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2화 – 아르티어스의 음모

아르티어스의 음모

사메지마가 아르티어스에게 묵향과 함께 오늘 저녁 영주님을 찾아오라는 통보를 하고 있을 때, 고다이 영지의 동북쪽에서는 이제 막 전투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고다이 영지를 약탈하고 있는 해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동원된 군세는 1만 7천. 고다이 영지를 포함한 3개 영지에서 파견된 연합군이었다. 고다이 영지의 군세 7천 을 중심으로 미나모토 대영주가 파견한 5천, 그리고 후지와라 영주가 파견한 5천이 합해진 대군인 것이다.

현재 연합군을 총지휘하고 있는 것은 미나모토 대영주 휘하의 가신(家臣) 요리토모라는 자였다. 요리토모는 각 영지에서 파견된 사령관들을 향해 호기롭게 외쳤 다.

“본관이 중앙을 맡겠소. 자, 모두들 군사를 점검하시오. 쌍방의 병력 차가 3배 이상 나니 손쉽게 승리할 수 있을 거외다.”

원래 이 전투는 고다이 영지에서 벌어지는 것이었고, 또 고다이 영지에서 투입된 병력이 가장 많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에 반대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의 뒤에는 미나모토 대영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요리토모는 전투가 벌어지면 가장 막대한 피를 흘리게 되는 중앙을 원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해적들은 여태껏 그랬듯이 이쪽의 군대가 접근하면 재빨리 배에 탄 다음 도망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요리토모는 최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했다는 영예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게 되는 것 이다. 거기에다가 미나모토 대영주는 자신의 동맹국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선전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었다.

연합군은 요리토모의 지휘 하에 해적들과 대치했다. 진형이 갖춰지자 부관이 요리토모에게 말했다.

“요리토모 사마, 개전 신호를 올릴까요?”

요리토모는 부관의 말에 한껏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물론이다.”

부관은 뒤에 서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화살을 쏴라.”

피유유웅!

소리가 나도록 특수하게 제작된 화살들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하늘로 치솟았다. 이것이 전투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요리토모는 적진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흐흐흐, 꼴에 전의를 불사르는 척하고 있지만 다 허장성세(虛張聲勢)다. 이쪽에서 공격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를 말겠지.”

부관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조언을 올렸다.

“타다마사 상에게 적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전령을 보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요리토모는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무는 법이다. 적들에게 어느 정도 따끔한 맛을 보여 주고, 주변 영주들에게 대영주님의 위엄만 보이면 끝나는 일이다. 알겠느냐?” 부관은 뒤의 뒤까지 생각하는 상관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비해서 드러난 앞면만을 바라본 자신은 어떤가? 부관은 생각이 짧았던 자신에 대해 부끄러 움을 느끼며 대답했다.

“옛, 요리토모 사마의 가르침,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전투는 요리토모의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해적들이 철수하기는커녕 오히려 투지를 불사르며 돌진해 왔던 것이다.

대족장 타르티는 손을 번쩍 들어 적진을 가리키며 외쳤다.

“우리에게는 탱게르의 가호가 함께한다. 자, 공격해랏!”

“우와아아아!”

“탱게르! 탱게르!”

해적들은 탱게르를 외치며 적들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3배가 넘는 적들을 향해 돌진하는 해적 무리의 그 어디에서도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 려 그들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자신들에게는 천신의 가호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르티어스가 신이 아니었기에, 가호 따위를 해 줄 리 없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천신의 가호를 굳게 믿고 있는 해적 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자고로 광신도만큼 상대하기 껄끄러운 놈들도 없는 법이다.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夜叉)와도 같이 악착스레 덤벼드는 해적 놈들의 광기에 어느덧 병사들의 눈에 는 두려움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전황을 살피던 요리토모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양민들을 약탈하다가도 군대가 나타나기만 하면 싸울 생각도 안 하고 도망치던 비 열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거늘.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해적들의 공격에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연합군이 뒤로 밀리는 것이 아닌가.

