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9권 9화 – 검투사 양성소

검투사 양성소

몬스터 쇼 단장은 기절할 지경이었다. 고블린에 이어 이번에는 오크까지. 저렇게 잘 훈련된 놈은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간다고 해도 구입할 수가 없었다. 야생 몬 스터나 다름없는 놈들을 고가에 구입하여, 지금까지 훈련시키는 데 들어간 수많은 돈과 시간, 그리고 노력이 단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흐흑, 죠지, 너마저……. 이럴 수가 있나. 이런 개새끼! 그 새끼, 이리로 끌고 와. 내가 직접 죽여 버릴 거야!”

길길이 날뛰는 단장에게 조련장이 다급히 조언했다.

“막간극이 끝나고 난 다음 순번은 헤럴드입니다. 설마 놈이 트롤까지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듀에이트급이 아닌 한, 혼자서 트롤을 상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안 돼! 헤럴드까지 잃을 수는 없어. 헤럴드까지 잃으면 나는 파멸이야, 파멸이라구.”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동안은 어떻게 운 좋게 이겼는지 몰라도 헤럴드에게는 불가능합니다. 트롤에게 있어서 저 정도 상처 따위는 전혀 문제도 되지 않으니 까요. 이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고블린과 오크를 무찌른 용맹한 전사가, 트롤을 상대로 얼마나 나약하게 부서지는지를 말이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단장이 약간 진정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헤럴드가 놈을 이길 수 있을까?”

“염려 놓으시라니까요. 완전히 토막을 쳐놓을 겁니다.”

이때, 밖에서 단원이 단장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장은 탁자 위에 놓인 단검을 집어들며 살기 어린 어조로 외쳤다.

“그 새끼를 데려왔냐?”

“아뇨. 그게 아니라 단장님을 뵙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커밍스라고 하던데요.”

단원의 말에 단장은 분노 어린 어조로 쏘아댔다.

“커밍스고 나발이고, 지금 다른 사람 만날 기분 아니라고 전해.”

그때 단원을 슬쩍 옆으로 밀치며 건장한 중년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이 사내가 단장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한 커밍스이리라.

“아니, 단장님께서는…….”

“제가 직접 말씀드리도록 하죠.”

커밍스는 단장에게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저는 커밍스라고 합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귀하의 노예가 사고를 친 것 같더군요.”

단장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잘 알면서 그런 걸 묻는 이유는 뭐요?”

“그 노예를 저에게 파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트롤 우리에 던져 넣어버리는 것보다는 저한테 파시는 게 훨씬 이익이실 텐데요.”

“그런 소리 마쇼. 나는 내 귀염둥이들의 복수를…….

하지만 단장의 말은 거기에서 끝났다. 커밍스가 그의 말을 끊었던 것이다.

“삼십 골드 드리죠.”

일순 단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 삼십 골드라고요?”

30골드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전장에서 싸우는 실력 있는 용병들의 월급이 10골드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예, 30골드. 원하신다면 지금 바로 현금으로 드릴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저렇게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조금 시간을 끌면서 차분히 생각해 보는 게 옳았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귀염둥이들을 둘씩이나 잃은 단장에게 그런 이성은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좋소. 팔지요. 지금 당장 팔겠습니다.”

보다 못한 조련장이 옆에서 급하게 끼어들었다.

“단장님,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보신 다음에 결정을 내리셔도…….”

“됐네. 더 이상 생각해 볼 것도 없어. 노예문서하고 매매증서 가져와!”

매매증서에 서명을 하려던 단장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커밍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런 놈을 사다가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커밍스도 이쪽 계통에서 잔뼈가 굵은 능구렁이였다. 복수심에 미쳐 있는 단장의 속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아, 예. 이번 검투경기의 전야제에 쓰려고 합니다.”

“전야제라면…, 그 로프췰트 전투를 형상화 했다는?”

로프췰트 전투는 알카사스 왕국 초기에 벌어졌던 야만족과의 전쟁이었다. 그때의 대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번 검투경기의 전야제에 당시의 전투를 재현한다고 했다.

“예. 그런데 야만족으로 써먹을 만한 노예를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는 놈들을 야만족으로 쓰자니 전투장면이 재미가 없 을 테고, 그렇다고 훈련 잘된 놈들을 쓰자니 값이 비싸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놈이 딱이라는 거죠. 안 그래도 죽이실 거라면 저한테 넘기십쇼. 확실하게 명 줄을 끊어 드리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아주 처참하게.”

