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9권 10화 – 대(代)를 이어가는 우정
대(代)를 이어가는 우정
처음 묵향이 아버지의 안다라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들었을 때, 테무진이 느낀 감정은 고마움이었다. 다른 안다들은 모두들 등을 돌리는데, 묵향만은 자신에게 아 낌없는 도움을 베푸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하지만 그건 그가 개인적으로 느낀 감정이었을 뿐, 부족의 족장인 입장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언제든지 부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에게 등을 돌릴 수 있는 상태였다. 원래가 몽고라는 대지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다 보니 테무진은 고마 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물정 모르고 도움을 주는 묵향을 멍청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테무진은 묵향과 함께 생활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이 조금씩 싹트고 있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묵향이 지니고 있는 지식도 지식이었지만, 여러 가지 일이 벌어졌을 때 그때그때에 맞는 정확한 판단과 그것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추진력은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 었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 어떤 몽고족보다도 더욱 잔인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부하들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배려하여 최상의 상태로 전투에 임하도 록 만들었다. 또, 부하들 각자가 지닌 장점들을 재빨리 파악하여 그들을 적재적소에 투입하여 활용함으로써 부하들이 지닌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 다.
그렇다 보니 묵향이 이곳에 머물면서 거의 사흘이 멀다 하고 전쟁이 벌어졌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고, 부족의 전사(戰士) 수는 그가 오기 전보다 세 배 나 늘어나 있었다.
어느 날 묵향은 테무진에게 말했다.
“이번 공격 목표는 바르탄 부족으로 하지. 인근에 있는 부족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니까 그들을 공략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게야. 나는 이 번에 구경만 할 테니 자네가 알아서 처리해 봐.”
일종의 시험이었다. 묵향은 자신이 가르쳐 준 지식들을 테무진이 제대로 활용하는지 알아 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테무진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존경해 마지 않는 아버지의 안다에게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신을 믿고 그토록 많은 것을 베풀었는데 말이다.
테무진은 곧장 밖으로 나가 젤메를 불렀다.
“자네가 20명을 이끌고 가서 바르탄 부족을 정찰해라.”
“옛.”
다음 날 정찰을 마친 젤메가 돌아왔다. 젤메의 보고를 찬찬히 들은 테무진은 핵심적인 부하 몇을 불러들여 작전을 수립했고, 그것을 묵향에게 들려줬다. 그런 다음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바르탄 부족을 치기 위해 떠났다.
테무진이 바르탄 부족을 공격한 것은 대낮이었다. 왜 밤에 기습을 가하지 않았느냐 하면, 낮에는 젊은이들의 대부분이 양과 말을 방목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 다가, 밤에 모두 모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밤이 되었을 때가 바르탄 부족을 치기가 더욱 어렵다.
테무진의 부대는 이동하는 도중에 2개로 나뉘었다. 전사의 수로 봤을 때, 적의 수가 훨씬 많기에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각개격파당할 우려도 있었지만, 테무진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바르탄 부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바르탄 부족의 본진을 공격하는 것은 젤메에게 맡기고, 테무진은 부하들을 이끌고 외곽으로 빠졌다. 그리고 바르탄 부족으로 통하는 넓은 길을 골라 커다란 말뚝 을 두 개 박았다. 물론 말뚝 근처에 구덩이를 파고, 그 위를 풀로 잘 덮어 표시가 나지 않도록 했다. 그런 다음 말뚝의 양쪽에 병사 하나씩을 배치했다.
덫이 완성된 후 테무진은 기다렸다. 아마 조금 있으면 젤메가 적들에게 쫓겨서 이쪽으로 달려올 테니까 말이다.
몽고족의 경우 집에 양식을 대량으로 쌓아 두는 것도 아니고, 금은보화를 쌓아 두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말과 양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식량이었고, 힘든 겨울을 보낼 수 있게 해 주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렇기에 부족의 전사들은 모두 말과 양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을 갖춘 채 방목지에서 지낸다. 마을에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여자나 어린애, 혹은 노인들뿐인 것이다. 그곳을 젤메가 이끄는 기마대가 덮친 것이다. 젤메는 그곳에서 오랜 시간 지체할 여유가 없 었다. 파오 몇 채를 불태우고, 남아 있는 전사나 늙은이들을 죽였다. 어차피 늙은이들은 필요 없으니 지금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런 다음 주위를 둘러봤다.