“치, 칙쇼. 마, 말도 안 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렸다.

점차 밀리고 있는 중앙부를 바라보며 부관이 당황한 듯 타다마사 장군에게 말했다.

“타, 타다마사 사마, 중앙을 지원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타다마사 장군은 오히려 현재의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외로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미나모토는 이제 똥 벼락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겠어.”

그는 부관을 향해 명령했다.

“슬슬 후퇴할 준비를 하라고 일러라. 적이 중앙을 돌파하면 우리는 전장에서 이탈한다. 저 난장판에 휩쓸릴 이유가 없지 않겠나?”

“하,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한낱 해적들에게 패했다고 주군의 명성에 누를 끼치게 될.

부관의 말에 타다마사는 답답하다는 듯 노성을 터뜨렸다.

“이런, 빠가야로! 지금 전장을 지휘하는 게 누군가? 내가 아니고 요리토모란 말이다. 치욕을 당하는 것은 대영주지, 주군이 아니란 말이야. 알겠느냐?”

“옛, 즉시 이행하겠습니다.”

부관은 즉각 전령들을 불러 타다마사 사령관의 명령을 전투를 벌이고 있는 지휘관들에게 전달했다.

타다마사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앙을 지긋이 바라봤다. 역전의 노장인 그가 봤을 때, 중앙군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자력으로는 회생이 불가능했다. 아마 조만 간에 붕괴될 것이 틀림없었다.

타다마사는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해적 따위에게 패했다고 주군의 체면이 조금 깎이기는 하겠지만, 잃는 것에 비하면 얻는 게 더 많지. 무엇보다도 대영주의 세력이 이 일로 인해 크게 약화될 것이 틀림없어.”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광기에 넘치고 있는 해적들을 타다마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이런 칙쇼!”

미나모토 대영주는 보고서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불같이 노했다. 하지만 보고서를 내던져도, 또 그 보고서를 발로 짓밟는다고 해도 땅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체면 이 회복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부하들 앞에서 체면만 더욱 구겨질 뿐.

고다이 영지 동북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미나모토 대영주는 최대의 치욕을 당했다. 자신이 파견한 부대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것도 동맹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론 전쟁을 하다 보면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문제였다. 그깟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해적들에게 정예군이 박살 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위 의 영주들이 그를 깔볼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미나모토 대영주는 대기하고 있는 장수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출동 준비를 해라. 내가 친히 그놈들을 박살 내 버리겠다.”

묵향은 자신의 무릎에 놓인 검을 찬찬히 바라봤다. 자신이 좋아하는 형식인 아주 가늘면서도 길게 빠진 매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양은 마음에 들었지만, 묵 향은 검날을 매만지며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검은 보검도 아니었고, 또 보검 축에 들어갈 만큼 뛰어난 검도 아니었다. 하지만 영주는 왜 이 검을 주며 뭔 가 특별한 선물이라도 주는 듯 생색을 냈던 것일까?

아르티어스는 그런 묵향을 바라보며 쩔쩔매듯 주절거렸다. 아무래도 닌자라는 놈들의 습격이 있었을 때 자기 혼자 술 마시러 도망쳤던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게다가 아들놈이 검을 뽑아 들고 뭔가 깊은 궁리를 하는 것을 보니 그걸로 자신을 치려는 생각이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에이, 내가 잘못했다. 혼자서 술 마시러 간 걸 가지고 꽁해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설마…, 그걸로 이 애비를 칠 생각은 아니겠지? 응?”

아르티어스의 목소리에는 애교마저 살짝 묻어 있었다. 그런 아르티어스를 향해 묵향은 피식 미소 지은 후 대답했다.

“설마요. 그건 그렇고, 왜 이따위 검을 주면서 영주가 큰 보물이라도 주는 듯 떠든 건지 이해가 안 가네요. 이런 정도의 검이라면 별로 대단하다고 할 수도 없는 건 데.”

묵향의 의문에 아르티어스는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묵향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영주가 한 말을 묵향에게 제대로 통역을 해 주지 않았 기 때문이다.

