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6권 1화 – 급변하는 정세
급변하는 정세
옥화무제를 태운 마차는 총단을 향해 미친 듯 질주하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한적한 객잔 앞에 멈춰 섰다. 늦게나마 요기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뭘 드시겠습니까?”
점소이는 탁자에 앉아 있는 옥화무제를 힐끔힐끔 훔쳐봤다. 태어나서 지금껏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 봤던 것이다. 만약 그녀와 함께 들어온 눈매가 날카로 운 무사들만 아니었다면 좀 더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무사들은 칼까지 허리에 차고 있었다. 더군다나 여인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은지 무사들은 자리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주위를 경계하기에 바빴다.
‘정말 예쁘다. 말로만 듣던 공주님이 이런 모습일까?”
두근거리는 점소이의 마음과는 달리 옥화무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객잔에서 판매하는 가장 비싼 음식 몇 가지를 주문했다.
그녀가 음식을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을 박차고 무사 한 명이 달려 들어왔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옥화무제를 호위하던 무사들이 깜짝 놀라 다급 히 칼을 뽑아 들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무사는 주위를 둘러보다 옥화무제를 발견하자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태상문주님을 뵈옵니다!”
순간 옥화무제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요 근래, 지급으로 보고된 정보들치고 좋은 소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령의 보고를 듣 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총단 총관으로부터의 급전입니다. 타주께서 태상문주님께 지급으로 전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대롱 하나를 꺼내 옥화무제에게 바쳤다.
장거리의 경우 전서구를 이용하는 게 가장 빠른 연락 수단이었지만, 아쉽게도 비둘기의 지능이 너무 떨어진다는 점이 문제였다. 오죽하면 새대가리라는 표현이 있 겠는가. 더군다나 전적으로 비둘기의 귀소본능에 의존하다 보니, 이렇듯 이동하는 대상에게는 전혀 써먹을 수 없다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총관은 그녀의 이동로 인근에 위치한 모든 분타에 전서구를 날렸고, 전서구를 받은 분타에서는 일제히 사방으로 전령을 파견한 것이다. 그들 중 한 명 정도는 옥화무제와 만나게 될 걸을 기대하면서.
대롱을 열어 전서를 읽던 옥화무제의 얼굴이 점차 낭패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지급으로 보내온 전서의 내용은 우이 마을에서 벌어진 참사에 관한 것이었다. 전서구를 통해 보낼 수 있는 서신의 분량이라는 게 뻔하다 보니, 아주 간략하게 써져 있었기에 그녀로서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 파악하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작전이 실패했다는 것, 그리고 그 피해 또한 엄청나다는 것.
“이런 망할!”
옥화무제가 거칠게 말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주위를 호위하고 있던 무사들의 얼굴에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먼저 총단으로 가겠어요.”
그 순간 그녀의 몸이 날아오르더니 창문을 통과해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유령과도 같은 그녀의 기쾌한 움직임에 객잔 안의 사람들은 모두 얼이 빠질 수밖 에 없었다. 방금 전에 자신들이 헛것을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총단에 도착하자마자 옥화무제는 추밀단주부터 호출했다. 웬만한 일이라면 총관에게 물어보면 되겠지만, 이번 일은 그의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녀의 긴급 호출을 받고, 추밀단주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고아한 학자풍의 노인이 바로 무영문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추밀단주이자, 무영문에 존재하는 4명의 장로 중 한 명이었다.
추밀단주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옥화무제는 상대에게 숨 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추밀단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태상문주님의 명령을 받는 즉시, 섬서분타주가 움직인 모양입니다. 그로서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만, 그게 최악의 결과를……..
옥화무제는 추밀단주의 얘기를 중간에 끊으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렇게 빨리 움직였다면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요?”
잠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던 추밀단주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게…, 비영단주가 미리 언질을 줬던 모양입니다.”
“비영단주가요?”
“예. 섬서분타주는 임무가 있을 거라는 비영단주의 언질을 받은 후, 곧바로 가용한 모든 전투원들을 끌어 모아 우이 마을로 달려갔답니다. 마을 인근에 포진하고 있다가, 태상문주님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치고 들어갈 작정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옥화무제는 추밀단주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써 왜 이렇게까지 일이 꼬이게 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섬서분타주는 옥화무제의 정식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칼을 들 수 있는 무사들을 최대한 끌어 모은 후, 우이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분타에 앉아 명령서를 기다릴 게 아니라, 미리 우이 마을 주변에 포진을 끝낸 후 그곳에서 명령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명령서가 도착한 후에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빠를 것은 뻔한 이치니까. 상관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는 흔히 찾아오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비 영단주 같은 고위급 인사가 미리 언질까지 주지 않았던가.
