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9권 5화 – 진실과 거짓 사이
진실과 거짓 사이
요즘 근처에 마적단이 나타났다느니, 떼강도가 출몰했다느니, 산적들이 횡행한다느니 하는 불안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적은 재산이나마 지니고 있는 자들은 그 소문에 몸을 움츠려야 했다.
옛날이 정말 좋았다. 강력한 대 송제국의 힘이 나라 구석구석까지 뻗치고 있을 때가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에는 엇나가 는 사람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방 포두는 치안이 허술하다고 난리를 떠는 지금이 오히려 더 좋았다. 요즘 그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하루하루가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이봐, 박 영감. 며칠 전에 땅을 샀다면서? 그렇다면 세금을 내야 할 거 아냐?”
자신의 말에 박 영감은 식은땀을 흘리며 애절한 목소리로 대답해 왔다.
“세금이라면 벌써 다 드렸지 않습니까요? 방 포두 나으리.”
방 포두는 짐짓 고개를 들어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이런 짓을 한두 번 해 보는 게 아니다 보니 요령이 생긴 것이다. 이럴 때에는 그런 얘기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딴청을 피우는 것이 돈을 뜯어내는 데 훨씬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흥, 이런 능구렁이 같으니라구. 애절한 목소리로 말하면 내가 마음이 약해질 줄 알았나?”
하지만 내심과는 달리 방 포두는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크흐흣, 이봐. 세금이라는 것은 말이야. 황실에 납부해야 하는 것만이 아니야. 자네가 도둑이나 강도 걱정 없이 하루하루 평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도 다 이 방 대이(方大二) 어르신이 노력한 결과라는 점도 알아줘야지. 황실에서 자네 집에 도둑이 드는지 신경 써 주는 건 아니거든. 안 그래?”
황실의 모든 이목이 금에 쏠려 버린 지금, 이곳 변경은 무법지대나 다름없었다. 현감도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해서 치부를 하고 있다.
물론 윗사람들이 치부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방대이 포두가 아니었다. 상관의 행동을 본받아 그도 열심히 치부에 동참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어, 얼마나 드려야 합니까?”
“은자 한 냥.”
순간 박 영감의 안색이 허옇게 변하는 게 보였다. 내가 너무 과하게 불렀나? 아니야. 마음이 약해서야 이 사업을 할 수가 없지. 이놈저놈 사정 봐주다가 언제 돈을 모은다는 말인가.
“왜, 못 주겠다는 말인가? 그 땅을 잘 활용하면 그 정도는 쉽사리 뽑아낼 수 있잖아. 안 그래?”
“하, 하지만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방 포두는 자신이 다 알아서 처리해 주겠다는 듯 박 영감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허, 이 사람.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고 있구먼. 설마하니 내가 자네의 처지를 모르고 이런 말을 했겠는가? 걱정 말게. 그저, 여기다가 도장만 꽝 찍으면 된다 네.”
하면서 방 포두가 박 영감에게 은근슬쩍 내민 것은 차용증서였다. 방 포두에게 은자 한 냥을 빌렸는데, 그것을 나중에 갚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그뿐만이 아 니라 차용증서 한쪽 귀퉁이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그 은자 한 냥을 갚을 때까지 매월 상당히 높은 이자를 지불하겠다는 내용까지 덧붙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박 영감은 차용증서를 내려다보며 치를 떨었다. 은자 한 냥을 거저 뜯기는 것만 해도 억울해 죽겠는데, 거기에 고리 대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높은 이 자까지 받겠다는 심보이니 말이다. 이건 완전히 날강도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걸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별의별 트집을 잡아 자신을 괴 롭힐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박 영감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도장을 찍고 있는 것을 방 포두가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포졸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외쳤다.
“방 포두 나으리. 거상(巨商)입니다요, 거상.”
“뭣이?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 거상이 마을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여섯 필의 말이 끄는 수레가 끝이 안 보일 지경입니다요.”
