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8권 4화 – 3가지 조건
3가지 조건
“다녀왔어.”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는 묵향을 향해 마화는 활짝 웃으며 반겼다.
“잘 다녀오셨어요?”
“미안해. 예상보다 좀 오래 걸렸어.”
원래 무뚝뚝한 성격의 묵향인 만큼,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쪽은 언제나 마화였다. 마화는 묵향이 자리에 앉자마자 옆에 달라붙어서 그동안 교내에서 있었던 자잘한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건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닌, 마치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돌아온 낭군에 게 하는 듯한 그런 편안함이었다.
어디서 그 많은 이야기들을 주워들었는지 마화는 쉴 새 없이 조잘거렸고, 묵향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로서 받아들였다.
“그런데 참, 저 영인이하고 만났어요. 그 왜 있잖아요? 지금은 무영문의 부문주가 되어있는 아이 말이에요.”
매영인은 현재 묵향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있는 당사자였다. 물론 마화와 대화의 주제로 삼고 싶지 않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가 여자라는 것도 한 가지 이유이기도 했고.
그래서 묵향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듯 슬쩍 받아넘겼다.
“그랬어?”
“어머, 반응이 왜 그래요? 제가 보기엔 정말 미인이던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알 수가 없었던 묵향이었기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글쎄……?”
“이제는 제법 나이를 먹었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예쁜지 모르겠어요. 몸매도 좋고, 피부도 깨끗한 걸 보면 세상은 참 불공평해.”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말도 안 된다며 따지고 들었을 정도로 마화 역시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화조차 가벼운 질투를 느끼게 할 정도로 매영인의 미모는 탁월했다. 무림에 소속된 수많은 여고수들 중에서 그 미모와 재능이 특출난 4봉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큼 말이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무영문을 살려보겠다며 단신으로 이곳까지 달려온 걸 보니, 좀 안되어 보여서요.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하지만 그녀의 말은 묵향의 무뚝뚝한 말투에 가로막혔다.
“그건 당신이 참견할 사안이 아니야.”
묵향이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때는, 이미 무영문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이 난 상태이리라. 이럴 때 누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한 번 결정한 것을 번복하는 사람이 아님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화는 황급히 화제를 바꿨다.
“그건 그렇죠. 참, 당신 아직 식사를 안 하셨죠?”
오랜만에 다정하게 잠자리를 함께 한 두 사람. 마화는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하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것은, 눈을 떴을 때 남편이 곁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인지 언제나처럼 그녀의 옆자리는 온기 한 점 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쳇! 좀 옆에 누워있어 주면 누가 잡아먹나? 달콤한 말로 사랑을 속삭여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누워만 있어 달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힘드나?” 입으로는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잠자리를 정돈하는 마화의 손길은 재빨랐다. 깔끔하게 잠자리 정돈을 끝낸 뒤, 가볍게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이미 반복 숙달이 되다 보니 예전처럼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가보니, 묵향은 아침 식사를 앞에 두고 마화가 일어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잘 잤어?”
부드러운 묵향의 목소리에 마화는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활짝 웃으며 조잘거렸다.
“예. 기다리지 마시고, 그냥 절 깨우시지 그러셨어요?”
“곤히 자고 있는 걸 왜 깨워. 난 괜찮으니까 자, 이리와 앉아.”
지존의 아침식사였지만, 음식은 매우 간소했다. 마교라는 단체 자체가 허례허식에 물들어 있는 곳이 아니었던 데다, 묵향 자신이 그런 걸 별로 따지
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화와 결혼을 하고 난 뒤, 예전에 비해 음식의 질과 양이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식사를 마친 마화는 차를 마시며, 왠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뒤 질문을 툭 던졌다.
“당신은 아들이 좋아요? 아니면 딸이 좋아요?”
“푸우~!”
마화의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느긋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던 묵향은 입안의 내용물을 내뿜고 말았다. 묵향은 빠르게 마화의 배 쪽을 살펴보 며 급하게 물었다.
“서, 설마 아기를 가졌다는 거야?”
당황스러워 하는 듯한 묵향의 반응에 마화의 표정이 일순 새침하게 바뀌었다.
“설마, 우리들의 아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겠죠?”
“무, 물론 아니지. 그냥 당황했을 뿐이야.”
묵향은 힐끔 마화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임신한 게 확실해?”
처음 질문을 던졌을 때의 따사롭던 마화의 표정이 언제부터인가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아니, 어쩌면 냉기가 풀풀 날리는 싸늘함보다, 서러워 보인다 는 표현이 맞으리라.
“아뇨,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아, 그래?”
