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8권 11화 – 불법 레어 침입자
불법 레어 침입자
팔시온과 헤어진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레어로 공간이동했다. 팔시온이 흑마법사를 찾는 동안, 그곳에서 상처를 돌보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던 것 이다.
레어의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 마련되어 있는 거대한 공동(空洞)은 드래곤이 본체로 현신한 채 잠을 자기위한 공간이다. 그래서 언제든 드래곤이 낮 잠을 잘 가능성이 있는 만큼, 그곳에는 아무것도 놔두지 않고 비워두었다.
공간이동을 한 아르티어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 공동의 중심부쯤이었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본체로 현신했다. 그 넓었던 공동이 꽉 찰 정도로 거대한 아르티어스의 본체. 하지만 그의 몸 여기저기에는 수많은 상처들로 너덜거리고 있었다.
이제야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된 아르티어스는 온몸의 상처를 꼼꼼하게 마법으로 치료해 나갔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 중에서 가장 강력 한 회복력을 자랑하는 게 바로 드래곤이다. 그런 만큼 마음먹고 치료를 하기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에 더 이상의 상처는 존재하지 않았 다. 하지만 너덜거리는 외피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물론 외피를 복구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뱀 같은 파충류들은 허물을 벗는 방식으로 외피의 상처를 복구하지만, 드래곤이 허물을 벗는다는 소 리를 들어봤는가? 드래곤은 허물을 벗지 않는다. 드래곤의 외피는 드래곤 본이라는 금속성 물질로 이뤄져 있었기에, 허물을 벗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 능했기 때문이다.
대신 드래곤들은 마나를 이용하여 자신의 몸체를 변화시키는 재주를 부릴 수 있었다. 과거 아르티어스가 다크를 위해 자신의 몸속에 있는 드래곤 본 의 일부를 꺼내어, 검을 만들어줄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아르티어스는 방대한 마나를 운용하여 뼈대를 이루는 드래곤 본의 일부를 꺼내어 외피를 복구시켰다. 몸 구석구석을 단장해야 하는 일인 만큼 마나 의 소모가 큰 것은 물론이고, 기나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매우 섬세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외피를 복구하는 작업을 완전히 끝내지 못했다. 그건 쏟아지는 잠 때문이었다. 그의 몸은 수면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기나긴 잠을 말이다. 지금 그의 드래곤 하트는 거의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장백산에서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를 했고, 곧 바로 차원이동을 하며 막대한 마나를 소모했다. 아무리 드래곤이 마르지 않는 마나의 샘인 드래곤 하트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렇게 엄청난 마나를 한꺼번에 소비하고 나면 반드시 수면을 통해 보충을 해야 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기 시작했을 때, 갑작스런 그 괴성에 놀라 엘프 둘이 뛰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지하공동을 가득 채 운 거대한 황금 덩어리를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의 주인이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이, 이걸 어떻게 하지요? 깨울 수도 없고…………….”
“우리를 찾지도 않으시고 바로 잠자리에 드시지 않았나. 주변에 대기하고 있다가, 찾으시면 바로 달려가는 수밖에.”
“그게 좋겠군요.”
엘프들은 드래곤이 언제 깨어날지 몰라 전전긍긍 하고 있었지만, 사실 아르티어스는 그들의 예상과 달리 깊은 잠에 빠진 게 아니었다. 깊은 수면으 로 빠지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그야말로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치레아 공국에 다녀온 지 보름쯤 지났을까, 그의 뇌리를 울리는 요란한 울림이 갑작스럽게 전해져 왔다. 팔시온에게 전해줬던 수정구 를 통한 통신이 그의 뇌로 직접 전해져 들어왔던 것이다. 그가 위험한 이런 방식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혹시나 깊은 잠에 빠져 신호를 놓쳐버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어르신, 기뻐하십시오. 어르신께서 제게 부·탁·하·신 흑마법사를 겨우 찾아냈습니다.>
<알겠다. 지금 곧 가마.>
곧이어 아르티어스의 거대한 몸체가 사람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레어에서 그 자취를 감춰버렸다. 치레아 공국으로 공간이동해 버린 것이 다.
***
“흠, 이 녀석이 죽음의 기사를 만들 줄 안다고?”
“예, 어르신.”