“뭣이? 어서 현감 어른께 통보를…….”
여기까지 말하던 방 포두는 뭘 생각했는지 슬쩍 박 영감의 눈치를 보더니, 포졸의 귀를 잡고 속삭였다.
“현감 어른께 통보는 드렸느냐?”
“아, 아뇨. 먼저 포두 어른께 알려 드리기 위해 달려왔습니다요.”
“그래?”
방 포두는 누구 들은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본 후, 서둘러 박 영감을 돌려보냈다. 물론, 도장이 꽝 찍힌 차용증서를 받고 말이다.
거상인 만큼 그들을 슬쩍 찌르면 상당한 액수가 튀어나오겠지만 그 대부분은 현감의 주머니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몰래 가서 찌르면? 물론 현감이 직접
하는 것보다는 액수가 작겠지만, 현감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얻어먹는 것보다는 훨씬 액수가 크지 않겠는가. 만약 제대로만 걸리면 큰 돈을 만질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입이 무거운 놈들로 20명만 대기시켜라.”
“예?”
“멍청하기는! 한두 번 해 보는 일도 아닌데 뭘 그러느냐? 척하면 알아들어야 할 것이 아니냐. 물론 이번 건은 좀 덩어리가 큰 만큼 아이들을 세심하게 골라야 할 것 “이야.”
그 말에 포졸의 눈빛이 음흉하게 빛났다. 그제야 상관의 속셈을 눈치 챈 것이다.
“예, 바로 애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마을 바깥에 집결시키도록 해라. 그리고 다른 녀석들에게는 내가 마을 근방을 순시하러 간다고 하더라고 전하거라.”
“옛.”
어차피 그들을 붙잡아 적당히 구슬려 돈을 뜯어내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었다. 현감이야 관청에 앉아 자신이 뜯어낸 돈을 그저 챙기기만 하지 않는가. 문제는 그들 이 마을에 머무느냐 아니면 그냥 통과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머무르지 않고 마을을 통과한다면 미리 마을을 벗어나는 지점에 가서 기다리다가 그들을 검문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감에게는 그때 자신이 자리에 없어 그들을 검문하지 못했다며 적당히 둘러 댈 생각이었다.
흐흐흐, 드디어 애월루의 향이를 품게 되는구나.
과연 포졸 녀석의 말대로 거대한 상단이었다. 짐이 잔뜩 실린 마차가 도대체 몇 대나 되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마차 주위를 에워싸고 움직이는 호위 무사들이었다. 괴이한 기운까지 물씬 풍기는 것을 보면 상당한 실력자들인 것 같은데, 과연 이들을 건드려도 괜찮을까?
좀 찜찜하기는 했지만 그냥 놔두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저 정도 규모의 상단이라면 은자 열 냥, 스무 냥 정도는 돈도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국가의 녹을 먹 고 있는 포두가 아닌가. 만약 분위기가 이상하면 적당히 둘러대며 빠져나오면 충분할 것이다.
방 포두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천천히 상단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물론 최대한 얼굴 표정을 근엄하게 보이려 애쓰면서 말이다.
“잠깐 멈추시오, 이건 어디서 오는 마차들이오?”
관복을 입고 있는 그의 물음에 장대한 체구를 지닌 사내가 급히 다가왔다. 칼에 난 상처인 듯 보이는 긴 흉터가 뺨에 있어 매우 인상적으로 보이는 인물이었다. “수고들 하시는구려. 이 물건들은 천마신교에서 필요한 물건들이외다.”
하지만 천마신교고, 말꼬랑지 신교고 간에 그런 곳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도 없는 방 포두다. 이곳은 천마신교와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곳이니 말이다. 자신이 들어 보지 못한 상단 이름이었기에 괜히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방 포두는 거만한 표정으로 상단을 쓰윽 둘러보며 물었다.
“천마신교라? 하여간에 목적지와 물품들의 품목이 뭔지 알려주시오. 물론 관에서 발급한 증빙 서류는 갖추고 있겠지요?”
