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권 10화 – 다시 찾은 어검술
다시 찾은 어검술
사륙 백인대는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40리 지점에 도착했을 때는 몽고병들은 벌써 달아나고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여기 부터 국광은 말이 피로를 덜 느끼도록 하면서 이동했다. 나중에 기마전이 벌어졌을 때 말이 피로하면 제대로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반 시진 정도 갔을까, 전방에서 칼 소리와 호령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직감한 국광은 수하들을 이끌고 달려 나갔다. 전방에서 선행하는 제6십인대와의 그들의 거리는 6리(약 2킬로미터). 적의 매복 기습을 받았다면 아마도 피해가 클지도 모른다. 그 부근에 2개 십인 대가 있고 또 본대와의 사이에도 1개 십인대가 있긴 하지만 국광이 쫓는 부대는 패잔병이라도 8천의 병력이었다.
죽자고 달려간 국광은 숲에 매복한 부대가 모두 보병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들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
‘말은 어디 있지?
몽고병은 말을 타고 싸운다. 아무리 매복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부는 말을 타고 퇴로 차단을 하기 위해 달려 나와야만 했다. 그런데 적은 앞을 막 고 백병전을 벌이거나 아니면 활로 응사할 뿐…………. 그 모습을 보자 국광에게 짚이는 것이 있었다.
‘아차!’
화살의 사거리에 조금 못 미쳐 국광은 외쳤다.
“모두 말에서 내려!”
국광은 말에서 뛰어내리면서 최대한의 경공술을 펼치며 적에게 달려갔다. 그러면서 임충에게 명령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임충, 너는 수하들을 데리고 말을 3리 밖으로 몰고 가서 거기서 대기해라!”
나머지 수하들은 임충이 거느리는 사륙팔 십인대에게 말들을 맡기고 경공술을 써서 국광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광에 비해 둔중한 갑주를 입은 그들은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국광은 달려 나가며 걸리적거리는 갑주까지 벗어 던지고는 죽자고 경공을 펼쳤고, 그것을 뒤에서 본 수하들은 그 의 경공술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매복한 적은 1천 명 정도……………. 매복에 걸린 4개의 십인대가 분전(戰) 중이었지만 말들은 이미 모두 죽어 있었고, 대원들은 말 시체 주위에서 등에 화살을 몇 대씩 박은 채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고수들이라고는 하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아 이미 몇 명은 시체가 되어 있었고, 또 아직 싸우고 있는 자들도 상당한 상처를 입었다. 국광은 적들에게 뛰어들자마자 자신이 가진 전력을 다해 무공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적의 숫자가 많 은 만큼 속전속결이 최고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전투를 빨리 종결짓지 못한다면 저 4개 십인대의 대원들 중에서 과연 몇 명이나 살아서 돌아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앞섰다.
“이얍!”
국광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에서 뻗어 나오는 검기는 더욱 강대해지더니 이윽고 유형의 강기로 변했다. 국광의 검에서 뻗어 나오는 강기는 점점 더 강해졌고, 그 강기의 회오리에 휩쓸린 적들의 몸은 토막이 나며 날아갔다. 죽기 살기로 검을 휘두르며 국광은 자신이 지금 전력(力)을 다한다고 생각했다.
‘11만이나 되는 적과 싸울 때도 나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온 힘을 다 쏟고 있을까? 그리고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솟아 나는 이 힘은 뭐란 말인가…………….’
미지의 힘이 단전에서부터 솟아올라 온몸의 혈도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며 국광은 초식에 더욱 공력을 실었다. 그런데 그런 어느 순간, 갑자기 몸 이 편안해지며 초식이 더욱 부드럽게, 또 진기의 유통이 더욱 원활하게 풀림을 느꼈다. 그의 청성검에서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강기가 피어 나오고 있 었다.
‘어검술인가? 나는 이걸 지금 깨달은 것인가, 아니면 이전에 익힌 것이 내가 전력을 다하자 다시 나타난 것인가….?
빙긋이 미소 지으며 국광은 생각했다.
‘아마 이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겠지………….’