왠지 안심했다는 듯한 묵향의 표정이 마화의 기분을 더욱 언짢게 만들었다. 그럴 리는 없다. 양녀인 소연을 그렇게 살뜰하게 아끼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 온 마화였지 않은가. 그렇다면 임신을 했느냐며 왜 저렇게까지 깜짝 놀라는 것일까? 혹시 자신과의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건가? 그것도 아닐 것 이다. 묵향의 성격상 싫어하는 여인과 억지로 결혼했을 리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대체 이유가 뭘까?
“아기를 싫어해요?”
“글쎄…, 싫어하고 자시고는 없어. 단지 내 자식이 태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살아왔기에 조금 당황했을 뿐이야.”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생각을 해보도록 하세요. 당신은 이제 독신이 아니라구요.”
“그렇게 하지.”
대답은 쉽게 했지만, 묵향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다.
내 피를 이어받은 아기? 물론 예전에 소연이를 키웠던 경험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웬만큼 자란 소녀였을 때였고, 자신이 소연이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다르다. 뱃속에서 태어나는 자식을 선택할 권한 따위는 없다. 그냥 태어나는 대로 사랑하며, 키워줘야만 한다. 그 자식이 어떤 모 습을 하고 있건.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르티어스는 정말 대단한 아버지라고 할 수 있었다. 종(種)을 초월해서 자신을 사랑해 줬지 않은가. 자신이 별로 살갑게 대해주 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변함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아 부어 주었으니………………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행방이 묘연해진 아르티어스가 은근히 보고 싶었다. 드래곤인 만큼 무슨 큰일이야 있겠느냐 싶긴 하지 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오래 아무런 소식이 없다 보니 슬슬 걱정이 되는 것이다.
‘다음에 만나면 제발 한 달에 한 번은 꼭 연락을 하며 살자고 얘기를 해야겠어.’
식사를 마친 후, 묵향은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도중 부하 하나를 시켜 군사 설민을 집무실로 데려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매영인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조언을 청하기 위해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를 인질로 잡아, 함정을 파서 옥화무제의 목을 베는 것이다. 만약 그게 힘들 것 같으면 이왕에 손에 들어온 그녀를 놔줄 것이 아니라, 주리를 틀어서라도 무영문의 비밀을 토설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하지만 문제는 그녀를 그런 식으로 대하고 싶지 않다는 데 있었다. 물론 주는 것 없이 얄미운 옥화무제의 목을 베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 녀의 손녀 매영인은 그에게 꽤나 좋은 인상으로 기억되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단호하게 처리했을 일이었지만, 이계를 다녀오고 난 뒤 묵향의 성격이 약간 변한 것이다.
집무실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설민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아마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를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설민은 심약한 심성 때문에 상관의 눈치를 살피는데 있어서는 도가 튼 인물이다. 그런 그가 교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어제 잠깐 동 안의 만남만으로도, 그는 교주가 매영인을 이용하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밤새도록 이 일을 어떻게 풀어가 야 할지 고심해야만 했다. 그 때문인지 그의 눈은 수면부족으로 인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한 장로가 제안하고, 교주님께서 허락하신 그 계책에 이용하는 겁니다. 그분이 교주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는 만큼, 가장 확실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사료됩니다.”
묵향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은?”
“한 장로님의 계책을 쓰지 않으실 겁니까?”
“그건 묻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보게.”
“그 계책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고문하여 무영문의 내부 사정을 캐묻는 게 좋겠다고 사료됩니다. 그냥 놔주기에 그분은 아주 쓸모가 있으니 까요. 더군다나 무영문과 본문은 전쟁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불쌍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본좌가 차선책도 쓰지 않겠다고 한다면?”
“교주님께서는 그분을 놔주시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묵향은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다네. 차마 그녀를 없앨 수가 없구먼.”
“그렇다면 두 가지 방법 중에 하나를 선택하실 수가 있겠습니다.”
“말해 보게.”
“기본 계획대로 원로들에게는 그분을 이용해 옥화무제를 낚겠다고 하시며 풀어주는 겁니다. 다들 납득하겠지요.”
원로들을 속이자는 말이다. 하지만 그 제안도 묵향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믿고 따르는 수하들을 속이고 싶지는 않군.”
“그분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도 싫고, 원로들을 속이는 것도 싫으시다면 선택의 폭은 대단히 좁아집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한 가지 조언을 드려도 될런지요.”
“말해보게.”
“어차피 교주님께서 그분을 풀어준다고 하더라도, 옥화무제를 목표로 하고 있는 이상 그분께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옥화무제의 손 녀이니까요. 지엽적인 선택을 위해 고심하시느니, 좀 더 커다란 가지를 두고 고심하시는 게 낫지 않으실런지요.”
“커다란 가지?”
