 본 적 있어?”
요 근래에 들어서야 무림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조령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조령이 고개를 살래살래 가로젓는 것을 보고, 진팔은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너의 그 무지 덕분에 위기를 한차례 넘겼는지도 모르겠군.”
무지라는 말에 조령이 살짝 눈초리를 치켜올리며 따졌다.
“그거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물론,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야. 그가 한참 활동하던 때의 마교는 엄청난 위세를 떨치고 있었지. 그런 만큼 마교 부교주였던 그가 활동할 일은 거의 없었어. 그러 다 보니 그는 아주 굵직굵직한 일에만 모습을 드러냈지. 물론 비밀스럽게, 조용히 말이야. 그래서 그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그에게는 명호가 없었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암흑마제는 뭐예요?”
“그가 무림에서 모습을 감춘 후, 남을 씹기 좋아하는 쓰레기들이 퍼뜨린 거지. 그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강한 걸까? 그리고 그 지랄 같은 성격. 그와 맞대면해서 살 아남은 자가 거의 없을 정도의 잔인한 손속. 이 모든 게 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 암흑마제라는 명호야. 결코 좋은 뜻이 아니지. 그의 앞에서는 결코 암흑마제라는 말 을 하지 마. 그냥 천마신교의 지존이나 아니면 교주님이나 뭐 그런 식의 호칭은 상관없겠지만 말이야. 어쩌면 그 한마디에 지옥을 경험할 수도 있어. 알았어?” “알겠어요.”
순순히 대답은 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양이 안 찼는지 조령은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명호 하나에 그 정도 반응이 나올까요?”
“그가 암흑마제에 얽힌 무림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면 당연히 그럴걸? 암흑마제는 그야말로 최악의 악당을 지칭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어떤 소문인데요?”
“그가 익힌 무공이 왜 그렇게 강한지에 대한 별의별 중상모략이라고 봐야 하겠지. 채음보양부터 시작해서, 흡성대법을 통한 정혈 갈취, 수많은 시체를 이용한 시 독(屍毒) 흡수, 내공에 있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각종 엽기적인 내공 흡수법, 그 소문들의 대부분이 막강한 그의 내공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지를 말하는 거야. 왜냐하면 그런 편법을 쓰지 않고서야, 그 젊은 나이에 그렇게도 막강한 내공을 쌓는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거지.”
“젊은 나이라구요? 하기야…, 젊기는 되게 젊더군요. 어쩌면 진 형보다도 더, 어? 아까 말했을 때, 진 형이 어렸을 때 그를 봤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그의 나이는 어느 정도란 말이죠?”
“무림의 고수는 겉에 드러난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지. 현재 추정하기로는 1백 살 전후야. 정확한 나이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야.”
“1백 살이라구요? 세상에…….”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조령이 다시금 말을 꺼냈다.
“그런데, 교주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그 노인 말이에요. 그분이 마교의 태상교주인가요?”
“아니, 태상교주는 따로 있어. 독수마제(毒手魔帝) 한석영(韓英)이지. 나도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대충 어떻게 생겼는지는 소문을 통해 알고 있어. 그는 결코 태상교주는 아니었어. 일단 무엇보다 너무 늙었잖아. 그 정도 고수라면 겉모습이 아주 젊어야 정상이야. 거기에다가 독수마제의 아들은 따로 있어. 그가 부교주일 때, 교주였던 흑마대제(黑魔大帝) 한중길(韓中)이라는 사람이지.”
“혹시 일부러 겉모습을 그렇게 꾸미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요? 한순간에 팔을 붙이는 거 봤잖아요. 무림의 고수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럴까?”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수록 조령의 말이 그럴듯했기에, 진팔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뭣이 놓쳤다고?”
보고를 접한 가주의 안색은 보고를 듣기 전과 거의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천풍검 곡추는 알고 있었다. 가주가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고 있 음을 말이다. 곧이어 가주의 눈가에 경련이 일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가주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채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잠시 급한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 오겠네.”
“예, 가주님.”
잠시 후, 가주의 목소리가 옆방에서 새 나왔다. 그 속에는 ‘병신 같은 놈’부터 시작해서 가지각색의 육두문자가 총망라되어 있었다.
가주는 열이 뻗쳐서 도저히 참기 어려울 때, 옆에 마련해 놓은 밀실을 애용했다. 밀실은 방음 시설이 매우 잘되어 있었는데도 그 안에서 얼마나 고함을 질러 댔으 면 그 소리가 밖에까지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태사의 옆에 서 있던 총관은 곡추를 볼 면목이 없었는지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실내를 둘러보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가주는 매우 폭급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신경질이 날 때마다 부하에게 욕설을 내뱉는다면 명문세가의 가주로서 품위가 떨어지지 않겠는가.
게다가 남궁세가의 경우 그 특성상 수하들 중에 친족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족보상으로 봤을 때 가주보다 항렬이 높은 가신들도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욕 설을 퍼부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회의실 옆에 만들어 놓은 밀실인 것이다.
잠시 후, 가주는 개운한 얼굴로 밀실에서 나와 태사의에 앉으며 곡추에게 물었다.
“왜 놓쳤나? 설마, 진팔이 녀석의 무공이 그렇게 높았나? 그렇지 않다면 진팔이 동행의 실력이?”
“물론 진팔의 능력이 상상 이상으로 높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속하가 실패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가주.”
“그렇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마교도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가주는 이제야 이해가 가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마교도? 호오, 마교도가 나타나서 그들을 구출해 갔단 말이지? 그렇다면 천지문이 마교와 모종의 밀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겠군.”
“그게 아닙니다, 문주님.”
“그렇다면 뭔가?”
“저…, 그게..
잠시 망설이던 곡추는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무리 마교도라고 하지만 그는 진정한 무인이었다. 아예 보고를 안 했으면 안 했지, 거짓을 입에 올려 사건 을 왜곡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곡추의 보고를 들은 가주는 아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 마교도와 진팔이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군.”
“예, 속하가 고수를 몰라본 죄입니다.”
가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여기까지 마교도가 어슬렁댄다는 것이 왠지 찝찝하군. 안 그래도 무림맹에서 마교가 활동을 개시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라서 그런지 더욱 그 래.”
가주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곡추를 향해 말했다.
“수고했네. 듣고 보니 자네의 잘못은 아닐세. 누구를 보냈다고 해도, 상대가 마교도인 이상 그런 식으로 말했을 게 분명하거든. 다만 상대를 잘못 만난 것이지. 자, 빨리 가서 치료를 받고 몸을 추스르게.”
“옛!”
곡추가 나가고 난 후 가주는 총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장로회를 소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속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궁세가의 밀실에서 장로회의가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회의가 끝난 후, 남궁세가에서 가장 강력한 고수 네 명이 은밀하게 세가를 벗어났다. 그리고 수십 마리의 전서구가 사방을 향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