절대로 실패해서도 아니, 작은 실수조차 허용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이 마을 외곽에 도착한 섬서분타주는 몇몇 발 빠른 수하들을 보내 마을 내부를 은밀히 살펴보게 하는 한편, 어떤 식으로 작전을 전개할 것인지 심복들과 의논하 느라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와중에 도착한 태상문주의 명령서. 무영문의 살아 있는 전설이 자신에게 직접 명령서를 보냈다는 사실에 섬서분타주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상문주는 마을의 주민들을 비롯한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섬서분타주가 주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를 필요는 없었다. 며칠 전 벌어진 마교와 개방의 충돌에 겁을 집어먹은 주민들이 모두 다 짐을 싸들고 이웃 마을로 도망쳐 버렸기에, 그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쥐새끼 한마 리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명령서에 기록되어 있는 마교도 역시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패력검제 일행이 마을을 탈출해 버린 마당에 장인걸의 수하들은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할 필요가 없어 떠나 버린 것이었지만, 그런 자세한 내막을 섬서분타 주가 알 리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혹시 마교도들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변을 경계하는 한편, 본연의 임무인 개방의 흔적을 완전히 말살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거기에는 개방의 생존자들의 처리 또한 포함되었다.
워낙 훈련이 잘된 무영문도들이었기에 임무를 완수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섬서분타주는 선뜻 철수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혹시 어딘가에 못보고 넘어간 비표라도 하나 남아 있다면 어쩌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만에 하나 그런 것이 있어 개방 쪽에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파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마을에서 철수하지 못하고 수하들을 닦달하여 마을 전체를 뒤지고 또 뒤졌다. 그리고 더 이상 뒤질 데가 없자, 이번에는 땅 속까지 파서 완전히 뒤 집어엎으라고 시켰다. 거기다 뭔가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아예 마을 전체를 불살라 버리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패력검제와 함께 탈출에 성공한 진곡추가 주위의 개방도들을 규합해 우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무영문도들이 마을을 산산이 분해하여 불사른다고 광분하고 있 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섬서분타주는 처음에 혹시나 마교도들이 습격이라도 해 올까 봐 주위에 보초를 세웠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해체 작업에 동참해야 했다. 마 교도들은 기본적으로 엄청난 마기를 뿜어대는 만큼, 굳이 보초를 세우지 않더라도 근처에 접근해 오면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더군다나 마을을 완전히 분해하느라 일손까지 딸리는 마당에 보초를 세운답시고 헛된 인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섬서분타주는 진곡추를 비롯 한 개방도들이 가까이 접근해 올 때까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진곡추를 비롯한 개방도들은 자신들의 동료들이 마을의 잔해 속에서 불타고 있는 걸 목격하고야 말았다. 마교도들의 손에서 구출해 내겠다고 죽자 살자 여기 까지 달려온 것도 다 저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저런 천인공노할 놈들이 동료들을 살해하여 불사르고 있다니…….
분노에 눈이 뒤집힌 개방도들에게 상대편의 정체가 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놈들이 저승사자면 어떤가? 그들은 자신들의 전력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적들을 향 해 분노의 함성을 질러대며 달려들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일이 꼬일 수가 있지?”
보고를 듣던 옥화무제는 참담한 표정만 지었을 뿐, 분노를 표출하지는 않았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충직한 수하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잘못 이 있다면 오판을 하여 명령을 내린 자신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우리가 입은 피해는?”
머뭇거리던 추밀단주는 참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상자만 100명이 넘습니다.”
100명이라는 숫자를 옥화무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정확한 건가요? 본문에 그 정도 피해를 입히려면 엄청난 인원을 동원했어야 가능할 텐데…… 개방에는 그렇게 충분한 시간 여유가 없었잖아요?”
“개방 쪽에 패력검제가 끼어 있었다고 합니다.”
“패, 패력검제가?”
무심결에 벌떡 일어섰던 옥화무제는 현기증이 난다는 듯 머리를 감싸며 비틀거리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옥화무제를 추밀단주는 송구한 듯 바라봤지만, 그렇다고 보고를 도중에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예. 섬서분타주가 우이 마을에 도착해 숨어 있던 개방도들을 찾아내어 처리하고 있을 때, 진곡추와 패력검제를 위시한 개방의 지원군이 달려왔다고 합니다.”
