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권 6화 – 기연(奇緣)

기연(奇緣)

노상(上)을 한 젊은이가 걷고 있다. 그의 등에 멘 검으로 보아 무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뚝 솟은 태양혈과 눈에 감도는 정기(精氣)는 상당한 수련을 거 친 고수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시원스레 솟은 콧날과 맑은 눈을 가진 잘생긴 젊은이다. 아마 20대 중반쯤 되었으리라…….

그는 천천히 길을 내려가 마을로 들어섰다. 그가 처음으로 찾은 곳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가 들어오자 점소이가 환대를 한다.

“어서 오십시오.”

“만두 한 접시하고, 술, 그리고 오리탕을 주게나.”

“예!”

그는 천천히 식당 안을 둘러보았지만 눈에 띄는 특이한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무림인들이 많다고 하지만 중원 천지에 특별한 어떤 사건이 없고서는 나돌아 다니 면서 무림인들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그는 명문까지는 안 되지만 그래도 꽤 정파에서는 알아주는 문파의 수제자이며, 사부의 딸인 미하霞)소저와 장래를 약속한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다.

“전번 여행에는 청수(淸修)를 데려와서 별로 심심하지 않았었는데… 역시 혼자 하는 여행은 너무 쓸쓸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옆 자리에 앉은 세 명 중년 남자들이 주고받는 말이 들려왔다. “이번에 주 서방 집 딸이 없어졌다지?”

“그렇다네. 그 아이까지 합하면 이 근방에서 사라진 처녀가 여덟 명이야. 도대체 어떤 색마(色魔)가 날뛰는지…….

“관부에서도 조사 중인데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던데, 글쎄 증거조차 잡지 못했다는 거야.”

“처녀들의 시신(屍身)이 발견되지 않는 걸로 보면 야산에 묻었든가, 아니면 인신매매단이 아닐까?”

그러자 앞의 사내는 단숨에 술을 비우며 말했다.

“커… 그러게 말일세.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정말 살기가 각박해지는구먼.”

“제기랄! 진평(陳平) 쪽에는 그래도 정도의 큰 문파가 자리 잡고 있어 이런 일이 덜하다던데, 도대체 관부 녀석들은 뭐 하는 건지…….”

“쉿! 이 사람아 딴 사람이 듣겠어. 잘못하면 잡혀 가서 치도곤을 당한다고.”

“에잇, 그……. 술이나 드세.”

“자네, 대낮부터 술이 과한 거 아닌가?”

“이런 빌어먹을 세상, 술이나 들어가야 제대로 보이지.”

“껄껄, 그도 그렇군.”

그는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다가 음식이 나오자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음, 이 근방에 인신매매단이 있는 모양이군. 어제 없어졌다고 하니 운이 좋으면 조금만 조사를 해 봐도 잡아낼 수 있겠는데……. 하지만 사부님의 편지를 빨리 전 달해야 하니 오랫동안 시간을 끌 수는 없고……. 어떻게 한다? 그래도 2, 3일의 여유는 있으니 그동안 조사를 해 보고 알아낸 것이 있으면 관부(官部)에 알려 주고 떠나면 그들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일단 마음을 잡자 그는 일어서서 옆의 장한(壯漢)들에게 다가가 포권을 하며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근처를 지나던 사람인데, 형장(兄丈)들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근처에 색마가 날뛰는 모양인데 약간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젊은이, 뜻은 고맙지만 그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면 젊은이 혼자 객사(客死)할 수도 있으니 그냥 가시는 게 좋을 거요.”

“저도 꽤 알려진 문파의 제자, 산적쯤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인데… 저쪽으로 가면 대홍산이 있소. 그곳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있지. 관에서도 조사를 했는데 알아내지 못했소. 만약 조사를 한다면 먼 저 그쪽을 조사하는 것이 좋을 거요.”

“고맙습니다.”

“여보시오, 주인장! 말린 고기 다섯 근과 술 두 병을 주시오.”

“여기 있습니다. 모두 열다섯 냥입니다.”

“여기 있네.”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대홍산으로 향했다. 대홍산은 산세가 가파르고 수풀이 울창한 큰 산이었다. 그는 술과 말린 고기를 먹으며 하루 종일 산을 뒤졌지만 아무런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도 오기를 가지고 계속 뒤져 나갔다. 소나무가 많은 산중턱을 뒤지다 보니 처음엔 몰랐는데 약간 느낌이 이상했다. 방금 본 경치가 다시 나타나는 듯했 던 것이다.

