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무림맹
시일이 지나자 공동산에서 벌어진 엄청난 혈겁이 개방을 통해 사방으로 전해졌다. 때마침 수라도제가 이끄는 무림 연합의 고수들이 도착하여 멸문당하는 사태까 지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공동파가 입은 피해는 너무나도 막대한 것이었다. 장문인 이하 모든 장로급들, 그리고 실력 있는 제자들의 대부분이 사망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생각해 보면 고수들의 상당수를 무림맹이나 양양성 방면에 파견해 놓은 것이 정말 공동파로서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들이 살아 있었기 에 공동파는 언젠가는 그 세력을 회복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그게 가까운 시일 내에는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무림맹은 금이 지닌 저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중원의 북부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무림의 방파들이 산산조각이 난 것 이다. 그것도 종남파와 공동파 같은 거대 문파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거기에다가 무림맹 수뇌부들을 더욱 긴장시킨 것은, 그들과 직접 사투를 벌인 수라도제의 보고 때문이었다. 적들을 포착하여 격멸시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피해 가 너무나도 막심했다. 1백여 명이 사망하고, 3백여 명이 중상을 당하는 엄청난 피해를 당한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의 수뇌부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중상자들 중 에는 황룡무제까지 끼어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피해가 크다고 해도 적들을 완전히 끝장내 버렸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무림맹의 수뇌부들 을 고민에 빠뜨린 것은 적도들 중에서 상당수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버렸다는 수라도제의 보고 때문이었다.
“허어, 어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이오? 적도들 중에서 화경급 고수와 상대할 만한 초절정 고수가 존재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오?”
일찍이 수하들을 거느리고 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연경으로 쳐들어갔었던 백량 장로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 태평스럽게 말했다.
“노부가 직접 연경에서 놈들과 싸운 적이 있소. 수하들을 다 잃고 노부만이 간신히 살아서 도망쳤을 정도로 그놈들은 뛰어난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소이다. 거기 에 화경급이 몇 명 섞여 있다고 해서 뭐가 그리 놀라운 일이겠소?”
“허어, 그렇게 속 편하게 말할 게 아니외다.”
점잖은 질책이었지만 그것이 백량 장로의 속을 뒤집어놓은 모양이었다. 벌떡 자리에 일어선 백량 장로는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자신의 허리에 애검이 매여져 있었 다면 당장 검을 뽑았겠지만, 아쉽게도 공식적인 회의 석상에는 무기의 휴대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손은 자신의 애병이 걸려 있던 허리 부근을 무의식적 으로 더듬고 있는 중이었다.
“뭣이? 속 편하게? 네놈이 노부의 마음을 어찌 알고 그딴 소리를 한단 말이냐?”
방금 전까지 말은 빈정거리듯했지만, 그의 마음이 그렇게 편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사문인 종남파가 적도들의 손에 피바다가 되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알 고도 태연하다면 그건 사람이 아닐 것이다.
“어허, 이게 무슨 짓이오? 맹주님 앞이오. 당장 자리에 앉으시오.”
백량 장로는 분노 어린 시선으로 상대를 한참 노려보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백량 장로가 자리를 뜸으로 인해 회의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져 버렸다. 오랜 시간 지속된 침묵은 공수개 장로가 입을 열면서 끝이 났다. 공수개 장로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더니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회의가 끝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 지 지금 가장 시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본방에서 한 가지 정보가 올라왔는데, 아무래도 이 점은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는 것이 좋을 듯해서 말씀을 올리겠소이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공수개 장로는 낮게 헛기침을 한 후 말을 이었다.
“어흠, 모두들 아시다시피 이번 혈사로 인해 금의 세력이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났소이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에 의문이 떠올랐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공수개 장로가 말하는 이유가 뭘까? 하지만 곧이어 그들은 알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큰 파장 을 몰고 올 수 있는 것인지.
“금은 그들의 영토 밖에 있는 공동파까지 박살 내 버렸소. 그렇다보니 지금 무림의 각 문파들은 양양성에 내보냈던 정예 고수들을 불러들이고 있소이다. 무림의 대의를 따르는 것도 좋지만, 우선 집안을 튼튼히 해 놓고 보자는 뜻이겠지요.”
그 말에 맹주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청호진인이 놀라서 외쳤다.
“아니, 그게 사실이오?”
“자세히 알아보면 곧 들통 날 일인데 거짓말을 해서 무엇 하겠소? 노부의 말은 사실이외다.”
“허어, 이것 큰일이구려. 그렇다면 모처럼 집결시켜 놓은 무림 연합의 세력이 급격히 저하될 것은 자명하지 않소이까? 소림까지 봉문한 상태인데 일이 어찌 되려 고 이러는지…….”
“참, 소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소문 들으셨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림의 장문인이 물러났다고 하던데.”
누군가 소림사에 대해 들은 풍문을 입에 담자 여기 모인 장로들 중에서 가장 정보가 빠른 공수개 장로가 그 진위를 알려 줬다.
