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1화 – 양에 차는 놈이 없다
양에 차는 놈이 없다
잘 다듬어진 정원.
특이하게도 정원에는 매화나무만이 심어져 있었다. 매화나무들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중년인. 그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슬쩍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무엇을 어떻 게 했는지, 한쪽으로 튀어나와 있던 나뭇가지 하나가 예리하게 잘려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중년인은 또다시 잘라 버려야 할 가지가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 다. 하지만 곧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군.”
중년인의 이러한 태도를 십분 이해한다는 듯 그의 뒤에 서 있던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선택을 하셔야겠지만, 태상교주님께서 조만간에 뭔가 조치를 취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 말에 태상교주는 난감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알고 있다네. 수석장로가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로군. 본교의 미래가 걸린 일인데, 그것을 은퇴한 지 오래된 노부가 결정해야 한다니……. 말년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로구먼.”
조언을 올리고 있는 노인은 지금은 은퇴했지만, 과거 수석장로직을 수행했던 천도(天刀王) 여지고(黎志高)였다. 그는 세력 다툼이 은근히 벌어지고 있는 마교의 현실을 우려하여 태상교주와 면담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태상교주님이 아니시면 그 누가 있어 본교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교주 자리가 벌써 23년씩이나 비어 있습니다.”
태상교주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쯧, 그걸 누가 모르나. 급하게 덥석 선택한 것이 최악의 수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니, 그것이 문제인 것이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노부의 생각 같아선 관지를 교주로 임명하고 싶었다네. 그라면 놀랍게 성장한 본교를 더욱 충실하게 다스려 나갈 수 있을 게야.”
여지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그가 뛰어난 인재임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는 교주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조차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무공이 너무 떨어집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태상교주는 매화나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게 문제야. 정말 세상사가 마음대로 안 되는구먼. 초류빈(楚柳濱) 대신에 관지가 화경을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군문(軍門)에 있었기에 조직을 통솔해 나가는 감각은 정말 탁월해. 그가 화경을 깨달았다면 주위에서 아무리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노부는 그를 교주로 삼았을 텐데…….”
태상교주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다. 관지의 경우 대부분의 조건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 물론 교주는 마공을 익힌 자여야 한다는 율법이 있었으나, 그 정도는 무마시 킬 자신이 있는 그였다. 하지만 화경에도 이르지 못한 자를 교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강자지존의 철칙이 지켜지는 마교에서, 그것은 태상교주의 권위 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비해 초류빈은 묵향의 직속 수하로서 마교에 들어왔다. 그렇기에 묵향이 실종된 후, 그가 할 일은 무공수련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 인지 그가 덜컥 화경의 벽을 깨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교주로 삼기에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마공을 익히지 않은 것도 문제이기는 했지만, 더욱 큰 문제는 그에게 야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태상교주가 봤을 때 그는 교주가 되기 위한 무공은 충분했지만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 나갈 인재는 아니었다.
여지고는 슬며시 태상교주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시다면 탈명도 부교주를 교주로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사실 지금 탈명도 부교주와 천리독행 부교주의 세력이 대치 중이라고 하지만, 결국 뒤를 보면 탈명도 부교주를 관지 장로가 받쳐 주는 형국이 아닙니까? 태상교주께서 관지 장로를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신다면, 탈명도 부교주를 교주로 만듦으로써 그에게 날 개를 달아 주자는 것이지요.”
탈명도(脫命刀) 초류빈이 화경을 깨달아서 부교주의 직위를 받았다면, 천리독행(千里獨行철(鐵營)도 극마의 경지에 올라 부교주의 직위를 받았다. 교주가 없 는 지금, 이 둘을 축으로 하여 마교 내의 세력이 양분되어 있는 상태였다.
태상교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그 생각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야. 하지만 비록 실종된 지 23년이나 되었지만 아직까지 본교의 교주는 묵향이 아닌가? 만일 노부가 누군가를 교주로 임명하다 면 그것은 묵향 교주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지 않겠나?”