‘이상한데? 혹시 모르니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역시나 느낌대로 한참을 걷다 보니, 자신이 처음 출발하면서 나뭇가지로 땅에 써 놓은 글자들이 제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역시! 제자리야. 한번 실험을 해 보자.’

그 글자를 중심으로 나뭇가지로 지나간 방향을 표시하며 왔다 갔다 하다 보니 꼭 북쪽으로만 가면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앞에 진법이 있다.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지? 지금까지의 형태로 보아 사람을 살상하기 위해 만든 진법이 아니라 이목을 속이기 위한 진법이야.’

그는 천천히 진법을 연구했다. 사부와 사모에게 진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진법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은 없는지라 진법을 깨는 데 엄청난 시간을 투입했다. 하지만 역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법을 좀 더 자세히 배워 두는 건데. 휴우…, 지금 후회하면 뭐 하나? 해가 지고 있으니 어디 잠자리를 찾아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시작하자.’

다음 날 아침 그는 젓가락 두 개 길이 정도 되는 나무 막대기를 많이 만들었다. 그것을 앞에 놓고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가서 다시 막대기를 놓고 한 발짝 앞으 로 한참을 가다 보니 다시 제자리. 그 자리에 서서 보니 막대기가 약간씩 왼쪽으로 꺾이면서 빙 둘러서 이쪽 방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좋아! 일곱 번째 막대기부터 옆으로 휘어져 있군. 그럼 일곱 번째에서부터 약간씩 오른쪽으로 돌자.’

다시 해 본 다음 제자리에 서서 그는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보고, 또다시 걸었다. 열 번째 시도 끝에 그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만약, 이 진법이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냥 사람의 이목을 속여 안으로 들어오지만 못하게 만들어 놓았어. 응? 그 런데. 저게 뭐지?”

그는 나무 밑에 있는 서너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초가집으로 다가갔다. 초가집을 지탱하는 나무가 아주 낡은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된 집 같았으며 대강 손으로 만든 게 한두 사람이 단시간 내에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혹시 녀석들이 이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검을 천천히 뽑아 꽉 쥐고 기척을 죽이며 다가갔다. 초가집의 앞문을 발로 부수고 검을 들이밀고 보니, 안에는 한 중년인이 좌정하고 있었다.

“쿨룩! 가까이 오지 말게! 나는 독에 당했어.”

그 말을 듣고 그는 걸음을 멈췄다. 중년인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힘없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누구인가?”

“저는 혁련운(赫蓮運)이라 합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자네에게서 뿜어 나오는 정기로 보아 하니 정파의 인물이군. 쿨룩!”

“그렇습니다.”

“나는 능비영이란 사람. 아수혈교(阿修血敎)의 뒤를 쫓다 이렇게 되었지.”

혁련운은 그 중년인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능비영 선배님이시군요. 아수혈교? 저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요?”

“쿨럭! 자네는 혈교라고 들어 봤나?”

“예, 사부님께 들었습니다. 대단히 사악한 단체였다고 하더군요. 마교에게 멸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으윽!”

능비영은 시커먼 피를 토해 내더니 말을 이었다.

“이제 좀 편하군. 보시다시피 완전히 박살 났어. 전신 혈맥이 부서지고 뼛속까지 독기(毒氣)가 침투해서 오래 버틸 수 없다네. 참, 그 혈교의 후신이 아수혈교지.” “그럴 수가!”

“그들의 사악함은 정말 공포스럽네. 부녀자들을 납치하는 것도 그들이야. 강시를 만들기 위해서.”

“강시라구요?”

“웬만한 고수는 죽일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한 것이 강시지. 그들은 전보다 더 강한 새로운 강시를 2백 구나 만들고 있어. 쿨룩, 보통의 강시만도 5천 구나 만들고 있 다네. 벌써 3할 정도가 완성되었으니, 그 수가 더 늘어나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해.”

“강시를 만들고 있는 곳은 어딥니까?”

“대망산일세. 우리는 그곳에서 놈들에게 들켜서 이곳까지 그들과 싸우면서 도망쳤네……. 자네를 만난 것도 하늘의 도움인 모양이군. 모두 죽고 나까지 이 꼴이 되어 소식을 전하는 것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정말 운이 좋군. 쿨럭쿨럭, 우욱.”