잠시 후 사방에 흩어져서 말과 양을 방목하던 바르탄 부족의 전사들이 용맹스러운 기세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보자마자 젤메는 부하들을 이끌고 도망 치기 시작했다. 젤메가 이끄는 기마대가 도망치는 것을 본, 바르탄 부족의 기마대도 맹렬히 추격해 오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본거지를 불태우고, 또 동족들을 학살 한 놈들이니 추격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왔다.”
테무진의 명령으로 말뚝 근처에 숨어 있던 몽고 전사들은 젤메의 부대가 통과한 후, 곧바로 말뚝 사이에 걸쳐져 있던 줄을 잡아당겼다. 그런 다음 재빨리 밧줄을 말뚝에다가 단단히 묶었다.
젤메의 기마대가 건조한 들판을 전속력으로 통과한 후였기에 희뿌연 먼지가 온통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밑에 쳐져 있는 밧줄이 보일 리가 만무하 다. 앞쪽에서 달려가던 수십 필의 말들이 밧줄에 걸려 나뒹굴고 난 다음에야 후미는 가까스로 말을 멈출 수 있었다.
“공격!”
바로 그때, 그 근처 야트막한 언덕을 엄폐물 삼아 뒤쪽에 숨어 있던 기마대가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활에 화살을 먹여 시위를 가득 당겼다. 몽고 활은 활 을 만들 좋은 나무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가, 그것을 잘 만드는 장인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니 그 성능만으로 따진다면 정말 형편없는 무기라고 할 수 있었 다. 아무리 힘껏 쏴 봐야 그 사거리는 50보도 채 안 된다.
하지만 이 장난감 같은 활을 가지고 마상 사격을 한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활의 크기가 작기에 휴대하기 편하고, 연사 속도가 아주 빨랐다. 흔들리는 말 위 에서 아무리 훌륭한 활을 가지고 쏜다고 해 봐야 제대로 맞출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기에 사거리는 짧더라도 좀 더 빨리, 더욱 많이 쏠 수 있는 활이 그들에게는 더 욱 유용했던 것이다.
밧줄에 막혀 우왕좌왕하고 있는 바르탄 부족의 전사들에게 화살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오른편에서 대규모의 적들이 나타나 화살을 쏘며 돌진해 오는 것 이 보였다. 그리고 방금 전에 부리나케 도망치던 녀석들도 말머리를 돌려 자신들을 덮쳐 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적이 쳐 놓은 덫에 걸린 것이다.
이 정도까지 진행된 상태라면 그 뒤는 안 봐도 뻔하다. 기마대가 지니는 최고 강점은 타인보다 높은 곳에서 싸울 수 있다는 이점과 그 속도에 있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그들에 비해 두 방향에서 돌진해 들어간 테무진의 부하들이 몇 배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바르탄 부족의 전사들은 자신들이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 하고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바르탄의 부족민들이 밧줄에 묶인 상태로 꿇어 앉아 있다. 테무진은 바르탄 부족의 주력 부대를 격멸함과 동시에 사방에 병사들을 보내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재산, 즉 말과 양을 약탈했다. 그리고 본진에 남아 있던 그들의 처자식의 운명 또한 그와 다를 바 없었다.
약탈물들을 한곳에다가 잘 정리해 놓은 후, 테무진은 그것을 모든 부족민들에게 골고루 나눠 줬다. 보통 상대편 부족을 정벌했을 때, 약탈물은 거의 족장이나 그의 측근들이 독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몽고 세계에서도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뿌리 깊게 내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몽고 사회는 핏줄이 매우 중시되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의 아들인지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테무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이익 분배 방식을 과감하게 깨 버렸다. 그도 과거에는 다른 부족들처럼 약탈물을 나눴었지만, 묵향을 만난 후에 그 방식을 바꿨다. 마교의 경우 능력 위주의 사회가 아닌가. 그렇기에 묵향이 이익 분배 방식을 그렇게 바꾸는 것이 좋을 거라고 조언했던 것이다.
그렇게 바꾸고 나서 보니, 평상시에는 몸을 사리던 하층민들이 자신의 명령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싸우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죽거나 다치더라도 승리 를 거둔다면 열심히 싸운 만큼의 보상이 뒤따른다는 것을 이해한 뒤부터 그들은 테무진 부족의 강인한 전사로 거듭났던 것이다.
약탈물의 분배가 다 끝난 후, 테무진은 묵향에게 다가가 그의 조언을 청했다. 어머니인 호에룬에게 묵향이 아버지의 안다라는 사실을 들은 이후, 묵향을 향하는 테 무진의 대접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마치 아버지를 대하는 듯했던 것이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묵향은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는 타고난 전사일세. 내가 더 이상 알려 줄 것이 없을 정도야.”
존경하는 스승의 칭찬에 테무진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났다.