순간 단장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호오, 그 조건이 꽤나 마음에 드는군요. 예, 좋습니다.”

단장은 30골드를 받고 매매증서에 서명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번 검투경기의 전야제만큼은 필히 참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라이를 전야제의 제물로 쓰겠다는 커밍스의 약속은 순전히 뻥이었다. 확실하게 죽여 버리겠다는 약속을 해줘야 팔 것 같았기에, 그렇게 둘러댄 것뿐이다. “나는 커밍스라고 한다. 네 이름은…, 라이라고?”

“예.”

성은 물어보지도 않았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성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상대가 이름을 밝힐 때, 성을 말하지 않으면 구태여 물어보지 않는 게 예의였다.

“나는 검투사(劍鬪) 양성소를 운영하고 있다. 너는 검투사가 뭔지 알고 있냐?”

물론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게 영웅담 같은 걸 듣다 보면 나오는 간략한 내용 정도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렇기에 라이는 짐짓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 했다.

“아뇨.”

“너는 이미 검투사의 세계에 한 발자국 내디뎠다.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벌이는 대결. 무기가 단순한 만큼, 서로 간의 실력은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승 자와 패자가 판가름 나는 순간에 들려오는 관중의 환호성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라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괜히 대꾸를 해봐야 매를 벌 뿐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충분히 체득했으니까. 하지만 커밍스는 라이의 얼굴 표정을 살펴본 다음 말을 이었다.

“물론 너는 야유밖에 받은 게 없지. 하지만 관중들이 네가 들고 싸운 무기가 얼마나 형편없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네가 입고 있던 갑옷이 얼마나 조잡한 것이었는 지를 알고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게다.”

라이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주인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이다. 이 업계에서 밥 먹은 지 어언 20년이 넘었으니까. 흥행사업을 하는 자들은 관중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서는 별의별 짓을 다 하게 되지. 몬스터가 노예 를 강간하는 걸 관중들에게 보여줄 생각을 다 하다니, 쓰레기 같은 놈들! 하지만 저런 추잡스런 것들과 나는 다르다. 나는 오로지 검투경기만을 추구한다. 검투사의 격돌! 몬스터와 달리 인간에게는 오랜 세월 갈고닦은 기술이라는 게 있다. 그걸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보여주는 거다. 어때? 멋있지 않느냐?”

커밍스는 검투사가 어떤 직업인지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특히 검투사의 수입에 대해서. 노예라고 하지만 검투사는 수입이 꽤 많았다. 승리를 거두면 사기 진작을 위해 주인이 수당을 지급해 줬다. 그리고 검투경기에 걸려 있는 상금의 1%는 법적으로 검투사의 몫이었다. 그런 돈들을 차곡차곡 모아서 결국 자신의 자유를 살 수 도 있었다.

문제는 실력 있는 검투노예라면 그 몸값 또한 엄청나기에 주인에게 지불해야 하는 돈의 액수도 증가한다는 딜레마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어때? 농장이나 광산 같은 데 팔려가서 죽도록 일해 봐야 노예에서 해방될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다. 하지만 검투사는 다르다. 쓸데없는 짓만 안 한다면, 언젠가 는 자유를 살 수 있거든. 그건 내가 보장하마. 내가 데리고 있는 교관도 한때는 검투노예였다. 지금은 내 일을 도와주고 있지만 말이다.”

꽤나 그럴듯한 제안이었다. 그렇기에 라이는 커밍스의 제안을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커밍스의 집무실. 가구라고는 거의 없는 아주 소박한 공간이었다. 커밍스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여자노예에게 음식을 몇 가지 내오라고 일렀다. 식사시간이 조 금 지난 상태였기에, 지금이 아니라면 한 끼 건너뛸 수밖에 없었기에 라이에게 베푼 친절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식사를 해야만 했고.

“체면 차릴 필요 없다. 배고플 때는 그저 먹는 게 최고지. 자, 먹거라.”

“예, 주인님.”

식사를 하며 커밍스는 라이의 식사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노예가 노예로 존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서류가 바로 노예문서다. 노예의 혈통에서부터 시작

하여, 어떻게 노예가 되었는지를 자세히 기록해 놓은 문서였다.