쌍방의 숫자는 비슷했다. 아니, 개방 쪽이 몇 명 더 많긴 했지만, 무공에 있어서 무영문도들이 월등했기에 개방도들이 학살을 당해야 마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화경급 고수인 패력검제가 앞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무영문도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그 결과 100여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섬서분타주를 위시해 40여 명이 포로가 되어 개방의 총단으로 압송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차를 벌컥벌컥 들이켠 옥화무제는 다소 냉정을 되찾은 듯 한층 진정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패력검제가 그곳에 왜 있었던 거죠? 왜 개방의 일에 패력검제가 끼어들었냐는 말입니다.”
추밀단주는 옥화무제의 눈치를 슬쩍 살펴본 다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 패력검제가 어떻게 나타났고, 또 그 때문에 이진덕 조장이 그를 가짜라고 착각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지 말이다. 처음부터 그를 가짜라고 생각했던 만큼, 패력검제가 그곳에 나타났다는 정보 자체가 옥화무제에게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추밀단주의 보고를 들으며 옥화무제의 안색은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아주 사소한 실수 몇 개 때문에 일이 이 지경으로 꼬였다. 어쩌면 무영문의 존립 자체가 뒤흔들릴 수 있을 정도로.
옥화무제는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한 순간의 판단 착오로 이렇게까지 상 황이 악화되다니.
옥화무제는 탁자를 거칠게 내리치며 비명과도 같은 뾰족한 외침을 터뜨렸다.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 거얏!”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까?”
“패력검제는 아직도 거기에 있나요?”
“예.”
옥화무제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구출작전을 감행할 수도 없다는 말이군요.”
“태상문주님께서 직접 나서신다면.
동급 고수와의 대결에는 언제나 커다란 위험 부담이 따른다. 물론, 그녀는 패력검제와 싸워 자신이 패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망설인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나선다는 것은 곧,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개방과의 전면 전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옥화무제는 살짝 눈살을 찡그리며 말했다.
“내가 직접 나설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군요. 개방과 협상을 해 보세요.”
그 말에 추밀단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그들이 협상에 응하겠습니까? 칼자루를 쥔 것은 저쪽인데………
옥화무제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흥!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패력검제가 자신들을 계속 도와줄 수 없다는 걸 그들도 잘 알 테니 말이에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개방 쪽에 해 줄 만한 마땅한 보상이 없지 않습니까?”
추밀단주는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사실 개방은 거지들의 집단이 아닌가. 불교와는 또 다른 방향에서 무소유를 주장하는 집단이다. 그런 그들에게 협상을 이끌어 낼 만한 보상이 뭐가 좋을지 추밀단주로서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옥화무제의 생각은 달랐다.
“돈 싫어하는 사람 봤나요? 듬뿍 안겨줘 봐요. 입이 헤벌쭉 벌어질 테니까.”
지극히 그녀다운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그녀는 돈을 싫어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하다못해 수양이 깊다는 소림사의 고승들조차도 돈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사실, 그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소림사를 돈이 없다면 무엇으로 유지 관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방대한 조직을 매끄럽게 움직이거나, 혹은 자신 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바로 그 점이 문파의 상층부 인사들로 하여금 겉으로는 세사에 초탈한 척 점잔을 떨면서도, 뒷구멍으로는 돈을 챙겨야 하는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살 수밖에 없도 록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 무영문을 관리해 온 그녀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이렇게 말한 옥화무제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기 때문이다. 그런 옥화무제의 행동에 추밀단주는 한 발 살짝 다가서기는 했지 만, 감히 그녀를 건들지는 못하고 걱정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태상문주님.”
“아니, 괜찮아요. 잠깐 머리가 아파서…….”
“부디 옥체를 보충하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태상문주님. 본문의 대들보이신 태상문주님의 옥체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큰일이니 말입니다.”
“추밀단주께 괜한 심려를 안겨드리는군요. 별것 아니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자신의 지시를 이행하라고 추밀단주를 내보낸 후, 그녀는 머리를 감싸쥐며 울분을 터뜨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나도 분하고 원통했기 때문이다. 중원 천하에
퍼져 있는 비급들 중에서 알짜배기들을 몽땅 다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것도 그 망할 놈들의 방해 때문에.