“과찬이십니다.”
“특히나 노획물의 분배 방식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네.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뒤처리는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을 언제나 명심하도록 하게.”
묵향의 조언에 테무진은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자나 깨나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네의 부족민도 좀 있으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될 게야. 지금은 수가 많지 않기에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지금의 체계로는 효율적인 통제가 어려울 거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나?”
물론 테무진도 묵향의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테무진이 느끼기로는 지금 현재 체제만 유지해도, 이 상태에서 부족의 수가 10배가 더 늘어난다고 해도 부족은 효율 적으로 움직일 것이 확실했다. 그렇기에 지금껏 그런 방향으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스승의 조언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혹시 생각해 두신 것이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묵향은 마교의 예를 들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본교는 효율적인 명령 체계를 위해 부하들을 여러 등급으로 나눠 둔다네. 본교에는 6개의 무력 단체가 있고, 그것들은 여섯 명의 대주들이 맡고 있지. 그리고 각 무력 단체는 그 규모에 따라 10개에서 20개의 대로 나눠 대장이 지휘하지. 나는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할 상황이 오면 대주에게 명령하면 돼. 그러면 대주들은 휘하에 있는 대장들에게 명령하고, 대장들은 그 밑에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하는 식이지. 이렇게 하면 내 명령은 저 말단에 있는 무사들에게도 신속하게 전달되지. 자네도 이와 같이 자네가 이끄는 전사들이 효율적으로 자네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도록 체계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할 걸세.”
잠시 묵향의 말을 곱씹어 보던 테무진은 곧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러니까 부족의 전사들을 여럿으로 나눠 각각의 장을 두고, 그 장들에게만 제가 명령을 내린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그렇게 되면 자네는 그자들만 통제하는 것으로 전체 부족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테무진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그런 좋은 방법이 있을 줄이야……..”
그날 밤 테무진은 부족 내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부족을 체계적으로 분리하는 것에 대해 토론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보
고크와 밍칸이다.
한어로 번역한다면 보고크는 30호장, 밍칸은 3백 호장이다. 30호장이나 3백 호장은 각자에게 배당된 부족들을 이끌고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신선한 풀을 찾아 방 목을 한다. 그러다가 유사시에 테무진이 소집 명령을 내리면 병력을 차출하여 이끌고 달려오는 식인 것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되면 언제나 얼굴을 맞대고 협동해서 유목을 하던 처지인 만큼 화합도 잘될 것이 분명했다.
묵향이 테무진의 거처에 자리 잡은 지도 어언 두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풍요롭던 가을이 끝났음을 알리듯 새벽에는 서리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묵향은 어제의 전투를 보고 이제 자신이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자신이 없더라도 테무진이 잘해 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찾으셨습니까? 교주님.”
자신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이팔삼 대장에게 묵향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내 자네에게 한 가지 임무를 내리고자 불렀네.”
임무라고 해봐야 이제 중원으로 돌아가겠다는 통보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팔삼 대장은 기운차게 대답했다.
“옛, 하명하십시오.”
“본좌는 내일 중원으로 떠나고자 한다.”
교주의 명령에 이팔삼 대장은 희열에 넘쳤다. 이제 드디어 본교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고개를 숙이며 우렁차게 외쳤다.
“옛, 수하들에게 준비하도록 이르겠습니다.”
“아니, 자네는 수하들과 남아 테무진을 돕도록 해라.”
그 명령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지 이팔삼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찼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가?
“예?”
“자네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남아 테무진을 도우란 말일세.”
아무리 교주의 명령이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그는 완수해야만 했다. 그게 본교의 율법이었으니 말이다.
“존명!”
묵향은 자신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이팔삼에게 이곳에서 해야 할 일들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테무진의 세력 규합, 타타르의 멸망, 그다음 목표는 금을 괴롭히는 것 이었다. 변방이 소란스러워지면 금은 싫어도 정예군을 몽고와의 접경에 배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금과 몽고가 접하고 있는 땅은 너무나도 광대했다. 그 모두를 지키려면 막대한 병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금의 세력이 한곳에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이팔삼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먼 이국땅에서 생활하려면 고생이 심할 것이다. 하지만 자네가 앞으로 하는 모든 일이 본교에 크게 도움이 되는 일임을 언제나 명심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 라.”
자신에게 교주가 이렇게까지 말해 오자 이팔삼은 감격스러운 어조로 외쳤다.
“옛, 교주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자네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내리라고 믿기에 이곳에 남으라고 하는 것이야. 본좌의 말을 이해하겠는가?”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 묵향은 파오를 나와서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다음에 언제 다시 오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하부르와 그녀 의 아들이 살고 있는 곳이니까 말이다.