자신이 꼬장꼬장하게 나가자 예상대로 뺨에 긴 상흔이 있는 그 장한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은근슬쩍 전낭 하나를 건네주며 말을 거 는 것이 아닌가.
“수고들 하시는구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일 끝나고 나서 술이나 한잔하시오.”
얼핏 무게를 가늠해 보니 제법 묵직했다. 아마 상당한 액수일 듯싶었다. 이쯤에서 그만둘까? 하지만 곧 방 포두는 생각을 바꿨다. 살짝만 찔렀는데도 이 정도인데 조금만 더 귀찮게 하면 짭짤하게 한몫 챙길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지금 거둬들이는 은자가 모두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니 욕심이 그의 눈을 가렸던 것이다.
방 포두는 우선 받은 전낭을 얼른 품속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장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어, 뭐 이런 걸 다……. 물론, 본관은 편의를 봐드리고 싶지만 뒤에 있는 수하들의 이목도 있는지라…….”
한마디로 몇 푼 더 달라는 요구였다. 뺨에 흉터가 있는 장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몇 개인가의 은자를 더 끄집어냈다. 방 포두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 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지금 뭐 하는 겐가?”
장한은 다급히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참은자를 건네받던 방 포두가 깜짝 놀라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한 주먹감이면 끝날 듯 보이는 비쩍 마른 녀석이 오만한 자세로 서서 퉁명스레 말하고 있 는 것이 아닌가. 한눈에 척 봐도 세상 물정 모르는 대갓집 도련님 같은 인상이었다. 방 포두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쯧쯧, 저런 철없는 놈들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고생하는 거야. 아주 일 잘하고 있구만, 뒤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지 끼어들기는 왜 끼어들어.’
그런데 그 순간 부잣집 도련님의 오만하기 그지없는 건방진 말투에 방 포두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아니기는.. 왜 저런 쓰레기 같은 놈에게 돈푼을 쥐어 주는 거지?”
‘뭣이 쓰레기라고? 감히 나 방대이를 쓰레기라고 불러?”
방대이는 노기 띤 어조로 소리쳤다.
“아니, 감히 이것들이 본관을 쓰레기라고 불러? 좋다. 이것 다 필요 없어.”
방 포두는 장한에게서 건네받았던 은자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다음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험악한 그의 표정과는 달리 방대이의 두 눈은 이리저리 굴러간 은 자들의 위치를 은밀하게 뒤쫓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회수해야 할 테니까.
“얘들아, 저 마차에 실린 짐들이 어떤 것들인지 철저하게 조사해라. 만약 그 속에 금지 품목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너희들 모두 다 껍질을 홀랑 벗겨 주마.”
저들의 수가 많은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자신에게도 수하가 20여 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이 일대는 모두 자신의 관할 구역이다. 거기에다가 내가 누 군가. 나를 감히 쓰레기라고 불러?
내가 버럭 화를 냈으니 저런 세상 물정 모르는 대갓집 도련님 따위는 지금 바짝 겁에 질려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저 뺨에 흉터 있는 장한이 다급히 자신에게 다가올 테고 한두 번 튕기다 못이기는 척하며 은근슬쩍 다시 협상을 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일은 방대이의 계획대로 풀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계속 먹혀 들어갔듯 자신이 화를 내면 이번에도 효과가 확실할 줄 알았다. 관리들과 잘 지내려는 것이 상 인들의 기본 태도니까 말이다. 하지만 밥 맛 없게 생긴 호리호리한 놈은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콧방귀를 뀌었다. 그것이 방 포두를 조금 두렵게 만들었다. 헉! 이거 혹시 잘못 건드린 거 아냐?
“흥! 껍질을 벗겨 주겠다고? 얘들아.”
그 말에 주위에 서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하명하십시오!”
너무나도 절도 있는 그들의 동작 하나만으로도 방 포두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 건드려 놓은 듯하다. 재빨리 사태를 파악한 방 포두 는 슬금슬금 뒷걸음치며 중얼거렸다.