옥화무제는 이빨을 뽀드득 갈며 원통스런 절규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말코들! 너희들이 그러고도 잘되나 두고 보자! 내 기필코 복수할 것이야.”
처음에는 복수를 한답시고 광분하느라 그냥 지나쳤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는 개방과의 갈등에 대한 걱정 때문에 비급에 대한 생각은 할 여유조차 없었다. 하 지만 이제 어느 정도 일이 수습이 될 듯하자, 비급에 대한 미련이 다시금 그녀를 덮쳐왔던 것이다. 극심한 두통과 함께…….
* * *
개방의 비육걸개(肥肉乞) 장로는 총단에 남아 있던 정예의 삼분지 일을 이끌고 즉각 섬서성으로 달려갔다. 이동로 인근에 위치해 있는 분타들의 정예들을 흡수 하며 이동했기에, 자장(長)분타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그 수가 무려 3천에 가까울 정도로 불어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육걸개 장로의 안색은 썩 밝지 못했다. 무영문과 정면충돌까지 각오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3천이라는 숫자로는 썩 믿음이 가지 않았 던 것이다. 무영문도들의 무공 수준이 개방도에 비해 훨씬 뛰어나다는 건 지나가는 개들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어서 오십시오, 장로님.”
자장분타에 도착한 비육걸개의 모습은 평상시와 달리 꽤나 말쑥한 것이었다. 패력검제에게 좋은 인상을 보여 줘야 하는 만큼, 이곳으로 오던 도중에 개천에서 몸 을 씻은 것은 물론이고, 땟국물이 흐르는 옷까지 깨끗하게 빨아 입었기 때문이다.
비육걸개는 자신을 마중 나온 분타주들에게 그간의 노고에 대해 치하했다. 특히, 오늘의 성과를 있게 한 진곡추 분타주에 대한 치하가 컸다. 그런 장로의 칭찬에도 진 분타주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오판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죽음을 당했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진곡추는 비육걸개의 등장에 크게 감동한 상태였다. 설마하니 장로급이 직접 여기까지 달려와 줄 거라고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기 때 문이었다.
“장로님께서 직접 달려오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원로(遠路)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허허, 수많은 형제들이 죽음을 당했는데, 그 정도가 대수겠는가. 그래, 꽤 많은 무영문도들을 생포했다고?”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장로님. 만약 패력검제 대협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저도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대협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일단 마을 중심에 있는 용문객잔으로 모셨습니다. 낡긴 했지만, 그래도 이 인근에서는 가장 시설이 좋은지라…….”
“잘했군.”
개방도들이 자신들보다 무공이 뛰어난 무영문도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패력검제의 덕분이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무영문에서 동문들의 구출작전을 쉽사리 펼치지 못하고 있는 이유 또한 바로 그의 존재였다. 옥화무제가 직접 나서지 않는 한, 패력검제를 상대할 만한 뾰족한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걸 잘 알고 있는 자장분타주였기에 총단에서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 그를 극진히 모시며 이곳에 잡아 두고 있었던 것이다.
패력검제가 묵고 있는 용문객잔으로 찾아간 비육걸개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패력검제 대협.”
상대의 푸짐한 덩치를 알아보자 패력검제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오, 이건 비육걸개 장로가 아니십니까?”
화경급의 무예를 지니게 됨으로 인해 패력검제는 중원에서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높은 배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비육걸개 쪽이 연배가 높은 선배고수인 것은 사실이었고, 그와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패력검제 역시 말을 높여 주고 있는 것이다.
“방주님을 대신하여 대협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본방은 대협께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려.”
“하하,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무슨 인사를 그리 과하게 하십니까.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 했을 겁니다.”
“정도를 걷는 무사라면 당연히 그리 해야 한다는 것을 다들 알긴 합니다만, 실제로 사건이 닥쳤을 때 끼어들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상대가 천하의 무영 문인데 말입니다. 은원을 맺었을 때 가장 골치 아픈 상대가 바로 무영문이 아니겠습니까.”
“허어~, 이것 참…….”
패력검제는 난처한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비육걸개 장로께서 노부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시는 모양이군요. 아부가 과하신 걸 보면 말입니다.”
일순 비육걸개 장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자그마한 눈동자는 워낙 두툼한 살집 속에 감춰져 있었기에 다른 사람이 그걸 눈치 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비육걸개는 짐짓 너털웃음으로 자신의 표정을 감추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핫핫핫, 무슨 그런 말씀을. 이미 대협께는 다 갚기도 힘들 만큼 커다란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같이 술이라도 한잔 하지 않으 시겠습니까?”