“대덕대사(大德大使)가 물러나고 새로이 덕량대사(德良大使)가 방장직에 올랐다는 연락을 받았소이다. 하지만 그것도 다 얄팍한 술수에 지나지 않다고 본방에서 는 추측하고 있소.”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공장로.”
“수라도제 대협이 소림의 정문을 파괴하며 응징하겠다는 선언을 했으니 소림사로서는 겁이 날 만도 하지 않겠소이까? 그걸 피해 가기 위해 대덕대사는 자신이 모 든 책임을 진다는 명목 하에 장문직을 아랫사람에게 넘긴 것이겠지요.”
“허어, 그런 속셈이 있었구려. 하여튼 말로만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떠들면서 하는 짓거리가 정말 얄팍하기 그지없구려.”
“그러게 말이외다.”
모두들 소림사의 행동에 실망감을 감추기 힘든 모양이다. 이때, 청호진인이 묵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건 소림이 봉문을 선언한 이상 그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소이다. 우선 당면 과제는 고수들을 빼내는 이기적인 문파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느냐 는 것이 아니겠소? 빈도의 생각으로는 몇몇 문파들을 골라내어 본보기로 응징을 가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
청호진인이 심각한 어조로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공수개 장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불가능하외다. 청호진인의 사문인 무당파의 경우 양양성에서 거리가 멀지 않기에 위급할 때는 즉시 양양성에 주둔 중인 고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다른 문파들은 그렇지 못하오. 만약 그들이 이 사실을 들고 나오며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한다면 어찌 하시겠소이까?”
공수개 장로의 지적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기에 청호진인으로서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공수개 장로는 그것보라는 듯 청호진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금군이 보유한 정예군들의 수준을 파악하는 일이외다.”
“놈들의 능력은 이번에 거의 드러났지 않았소이까? 공동파와 종남파를 파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거의 9대문파급,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강력한 정도의 전력 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
“물론 그렇소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오. 놈들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해야 이번처럼 뒤통수를 얻어맞지 않을 수 있지 않겠소? 이번에 일 어났던 일도 다 놈들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소이까?”
“허어, 참. 개방에서조차 그 사실을 모르는데, 빈도가 그걸 어찌 알아낸단 말이오? 혹시 무영문 쪽에다가 의뢰를 한다면…….?”
청호진인은 공수개 장로의 안색이 노기로 시뻘겋게 변하는 것을 보고 황급히 말을 멈췄다. 무의식중에 자신이 공수개 장로의 역린(逆鱗)을 건드렸음을 느꼈던 것 이다.
이때, 지금까지 말없이 듣고만 있던 맹주가 문득 입을 열었다.
“서로 다툴 필요 없네. 금이 보유하고 있는 핵심 전력은 이미 파악해 냈으니까.”
그 말에 공수개 장로는 놀라서 외쳤다.
“정말이십니까? 맹주님.”
“물론일세. 노부가 여러 가지로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일단의 마교 세력이 금군에 협조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네.”
그런 말은 개방 출신인 공수개 장로도 처음 듣는 것인지라 불신감 어린 표정으로 반문했다.
“도대체 그 정보의 출처는 어딥니까? 맹주님.”
맹주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무영문일세.”
그 말에 공수개 장로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또다시 무영문에 한 발 뒤진 것이다.
맹주는 공수개 장로의 표정을 보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공수개 장로도 그 사실을 알려 줬지 않은가?”
이어진 맹주의 말에 공수개 장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런 보고를 올린 기억이 없습니다.”
“과거 노부는 공장로에게 완옌 렌지에라는 인물을 조사해 달라고 청한 일이 있었네. 안 그런가?”
“그… 그렇습니다.”
“그때 공 장로가 노부에게 들려준 답변과 무영문에서 흘러 들어온 정보를 종합해 보고 노부는 그런 결론을 내렸던 것일세.”
“그렇다면 맹주님께서는 마교가 금의 뒤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또 다른 장로가 외쳤다.
“그놈들이 갑자기 협정을 맺자고 할 때부터 그 저의가 의심스러웠소이다. 이런 썩을 놈들!”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맹주는 손을 슬며시 치켜들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모두들 조용히 하게나. 노부는 분명히 말했네. 마교 세력의 일부가 금에 넘어갔다고 말이야. 만약 지금 마교가 전폭적으로 금을 밀고 있다면 사태는 절망적 이겠지만, 원시천존께서 도우셔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네. 지금 금에 협력하고 있는 존재는 과거 마교에서 암흑마제와 교주 자리를 다투다가 쫓겨난 인물일세.”