“예. 그분께 상처를 주고 싶지 않으시다면, 이쯤에서 옥화무제를 용서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무영문도 꽤나 커다란 타격을 입었음에 틀림없는 데 말입니다. 역사상 무영문의 총단을 잿더미로 만든 것은 교주님께서 최초로 달성하신 위업입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세인들은 교주님께서 무영문 에 더 이상의 공격은 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리셔도 충분히 납득할 것입니다.”
“수하들도 납득할까?”
“원로분들은 힘들겠지요. 뭐니뭐니 해도 매영인이라는 패를 쥐셨는데, 그냥 물러나신다면 모두들 의심하실 겁니다. 특히 주모님께서.
“마화가 왜?”
“그분과 혹 수상쩍은 관계이신 건 아닐까 오해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묵향은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헛소리! 그딴 건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그런 사소한 걸로 삐질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결혼도 하지 않았어.”
설민이 이런 식의 말을 꺼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심약한 설민은 그의 범 같은 부인에게 꽉 잡혀 살고 있었다. 그래서 사소한 일로 부인의 심기를 건 드려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그는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다.
때문에 혹시라도 이번 계책의 발안자가 자신이라는 걸 주모가 알게 된다면, 그 후환이 두려웠기에 미리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사실 어젯밤 생각해 둔 계책이 한 가지 있긴 합니다만…….”
“그게 뭔가?”
“조건을 제시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조건이라고?”
“예. 무영문에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입증하라고 하는 겁니다. 원로분들 조차도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난해한 조건이라면, 그럴듯한 명분이 되지 않 겠습니까?”
괜찮은 계책이라고 꺼내놨지만, 묵향은 썩 내키지가 않았다.
“가치를 입증하라고? 도대체 뭘 가지고? 장인걸도 박살낸 만큼 이제 더 이상 놈들의 도움 따위는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어차피 교주님이 바라시는 건 무영문 따위가 아닌, 그분에게 더 이상의 상처를 안기지 않고 별 탈 없이 마무리 짓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 적당한 명분을 만들자는 겁니다.”
“그, 그건 그렇다만.”
“그렇기에 본교에서 수행하기 힘든 사안을 조건으로 제시하는 겁니다. 이를 테면 만통음제 대협을 찾아오라고 한다든지 말입니다. 만약 그분이 죽 으셨다면 시체라도 찾아오라고. 그러면 명분이 되지 않겠습니까?”
마교 역시 정보를 관할하는 부서가 있긴 했지만, 전 중원에 촘촘히 깔려있는 무영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비록 총단이 박살났어도, 지금까지 보여 왔던 그들의 활약을 감안해 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찌되었건 만통음제를 찾을 수 있다는 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묵향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런 걸 수하들이 받아들일까? 형님은 본교의 인물도 아니지 않느냐.”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조금 명분이 약하기는 합니다만, 교주님과 만통음제 대협과의 우애를 모두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그분은 무명소졸도 아니고 정파의 커다란 별입니다. 그분의 존재가 본교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허긴…….”
고개를 주억거리는 묵향을 향해 설민이 조언했다.
“그 부분은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일단 부문주부터 만나보신 뒤에 결정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만약 결정하기 힘드시다면, 오늘은 대충 시간만 끌다가 헤어지셔도 괜찮을 듯 합니다만.”
“그건 자네 말이 옳은 듯 하군.”
“교주님을 뵈옵니다.”
“손님은 안에 계시나?”
“옛, 교주님.”
***
갑작스럽게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매영인이 당황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묵향이 들어왔다. 그녀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묵향은 꽤나 난감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좌가 없는 동안에 큰 곤욕을 치렀다고 들었는데……………?”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교주님.”
“아, 그래. 오랜만이야.”
묵향은 매영인의 위아래를 이리저리 쳐다본 후에야 겨우 안심이 된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
매영인은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염려를 해주신 덕분에 별 일은 없었어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런 침묵이 싫었던지 묵향이 급작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본좌가 무영문을 쳤다는 얘기는 들었느냐?”
“예.”
묵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혼자 이곳으로 올 생각을 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나. 죽고 싶어서 작정을 한 것도 아니고……………”
“정말 저희 문파를 멸망할 때까지 공격을 하실 생각이신가요?”
“글쎄… 어디로 숨었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니 공격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지.”
“그럼 위치를 파악하기만 하면 공격하실 건가요?”
묵향은 일부러 한숨을 푹 내쉰 다음 대답했다.
“후우~~, 어떻게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이번처럼 무리를 해서 공격한다고 해봐야 별 소득도 없을게 뻔하니까 말이야. 아마, 더 이상의 전투 는 없을 거야. 정파놈들처럼 그냥 평행선을 달려가는 정도로 그치게 되겠지.”