“아아, 그건 검이 문제가 아니라 그걸 사용했던 사람 때문이지. 예전에 그걸 쓴 사람이 영주의 목숨을 구해 주고 전사한 뛰어난 무사였던 모양이야.”

“흠, 영주의 추억 어린 기념품인 모양이군요. 어쩐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묵향에게 아르티어스는 말을 이었다.

“단순한 기념품은 아니지. 이 세계에서는 그런 검을 준다는 것은, 그 검을 지녔던 주인의 권력을 승계한다는 의미도 있으니까 말이다.”

“권력을 승계한다구요?”

“그래, 이 세계에서는 그렇게 하는 모양이야. 잘만 하면 너 또 여기서도 치레아 공국을 다스리던 것처럼 영주 노릇을 할 수 있을 게다.”

“쳇,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이 덜떨어진 야만족들 두목 노릇이나 하고 있겠어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나중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될걸? 흐흐흐……..

아들놈이 아무리 까불어 봐야, 자신을 따라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고 확신하는 아르티어스 어르신이었다.

미나모토 대영주가 친히 이끄는 1만 5천의 병력이 패잔병 부대와 합류했다. 자신의 영지에 겨우 1만의 방어 병력만을 남겨 두고 말이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가 얼마나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패장(敗將) 요리토모는 이제 1천여 명 남짓으로 줄어든 초라한 병력을 이끌고 주군을 맞이했다. 그에 비해 동맹군의 병력은 그렇게 큰 변동이 없었다. 중군을 도와 혼전을 벌이며 공멸(滅)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신속히 전장을 이탈한 덕분이었다.

대영주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요리토모의 목을 베었지만, 조금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 분노에 가득 찬 대영주의 시야에 해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대 병력을 앞에 두고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탱게르의 가호가 함께 하는 한 자신들에게 패배는 없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대족장 타르티는 손을 번쩍 들어 적진을 가리키며 자신 있게 외쳤다.

“우리에게는 탱게르의 가호가 함께한다. 저놈들을 완전히 쓸어버려라. 돌격!”

“우와아아아!”

“탱게르! 탱게르!”

해적들은 탱게르를 외치며 적들을 향해 야차와도 같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묵향은 아르티어스와 함께 사사키 겐지의 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 죄도 없는 사사키를 떡으로 만든 것에 대한 사과를 해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 기 때문이다. 물론 잘못에 대한 사과가 좀 더 빨랐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묵향도 무인이었다. 무인은 당당한 상태에서 사과받기를 원하지, 결코 침상에 누워 눈탱이가 퍼렇게 멍든 상태에서 사과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의 그 런 약한 모습을 상대에게 보이기 싫은 것이다. 그렇기에 묵향은 사사키가 적당히 완치된 시점을 골라서, 가능한 한 빨리 그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사키의 도장으로 가던 도중, 그들은 영주의 꾀주머니인 사메지마를 만났다. 사메지마가 자신의 갈 길을 가기 위해 헤어진 후, 묵향은 궁금하다는 듯 아르티어스 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 사메지마라는 녀석하고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했어요?”

아르티어스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 그거? 별거 아니다. 고다이 영지에 침입했던 해적들을 완전히 소탕했대. 그래서 며칠 후면 타다마사 장군이 병력을 이끌고 돌아온다고 하더구나. 그가 돌아오 면 승전을 기념해서 조촐한 연회를 베풀 텐데, 그때 참석해 달라고 부탁하더라. 멍청한 녀석. 한 달만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것도 하나 이행 못 하다니……. 돌아갈 배편이 사라져 버렸으니 이제 어떻게 하지?”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 떠올리기도 싫은 그때의 기억이…, 으윽 멀미라도 시작된 듯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놈의 배 얘기는 두 번 다시 하지 마요.”