“뭐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핫핫, 유쾌한 여행이 되기를 빌겠소이다. 얘들아, 가자.”
그들이 몇 발자국 가지도 못했을 때, 뒤에서 예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잡아서 꿇려라.”
“존명!”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무사 10여 명이 달려왔다. 그 순간 후위에 서 있던 포졸들 중에서 제일 실력이 뛰어나다는 아삼(兒三)이 재빨리 칼을 빼들었다.
하지만 그는 칼을 채 휘두르지도 못했다. 어느새 두들겨 맞았는지 길게 쭉 뻗어 버렸고, 칼은 저쪽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가 버렸다. 도무지 방 포두가 생각 하고 있던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물론 방 포두도 잡히지 않기 위해 반항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무지막지한 주먹이 자신의 배에 꽂혔다.
퍼억!
“크어어억! 쿨럭쿨럭!”
너무나도 통증이 극심해서 방 포두는 한동안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들은 양쪽에서 방 포두의 손을 붙잡아 끌고 갔다. 그 호리호리한 녀석은 자신의 앞에 꿇려져 서 핼쑥하게 질려 있는 방 포두 일행을 보며 이죽거렸다.
“오기는 쉽게 왔는지 몰라도, 갈 때는 너희들 마음대로 갈 수 없지. 자, 기왕에 껍질 벗기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게 어떤 것인지 본좌가 친히 가르쳐 주마.” 엄청난 실력 차. 거기에다가 상대방은 5백여 명이나 된다. 옛날이었다면 상부에 통고해서 어림군이라도 출동시킬 여지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자신들도 상부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뇌물을 먹었지만, 역으로 자신들의 통제력을 상회할 정도의 무력을 지닌 채 반항하는 자들이 생겼을 때 그것을 막을 방법이 하나도 없음을 방 포두는 깨달아야만 했다.
방 포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하, 하늘을 몰라 뵙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애처롭게 용서를 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비웃음뿐이었다.
“버러지만도 못한 새끼들. 여봐라.”
“옛.”
“이런 쓰레기들이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않게 해라.”
“존명!”
“그리고 저놈은 특별히 껍질을 홀랑 벗겨 주도록!”
그러면서 그는 방 포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방 포두 자신은 성질난 김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몽땅 다 뺏겠다는 의미에서 ‘껍질을 홀랑 벗기겠다’는 표현 을 썼지만, 상대의 말은 말 그대로 껍질, 그러니까 가죽을 벗기겠다는 소리였다. 그 순간 방 포두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가죽을 벗긴다고? 어찌 사람 가죽 을 벗긴다는 말을 저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저놈들은 도대체 사람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백정들이라는 말인 가.
방 포두는 한쪽 구석으로 질질 끌려가면서도 애절한 목소리로 악착같이 용서를 구했다.
“대, 대인 제발 살려 주십시오. 대이이이인!!”
하지만 흑의를 입은 무사들은 인정사정없었다. 퍽! 퍽!
“크아아악!”
우선 모진 구타가 시작되었다. 방 포두와 그의 부하들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지만 하나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모두들 피투성이가 되어 기절하기 직전 쯤 되어서야 주먹질과 발길질이 멈췄다.
그리고 그들 중의 한 명이 품속에서 작은 칼을 쓱 꺼냈다. 비도(飛刀)로 보이는 그 칼은 아주 얇고도 날카로웠다. 그는 칼날을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음침한 목소리 로 이죽거렸다.
“이봐, 내가 좀 실수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더라도 참으라구. 나도 사람 가죽 벗기는 것은 처음이라서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방 포두는 극심한 공포를 도저히 참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최근 마교의 동태를 기록해 놓은 보고서들을 읽어 보던 옥화무제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이건 도대체 뭐죠?”
총관은 옥화무제 옆으로 다가가서 어떤 보고서인지 확인한 후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설명했다.