점소이를 불러 술과 안주를 시킨 비육걸개는 호기롭게 말했다.
“방주님께 돈을 왕창 뜯어왔으니, 제가 오늘 크게 한턱 쓰겠습니다. 핫핫핫.”
* * *
“저쪽의 동정은 어떻더냐?”
순우기 장군의 물음에 군관은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아무런 이상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장군.”
“그래? 어쨌건 수고했다.”
“옛.”
더 이상 알아볼 게 없다고 판단한 순우기 장군은 군관을 돌려보냈다.
“거참, 이상한 일이로군.”
군관은 몇 가지 보급물자를 수령하기 위해 여문덕 상장군의 진영에 갔다가 방금 전에 돌아왔다. 그곳에 가기 전에 상장군의 동태를 자세히 살펴보라 이미 일러 뒀 기에, 그에 따른 보고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가 없다? 순우기 장군은 그 점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돌을 던졌으니, 지금쯤 상대로부터 뭔가 반응이 와야 했기 때문이다.
여문덕 상장군은 자신들의 대열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아직까지도 밝혀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배반을 하겠다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만약 그가 상부에 밀고 했다면, 벌써 오래전에 자신들을 잡기 위해 형부에서 들이닥쳤을 테니까.
“도대체가 상장군의 속셈을 모르겠군. 뭘 어쩌자는 건지…….”
여문덕 상장군이 가세하지 않는다면 군사를 일으킬 수가 없다.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거는 것도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때나 하는 짓이니까 말이다. 상장군의 결정을 하루 이틀 기다리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그동안 주요 장수들에 대한 포섭 작업은 완전히 끝났다. 모두들 악비 대장군을 부모처럼 따르며 존경 하던 장수들이었기에, 포섭 작업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열 길 물속은 알 수 있겠지만, 한 길도 채 안 되는 사람의 속은 누구라도 알 수가 없는 것 이니까. 그들 중 어느 하나가 상부에 밀고라도 하는 날이면 파멸인 것이다.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상장군.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네가 그쪽으로 가는 것은…….”
사태가 급박함을 알지만, 유광세 상장군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여문덕 상장군을 만나서 설득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건 너무 위험했다. 그렇 다고 모반의 핵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순우기 장군을 그곳으로 보낸다는 것도 큰 모험이었다. 만약 상대가 변심해서 순우기 장군을 투옥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 신은 가장 신뢰하는 동지를 잃게 되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곳에 다른 사람을 보낼 수도 없다. 상장군을 설득하는 중책을 맡길 만큼 믿음직스런 장수가 없었기 때문 이다.
“말리신다고 해도 소장은 상장군을 설득하러 가겠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끈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니까요.”
순우기 장군이 이렇게 강경하게 말하는 이유는 며칠 전, 회하 중부 지역 방어선 중 일부를 맡고 있던 심대평 장군이 처형된 사건 때문이었다.
심 장군이 황실에서 파견된 장졸들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된 일인지 궁금해 하던 차에 오늘 아침 추밀원에서 긴급 공문이 날아왔다. 공문의 내용은 심 장군이 금나라와 내통했고, 이에 그 죄를 물어 참수형에 처했다는 것이었다.
그걸 보면 황실의 사냥개인 황성사가 전방에 배치된 모든 지휘관들을 향해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에게 포섭된 장수 들 중 하나가 입이라도 자칫 잘못 놀리는 날에는 모든 게 끝장인 것이다.
“만약 제가 4일 내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상장군께서 배신하신 거라고 여기셔도 무방할 겁니다.”
“휴우, 어쩔 수가 없군. 알겠네. 귀관의 충심은 내 잊지 않겠네.”
허가가 떨어지자 군막을 나선 순우기 장군은 몇몇 호위병만을 대동한 채 여문덕 상장군을 만나러 길을 떠났다.
여문덕 상장군을 만난 순우기 장군은 상대의 표정이 예상외로 밝은 것을 보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변심한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어서 오게나. 안 그래도 유 상장군을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갑자기 몇 가지 일이 생겨 발을 빼기 어려웠다네.”
“반가이 맞아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상장군.”