여지고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왜 갑자기 태상교주가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노부가 누군가를 교주로 만든다면, 그때부터 교주가 되지 못한 자가 가만히 있을까? 그나마 지금은 은밀하게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지만, 노부가 누군가를 교주 로 삼는다면 그때는 아예 대놓고 세력전을 벌일 게 분명해. 강자지존의 율법은 없어진 게 아니니까 말일세.”
가만히 생각해 보던 여지고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태상교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또, 초류빈은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문제점도 가지고 있지. 그를 교주로 만든다면, 철영은 틀림없이 그 점을 들고 나와 초류빈을 교주로 만든 것의 부당함을 제 기할 걸세.”
“하지만, 묵향 교주라는 선례가 있습니다. 그분도 마공을 익히지는 않으셨지 않습니까?”
태상교주는 피식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물론이지. 하지만 그는 논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네. 노부는 지금껏 그보다 뛰어난 인물은 보지 못했네. 그는 교주가 되자마자 본교를 완전히 휘어잡아 버렸지. 그 엄청난 무공에 누가 감히 반발을 꿈꿀 수나 있었겠는가? 거기에다가, 사람을 부리는 능력 또한 탁월했어. 그가 일을 맡긴 자들은 아직까지도 본교의 중심축을 이루 며 그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율법에 나와 있다고 해도 누가 감히 그에게 그런 문제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겠나?”
여지고는 잠시 묵향 교주를 회상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여지고 장로는 묵향과 같은 인물을 모셨다는 것이 하나의 자랑거리였다.
어쨌건 초류빈이 안 된다면 남은 것은 철영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여지고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천리독행 부교주를 교주로 삼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는 정통적인 마교의 인물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태상교주는 잠시 매화나무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내 그 생각도 안 해 본 것은 아닐세. 철영은 아주 야심이 큰 인물이야. 극마에 올라, 부교주가 된 이후부터 자신의 세력을 넓히는 데 혈안이 되어 있지. 그리고 아 주 호전적이지. 그 때문에 많은 고수들이 그를 추앙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야. 하지만 그놈은 그릇이 너무 작아.”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가 만약 묵향처럼 본교를 휘어잡을 만한 능력이 있다면 차라리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문제라는 것일세. 그가 교주가 된다면 초류빈을 주축으로 하는 묵향 의 추종파들이 가만히 있을까? 또, 그런 분리된 힘으로 정파 놈들과 맞설 수 있겠나? 주제파악도 못하는 상태에서 야심만 커 봐야 다 헛것이란 말일세. 그놈을 선 택하면 기껏 키워 놓은 본교를 한순간에 망쳐 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거든.”
여지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지만 그래도 교주직을 언제까지나 비워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방관만 하고 계실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묵향교주를 지지하는 탈명도 부교주의 세력과 교주를 새로 뽑은 뒤 하루빨리 본교의 숙원을 이룩하자는 천리독행 부교주의 세력. 이 두 세력이 충돌이라도 일으킨다면 본교는 또다시 내전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쯧쯧, 강자를 우선하는 피의 율법. 하지만 어느 한 녀석도 양에 차는 놈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태상교주는 심란한 표정으로 매화나무를 바라봤다.
“어서옵…….”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려던 점소이의 말이 도중에 뚝 끊겼다. 그도 그럴 것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의 옷차림이 너무나도 남루했기 때문이다. 땟국물에 절은 것 도 모자라서 여기저기에 구멍까지 뚫려 있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거지나 다름없는 옷차림에 점소이가 상대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려는 순간, 그 목소리는 목구멍 밑으로 쑥 들어가고 말았다. 상대의 등 뒤에 묶여 있는 뭔가를 봤기 때문이다. 거대한 도(刀)의 손잡이를…….
완전 거지꼴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혹시 강호의 고수가 아닐까 생각한 점소이는 방금 전에 하다가 만 말의 뒷부분을 마지못해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쇼.”
그런 점소이의 태도에 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구석진 자리에 앉은 사내는 걸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리탕을 내오너라.”
“예.”