“예, 일단의 마교 세력이 북상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수의 수레에 뭔가를 잔뜩 싣고 수송하고 있는데, 그게 뭔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옥화무제는 보고서를 찬찬히 훑어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상하군요. 이들이 하는 행동은 완전히 ‘내가 이리로 가고 있소’하면서 광고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겨우 자성만마대 1개 대뿐인 전력만으로 말이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마교에서 요 근래에 출발한 또 다른 고수들이 없는지 철저히 조사해 보라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미끼인 듯 보이는 그들 주위도 철 저히 수색해 보라고 일러두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건진 것이 있었나요?”
총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옥화무제에게 보고서를 올리기 전에 자신도 그것을 읽어 보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총타와 아예 연락을 주고받기를 포기한 듯, 그 어떤 연락도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흐음…, 이해하기 힘들군요.”
잠시 이리저리 궁리하던 옥화무제가 입을 열었다.
“보고서대로라면, 그들은 몽고 쪽으로 가고 있는 모양인데…….”
“예, 방향만으로 따진다면 몽고 쪽으로 가는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몽고 남부의 케레이트 부족 같은 경우 돈만 많이 준다면 충분히 포섭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 다. 하지만 속하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행동이었습니다. 엄청난 마차를 몰고 가면서도 호위 무사가 겨우 자성만마대 1개 대뿐이었고, 더군다나 가는 길에 포두의 가죽을 벗긴다든지 하는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금이 자신들의 행동을 지켜봐 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총관은 잠시 옥화무제의 눈치를 살피며 혀로 입술을 축인 뒤 계속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속하의 생각으로는 양양성으로 가고 있는 흑풍대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연막을 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장인걸의 시선을 몽고 쪽으로 돌 려놓고, 양양성 일대를 쓸어버리겠다는 계획이 아니겠습니까?”
옥화무제는 다시 한 번 보고서를 쓱 훑어보며 말했다.
“그게 가장 신빙성 있는 추리겠죠. 마교 쪽에서는 본문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흑풍대를 지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사실 흑풍대를 향한 장인걸의 모든 이목은 본문이 막아 주고 있는데 말이에요.”
“마교는 아직까지도 그걸 모르고 있을 겁니다.”
사실 무영문이 흑풍대의 이목을 가리거나 지원을 해 주고 있는 것들은 모두 다 마교와 사전에 협의가 된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마교 쪽에서는 그 사실을 전혀 알 지 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무영문의 움직임은 은밀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옥화무제가 고개를 들더니 총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몽고로 가고 있는 마교 세력에 대한 정보도 장인걸이 포착하지 못하도록 공작을 펼치도록 하세요.”
그 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지 의아한 표정으로 총관이 물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장인걸의 세력이 분산되면 분산될수록 더욱 좋지 않습니까?”
그 말에 옥화무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만약 장인걸이 무너지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겠어요? 마교와 무림맹은 또다시 무림을 두고 다퉈야 해요. 이번에 마교가 더 많 은 피해를 보도록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20여 년 동안 축적된 마교의 힘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하니까 말이에요.”
그 말에 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그렇군요. 마교와 무림맹의 세력이 모두 약해질수록 본문의 세력은 강성해질 테니까 말입니다.”
무영문의 찬란한 미래가 보이는지 총관은 미소를 씩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 미끼로 던져진 자성만마대 1개 대는 태상문주님의 보살핌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것도 모르겠군요. 대신 양양성에 모인 자들은 그만큼 더 고생을 하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게 미끼가 아닌 진짜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 결정 때문에 북방의 판도가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리라는 것 또한 그들 은 알 수 없었다.
묵향 일행이 뇌물을 요구한 포두와 포졸들을 어떻게 했는지는 곧이어 그 일대에 소문이 쫙 퍼져 버렸다. 대부분의 포두들은 묵향 일행이 나타나자마자 재빨리 길 을 열어 줬다. 하지만 그중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인물들도 있었다.