팔시온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치레아 대공이 굽신거리고 있는 금발의 사내. 그 사내의 정체가 뭔지 흑마법사는 곧바로 눈치 챘다. 저 정도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는 사람은 아예 없다. 있다면 드래곤뿐. 특히나 금발인 점으로 미뤄봐서 골드 드래곤이 틀림없었다. 그 순간 흑마법사의 뇌리로 악독하기 그지없었던 한 골드 드래곤 의 이름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서, 설마?’
두려움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흑마법사를 향해 아르티어스가 물었다.
“내가 아끼던 호비트가 죽었다. 그 호비트를 죽음의 기사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 그러기에 앞서 위대하신 분께 먼저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죽은 기사를 죽음의 기사로 되살리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원해야 가능하지, 그렇지 않고 강제적으로 죽음의 기사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기사라는 마물로 태어나 저에게 속박되는 것을 감수할 정도로 강한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죽음의 기사로 재 탄생되기를 원하는 기사는 거의 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수백 명에 달하는 기사들의 영혼에게 권유해 봤습니다만, 성공한 것은 겨우 3명 정도에 불 과했습니다. 그런 만큼 죽으신 분의 영혼이 만약 거부를 하여 죽음의 기사로 만들지 못하게 되었을 때, 저에게 그 책임을 묻지 말아 주시기를………….” 그제야 흑마법사 녀석이 주장하고자 하는 게 뭔지를 깨달은 아르티어스는 신경질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아아, 네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그쯤 했으면 이해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럼 저를 그 분이 묻혀있는 무덤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무덤에는 왜?”
“그 분의 영혼과 대화를 해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르티어스는 곧바로 품속에서 술병을 꺼냈다. 다크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는 그 술병을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술병의 봉인을 해제하여 영혼이 밖으 로 나올 수 있게 해줬다. 물론 다크의 영혼이 딴 데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커다란 결계를 형성한 뒤 그 속에 머물도록 했다. 그런 다음 흑마법사에게 말했다.
“여기에 영혼이 있으니 주문을 외워보거라.”
흑마법사는 두 손을 하늘 위로 뻗으며 주문을 외웠다.
“잠들어 있는 위대한 기사의 영혼이여! 대마왕 크로네티오님의 권능을 받아 그대에게 명하오니 지저(地)의 혼돈에서 깨어나 나, 카론 일족의 권능 을 이어받은 제이슨의 명령에 따르라!”
흑마법사가 주문을 외우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술병 안에서 왠지 까칠한 음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네놈은 누군데 나를 부르는 게냐?〉
“위대한 기사의 영혼이여, 죽음의 기사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만약 죽음의 기사로 다시 태어난다면,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 록 내가 최선을 다해 도우마. 네 원한이 무엇이냐?”
애타는 그의 물음에 영혼은 퉁명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원한 따윈 없다. 무사로서 후련하게 싸우다 죽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게 있겠는가.〉
까칠한 답변에 당황한 흑마법사는 황급히 아르티어스에게 보고했다.
“사자가 다시 태어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답니다. 무사로서 후련하게 싸우다 죽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느냐고…………….”
“이런 망할! 그 녀석한테 전해.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말이야. 죽음의 기사면 어떠냐. 나는 네 외모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 그러니 내 곁에서 말벗이라도 해다오. 앞으로 기나긴 생을 홀로 살아야 할 아버지가 불쌍하지도 않냐?”
그 말을 사자의 영혼에게 전한 흑마법사는 곧 황당한 표정으로 말을 전했다.
“싫다는데요.”
“이런 못된 놈! 애비는 자기를 살리겠다고 이렇게 애를 태우고 있는데, 감히 들은 척도 안 해?”
성질 같아서는 그냥 영혼을 순리대로 떠나게 해주고, 모든 것을 끝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 그 빈자리가 너무 컸던 탓이다. 무미건조하던 그의 삶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어줬던 호비트인 다크. 그 다크와의 짧았던 유희는 이 전에 해 왔던 어설픈 유희와는 달리, 그에게 엄청난 삶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래서 다크를 친아들처럼 애지중지하며 돌봐줬는지도 모른다.