점소이가 사라지고 난 후, 사내는 객잔 안을 쓱 훑어봤다. 허름하기 그지없는 객잔이었고, 식사 시간도 아니었기에 싸구려 술 몇 병을 시켜 놓고 떠들고 있는 사내 몇이 있을 뿐, 손님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내가 주문한 요리는 오래지 않아 나왔다.
싸구려 음식이기는 했지만 사내가 아주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먹고 있을 때,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몇 명의 손님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말을 타고 온 손님이라 그런지 점소이의 태도 자체가 달랐다. 점소이는 사근사근한 말투로 손님들을 전망이 좋은 창가의 자리로 안내했다.
사내는 힐끗 새로 온 손님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리따운 묘령의 아가씨 한 명과 우람한 덩치를 지닌 사내 둘. 그리고 기생오라비처럼 미끈하게 빠진 소년 한 명이 보였다. 우람한 덩치의 사내나 묘령의 아가씨가 모두 소년에게 대하는 태도로 보아 약관(弱冠 : 20세)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소년이 그들보다 높은 신분임을 금 세 알아챌 수 있었다.
이때, 그 소년과 사내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음에도 무표정을 유지한 채 멀뚱이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를 향해 소년은 씨익 미소를 보냈다. 물론 사 내의 눈에 그 미소는 ‘씨익’이 아니라 ‘방긋’으로 보였지만 말이다. 사내가 뭔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얼른 오리탕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년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나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찾은 것 같아.”
소년의 말에 무사들 중에서 왼쪽 뺨에 길게 흉터가 있는 자가 물었다. 병장기에 당한 듯한 상흔이었는데, 그의 날카로운 이목에 더해져 더욱 강인해 보이는 분위기 를 풍기고 있었다.
“예? 뭘 말씀이십니까?”
“무림인 말이야. 무림인!”
소년의 말에 덩치 큰 사내들의 시선은 허름한 옷을 입고 오리 다리를 먹고 있는 사내에게로 곧장 돌려졌다. 사내의 뒤쪽으로 천에 둘둘 말려 있는 거대한 도가 벽 에 기대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도신의 길이는 약 3척 정도였고, 손잡이는 1척 정도였다. 손잡이를 제외하더라도 저 두툼한 도신의 두께와 폭으로 봤을 때 그 무게는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그리 고 저런 도를 휘두를 정도라면 엄청난 힘의 소유자임에 틀림없었다.
“저자가 무림인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게 어떻다는 말씀이십니까?”
“예전에 어머님께 들은 말이 있어. 보다 높은 경지의 무술만을 위해 삶을 영위하는 인물들이 있다고 말이야.”
“무술이라면 노사(老師)께 어느 정도 배우셨지 않습니까? 만약 더욱 강한 무술을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을 텐데, 겨우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다는 말씀이십니까? 혹시 노사께 배우시는 게 싫으시다면, 미흡하지만 속하가 가르쳐 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사내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꿈꾸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머님한테 무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었어. 그런데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아.”
한껏 들떠 있는 소년에게 뺨에 흉터가 있는 사내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이제 무림인을 찾으셨으니, 다음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 사람을 따라갈 거야.”
그 말에 처음으로 사내의 표정에 동요가 일어났다.
“예? 그,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저자를 따라가서 뭘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어쩌기는…, 이렇게 할 거야.”
소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오리탕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한 사내에게 다가갔다. 소년은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폐가 안 된다면 합석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수상한 인물은 절대 아닙니다.”
소년은 사내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재빨리 점소이에게 요리와 술을 주문했다. 객잔에서 파는 것 중에서 제일 비싼 것들이었다. 상대는 소박한 음식밖에 먹을 수 없는 형편이니, 합석의 조건으로 값비싼 음식물을 제공하겠다는 뜻이었다. 역시나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자리에 앉은 다음 소년은 흥미진진하다는 듯 수염이 텁수룩하게 나 있는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혹시 소속된 문파가 있으십니까?”
사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실례가 안 된다면 좀 가르쳐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무림인들은 대부분 문파에 소속되어 있다고 들었거든요.”