묵향 일행이 변방의 요지라고 할 수 있는 주천(酒泉)을 통과하고자 할 때였다. 1백여 명이 넘는 포졸들이 십수 명의 포두들의 지휘를 받아 가며 활과 창 등으로 무 장을 갖춘 채, 방어선을 치고 묵향 일행을 맞이했다.
포두들 중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앞에는 창과 칼을 든 포졸들이, 뒤에는 활을 든 포졸들이 도열해 있었다. 활을 든 포졸들은 활시위를 가득 당긴 상태 여서 명령만 내리면 곧장 발사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냐?”
여태까지 봐 오던 부패한 포두들과는 그 움직임부터 판이했다. 포졸들도 포두의 명령에 따라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묵향은 뒤에서 아주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들이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대한 체구의 이팔삼 대장이 앞으로 쓱 나서며 대꾸했다.
“우리들은 몽고와 교역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오.”
“그대들이 이전에 벌인 만행은 잘 알고 있겠지? 감히 국가의 녹을 먹는 관리에게 상해를 입히다니, 그것은 황실의 권위를 넘보는 행위임에 분명하다. 이 상단의 책 임자는 누구인가, 당장 앞으로 나와 오라를 받거라.”
이팔삼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교주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교주를 보며, 이팔삼은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 즉각 결정했다. “쳐랏!”
이팔삼의 손짓에 1백여 명의 자성만마대원들이 전광석화처럼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포졸들이 정신없이 쏜 화살 수십 발이 날아들었다. 자성만마대가 아무리 마교에서 하급 무력 단체라고는 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포졸들이 쏜 화살에 당할 만큼 만만하지는 않았다.
포졸들은 채 두 번째 화살을 날릴 틈도 없이 제압당했다. 앞에서 창이나 칼을 든 포졸들이 뒤에 활을 든 포졸들을 방어해줘야 함에도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기에 벌 어진 일이었다. 약간 무공의 맛을 봤다고 자부하는 포두들도 몇 있었지만, 정식으로 마교에서 수련을 쌓은 자들과는 수준 차이가 벌어져도 너무 심하게 벌어졌다. 특히나 마교도들이 익히는 마공의 특성상 초기 연성 속도는 그 어떤 문파보다도 뛰어났다. 물론 상급 단계로 올라갈수록 더욱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단점 을 무시해 버릴 정도로 그 속도가 지니는 매력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웬만큼 뛰어난 고수들 정도야 수로 밀어 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팔삼 대장은 앞을 가로막고 있던 포졸들을 처리한 후,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여태까지 해 왔듯 정신 좀 차리게 만들어 줘라.”
“옛, 대장.”
어딘가로 끌고 가서 주제 파악 좀 하도록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패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때, 묵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
이팔삼 대주는 재빨리 묵향의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아뢰었다.
“지시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이팔삼에게 대답도 하지 않고, 묵향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곳에는 포두와 포졸들이 꿇어앉아 있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자신들이 어떻게 제압당했는지도 이해 하지 못하는 듯했다.
묵향은 거만한 표정으로 그들을 쭉 훑어본 후 이죽거렸다.
“호오, 이제는 뇌물을 받기 위해 떼거리로 몰려오는구먼. 이 정도 병력을 동원하려면 포두 정도의 힘으로는 안 될 텐데?”
그러면서 묵향은 제일 앞에 꿇어앉아 있는 포두들 중의 한 명에게 물었다.
“여기 현감 놈이 시킨 짓이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포두 한 명이 굵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크흐흐흑! 말세로다. 어찌 이런 무뢰배들이 날뛴단 말인가. 가욕관에 어림군이 주둔하고 있기만 했었어도 네놈들을
“신세타령은 그만 하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지? 여기 현감 놈이 뇌물을 거둬오라고 시키더냐?”
“당치도 않은 말을 하지 말거라. 현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데, 네놈 따위가 함부로 입에 담는단 말이냐.”
묵향은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범인을 말해야 껍질을 벗길 것 아니겠느냐? 자 순순히 이실직고 하지?”