유희라는 게 언제나 그렇듯, 골치 아프게 꼬이다 보면 나중에는 신물이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그냥 다 때려치우고, 다른 곳에 가서 다시금 유희 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아들인 다크와의 유희는 그렇지가 않았다. 호비트인 주제에 드래곤인 자신에게 겁도 없이 달려들던 그 무모함, 그리고 자 기가 원하는 대로 마구 부려먹는 그 악독함.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아들놈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어처구니 가 없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하루하루가 재미있고, 너무 행복했었다. 그래서였을까, 예전에 유희 중 대륙을 정복해 보겠다고 날뛰었을 때보 다, 다크의 눈을 피해 구석에 처박혀 농땡이 필 때가 더 통쾌하고 행복하게 느껴졌던 것이.
그만큼 아들의 존재가 자신의 많은 것을 바꿔놨던 것이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아들이 없는 삶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또다시 동굴 속에 처박혀 잠이 나 자면서 그 기나긴 삶을 지루하게 보내야만 한다는 걸 떠올리면……….
“안 돼! 절대 그럴 수는 없어.”
아르티어스가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분노에 잠겨있을 때,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팔시온과 미디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팔시 온은 궁금증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아르티어스에게로 다가가 뭔가를 물으려 했다. 그때 미디아가 황급히 다가와 그의 팔을 잡고는 뒤로 잡아당겼 다.
“당신 지금 뭘 하려고 하는 거예요?”
“설마 다크가 죽은 거야? 말도 안 돼. 어르신께 확실히 물어봐야겠어.”
“당신 미쳤어요? 지금 어르신께 뭘 물어볼 만한 상황이냐구요.”
미디아가 겁에 질릴 정도로 아르티어스의 분노는 대단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지금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이럴 때 자칫 그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했다가는, 오늘이 바로 제삿날이 되는 수가 있다.
하지만 팔시온은 그런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그저 멍하니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 녀석이 얼마나 강했는데. 코린트가 자랑했던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조차도 이긴 녀석이잖아. 그런 놈이 죽었다는 게 말이 “나 돼?”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일단 우리 밖으로 나가요.”
듣다 못한 미디아가 팔시온의 팔을 잡아끌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 와중에도 팔시온은 멍한 표정으로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친구 중 하나가 다크였어. 그 빌어먹을 놈은 내가 죽은 후에도 몇 백 년은 더 살 만큼 강했다구. 그런데 그런 놈이 죽었다고 나 보고 믿으라는 거야?”
텅 빈 눈으로 미디아를 향해 물어보던 팔시온은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관저 안으로 터덜터덜 들어갔다.
실내로 들어온 팔시온은 벽장에 장식되어 있던 독한 술병을 꺼내 주저없이 마개를 땄다. 그리고는 목이 타는 듯 한잔 가득 부어서는 벌컥벌컥 들이 켰다. 그런 다음 또다시 한잔 따라서는 미디아에게 내밀며 물었다.
“당신도 한잔 할래?”
“나는 됐어요.”
살며시 고개를 흔든 미디아는 창가 쪽으로 다가가 아르티어스가 지금 뭐하고 있는지부터 살폈다. 아르티어스는 분노를 참기 힘들었던지 발을 연신 동동 구르면서도, 화를 애써 참으며 계속 흑마법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죽음의 기사가 되기 싫다는 다크의 영혼을 달래고 있는 것이리 라.
아르티어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채, 자신의 레어로 돌아왔다. 거의 1시간에 걸쳐 애걸복걸하며 매달렸건만, 매정한 아들놈은 그의 요청 을 거절했다. 좀 더 설득해 보고 싶었지만, 이제 더 이상의 형식적인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는 흑마법사의 말에 그만 포기하고 돌아온 것이다. “망할 놈의 새끼!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나를 이따위로 대해? 또다시 네놈을 살릴 생각을 하면 내가 드래곤이 아니라 도마뱀이다.” 아르티어스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 엘프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잠을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주인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후, 그들은 아예 지하공동에다가 보초까지 세워놓은 상태였다. 안 그래도 성질 더러운 주인이 들락거리는 꼴이 왠지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아르티어스는 귀찮은 듯 손짓하며 대꾸했다.
“됐다. 너희들은 가서 일 봐.”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사라지는 엘프들. 아르티어스가 그들을 서둘러 내보낸 것은 성질 같아서는 무슨 짓을 해버릴지 자신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 다. 그래도 나름 쓸 만한 노예들인데, 화풀이 대상으로 없애버리기에는 좀 아까워서였다.