그러면서도 국광의 맹렬한 공격은 끊이지 않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황궁무학의 진수를 쏟아 부어 사방으로 검강을 날리며 수많은 적들을 죽여 나갔 다. 피와 살이 튀어 오르고 절단된 적의 몸뚱이가 날아다녔다. 이제 적의 포위는 풀렸지만 국광은 미친 듯이 움직이며 저쪽에서 그의 악귀(惡鬼) 같은 형상을 보고 질려 있는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네 녀석들은 뒤로 물러서. 잘못하면 다친다.”
국광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부상자를 부축하며 뒤로 물러섰다. 국광은 뒤편에서 자기 딴에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 오고 있는 수하들에게도 소 리쳤다.
“이리 오지 마! 걸리적거린닷!”
국광의 말을 들은 수하들은 한편으로는 이런 미친 명령을 들어야 하는지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대장의 명령이라 국광이 밀리면 도와야겠다고 생각하 며 모두 모여 진형을 짰다. 그러나 그들은 곧 국광의 싸우는 모습을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국광은 이제 주변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지자 더욱 광
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무장(武將)이라기보다는 한 마리의 악귀에 가까웠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사방을 누비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살육하는……………
국광은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르며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내력과 싸울수록 차분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1대 1천의 말도 안 되는 싸움이지만 진다는 생 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아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만이 있을 뿐이었다. 국광은 읽기만 했을 뿐 아직까지 써 보지 않은 수많은 황궁무학을 이 자 리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수많은 초식들을 펼쳐 나가면서 그에게는 솟아오르던 자신감을 비롯한 모든 생각이 점점 다 사라졌다. 오직 눈앞의 적 을 향해 검을 날릴 뿐이었다. 완전한 무념(無念)…
국광의 수하들은 국광이 검술뿐 아니라 장법, 권법, 각법 등등 황궁무학을 이용해서 수많은 적들을 썩은 나무처럼 쓰러뜨리는 걸 보고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는 오른손으로 청성검을 잡고 왼손으로는 권법이나 장법을, 양다리로는 각법을 펼치면서 주변의 몽고병들을 죽여 나가고 있었다. 국광의 행동을 차분히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마화가 옆의 임충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봐, 황궁무학이라고 했잖아…….”
황궁무학 자랑에 속이 뒤틀린 임충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난 황궁무학은 익힌 적도 없다고 했지? 하지만 대단하긴 대단하군. 어검술에 검강까지 쓸 줄이야…………. 나도 황궁무학을 좀 익혀야겠어. 황궁무학이 저 정도로 대단한 줄은 오늘 처음 알았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버지가 황궁무학만을 고집했을 때는 무림사(武林)에 이름난 고수 한 명 배출한 적 없는 황궁무학을 익히게 한다고 불만 도 많았었는데, 오늘 보니 그게 아냐…………. 무공 수준에 따라 유치한 것처럼 보이던 초식도 저렇게 살인적인 초식이 된다는 걸 처음 알았어.”
국광의 엄청난 초식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임충이 혀를 내둘렀다.
“정말 대단하군. 대체 어떤 수련을 쌓으면 저 정도의 고수가 될 수 있는 거지?”
마화는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거야 알 도리가 없지. 도대체가 웃기는 대장이라니깐. 말로는 왜 살인을 할까, 도덕이 어쩌구하며 웃기는 얘기만 해 대면서 피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니 …………….”
2각 정도가 지나자 1대 1천의 대결은 거의 종말을 고해 가고 있었다. 창칼을 든 병사들이 근처에만 가도 두 토막을 내며, 화살을 쏴도 모두 막고 간 혹 운 좋아 맞췄다 하더라도 아무 효과 없이 다시 튕겨 내는 악귀에게 몽고 병사들은 공포를 느꼈다. 조금 더 지나 그들의 일부가 슬금슬금 뒷걸음치 다가 본격적으로 도망치자 나머지도 따라서 일제히 도망쳤다. 몽고병들이 도망치자 문득 이성을 찾은 국광은 손에 묻은 피가 검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보면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국광은 수하들이 모두 자신을 빤히 지켜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다 외쳤다.
“추격해서 전멸시켜!”
그러자 모두 괴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하지만 유일하게 한 사람, 마화는 나서지 않고 국광의 말을 끌고 창백한 표정으로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 국광에게 다가갔다. 마화는 자신의 말 안장 뒤쪽에 묶여 있던 수건을 꺼내어 국광에게 건네주었다.