한동안 말없이 점소이가 가져온 값비싼 음식을 이것저것 먹어 보던 사내는 갑자기 몇 마디 중얼거렸다.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다. 강호에는 문파에 소속된 인물보다 소속되지 않은 인물이 더 많다. 또, 설혹 문파에 소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런 곳에서 자신의 문파를 떠벌려 대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사내의 퉁명스런 반응에 소년은 당황한 듯 물었다.
“그…, 그런가요? 그럼, 무림인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소년의 질문에 사내는 기가 막힌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이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여태까지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했던 사내였기에, 자신의 질문에 뭔 가 문제가 있다고 느낀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따졌다.
“웃지만 말고 말씀을 해 주시죠.”
사내는 오랜만이라는 듯 술잔을 들고 잠시 향기를 음미하고는 한 잔 쭉 들이켠 후 말했다.
“무림인이 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 말에 소년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죠?”
말은 그렇게 꺼냈지만 사내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이리저리 생각을 했다. 무림인.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게 뭐라고 꼭 집어서 말하자니까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던 것이다. 사내는 뭔가 대답할 말이 떠오를 때까지 눈앞에 있는 음식과 술 을 묵묵히 먹어댔다. 그러다가 이윽고 사내는 생각이 정리된 듯, 자신이 알고 있는 무림에 대한 정의를 늘어놨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언제든지 죽어 주겠다는 마음가짐만 가지면 되는 거지. 아주 간단하지 않나?”
순간 소년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뭐라구요?”
하지만 곧이어 소년은 눈을 실쭉하게 바꿔 상대를 노려보며 따졌다.
“형장께서 지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소년의 말에 사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나는 목숨 가지고 농담하는 취미는 없다.”
상대가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했기에, 오히려 소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다면, 남이 나를 죽인다는 말은 곧 저도 남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렇지.”
“그렇게 하면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요?”
사내는 거칠게 콧바람을 일으킨 후 대꾸했다.
“흥, 법을 따진다면 영원히 무림인이 될 수 없다.”
“관에서 살인자라고 추격을 한다면요?”
“당연히 도망쳐야지.”
무덤덤한 사내의 말에 오히려 당황하고 있는 쪽은 소년이었다. 이 사내가 과연 제정신인 것일까?
“그, 그렇다면 무림인은 바로 범법자라는 말씀이십니까?”
“글쎄….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렇게 틀에 얽매여 있는 한 영원히 무림인이 되기는 힘들 거다. 그건 그렇고 음식 잘 먹었다.”
사내는 품속을 뒤져서 동전 몇 개를 탁자 위에 던져 놓으며 일어섰다. 처음에 자신이 시킨 오리탕 값이었다. 거대한 도를 잡고 뒤돌아서는 사내에게 소년은 다급히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무림에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보아하니 형편도 어려우신 것 같은데,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실례가 안 될까요? 무림이라는 게 뭔지 좀 가르쳐 주세요.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그 말에 사내는 피식 웃었다. 눈가에 주름이 조금 잡힌 것도 웃는 거라면 말이다. 사내는 투박한 어조로 대꾸했다.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사내는 문을 나서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소년에게 분명히 들렸다.
“꼬마야, 무림에 발을 들여놓지 마라.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소년은 돌아서는 사내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제 이름은 꼬마가 아니라 완…, 아니 그 뭐냐… 조령(趙鈴)이라고 한다구요.”
이상하게 이름을 대는 것이 뭔가 망설이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사내는 단 한마디 의문도 표하지 않고 그냥 멀어져 갈 뿐이었다.
사내가 나간 후, 사내들 중 한 명이 소년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속하의 생각으로는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 저 사람을 따라가겠어.”
“저자를 말씀이십니까? 아니, 왜 저렇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놈을 따라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냥 중원의 아름다운 산천 구경이나 하시다가 돌아가시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소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무뚝뚝함이 묘한 매력이야. 그리고 어머니한테 들은 것보다는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어. 더군다나 한 가지 가능성이 생겼잖아?”
“예? 가능성이라니요.”
“그냥 나갔다면 모르겠지만, 친절하게 조언까지 해 줬잖아. 그걸 보면 마음씨가 좋은 사람인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사내는 소년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