하지만 라이의 노예문서에는 상당부분이 공란으로 비워져 있었다. 변방 약소국의 시골마을에서 말 도둑질을 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곳 시장의 재량으로 노 예로 판매되었다는 것이 적혀 있는 내용의 전부였다.

노예문서만으로 판단한다면 라이는 뒷골목 출신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군지 알 수 없는.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배가 꽤나 고팠을 텐데도 라이는 허겁지겁 먹지 않고 비교적 천천히 예의바르게 먹고 있었다.

‘뒷골목 출신치고는 꽤나 가정교육을 철저히 받았군.’

이때, 커밍스의 호출을 받은 교관이 도착했다. 커밍스가 기르는 검투사들을 훈련시키는 책임자가 바로 이 교관이다.

“찾으셨습니까, 소장님.”

“그래, 이번에 구입한 새 식구일세. 천부적인 싸움꾼이니 자네가 잘 지도해 보도록 하게.”

교관은 라이의 꾀죄죄한 몰골을 본 뒤 소장의 말을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싸움꾼이라고 하기에는 비쩍 마른 것이 신체가 너무 허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드리기는 송구합니다만, 몸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데요?”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게 무슨 대순가? 녀석은 아직 어려 한 4~5년 공을 들인다면 쓸 만한 검투사로 키울 수 있지 않겠나. 자네 실력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해서 사온 녀석인데 말이야.”

“아, 그렇게 길게 보시고 계시다면 문제없습니다. 훌륭한 검투사로 키워 놓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소장님.”

교관은 라이를 훈련장으로 데리고 갔다.

라이를 교관에게 인계한 지 채 2개월도 되지 않아, 커밍스는 교관의 요청을 받고 훈련장을 방문해야만 했다.

“어서 오십시오, 소장님.”

“무슨 일인가?”

커밍스는 멋진 예복을 빼입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평소와 달리 서두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높은 사람과의 약속이 있는 모양이었다.

“바쁘신데 뵙자고 청한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닐세. 그 정도 시간은 있다네. 그래, 무슨 일인가?”

“저기를 보십시오.”

교관은 격투장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중무장한 검투사 2명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진짜 무기를 들고 말이다. 검투사들은 관중들의 인 기를 얻어야 하는 존재들인 만큼, 과도한 무장은 삼가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몸 여기저기의 맨살을 드러내어 야성미를 과시하는 단촐한 갑옷을 선호한다. 그렇 다 보니 접전을 벌이고 있는 두 명 중 한 명의 몸매가 비쩍 말라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설마…, 라이인가?”

“제대로 보셨습니다.”

2개월 동안 영양가 풍부한 식사와 함께 강도 높은 훈련을 받다 보니, 라이의 몸은 꽤 많이 좋아져 있었다.

“녀석이 제법 잘 적응하고 있다는 보고는 받았다네. 그런데, 나한테 긴히 하고자 한 말은 뭔가?”

“저 움직임을 보십쇼.”

잠시 바라보던 커밍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참,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자네한테 맡긴 지 겨우 2개월밖에 안 된 놈이지 않나?”

검을 가르친 지 겨우 2개월. 완전히 생초보인 상태다. 그런데 그런 놈이 저렇게 격렬하게 싸운다는 게 가능이나 한가? 그것도 진검(眞劍)으로 말이다.

“놈은 숨기려고 했지만, 제 눈을 속일 수는 없죠. 한두 해 검술을 배운 놈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렇게 해놓은 건가?”

“놈이 전력을 다하게 하려면 저 수밖에는 없으니까요. 설마, 자신의 진면목을 숨기겠다고, 칼을 맞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커밍스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그것 참…….?”

라이는 숨긴다고 숨긴 것이겠지만, 상대는 이 방면에서 전문가였다. 그렇기에 교관은 일부러 진검승부를 시킨 것이다. 죽기 싫으면 전력을 다하라고 말이다. 

“길드에서 키운 놈일까?”

용병길드, 도둑길드, 암살자길드 등등.. 별의별 합법, 비합법적인 길드들이 왕국에는 많이 있다. 그런 길드에서 키운 놈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는 것이다. 하 지만 교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한 번 쓰고 버릴 놈이라면, 고급 수법 한두 개 정도만 가르쳐서 그것만 철저히 숙달시킵니다. 그것만 해도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놈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기를 아주 탄탄하게 익혔더군요.”