“괜찮으십니까? 선배!”

“별로 괜찮지 않다네. 거의 오장 육부까지 독기가 침투했어. 내가 죽으면 이 집과 함께 태워 주게나. 내 몸을 만지는 것도 위험하네. 쿨룩…, 사망시독(死亡屍毒)만 아니었어도 이 꼴은 되지 않았을 텐데. 쿨룩쿨룩.”

“선배님,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마십시오.”

“그런 소리 말게. 빨리 말을 전해야지. 나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네… 내 무공이 내 대에서 끊어지는 것이 원통하구만.. 네, 내 부탁 좀 들어주겠나?”

“말씀하십시오.”

“자, 이것이 내가 익혔던 비급이네. 이걸 혼자 익히기는 어렵겠지만 자네가 익히고 비급과 내 소식을 전해 주게.”

“누구에게 전하면 됩니까?”

쿨룩! 이것도 인연인데 자

“장안(長安)에 천안루(天安樓)라는 객점이 있네. 객점 2층의 오른쪽 첫 번째 방에 투숙한 후 종이에 「問(문)」이라는 글자를 써서 밖에서 보이게 달아 두게. 그러면 이틀 안으로 사람이 올 거야. 그에게 비급과 내 소식을 전해 주면 돼.”

“알겠습니다.”

“꼭 전해 줘야 하네.”

“예.”

“고맙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죽었다. 혁련운은 그의 부탁대로 부근의 소나무를 잘라 오두막에 던져 넣은 후 불을 질렀다. 그는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길을 떠 났다. 소나무 막대기를 따라 걸으니 진법에서 나오는 것은 간단했다.

사부의 편지를 전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태산파(泰山派)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날 여관에 묵은 후 그는 경황중이라 그냥 품속에 갈무리한 비급을 꺼내 들었 다. 겉표지에는 ‘청월검법(靑月劍法)’이라 쓰여 있었다. 그 안을 본 그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대단한 경지의 상승무공(上昇武功)이었다. 그는 이 비급을 약속대로 돌려줘야 했기에 비급을 이해하기보다는 외우기에 전념했다.

사부의 편지를 태산파의 장문인에게 전한 혁련운은 답장을 받아 들고 물었다.

“죄송하지만 한 가지 약속이 있어서 그러는데, 이 답장은 사부님께 빨리 전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화급한 전갈은 아니네. 자네 볼일을 보고 전해도 상관없어. 어떤 볼일인데 그러나?”

“이곳으로 오면서 희한한 일을 당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는 태산의 장문인에게 무공비급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 모든 사실을 말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군. 자네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네.”

“하지만 저는 그분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하기야, 그 정도의 고수를 기른 단체라면 그들도 알아야 하지. 그는 정파의 인물이었나?”

“혹시 장문인께서는 청월검법이라는 무공을 아시는지요?”

“청월검법이라고? 청월검법은 대단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무공이지. 그 검법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는 그 패도적인 위력 때문에 익히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했지만 마교와의 다툼이 시작되면서 그 금제는 사라졌지.”

“정파의 무공입니까?”

“음…, 청성파(靑城派)가 자랑하는 검법이지. 장문인 외에는 익히는 것이 금지된 무공이었지. 하지만 중간에 절전된 데다 비급마저 사라졌어. 그가 설마 청월검법 을 사용했다는 것인가?”

“예, 그의 독문무공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시독(死亡屍毒)만 아니었다면 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습니다.”

“사망시독! 그것은 혈교가 자랑하는 극독이야. 혈교의 사악한 무공인 수라혈시마공(修羅血屍魔功)에 맞으면 사망시독에 중독된다고 알려져 있네. 진정 혈교의 준 동이 맞는 모양이군. 그런데, 그의 시체는 묻었는가?”

“아닙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독이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태웠습니다.”

“자네…, 혹시 그의 품속을 뒤져 봤나?”

“예? 무슨 말씀이신지? 독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멀찍이 떨어져서 대화만 나눴죠. 대화 중에도 기침과 함께 독 혈(血)을 토했습니다.”

“휴우, 아까운 일이군. 어쩌면 자네의 무욕(無慾)으로 인해 귀중한 비급이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닐세, 이만 가 보게나.”

“안녕히 계십시오.”