그 말에 포두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현감의 목숨이 걸린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 아니다. 내가 그랬느니라.”
묵향의 눈이 실쭉 가늘어졌다. 부하들에게 이 정도의 충성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 현감이 보통 인물은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다.
“크흐흐흣, 좋다. 현감에게 가서 알아 보기로 하지. 만약 아니라면 죽을 줄 알아라.”
그런 다음 묵향은 고개를 돌려 이팔삼 대장에게 명령했다.
“오늘은 때도 늦었고 하니, 주천에서 묵도록 하지.”
“옛.”
묵향은 포두 한 명을 앞세워 현감의 처소로 달려갔다. 물론 초류빈도 함께였다. 달리 할 일이 없었던 초류빈이었으니 상관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구경도 할 겸, 겸 사겸사해서 따라나선 것이었다.
“댁이 이 지방의 현감이시오?”
갑자기 묵향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40대 초반의 현감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근엄한 표정으로 묵향과 함께 온 포두에게 질문부터 던졌다.
“관 포두, 대체 이자는 누군가?”
현감의 물음에 관 포두는 면목 없다는 듯 대답했다.
“현상 수배된 일행들의 우두머리인 듯합니다, 대인.”
현감은 집무를 수행하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서 묵향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안 그래도 어지러운 변방에서 무슨 일로 소란을 일으키는 것인가?”
“글쎄…, 그냥 상인들이라고 해 둡시다.”
“본관이 보고를 듣기로는 저 청해성부터 시작해서 이곳으로 흘러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상인이라니. 그렇다면 몽고와 상거래를 하기 위해 이동해 온 것인가?” “그렇다고 해 둡시다.”
“그런데, 관의 수색에 불응한 것으로 보아 금지 물품을 거래하는 자들인가?”
현감의 질문이 계속될수록 묵향의 대답은 조금씩 퉁명스러워졌다.
“그럴지도 모르지.”
안하무인격의 상대방의 태도에 분기탱천한 현감은 드디어 노성을 터뜨렸다.
“이런 발칙한! 금지 물품을 밀거래하는 자들이 어찌 관을 이렇듯 업신여긴단 말인가?”
현감의 서릿발 같은 호통에 묵향은 시끄럽다는 듯 귓구멍을 후비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야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고 설쳐대는 관청 놈들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건 그렇고, 얼마면 되겠소?”
그 말에 현감이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뭣이? 그게 무슨 말이냐?”
“얼마를 드리면 지명 수배를 해제해 주고, 이곳을 무사 통과시켜 주겠느냐 이 말이오. 사실, 당신의 부하들은 내 수하들에게 제압당한 지 오래요. 그런 만큼 내 제 안을 따르는 것이 당신 신상에 좋을 거외다.”
현감은 기가 막힌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외쳤다.
“이, 이런 발칙한 놈을 봤나!”
그러자 묵향은 쓱 검을 뽑아 들며 짙은 살기를 뿜어냈다.
“나도 쓸데없이 살생을 즐기지는 않으니 웬만하면 이 정도에서 타협하는 게 좋지 않겠소? 그렇지 않다면 지금 당신을 벨 수밖에 없소.”
“이익! 오냐. 벨 테면 베어 봐라. 관에서는 네놈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 죗값을 치르도록 할 것이다.”
“흐흣, 이곳 현에서는 우리들을 잡을 만한 병력이 없지 않소. 더군다나 어림군은 이곳을 떠난 지 오래지 않소? 자, 어서 선택하시오.”
그러면서 묵향은 검을 현감의 목에 가져다 댔다. 여차하면 벨 기세. 묵향이 내뿜는 짙은 살기에 현감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항복하 지 않았다. 단지 눈을 지그시 감으며 탄식을 터뜨릴 뿐이었다.
“허어, 저런 무뢰배들이 날뛰는데도 어찌할 수 없다니…, 대 송제국의 앞날이 걱정되는구나.”