“흐음…….”

“소장님께서는 저놈을 검투경기에 내보내실 생각이잖습니까? 경기장을 찾는 높은 분들도 많습니다. 저놈이 자칫 사고라도 치는 날에는 소장님께서 곤란을 겪으 실 수도 있습니다. 검투장에 내보내기에 앞서 놈의 과거를 짚고 넘어가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하여 소장님께 보고드리는 겁니다.”

커밍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찬성했다.

“자네 의견이 옳은 듯 하군. 하지만 녀석이 제대로 실토할까?”

커밍스의 말에 교관은 씨익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예전에 썼던 그 방법을 쓰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 방법이라니??”

“기억을 통째로 봉인해 버리는 것 말입니다.”

과거, 그는 경쟁파 쪽에서 침투시킨 녀석의 기억을 통째로 봉인해 버린 다음 팔아 치워버린 전례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놈을 그냥 팔아버린 것으로 끝내버렸지 만, 지금은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기억을 봉인해 버린다면 검술에 대한 기억까지도 모두 다 잃어버릴 텐데.

“내가 녀석에게 필요로 하는 게 검술인데, 그건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말은, 곧 검술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 될 텐데…….”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 녀석처럼 오랜 세월 고련을 쌓은 경우는 얘기가 틀리죠. 기억을 잃더라도 몸이 그걸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당장은 써먹지 못하겠지 만, 한 2~3년 정도 수련시킨다면 원상회복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신관에게 달려가서 기억 봉인을 부탁해야겠군.”

“기억을 선택적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지 그것도 좀 알아보십시오. 검술에 대한 기억을 남겨둘 수만 있다면, 녀석을 재교육시키는 시간이 그만큼 짧아질 테니 말입 “니다.”

“알겠네. 그것도 물어보도록 하지.”

쇠뿔도 단숨에 빼랬다고, 커밍스는 곧바로 훈련장을 떠나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신관을 찾아갔다. 환한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신관에게 커밍스는 심각한 표정 으로 말을 건넸다.

“한 가지 상의드릴 게 있어서 찾아봤습니다.”

“심각하신 표정을 뵈니, 나쁜 일이 아니길 빕니다, 형제님.”

“나쁜 일은 아니구요. 실은, 제가 아끼는 노예가 하나 있는데 말입니다. 사실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커밍스는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신관이 기억봉인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도록 가급적이면 녀석의 과거를 비참하게 그렸다.

“과거의 기억이 녀석을 괴롭히는 모양입니다. 한없이 괴로워 하는 녀석을 보면, 혹시 목이라도 매달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얘기를 모두 들은 신관은 안타까운 듯 말했다.

“허어, 그것 참 큰일이로군요.”

“혹시 과거의 기억을 봉인해 버릴 수는 없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신관이 입을 열었다.

“기억을 봉인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봉인한 후겠지요. 일정 시점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린다는 것은, 커다란 후유증을 동반할 수가 있 습니다. 특히, 정신 쪽의 마법은 잘못되었을 때 상당한 후유증을 앓을 수 있거든요.”

“아무리 잘못된다고 해도 지금보다야 낫겠지요. 사실 지금도 자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처지니까요. 그건 그렇고, 기억의 봉인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면, 혹시 그 아이가 익히고 있는 검술에 대한 기억은 그냥 놔두실 수는 없을까요? 검술 실력이 아주 훌륭한 아이라서………”

“그건 유감스럽게도 제 실력으로는 안 되겠군요, 형제님. 선택적으로 기억을 삭제하는 것은 대단한 고난이도의 작업이랍니다. 드로아의 대신전에 계시는 분들이 라면 모를까, 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커밍스는 선택적 기억 봉인이 힘들다는 신관의 말에 내심 실망했지만, 그걸 드러내지는 않았다. 검술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도 몸에 익히고 있어 다시 2~3 년 정도 재교육하면 된다는 교관의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냥 기억봉인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제 믿음이 워낙에 미천하여, 오차가 좀 심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오차라니요?”

“알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지금부터 2년 전까지의 기억을 봉인한다고 가정한다면, 제가 지닌 능력으로는 그게 2년이 될지 3년이 될지, 혹은 4년이 될지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 무슨 말씀인가 했네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죽으려고 하는 사람부터 살려놓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형제의 집으로 언제 가면 되겠습니까? 편한 시간을 알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