그는 태산파(泰山派)를 떠나 장안으로 향했다. 넓은 장안에서도 천안루를 찾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장안에서도 이름난 대규모 음식점이었던 것이다. 그는 천

안루에서 음식을 먹고 오른쪽 첫 번째 방에 들어 「問문)」이라는 글씨를 적어 창문에 걸어 뒀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3일이 지나자 그는 할 수 없이 사부님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길을 나섰다. 길을 가면서 혹시나 누가 따라오지 않을까 생각되어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런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저녁 마을에 들러 식사를 마치고 객점에 들었다. 그는 또다시 비급을 오랜 시간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었다. 이제 모든 내용을 외웠지만 극성 을 익히면 반월형의 푸른색 검강이 초식을 따라 뻗어 나가 상대를 공격하며 무적의 위력을 자랑한다는 이 비급을 혹시나 한 자라도 틀리게 외웠을지 걱정되어 밤마 다 보고 또 보고 있었다.

그는 목에 싸늘한 감촉을 느끼고 잠이 깼다. 곧이어 이 감촉이 잘 드는 검날의 감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너는 누구지?”

비로소 눈을 뜨고 보니 복면을 한 괴한이 검을 그의 목에 겨누고 있었다. 그는 상당히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굵직하면서도 힘이 있었고 싸늘했다.

“본인은 혁련운이라는 사람이오.”

“청운신검(靑雲神劍)은 어떻게 되었나?”

“청운신검이라뇨?”

“청운신검 능비영을 모른다는 말인가?”

“아! 능비영 선배를 만나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그렇다.”

“제 품속에 비급이 한 권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마지막 남긴 말씀도 있구요.”

그 괴한은 혁련운의 품속을 더듬어서 비급을 꺼내고는 칼을 겨눈 채 약간 떨어졌다. 그걸 본 혁련운은 천천히 말문을 열어 그때 있었던 모든 일들을 차근차근 말했 다. 그의 말을 모두 다 들은 후 괴인은 말했다.

“청운신검 같은 고수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놀랍군. 자네는 초막에서 청운신검 한 사람만을 봤나?”

“예.”

“아수혈교가 하는 일을 정탐하기 위해 특급 고수 다섯 명을 투입했는데, 그중 혼자만이.. 그것도 대리인을 통해 소식을 듣게 되는군. 자네에게 칼을 들이대서 미안하군. 다음에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번에 있었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게 자네 신상에 좋을 거야.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그 말과 동시에 괴인은 사라져 버렸다.

“후우…….”

괴인이 사라지자 혁련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생각에 잠겼다.

‘정말 대단한 고수로군. 거의 사부님과 같은, 아니 더 무서운 고수다. 빨리 이 일을 사부님에게 알려야겠다. 나에게 이런 기연(奇緣)이 있을 줄이야. 이번에 얻은 청 월검법만 빨리 완성하면 나도 절정고수의 자리에 올라 설 수 있어. 하지만 청월검법을 완성하려면 내공이 있어야 하는데……. 할 수 없지 그건 세월이 해결해 주겠 지.”

혁련운은 사문에 도착하자마자 사부에게 불호령을 들었다.

“심부름을 시킨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야 나타나느냐? 이번 심부름은 중요한 것이기에 일부러 너를 보냈는데, 대제자라는 녀석이 이 모양이라니……. 쯧쯧.”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운이 나름대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사부님, 사모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여기 태산파 장문인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두 분께만 비밀리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안 되겠느냐?”

“죄송합니다.”

“그럼, 내실로 들어가자.”

“예.”

내실에 들어가자 혁련운은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이상한 일을 겪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혁련운의 말이 끝날 때까지 침중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사부가 말했다.

“정말 놀라운 기연이구나. 혈수마교에 대한 정보는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청월검법까지 얻다니. 그 비급은 돌려줬겠지만 내용은 외웠느냐?”

“예, 능비영 선배가 내용은 봐도 좋다고 허락하셨기에.”

“잘되었다. 우리 문파는 그 무공으로 더욱 이름을 높이게 되었다. 여보, 나는 소림사에 잠시 다녀올 테니 그동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경계를 철저히 하시오.”

“예.”

“그리고 운아.”

“예, 사부님.”