“빌어먹을. 다 때려치우고 잠이나 자자.”
그때 막 드래곤의 본체로 변신하려고 하던 아르티어스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죽음의 기사로 만드는 데는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봐야 한다지만, 키메라의 경우에는 그런 작업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흠, 호비트들이 키메라를 만드는 실력이라고 해봐야, 별 볼 일 없을 게 뻔하고…………….?
어느새 본체로 돌아가서 잠이나 즐기겠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그의 머릿속은 키메라로 꽉 들어찼다.
“이왕에 이렇게 된 거, 내가 한 번 키메라를 만들어 봐? 드래곤도 한 마리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정 안되면 브로마네스를 잡아서 쓰면 되겠네. 큭큭 큭.”
자신의 생각이 꽤나 마음에 든 듯 흡족한 웃음을 터트리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꼭 죽일 필요는 없을 거야. 겨우 키메라 한 마리 만드는 것 정도라면, 드래곤의 본체가 다 필요하지는 않겠지. 그 정도라면 내 피와 살을 조금
잘라서 쓰면 되지. 그렇게 되면 아들놈과 나는 같은 피로 연결되는 게 아니겠어?”
정말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빨리 키메라 제작법이나 배우는 게……..”
중얼거리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인상을 확 구겼다.
그러고 보니 키메라 제작법을 누구에게 배우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호비트한테 가서 배운다고? 녀석들의 연구 수준 이라고 해봐야 뻔할 뻔자가 아닌가. 브로마네스 녀석의 말에 따르면 제대로 말도 할 줄 모르는, 그런 허접한 놈들 밖에 만들지 못할 정도로 저급한 수 준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직접 연구하며 레벨을 올릴 수밖에 없을 텐데, 어느 세월에 그 짓을 하겠는가.
아르티어스는 공동 안을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뭔가 방법을 찾아내야 해. 아르티어스, 너는 일족들 중에서 가장 머리가 뛰어나다는 칭송을 받고 있는 아버지의 아들이잖아. 너는 생각해 낼 수 있 어. 너는…………….”
이때, 그의 머리를 번쩍 하고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그의 아버지인 아르티엔이 생애 대부분을 마법에 미쳐서 사셨던 분인 만큼, 키메 라에도 손을 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마법생물 키메라를 제조하는 것에도 엄연히 고난도의 마법이 필요했다. 거기에 흥미를 느끼셨을 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의 레어를 뒤져봐야 해.”
아르티엔이 죽은 지 꽤나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레어에 있는 보물들은 도둑맞지 않고, 모두 다 제자리에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아르티어 스였다.
골드일족이 낳은 최강의 드래곤 아르티엔.
하지만 의외로 그의 레어는 소박했다. 아마도 그건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금은보화와 보물을 모으느라 정신없었던 것에 비해, 그는 마법 연구만으로도 바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리라. 더군다나 아르티어스를 낳은 다음에는 그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바빠서, 금 쪼가리나 모은다고 돌아다닐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르티엔이 전혀 금은보화를 수집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른 드래곤에 비한다면 비교적 소량이기는 했지만, 수집하기 는 했었다. 그런데 레어 안이 텅 비어있는 것은 이미 아르티어스가 몽땅 다 털어먹었기 때문이었다.
레어에 도착한 아르티어스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얼레, 침입자가 있었나?”
금은보화야 이미 다 털어갔지만, 그 외에도 아르티엔의 레어에는 방대한 마법 자료들이 쌓여있었다. 그것들을 몽땅 다 자신의 레어로 옮길 생각이었 지만, 당시 다크에게 얽매여 있던 아르티어스에게는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놈들이 들어와서 아버지의 유산을 훔쳐가 지 못하도록 각종 방어망을 쳐놓는 것으로 그쳐야만 했었다. 그런데 그 방어망들이 전부 다 해체되어 있는 것이다.
드래곤답게 아르티어스는 어떤 위험이 저 어두컴컴한 레어 안에 감춰져 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때, 그의 귀에 이해 하기 힘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거기 조심해!”
“그래, 그렇게..”