“끔찍한 얼굴 하고 있지 말고 어서 피나 닦아요.”
국광은 그 수건을 받아 피를 대충 닦고 말 안장 위에 있던 자신의 갑주를 입었다. 갑주를 입고 있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마화가 물었다.
“도대체 오늘은 왜 그래요? 죽으려고 작정, 아니지. 오늘 보니 당신을 죽일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도 않더군요.”
“글쎄, 처음엔 뭐랄까… 분노, 안타까움, 뭐 이런 감정이 솟았는데 나중엔 피를 너무 봐서 그런지 아무 생각도 안 나더군. 흉측했나?”
마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다.
“뭐, 그렇게 흉한 모습은 아니었어요. 그저 악귀 같았을 뿐이니까.”
국광은 피에 젖은 수건을 내던졌다.
“악귀라……………. 그럴지도 몰라. 이 수건은 못 쓰게 됐으니 나중에 새 걸 주지.”
갑주를 다 입은 국광은 말에 올랐다.
“자, 가자.”
추격전은 반 시진도 안 되어 끝이 났다. 매복했던 몽고병을 모두 죽였지만 그 뒷맛은 씁쓸했다. 국광은 추격전이 끝나고 다시 집결한 수하들을 둘러 보았다.
“완전히 글렀군. 이번 매복조는 나머지 7천 명이 살아 돌아가기 위한 희생물이야. 그런데 우리들에게 걸렸으니…………. 저들의 희생이 가엾게 됐군.” “무슨 말씀입니까?”
“저들은 우리의 목숨보다는 우리의 말을 없애는 데 더욱 신경을 썼다. 우리는 중갑주를 입었으니 말이 없다면 퇴각하는 적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 아마도 그들은 정찰조에게 들켜 버린 탓에 어쩔 수 없이 싸움을 시작한 것이었겠지만, 어찌 되었건 빨리 해치우고 새로운 먹이를 기다릴 생각이었겠 지. 그런데 후속대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고, 또 쉽사리 해치우지를 못해서 전체적인 작전이 어긋난 거야. 거의 60필의 말을 잃었으니 더 이상 적의 본대를 추격할 수는 없겠군. 그리고 선도 임무를 이행할 수도 없다. 부상자도 많고.”
말을 멈춘 국광은 수하들을 빙 둘러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돌아가자. 마화는 열 명을 이끌고 말을 잃은 수하들을 보호하여 후속하는 관지 대장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본대로 회군(回軍)해라. 그리고 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30명은 나를 따라서 이동한다. 직접적인 전투는 힘들겠지만 정찰 임무는 충분히 수행할 수 있겠지.”
국광이 처음에는 함께 돌아갈 듯하다가 나중에는 30여 명을 이끌고 다시 정찰 활동을 하겠다는 말을 듣고 마화가 이의를 제기했다.
“대장, 저도 남겠어요. 누구 다른 사람을 선임해 주시면………….”
“네가 가라. 말없이 회군하는 수하들을 보호하는 임무도 막중한 거야. 이제 여기서 헤어지자. 자, 출발!”
국광은 자신들이 매복대와 교전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자신들은 관지 대장의 명령을 받자마자 거의 최소한의 시간 을 투입해서 출동했으니 본대와 더불어 나머지 2개 천인대까지 함께 출발했다면 그 준비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었다. 거기에 적이 발견된 140 리 지점까지는 대단한 속도로 이동했으니…………. 하지만 여기서 막대한 시간을 소모했기에 지금 본대는 국광의 사륙 백인대와 적으면 10리, 최대한으 로 잡아도 아마 40리까지 거리를 좁혔을 것이다. 더 이상 거리가 좁혀지면 국광의 30여 기로는 참다운 정찰 활동을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국광은 오 랜 전투로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여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60리 정도 앞으로 추격해 나갔을 때 전방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보며 임충이 입을 열었다.
“멀어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행색(色)을 보아하니 피난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피난민을 가장한 적의 분대(分隊)인지도 모르니 빨리 가 서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좋아, 자네는 여기 남아 퇴로를 확보하라. 나는 10여 기를 거느리고 정찰을 하겠다. 만약 혼전(混戰)이 벌어지더라도 돕겠다고 혼전 속에 뛰어들지 말고 퇴로 확보에 최선을 다하라.”