가벼운 인사가 오간 후, 여문덕 상장군은 순우기 장군을 진영 깊숙한 곳에 마련되어 있는 자신의 처소로 안내했다. 밀담을 나누기 위해서 자신을 인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함정을 파놓고 끌어들이는 것인지를 가늠하느라 순우기 장군의 머릿속은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들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상장군의 처소를 경비하고 있던 군사들이 순우기 장군과 함께 따라온 장졸들을 막아섰다.
이곳은 상장군의 처소다. 상장군이 초청한 순우기 장군 외에 다른 자들이 들어갈 수는 없는 곳이다. 경비병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순우기 장군은 하마터 면 칼을 뽑아들 뻔했다. 자신을 저 안으로 끌어들여 생포하려는 속셈인 듯한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칼에서 손을 뗀 순우기 장군은 상장군을 따라 순순히 들어가기로 했다. 이곳은 상장군의 진영 한복판이다. 겨우 6명밖에 안 되는 호위병들과 함께 칼부 림을 해 봐야 헛된 반항일 뿐이었다.
순우기 장군은 손을 들어 호위병들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한 다음, 여문덕 상장군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앉게.”
순우기 장군에게 자리를 권한 후, 여문덕 상장군은 탁자에서 하얀 비단으로 감싼 보따리를 꺼냈다. 새하얀 최상급 비단으로 감싸 있는 걸 보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소중한 게 그 안에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풀어보게.”
“이게 뭡니까?”
주섬주섬 보따리를 풀던 순우기 장군의 손이 딱 멈췄다. 피에 절어 있는 관복, 순우기 장군은 이게 누구의 것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이건.. .?”
순간 순우기 장군의 손이 격동으로 부르르 떨렸다.
“대장군의 유품일세.”
여문덕 상장군은 관복 위에 놓여 있던 비단뭉치를 풀었다. 돌돌 말려 있던 새하얀 비단이 풀리자, 그 속에서 핏덩이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이 나타났다.
“이, 이걸 어디서 입수하셨습니까?”
“섭 대인이 주더구먼.”
그러면서 그는 추밀사 섭평의 말을 전했다. 악비 대장군의 죽음에 얽힌 비사를 말이다. 물론 그것은 섭평에 의해 날조된 것이었지만, 그걸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자 리에 없었다. 묵향이 이들에게 알려 준 것도 섭평이 대장군을 죽였다는 정도의 아주 간략한 내용이었지 않은가. 그에 비해 섭평은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게 선후관 계를 따져가며 그럴듯하게 비사를 늘어 놨으니, 도저히 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장군을 죽인 게 진회, 그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매국노였다는 말씀이십니까?”
“섭 대인도 대장군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구먼. 황실 안에 재상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섭 대인 같은 사람도 재상의 눈 밖에 나서 결국 추밀원으로 쫓겨났다고 하더군.”
이렇게 말하며 여문덕 상장군은 섭평이 제안했던 사안을 순우기 장군에게 고스란히 전했다. 매국노 진회를 몰아내고, 악비 대장군을 복권시키자고 말이다. 그리고 그 제안은 순우기 장군에게도 솔깃한 것이었다. 대장군의 복권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이 소식을 상장군께 즉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아닙니다, 상장군. 부탁은 소장이 해야지요. 이런 비상시국에 자신의 권력이나 탐하고 있는 쓰레기를 몰아내는 일입니다. 만약 저를 참여시켜 주지 않으신다면, 엎드려 빌어서라도 참가를 허락받고 싶을 정도입니다, 상장군.”
섭평의 말이 진실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여문덕 상장군의 말에, 제대로 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하고 있었던 순우기 장군 역시 아무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히 순우기 장군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사람이란 가급적이면 목숨을 건 모험은 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던가. 추밀사 섭평과 함께 한다면 자신들이 하려고 하는 썩어빠진 간신들을 축출하고, 황실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을 훨씬 더 안전하게 수행해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군부 공통의 적이 섭평에서 진회로 변경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재상 진회를 타도하기 위한 계략을 짜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야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선 순우기 장군은 말을 달려 양양성으 로 돌아가 유광세 상장군에게 이 모든 사실을 그대로 전했다.
그리고 섭평이 아닌 진회를 타도해야 한다는 정보를 묵향에게도 전했다. 진회의 끄나풀이었던 섭평이, 양심선언을 했다고 말이다.
군부의 일에 밝지 못했던 묵향은 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한방꺼리도 안 되는 황궁의 정세에 대해 알아보랍시고 무영문에 의뢰를 넣는 것도 귀찮은 일이 고, 무엇보다 지금 그의 관심은 장인걸에게 쏠려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