뭔가를 퉁탕거리며 두들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드워프 특유의 억양과 어 조가 가미되어 있기에, 아르티어스는 보지 않고도 레어 안쪽에 드워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이상하네……? 아무리 드래곤이 살지 않는다고 해도, 레어에 드워프들이 정착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왜 그런가 하면, 이곳에 다른 드래곤이 둥지를 틀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날로 둥지를 튼 드래곤의 노예 신세로 전락해 버린다. 그 런 위험을 뻔히 알면서도 이곳에 정착할 간 큰 드워프는 없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수많은 드워프들이 북적거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다 털어가버려 휑하기 그지없게 변해버린 을씨년스러운 공간을 새로운 예술작품들로 채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의 모습을 발견한 드워프들 중 한 명이 안쪽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우람한 덩치의 오크를 한 마리 데리고 나왔다. 오크들 중에서 붉은 털을 지닌 개체는 꽤나 드물다. 더군다나 저렇게 불타오르는 듯한 선명한 붉은 털을 가진 놈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이죽거렸다.
“킁, 손님이 들어온 거였군.”
하기야, 드래곤이었으니 그가 여기에다 쳐놨던 각종 방어 마법들을 무위로 돌릴 수 있었던 것이리라. 물론 그것도 다 아르티어스가 이곳에 없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말이다.
“췩! 누구시죠? 췩! 무슨 일로 남의 영역에 침범하신 겁니까. 취췩!”
말을 할 때마다 커다란 송곳니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여기가 어떻게 네 녀석의 영역이라는 말이냐? 이 레어는 골드일족 최강의 드래곤이셨던 아르티엔님의 것이다.”
“췩! 그건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것도. 췩!”
“그렇다면 이 레어가 그분의 아들인 나 아르티어스에게로 상속되었다는 것도 잘 알겠군. 안 그래?”
“췩! 당신은 이곳에서 살고 있지 않잖아요. 췩! 그리고 드래곤이 둥지를 두 개 이상 가진다는 말은 여태 들어본 적이 없다구요.”
“흥! 2개를 가지건, 3개를 가지건 내 마음이지.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레어에 침입한 녀석은 이만 여기서 나가줘야겠어.”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췩!”
“호오, 못하겠다고?”
피식 미소 짓는 아르티어스. 말로 하니까 감히 어린놈이 주제파악도 못하고 덤비고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다크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있 는 상태였는데, 아르티어스는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이놈을 어떻게 박살내야 울화가 풀릴까? 뼈다귀 한두 개 부러트리는 정도로는 화가 풀릴 것 같 지도 않았다.
“크크, 어쩔 수 없지.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영역에 멋대로 침입하는 놈이 어떻게 되는지 내가 몸소 가르쳐 주는 수밖에.”
광기로 번들거리는 아르티어스의 눈을 보고, 오크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 거의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자신의 온 몸을 짓누르는 상대방의 거대한 존재감.
“취익, 맙소사……”
자신이 아는 한 가장 강한 존재였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보다도 훨씬 더 강맹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자신을 옭죄고 있었다.
“꾸애애액! 오, 오크 아니, 드래곤 살려~.”
잠시 후, 광장 안에는 처절한 오크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겁에 질린 드워프들은 손으로 양쪽 귀를 꽉 막고 한쪽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기만 했 다.
“망할 새끼! 곱게 말로 할 때 알아서 나갈 것이지….”
이제 갓 독립한 듯한 철없는 드래곤 한 마리를 확실히 교육(?)시킨 후, 아르티어스는 아버지의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의 연구실은 예전 과 변한 게 전혀 없었다.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는 책상. 먼지가 쌓여있는 것은 책상 위만이 아니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랬다.