묵향이 사사키의 도장에 도착했을 때, 도장에 있던 무사들의 눈에는 흉광이 번뜩였다. 물론 스승을 그렇게 만든 자에 대한 원한과 복수에의 갈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섣불리 손을 쓰지는 못했다. 차원을 달리하는 검객을 상대로 드잡이를 해 봐야 헛일이겠지만, 이유는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복수는 그들에게 있어서 의무였다. 설혹 그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사사키 선생이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후였기에, 제자들은 스승을 위해 져야만 하는 의무에서 풀려나 있었던 것이다.

제자의 통보를 받은 사사키는 부목을 댄 발을 절뚝거리며 걸어 나왔다. 결코 이런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옳은 선택이 아님을 잘 알지만, 그는 나약함을 보 이기 싫었던 것이다. 사사키는 발에서부터 전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영주님께서 당신께 중요한 자리를 맡기셨다고 전해 들었소.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 나누면서 얘기합시다.”

아르티어스가 묵향을 위해 사사키의 말을 통역해 줬다. 바로 그 때문에 묵향이 자신과 함께 온 것이니까. 하지만 묵향에게 곧이곧대로 전할 아르티어스는 아니었 다. 영주가 검을 주며 자리를 맡긴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차차 아들놈을 설득할 생각이었으니까 말이다.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나누면서 얘기하자는데?”

묵향은 사사키를 따라 실내로 들어갔다. 사사키는 절뚝거리며 도장을 가로질러 자신이 기거하는 내실로 묵향 일행을 안내했다. 사사키를 따라 내실로 들어서는 순 간 묵향은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劍(활인검)」

내실의 벽 한쪽에는 커다란 족자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유려한 필치로 活人劍」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묵향의 눈에 살짝 물기가 어렸다.

“크하하하하핫!”

갑자기 묵향은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찾은 것이다. 중원의 글자를 쓴다는 것은 곧 중원이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기쁨에 들뜬 묵향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자, 제어되지 못한 공력이 사사키의 도장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흡사 지진이라도 난 듯 사사키의 도장이 요동쳤다. 도장의 생도들 은 귀를 틀어막고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단 두 명.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은 둘밖에 없었다. 사사키는 오랜 수련을 쌓은 무인답게 다리가 후들거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참아 내고 있었다. 묵향을 바라 보는 그의 눈에는 강한 불신이 어려 있었다. 저것이 도대체 인간이란 말인가?

사사키에 비해 아르티어스는 멀뚱히 묵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이 녀석이 미쳤나? 도대체 아들놈이 왜 이러는지 이해하기 힘든 아르티어스 어르신이었다. 묵향의 웃음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웃음을 멈춘 묵향은 고개를 획 돌려 아르티어스를 노려봤다. 불타오르는 듯한 묵향의 시선에 아르티어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도대체 왜?”

아르티어스를 한참 노려보던 묵향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죠?”

아르티어스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을 바로 바라볼 수 없어서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던 아르티어스의 눈에 한자가 쓰인 족자가 보였다.

‘이런 젠장! 저것 때문이었군. 눈에 띄는 것들은 모두 다 영주에게 부탁해서 없애 버렸는데, 설마 여기에도 있었을 줄이야……..

아르티어스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왜 나를 속였던 거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아들을 보며, 난감하기만 하던 아르티어스.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리던 그에게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한 끝내 주 는 생각이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일부러 한숨을 푹 내쉰 후 진지하게 말했다.

“휴~! 내가 너를 속이고 싶어서 속였던 것은 아니다.”

“그럼 뭐예요?”

“그게 말이지. 여기서 말하는 대국(大國)이라는 게 바로 네가 가고 싶어 하는 송나라란다. 그런데 그곳과 여기는 아주 넓고 험한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서…….” 바다라는 말에 묵향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그런데 알다시피 너는 뱃멀미가 심하잖니. 그래서 네가 너무 상심해할까 봐 숨기고 있었던 거란다.”

그 말에 묵향은 풀이 죽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죠?”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대신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맹세만 해라. 그럼 내가 곧장 그곳까지 빠르면서도 편안하게 실어다 주마. 물론 아주 빠르게 말이다. 어때?”