묵향의 대답에 매영인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무영문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의사는 없는 듯 보였으니까.
“어쨌건, 본좌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이 정도로구나.”
그러자 매영인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 묵향에게 청했다.
“혹시 할머니를 용서해 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묵향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용서? 용서고 뭐고, 이제는 갈 데까지 가버린 상태라 원상태로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야.”
“그, 그래도…….”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보지.”
“예, 말씀하세요.”
“본좌는 신뢰를 가지고 대했건만, 옥화무제는 본좌의 뒤통수를 스스럼없이 쳤지. 그것도 본좌가 가장 취약한 때를 노려서 말이야. 하마터면 본좌는 물론이고, 내 수하들까지 떼몰살을 당할 뻔 했지. 그런데, 그런 그녀를 용서해 주라고? 너는 대체 뭘 믿고 나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는 거 “지?”
일순 매영인은 할 말을 잊었다. 그녀도 마화를 만나 모든 얘기를 들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영문이, 아니 자신의 할머니인 옥화무제가 어떤 짓을 했는지 말이다. 잠시 어색한 표정으로 고심을 하던 매영인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인질이 되어 이곳에 머물겠어요. 그럼 저희 문파가 또 다시 교주님께 허튼 짓을 하지 못할 테니까요.”
설마 이런 말까지 듣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묵향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한참동안을 고심하던 묵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휴우,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런데 네가 옥화무제라면, 지금 내가 화평을 제의한다고 해서 순순히 받아들일 거 같으냐?”
“…….”
일순, 매영인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둔한 사람이 아니다. 묵향의 질문을 받고 보니, 할머니의 의심 많은 성격이 떠올랐던 것이다. 뭔가 확실 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할머니는 묵향이 화평을 제의했다는 것 자체를 함정으로 볼 게 뻔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마교가 화평을 제의할 이 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매영인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건 제가 어떻게든 할머니를 설득해 볼게요. 저를 한 번만 믿어주세요.”
애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매영인의 모습에, 묵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설민이 마련해준 해결책을 말해줬다.
“정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조건을 제시하마.”
“예. 말씀하세요.”
“행방불명되신 만통제 형님을 찾아오너라. 만약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말이다.”
원래는 설민이 조언한 대로 이 한 마디만 하고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왕지사 일을 시켜먹을 생각이면 철저히 시켜먹는 게 좋겠다는 묵향이었다.
“두 번째는…, 이게 무슨 뜻인지 번역해 오너라.”
묵향은 요 근래 언제나 품속에 지니고 있던 비단조각을 꺼냈다. 그 비단에는 북명신공에서 옮겨 적은 해독불가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밑져봐야 본 전인 만큼,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고 그녀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좌의 아버지를 찾아오면 된다.”
묵향으로부터 받은 비단조각에 써진 괴상한 기호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매영인. 물론 여기에 적혀있는 문장은 무영문에서 이미 해독이 끝난 상태였 지만, 그녀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매영인은 어떻게든 묵향이 제시한 조건을 완수하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의 무영문이 무사할 수 있을 테니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요.”
“말해보거라.”
“우선, 행방이 묘연하다는 그 두 분 말이에요. 어디에 계신지만 알려드리면 되는 건가요? 아니면, 십만대산까지 모시고 와야 한다는 건가요?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두 분께서 자의적으로 모습을 감추신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사실, 만통음제 같은 분이 이리로 안 오시겠다고 버 티신다면, 저희들로서는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게 사실이거든요.”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럼 조건을 바꾸기로 하지. 그 두 사람의 행방만 알려줘도 무방하다. 이러면 되겠느냐?”
“예. 그리고 이 비단에 써져있는 문장이 교주님께서 본문에 조건으로 내걸 정도라면 해독하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으리라 생각되네요. 그러니 알고 계신 것을 뭐라도 말씀해 주신다면 커다란 도움이 되겠어요.”
매영인의 요청에 묵향은 망설임 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다 얘기해줬다.
“이 문장은 북명신공이라는 비급에 적혀있던 것이야. 그런 만큼 어쩌면 발해의 옛 문자일지도 모른다는 게 본좌의 생각이다.”
북명신공(神功).
과거 사람들이 천하제일고수로 첫손가락에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신검대협(神劍俠) 구(區揮)가 남긴 희대의 무공비급이었다. 당연히 매영인 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명…, 신공이 여기에 있었나요?”
“비급의 내용까지 네게 알려줄 수는 없다. 본좌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어떠냐, 이 정도면 도움이 되겠느냐?”
“예, 교주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희대의 보물인 북명신공이 마교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는 것만으로도 매영인은 묵향이 제시한 조건이 정말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3가지 조건만 해결할 수 있다면, 무영문은 예전처럼 마교와 친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묵향하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