어쩌면 어린 드래곤 녀석도 이곳에 연구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갓 분가해서 해보고 싶은 일이 수없이 많은 어린 드 래곤이 연구실에 처박혀 마법공부부터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아르티어스는 먼저 수북이 쌓여있는 마법서들 중에서 키메라 제조에 대한 책이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책 한권 한권을 다 읽어보며 꼼꼼히 확인 해야 하는, 엄청난 끈기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거의 3천 권쯤 되는 마법서들을 살펴봤을 때쯤일까? 아르티어스는 희미한 드래곤의 존재감을 느꼈다. 그는 살펴보던 책을 신경질적으로 탁자 위에 내려놨다. 안 그래도 찾고자 하는 책이 찾아지지 않아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이 자식이 주제 파악도 못하고, 다시 온 모양이군. 이번에는 아주 그냥 박살을 내줘야겠어. 이 근처에는 아예 올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녀석을 어떻게 하면 화끈하게 아작을 내줄까 궁리하며, 느긋한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몇 발자국 채 걸어가기도 전에 밖에서 느껴지는 드래곤의 존재감이 상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온 몸에 전율이 일게 할 정도의 무시무시한 존재감…………. 이 정도 존재감이라면 필시 에인션트급을 상회하는 드래곤이리라.
순간 멈칫 멈춰 선 아르티어스.
“지 애비에게 도움을 청한 건가?”
녀석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복수할 수 없을 거라는 걸 느꼈으리라. 하지만 자존심 강하기로 이름 높은 레드 일족이, 연장자의 도움까지 청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배알도 없는 새끼.”
무심결에 욕설을 중얼거리는 아르티어스였다.
지금까지 저질러 놓은 수많은 악행 덕에, 노룡들이 자신을 보는 눈이 곱지 않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제 멋대로 살아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처한 현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아르티어스는 아니다. 무엇보다 냉철하게 판단한다.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사고를 치고도, 이렇게 멀쩡 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게 바로 그 덕분이었으니까.
‘그냥 물러날까?’
만약 이게 아들의 일에 연관된 것만 아니었다면, 그는 곧바로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도망칠 수 없었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더 이상 이곳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은 여기에 쌓여있는 아버지의 마법서들을 살펴볼 수 없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부딪쳐 보는 수밖에.”
아르티어스의 예상과 달리 손님은 한 명만이 아니었다. 무려 세 명이었다. 그 중 하나는 얼마 전에 아르티어스에게 박살나서 쫓겨난 어린 드래곤이 었고, 둘은 처음 보는 드래곤들이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의 존재감이 워낙에 엄청나서, 나머지 둘의 존재감이 묻혀버렸기에 하나로 느껴졌던 것이 다.
아르티어스가 레어 안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오크 녀석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으르렁거렸다.
“바로 저놈입니다! 저놈이 제 레어를 뺏고,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구요.”
이때, 오크 녀석의 옆에 서있던 드래곤이 또 다른 존재에게 공손히 말했다.
“브라키어님, 공정한 판결을 부탁드립니다.”
월급 정도의 젊은 드래곤, 아마도 오크 녀석의 아버지인 모양이다. 아르티어스에게 묵사발이 난 놈이 구원을 청할 데라고 해봐야, 그 아버지 밖에 더 있겠는가. 만약 아버지라는 녀석이 직접 이리로 달려왔다면, 아르티어스가 손쉽게 상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저놈이 아들을 박살낸 게 누군지 눈치를 챘는지, 자신들의 일족 수장(首長; Lord)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데 있었다.
에인션트 레드 드래곤 브라키어. 레드 일족의 수장으로서 광폭하기로 이름난 무시무시한 드래곤이다.
혹시나 하기는 했지만, 상대가 브라키어라는 말에 아르티어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브라키어와는 예전에 안면이 있었다. 과연 저놈이 공정한 판결을 해줄까?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다는 게 아르티어스의 판단이었다.
예전에 아르티어스가 사고 쳤을 때, 브라키어가 다른 종족의 수장 둘과 함께 그의 레어를 방문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붉은 머리의 엘프였는데, 오늘은 타는 듯한 적발의 건장한 호비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브라키어는 레어 안에서 걸어 나오는 아르티어스를 보고는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또 네놈이냐?”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그래.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또다시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게냐?”
“말썽이라니요? 터무니없으신 말씀이십니다.”
“터무니없다니! 어떻게 된 게 네놈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한 게 없냐. 이 아이한테 다 들었다. 레어에 무단침입, 그리고 강제 점거. 내 살다 살 다 남의 레어를 뺏는 드래곤이 있다는 소리는 오늘 처음 들었다.”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무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항변했다.
“뺏다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뺏은 게 아니라고?”
“예, 이 레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제 것입니다.”
“네 녀석의 레어는 말토리오 산맥에 있지 않더냐?”