묵향이 걸어 나오자 그곳에는 초류빈과 그의 독립 호위대인 초연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떠난다는 생각 때문인지 초류빈의 안색은 어느 때보 다도 희색이 만연했다.
“자, 오르시지요.”
묵향이 말에 오르자 테무진의 명령에 따라 커다란 사발이 하나 운반되어 왔다. 그리고 그 사발에는 마유주가 잔뜩 들어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묵향의 눈썹이 미미 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추억 삼아 마시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웬만한 솥단지만큼 큰 사발에 든 마유주를 마신다는 것은 거의 고문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던 것이다. 테무진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 단숨에 쭉 들이켜십시오.”
이걸 마셔야 하나, 아니면 물리쳐야 하나. 묵향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교주와 부교주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나와 있던 마교도들 중에서 앞으로 나서는 인물이 있 었다. 그는 바로 막이첨이었다. 몽고의 풍습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난감해하고 있는 교주를 향해 조언을 건네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하급 무사 주제에 하늘같은 교주님께 참견하는 것은 거의 불경죄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묵향과 지내 오며 묵향의 소탈한 성격을 막이첨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좋은 상관이었던 것이다.
“교주님, 빨리 그걸 다 드셔야만 합니다.”
묵향은 딱딱한 어조로 답해왔다. “왜?”
“이것도 다 테무진 족장이 교주님께서 제발 며칠만이라도 더 머물러 달라고 붙잡고 싶어 하는 심정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묵향은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군. 그냥 며칠만 더 계시다가 가라고 말하면 될 것을, 저렇게 엄청난 마유주를 마시라고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몽고에는 귀한 손님이 길을 떠날 때, 손님이 말에 탄 후 대접에 마유주를 가득 담아 건네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 말에 묵향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별 말도 안 되는 풍습이 다 있군.”
막이첨은 자신의 마음을 제발 알아 달라는 듯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이건, 귀한 손님을 하루라도 더 붙잡고 싶은 순박한 마음의 표출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걸 다 마신 다음 술에 취해 말에서 떨어지거나, 다 마시지 못하면 여기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는 규칙이 붙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간절한 소망을 지닌 채 건네는 그의 술을 마다하시면 안 됩니다, 교주님. 만약 그렇게 되면 교주님 께서 지금까지 이 땅에서 공들여 이룩하신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연 순박한 마음의 표시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속 보이는 행위가 아닌가? 두 사람이 낑낑거리며 들고 있을 정도로 큰 마유주 사발이라니. 저 걸 다 마시고도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엄청난 마유주 사발을 들이밀 정도로 자신을 붙잡고 싶어 하는 테무 진의 마음이 엿보이는 것 같아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묵향이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호기롭게 몽고어로 외쳤다.
“풍습이 그렇다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줘야겠지.”
그 커다란 사발에 가득 담긴 마유주를 쉬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켜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는 테무진의 눈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설마 저것을 다 마실 수 있 다는 말인가? 부족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이며 우람한 덩치의 소유자인 젤메라 할지라도 저 큰 사발에 든 마유주를 반만 마셔도 인사불성이 될 텐데. 그런데, 어찌 저렇게 체구도 작은 사람이 저것을 다 마실 수 있다는 말인가? 도저히 경악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끄억! 한 사발만 더 먹인다면 사람 잡겠군. 자, 이제 됐는가?”
일단 사발이 깨끗하게 비자 테무진은 풍습에 따라 잘 가시라는 인사를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아직까지 절망감에 차 있지는 않았다. 아직 한 가지 남 아 있는 것이다. 과연 저걸 다 마시고 말을 탈 수 있을까? 한 번에 마셨으니 취기는 조금 더 있다가 올라올 것이다. 말 타고 가다가 취해서 떨어지면 하루를 더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묵향은 테무진의 그런 기대를 무참하게 무너뜨렸다. 기운차게 말을 몰아 순식간에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보며 테무진의 눈에는 촉 촉하게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고 어떻게 저렇게 기운차게 떠나버린단 말인가? 정말이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아버지의 안다여. 다음에 만났을 때는 몽고를 발아래 둔 대족장으로서 당신을 성대히 맞이할 것을 맹세합니다.’ 상념에 잠겨 있던 테무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도저히 술 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군. 젠장, 다음에는 곱절은 더 큰 사발을 준비해 둬야겠어.”
이건 완전히 사람을 잡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기에 그 말을 옆에서 들은 막이첨은 쓴웃음을 감추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