“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청월검법을 소상하게 기록해 둬라. 청성파(靑城派)의 실전된 비급이니, 우리가 익힌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그럼 다녀오겠소.”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이문학이 소림사에 도착하자 마당을 쓸고 있던 스님이 그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나야 편안하네. 자네도 별일 없지?”

“예, 석산 스님께 연락을 드릴까요?”

“아닐세. 수도하는 도중이 아니면 내가 그냥 가지.”

“그럼 저와 함께 가시죠.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들은 한참을 걸어가 어떤 방 앞에 섰다.

“석산 스님, 황룡문 장문인께서 오셨습니다.”

안에서 기쁨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라 해라.”

“예. 드시지요.”

“고맙소.”

방으로 들어선 이문학은 환한 표정으로 그를 맞는 스님에게 예를 갖추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사부님?”

“오랜만이구나.”

“긴히 의논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어떤 일인데 그러나?”

“다름이 아니옵고…….”

한참 옛 제자의 설명을 듣던 스님은 이 일이 자신의 손에서 해결될 수 없는 큰일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방장 스님과 의논을 해 봐야 결론이 나겠어. 따라오너라.”

“예.”

“수고스럽겠지만, 아까 내게 했던 말을 다시 해 주게.”

“예.”

한참 설명을 듣고 나서 방장인 공지대사(空知大使)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미타불…, 이건 놀라운 소식이군요. 이 장문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우리는 벌써 아수혈교의 준동 상태를 10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10년 전부터요?”

“그렇소. 하지만 그들에게 손을 쓰지 못한 이유는 그들 총타의 위치를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분명히 3할이라고 하셨지요?”

“예, 강시는 3할 정도 완성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1천5백 구 정도 만들어졌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수는 더욱 많아지겠지요. 가 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새로운 강시입니다. 최소한 보통 강시의 3배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공지대사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이건 노납(老)이 혼자서 처리할 수 없고, 무림맹을 소집하여 각 문파의 장문인들과 의논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그들을 치게 된다면 그때 장문인께서도 좀 도와주십시오.”

“미진한 힘이지만 손이 되는 대로 도움을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하오. 그런데 이 기연이 우연일 수도 있지만, 기연을 가장한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예?”

“능비영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 강시를 대량으로 제조하는 곳이라면 대비 또한 만만치 않을 터! 그런 곳에서 상대에게 들켰는데도 어 떻게 빠져나왔는지 이상하지 않소? 웬만한 고수로는 힘든 일이오.”

공지대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던 황룡문주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고뇌하는 흔적이 역력했으므로 두 노승은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말문을 열기 를 끈기 있게 기다렸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황룡문주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공지대사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말해 보십시오.”

“대사께서는 청월검법이란 것을 알고 계신지요?”

공지대사는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청월검법! 그것은 청성파의 진산지보인데,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놀랍게도 그는 청월검법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험……, 청월검법을 익힌 고수라면 그 지옥에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겠지요.”

“예, 저의 제자의 말로는 그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망시독(死亡屍毒)만 아니었어도 이 꼴은 안 됐을 텐데’라고 말입니다. 그의 동지 네 명도 사 망시독에 당한 것 같습니다.”

석산대사는 흠칫 했다.

“사망시독?”

“예, 사부님. 저주받은 수라혈시마공(修羅血屍魔功)의 부산물 말입니다. 저의 제자와 얘기를 나누면서 끊임없이 독혈을 토해 내더니 나중에 자신의 친구에게 자신 과 동지들의 소식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건네준 비급이 청월검법이었습니다.”

공지대사는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비급은 황룡문에 있소이까?”

“아닙니다. 그의 친구에게 전해 줬습니다. 대신에 그가 보는 것은 허락했으므로 제자가 그 비급을 완전히 외웠습니다. 이리 오기 전에 제자에게 기억나는 것을 모 두 써 놓으라고 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청성파에서 알면 그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저도 그 점이 걱정이라 망설였던 겁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공지대사가 제안했다.

“시주께서는 사본을 하나 더 만들어 청성파에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석산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장스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청성파에도 한 부를 준다면 그들도 시비를 걸지는 않을 겁니다.”

“저도 그 점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원체 이름 높은 비급이다 보니 욕심이 앞서서……. 죄송합니다, 사부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중재를 부탁드리 겠습니다.”

“이르다 뿐이겠소? 청성파도 완전히 잃었다고 생각했던 비급을 힘 안들이고 찾는 것이니 그들도 찬성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