“그렇긴 한데 그건 본집이고, 여긴 가끔 와서 쉬는 별장이죠.”
별장이라는 대답에 브라키어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그런데 감히 그런 억지를 자신의 앞에서 부리다니. 브라키어는 그 래도 일족의 수장답게 분노를 애써 억눌렀다. 성질 같아서는 패대기부터 쳐놓고 대화를 나눴겠지만, 종족의 수장이라는 지위에 있는 만큼 분노로 부 들부들 떨리는 손을 억지로 참고 있었던 것이다.
“별장을 가진 드래곤이 있다는 말은 내 생전 처음 듣지만…………. 뭐, 좋다. 네 말이 옳다고 치자. 그런데 이게 네 레어라는 증거가 있느냐? 네 별장이라 는 증거가 있느냐는 말이다.”
“물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이 레어를 물려받은 후, 저는 이곳에 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각종 마법 방어망을 쳐뒀습니다. 물론 그 방어망은 보물사냥을 하러 다니는 호비트들을 막자는 것이지, 동족을 막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강하게 방어망을 쳐봐야, 동족들을 상대로 그게 먹혀 들어가기나 하겠습니까? 오히려 방어망만 부서지죠. 그래서 동족이라면 방어망을 부수지 않고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해놓은 뒤, 안쪽에 팻말을 세 워두는 것으로 대신했었습니다.”
말을 하던 아르티어스는 어린 드래곤을 한 번 매섭게 째려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실수한 게 있으니, 설마 갓 분가한 어린놈이 제 레어에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을지는 상상조차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그 간단한 마법 방어망도 통과하지 못해 몽땅 다 부숴버렸고, 제가 안쪽에 세워뒀던 팻말도 없애버렸더군요.”
브라키어는 사나운 눈빛으로 어린 드래곤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녀석의 말이 사실이냐?”
갑작스런 질책에 어린 드래곤은 당황해서 대답했다.
“무, 물론 제가 여기에 왔을 때 방어마법진이 쳐져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안쪽에서 팻말도 봤습니다. 하지만 당시 여기에는 아무도 살고 있 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곳에 주인이 있다면, 그를 시중드는 자들이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경비 몬스터 한 마리 없이, 그렇게 간단한 마법만으로 레 어를 방비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 말에 브라키어는 잠시 고심을 했다. 사실, 브라키어는 내심 탄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순전히 억지만 부려대며 동족들을 괴롭혀 대는 못된 놈인 줄 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이다. 어쩌면 아르티엔의 죽음이 녀석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쌍방 간의 의견을 들어본 결과, 네 의견이 충분히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브라키어는 오크 녀석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 레어의 주인이 죽은 것도 사실이고, 또 이곳에 아무도 살지 않고 있었다는 네 주장은 옳다. 하지만 방어 마법진이 쳐져있고, 이곳에 주인이 있다 는 팻말까지 세워져 있었음에도, 그걸 무시한 것은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니야.”
오크는 굉장히 억울하다는 듯 슬쩍 눈시울까지 붉히며 열변을 토했다.
“그저 단순한 팻말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잠시 기억을 되새겨보는 오크. 그때 대충 읽고 뽑아버렸던 것이었지만, 완벽하기 짝이 없는 드래곤의 기억력은 당시의 장면이 마치 방금 전에 벌어 졌었던 것처럼 선명하게 그의 뇌리에 떠오르게 만들어 줬다.
“이 레어는 나 아르티어스의 것이다. 무단침입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이렇게 단 두 줄만이 기록되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레어 안에는 아무도 살 고 있지 않았고, 심지어 금은보화라고는 두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죠. 남아 있었던 건 아르티엔님이 남겨놓으신 방대한 양의 마법 서들 정도였습니다. 저는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이 아르티엔님이 돌아가신 후, 그분이 남겨놓으신 재산을 습득하기 위해 먼저 침을 발라놓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에 들러 마법서를 자신의 레어로 옮기려고 말입니다. 저는 혹시나 해서 10년 동안을 기다렸습니다. 아르티어스 란 드래곤을 만나면 사정을 설명하고, 마법서는 필요 없으니 이 레어를 저에게 달라고 부탁하려고 말입니다. 제가 남의 재물을 탐할 만큼, 후안무치 한 그런 드래곤은 아니지 않습니까? 고룡께서 기거하시던 곳이라서 그런지, 넓이 하나만큼은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 분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앞뒤 설명을 들어보지도 않고 저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진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브라키어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아르티어스를 바라봤다. 양쪽 얘기를 들어보니, 둘 다 그럴 듯한 이유였기에 공정한 판단을 내리기가 곤란 했기 때문이다.