그 말에 장로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암흑마제와 권력다툼을 벌이다가 쫓겨난 자라. 이 순간 그들의 뇌리에 한 가지 명호가 떠올랐다. 맹주는 말을 멈추고 좌 중을 쓱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사파에서는 흑살마제라고 부르고, 우리 쪽에서는 흑살마왕이라고 부르는 장인걸 전 교주가 바로 그 당사자지. 노부는 그가 탈출할 때 천마혈검대까지 거느리고 갔다는 정보까지 입수했다네.”
그 말에 모두들 작금의 사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교는 일찍이 그 사실을 알고 동맹을 요청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일세. 그들도 흑살마왕을 치기 위해서는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힘들다고 결론을 내렸겠지. 수라도제의 보고에 따르면 지금 교주는 양양성에 와 있는 모양이 야. 교주가 직접 움직일 정도로 마교는 이번 일을 중대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지.”
“오오, 그런 일이……. 그런데 맹주께서 좀 더 빨리 그 사실을 밝히셨으면, 이토록 엄청난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건 노부가 여러 장로들에게 사과하겠네. 그 정보를 알려 준 옥화 봉공은 그 사실을 비밀에 붙여줄 것을 부탁했었네. 흑살마왕이 금에 있다는 것을 조사하여 마 교 교주에게 알려 준 것이 무영문이었거든. 무영문은 지금까지 한 가지 정보를 한 곳에다가만 판매한다는 규칙을 고수해 오지 않았었나? 그걸 노부 때문에 깨뜨리 게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니, 노부가 그 사실을 공포하면, 그걸 노부에게 알려 준 옥화 봉공의 처지는 어떻게 되겠나? 태상문주가 문의 법규를 어긴 것이니 아 주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겠지. 그렇기에 노부는 지금까지 그 사실을 비밀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네.”
이제 모든 상황을 이해한 공수개 장로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금이 지니고 있는 세력은 그렇게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흑살마왕과 그가 거느리는 천마혈검대. 물론 천마혈검대가 엄청난 힘을 지닌 세 력임을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소수 정예라는 단점을 안고 있습니다.”
소수 정예가 단점이라는 말에 다른 장로들은 의아스러운 듯했다. 사실 소수 정예가 지니는 이점이 더욱 크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은 이어지는 공수개 장로의 말에 그가 뭣 때문에 소수 정예가 단점이라고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백량 장로가 금의 황궁에 침입했을 때 그곳에 일단의 마교 고수들이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천마혈검대는 지금 두 토막이 나 있다고 보는 것이 옳 겠지요. 일부는 황궁을 지키고, 일부는 흑살마왕이 거느리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안 그래도 1백 명 남짓한 소수로 이뤄진 천마혈검대를 두 개로 나눈다는 것은 치 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흑살마왕이 마교에서 쫓겨난 후 20여 년이 흘렀소이다. 그가 또 다른 고수들을 키웠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우려 섞인 지적이었지만 그 말에 공수개 장로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흑살마왕이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자라고 해도 여진족들을 상대로 무공을 가르쳐 봐야 얼마나 가르쳤겠소이까? 쓸 만한 고수 2천을 키웠다면 정말 많이 키운 것일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공수개 장로의 지적에 다른 장로들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 또한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 아닌가. 뛰어난 고수 한 명을 만드는 데 얼마만한 시간과 노 력이 투자되어야 하는지 잘 아는 것이다.
“공수개 장로의 말이 옳습니다.”
“허어, 금이 엄청난 세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구려. 이건 완전히 자신이 지닌 총력을 다하여 외줄타기를 한 것이 아니오이까?” 지금까지 아무런 말없이 가만히 있던 옥진호 장로가 입을 열었다.
“기왕에 알게 된 사실이니, 우리들은 그걸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오오, 옥 장로께 뭔가 고견이 있으시오?”
“천마혈검대 하나뿐이라고는 하지만, 그 지닌바 능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소이다. 그들을 없애려면 이쪽의 피해도 적지 않을 게 분명하오. 구태여 그런 피해를 자초할 것이 아니라 마교의 일은 마교가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렇다면 천마혈검대는 그렇게 처리한다고 하고, 지금 당면한 과제인 양양성에 주둔 중인 고수들의 이탈은 어찌 해결하는 것이 옳겠소이까?”
“일단 각 문파들에 맹의 일에 협조해 달라는 서신을 돌리는 정도로만 해 두는 것이 좋겠소이다. 정파 쪽이 더 이상 피해를 당한다면 나중에 금과의 전쟁이 끝난 후, 마교에게 밀릴 가능성이 크니까 말입니다.”
“노부의 생각도 그렇소이다.”
모든 장로들의 의견이 어느 정도 합해지자 가만히 앉아 있던 맹주는 결정을 했는지 공수개 장로를 향해 말했다.
“공수개 장로.”
“예.”
“개방의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천마혈검대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게. 흑살마왕이 거느린 주력의 위치만 예의 주시한다면 언젠가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게 아니겠나?”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맹주님.”
“청호 장로는 각 문파에 서신을 돌려 양양성에서 고수들을 빼내지 못하도록 당부해 주게.”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