“이런 제기랄!”

숙소로 돌아온 후에도 묵향의 두근거리는 마음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드디어 찾은 것이다. 묵향은 숙소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때는 완 연한 봄이었다. 숙소 앞 작은 정원에는 이름 모를 화초들이 저마다 소담한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리고 정원에 심어진 작은 벚나무에서는 몇 개 남지 않은 하얀 꽃잎들이 눈처럼 떨어져, 바닥에 점점이 흰 점을 수놓고 있었다.

묵향의 가슴은 두근거렸지만, 그의 차가운 이성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바다……. 그놈의 바다가 문제였다. 묵향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흰 점이 군데군데 찍혀 있기는 했지만, 하늘은 파랗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고생했던 그 망할 놈의 바다처럼.

“젠장, 날씨 한번 더럽게 좋구먼.”

무심결에 묵향은 그 말을 중원의 언어로 내뱉었다. 아마도 중원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때 자신의 곁에 서 있던 하녀가 살짝 고개를 까딱거 리는 것을 묵향은 놓치지 않았다.

마사코 또한 여태껏 자신의 상전들이 단 한 번도 중원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방심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무심결에 그에 반응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곧장 마사코에게 날아왔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 계집이 송나라 말을 알고 있었잖아.”

마사코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대답했다. 그녀의 억양은 중원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간드러지는 것이었다.

“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물어보시지 않으셨기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맞기는 했다. 뭔가 속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랬지. 그건 내 실수였어.”

마사코는 변명을 늘어놨다.

“영주님께서는 중원에서 오신 분들이라고 그쪽 말을 할 줄 아는 저를 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이상한 나라의 말을 쓰시는지라, 혹여 대국 말을 모르시 는 줄 알고…….”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묵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맞아, 듣고 보니 그렇군.”

잠시 뭔가 골똘히 생각한 다음, 묵향은 그녀에게 말했다.

“대국은 어느 쪽에 있느냐?”

“제가 듣기로는 서쪽으로 오랫동안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여기서 북쪽으로 항해해서 고려에 도착한 다음 거기서 육로나 해로 로 갑니다.”

“그랬군, 그랬어. 처음부터 잘못 온 거였어…….”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묵향은 문득 마사코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국으로 가는 배는 어디서 탈 수 있지?”

“대국으로 가시게 말입니까?”

“물론이지.”

마사코는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었는지 지체 없이 대답했다.

“배는 후쿠오카로 가면 타실 수 있을 겁니다. 무역은 그곳에서만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대국으로 바로 가는 배는 없고, 고려로 가는 배라면 구하실 수 있을 겁 니다.”

“고려라…….”

마사코는 묵향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언제 떠나실 겁니까?”

“그건 왜 묻느냐?”

수상하다는 듯한 눈빛을 던지고 있는 묵향을 향해, 마사코는 변명을 늘어놨다. 그녀는 대국과의 밀무역을 위해 영주가 키운 가신들 중의 하나였다. 대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온 지금 그녀는 그것을 놓칠 수 없었다. 일단 그 이후의 상황은 대국에 도착한 후에 천천히 궁리를 해 보면 되지 않겠는가.

“그건…. 저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뭐? 네가 왜 따라오겠다는 거냐?”

“저는 영주님께서 주인님께 하사하신 몸종이니까요.”

“자신의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야. 아무리 영주의 명령이 그렇다고 해도 굳이 나를 따라나설 필요는 없다. 영주한테는 내가 잘 말해 주겠다.” 말을 하는 묵향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사코를 설득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사코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저는 가고 싶습니다.”

묵향은 잠시 마사코를 지그시 바라봤다.

“왜 따라오겠다는 것일까? 가 봐야 뭐 좋은 일이 있다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가 따라온다면 그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어를 할 줄 아는 자는 쉽게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왜국어를 할 줄 아 는 자는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 만큼 왜국어와 한어를 함께 구사할 수 있는 그녀라면 아주 쓸모가 있지 않겠는가.

“정 따라오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