“이 아이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솔직히, 자네에게 레어가 둘씩이나 필요하지는 않지 않은가. 물론 여기에 있는 아르티엔님의 유산은 자네가 가 져가는 것으로 하고, 어린 드래곤을 위해 양보를 해주면 안 되겠는가?”
“위대하신 브라키어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윽박을 질러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내심 마음을 다지고 있었던 브라키어는, 아르티어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네 예전보다는 꽤나 어른스러워졌군, 그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허허, 아르티엔님께서 살아계셨다면 대견스러워 하셨을 게야.”
살짝 양심이 찔리는 아르티어스였다. 지금 이러고 있는 건 필요에 의해서였지, 결코 자신이 개과천선해서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그분께서 대마왕 크로네티오와 싸우다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브라키어, 대마왕이 강림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드래곤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그 혼자만이 싸우다 죽었다 는 것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회상에 잠겨있던 브라키어는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일세. 아르티엔님께서 크로네티오와 싸우실 때, 자네도 함께 있었나?”
“예.”
“오호, 이제야 궁금증을 풀 수 있겠구먼. 그렇다면 왜 그때 다른 드래곤에게는 알리지 않았는가. 내가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 려갔을 텐데………….”
“당시 대마왕은 토지에르라는 호비트의 육신에 강림했었지요. 아무리 대마왕이 강하다고 하지만, 호비트의 육신이 지니고 있는 한계로 인해 그리 대단한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었습니다. 그 때문에 어르신을 비롯한 다른 일족의 수장들께 기별을 넣지 않았던 겁니다.”
브라키어는 말도 안 된다는 소리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호비트의 몸에 강림했다고? 그럴 리가………….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내 직접 가봤다네. 그 엄청난 흔적들, 그건 결코 호비트 따위의 몸에서 구현해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어.”
“맞습니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아버지께서는 놈이 본신이 지닌 힘의 절반쯤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씀하셨죠.”
그 말에 브라키어의 얼굴에 경악감이 어렸다. 본신 능력의 절반이라면, 드래곤이 떼로 덤벼든다고 해도 승패를 가늠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었기 때문이다.
“저, 절반이라고? 그게 사실인가?”
“예. 아버지께서는 대마왕과 싸우기 전에 제게 경고하셨죠. 당신께서 놈에게 패한다면 덤벼들 생각 말고, 즉시 각 종족의 로드들께 사태의 전말을 말해주라고 말입니다. 모든 드래곤이 힘을 합친다면, 승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면서…………….”
얘기를 하던 중 하마터면 아르티어스는 다른 드래곤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추태(?)를 연출할 뻔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의 아버지의 모습 은 정말 멋있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아버지의 너무나도 깊고 큰 사랑이 마음 속 깊이 느껴졌던 것이다.
“허어, 내가 파악했던 것보다 더욱 큰일이 벌어졌었던 모양이로군. 그런 강적을 아르티엔님 혼자서 막아내시다니. 그분께서 강하시다는 것은 모두 들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였을 줄이야………….”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브라키어는 잠시 후,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자네가 말썽은 많이 부리지만, 그래도 자네 또래의 다른 드래곤들에 비한다면 마법에 대한 성취가 높다는 것 정도는 나도 익히 알고 있다네. 그분 의 뒤를 잇기 위해, 이렇게 마법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니…………. 허어, 참으로 대견하구먼.”
아르티어스가 이계로 날아갔다가 얼마 전에야 도착했다는 것을 브라키어는 몰랐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이곳에 몇 십 년만에 왔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아르티엔이 물려준 마법서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대면하는 위험까지 감수하고 있지 않은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아르티어스는 자신 의 레어에 처박혀 마법에 매진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브라키어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르신.”
“열심히 해보게. 아르티엔님의 혈통을 계승한 자네니, 목적한 바를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게야.”
“감사합니다, 어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