잠시 그런 현감의 얼굴을 바라보던 묵향은 검을 거둔 후, 자리에 앉으며 사과했다. 사실 방금 전까지 그에게 모질게 대한 것은 상대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이토 록 청렴한 관리가 이런 변방에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그대를 잠시 시험해서 미안하게 생각하오. 나는 대 송제국을 위해서 몽고에 군수 물자를 지원해 주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오.”
그 말에 현감은 감았던 눈을 뜨고 묵향을 바라봤다. 묵향을 향하는 그의 시선에는 불신과 의혹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묵향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
을 이었다.
“몽고를 충동질하여 금의 뒤를 치기 위해서지. 아무래도 변방이 소란스러워지면 금으로서도 모든 병력을 송에다가 쏟아 붓기 힘들어지니 말이오. 자, 이제 대답이 되었소?”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현감은 묵향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이미 포졸들을 완전히 제압한 상태에서 상대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상대에게 지금까지 놀림을 당한 것 같아 화가 나기는 했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상대의 지위는 대단히 높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중대한 사명을 받은 자라면 결 코 신분이 낮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감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황실의 밀명을 받고 움직이는 분이시오?”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소. 하지만, 귀하처럼 청렴한 관리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 말에 현감은 묵향이 황실과 관련된 인물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5백여 명이나 되는 정예 병사를 이끌고 험난한 몽고 벌판으로 갈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포두의 가죽을 벗긴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포두가 뭔가 그만한 죄를 지었음이 틀림없으리라.
현감은 황송스럽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본관은 황상 폐하의 명을 충실히 받들 뿐이외다. 자, 먼 길에 수고가 많으신데 차라도 한잔 드시며 얘기를 나누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그러면서 현감은 관 포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자네들에게 괜한 짓을 시켰구먼. 그래 다친 사람은 없는가?”
“예, 다행히 저분들께서 사정을 봐주시어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현감 어른.”
그 말에 현감은 “과연”하고 낮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다음 그는 관 포두에게 지시했다.
“자, 돌아가서 볼일이나 보게나. 그리고 나가서 차를 대령하라고 이르게.”
“예, 대인.”
묵향을 바라보며 현감은 침중한 어조로 사죄했다.
“워낙 나라가 어지럽다 보니 요즘 밀수꾼과 마적단들이 판을 치는지라 귀하신 분께 이런 실례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묵향은 뻔뻔스럽게도 장단을 맞춰 대꾸했다.
“괜찮소이다. 이런 변방에서 마적단까지 상대하자면 많이 힘드실 것이오. 자, 이건 그대에게 주는 자그마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주시오.”
현감은 묵향이 건네준 전표를 받아 본 후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통 큰 액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상대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지 현감은 불신 어린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이, 이건 무슨 뜻이오?”
“이건 현감에게 주는 뇌물이나 선물이 아니오. 마적단을 상대하고, 이 지방의 치안을 정립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겠소? 거기에 보태 주시오.”
그 말에 현감은 전표를 품속에 거둔 후 고개를 숙이며 감사해했다.
“가, 감사하오이다.”
묵향은 현감과 밤늦게까지 얘기를 나누며 몽고 쪽의 정세라든지 여러 가지 대화를 주고받았다. 현감은 묵향이 황실의 밀명을 받고 행동하는 관리라고 여겼기에 아 주 깍듯하게 대접을 해왔다. 그리고 이런 둘의 언행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초류빈은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현감과 대륙의 정세에 대해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묵향의 모습은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단순무식한 교주의 모습이 아 니었다.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현감과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묵향의 말을 듣다 보니 자신이 그렇게 많이 배우지는 못했어도 묵향의 지식이 대단히 폭 넓고도 깊이가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묵향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현감의 모습을 보며 초류빈은 그가 자신이 아는 교주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요 며칠간 보여 주는 묵향의 모습은 사내인 자신이 보더라도 왠지 너무나도 멋있었다.
“허, 거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