“예.”
임충은 마화와 함께 사륙 백인대에서는 가장 고참이다. 그렇기에 마화를 돌려보낸 지금 자연스럽게 임충은 백인대의 부대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 다. 임충은 말 위에서 고개를 돌려 뒤쪽의 대원들을 훑어보더니 외쳤다.
“차림(車林)!”
그러자 뒤편에서 피에 젖은 갑주를 입은 무사가 달려왔다. 그의 갑옷에는 「四(사륙구)」라고 쓰여 있었다. 차림은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젊지만 뛰어난 검객이었다.
“예.”
“네가 아홉 명의 수하를 이끌고 대장을 따라가라.”
“예. 그쪽의 아홉 명 모두 나를 따르라.”
국광이 피난 행렬로 보이는 집단에 근접해 갔다. 모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상대의 기습에 대비했지만, 더욱 가깝게 접근하자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진짜 피난민들이었다.
많은 말 떼와 양 떼를 이끌고 그 사이사이 마차에 짐을 가득 싣고 이동 중인 그들의 표정에는 절망감만이 어려 있었다. 장정들은 없고 모두 노인과 여자, 어린애들뿐……………. 국광은 나이 지긋한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가?”
검은 갑옷을 입은 중국인이 난데없이 몽고어로 말을 걸자 그는 놀란 듯한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곤륜하(坤輪河) 쪽으로 갑니다, 나으리.”
“왜?”
“진령하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쪽에서
“이 부족의 이름은 뭔가?”
“타지크 부족입니다요, 나으리.”
“타지크면 지울 부족의 한 갈래가 아닌가?”
노인의 눈에 공포가 어리더니 더듬더듬 항변했다.
“아닙니다. 타지크는 지, 지울 부족의… 영토에서 일부 생활하긴 하지만 지울 부족과 절친하지도 않습니다요, 나으리.” 국광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그래?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잘못 아신 겁니다요, 나으리.”
“좋아, 그건 어찌 되었건 상관없어. 이쪽으로 지나가는 7천 기 정도의 몽고 병사들을 만났나?”
“못 만났습니다요, 나으리.”
“자네들은 어디서 오는 길인가?”
“울란토르에서 오는 길입니다요.”
“울란토르? 울란토르라면 충분히 만났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러면서 피난 행렬을 휙 둘러보았다. 부족의 크기에 비해 말이 적고 남자가 너무 없었다.
‘아마 남자들이 말을 끌고 그 녀석들에게 합류했다고 봐야겠군. 여자들의 숫자로 봤을 때 거의 1천 명 정도?’
“좋아, 나완 별 상관없는 것 같으니 너희들은 최대한 빨리 이 부근을 떠나라. 이 근처에서 뭉그적거려 봐야 신상에 좋을 게 없을 테니까. 이봐, 차 림!”
“예.”
“임충에게 전진하라고 해. 자, 우리도 출발한다.”
대초원에 새겨진, 7천 기나 되는 병력이 움직인 흔적은 쉽게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다. 폭설이나 폭우가 쏟아진다면 몰라도. 타지크 부족과 서로 합쳐 진 부분에서 혼동만 안 하면 추격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 국광은 말을 탄 채 건포로 끼니를 때우며 부하들을 몰아붙여 250리(약 100킬로미터) 정도 를 추격해서야 적의 후미를 포착할 수 있었다. 국광은 패잔병들과 20리(약 8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비밀리에 뒤따르는 본대를 이끌었다. 적들은 그날 1백 리 정도를 더 이동한 다음 약 3천 가구가 살고 있는 몽고 마을에서 야영했다. 그리고 관지 대장의 본대는 그날 저녁 늦게야 국광의 정찰대와 합류했다.
관지 대장은 적이 후퇴의 속도를 조금 줄인 이유가 뒤에 남겨 둔 1천여 명의 매복대에 대한 기대감이란 걸 눈치 채고 재빨리 적의 꼬리를 잡은 국광 의 공로를 치하하고, 휘하의 장수들과 전투에 대한 토의를 시작했다. 5개 백인대가 적의 퇴로로 예상되는 지점에 매복을 하고 나머지 25개 백인대가 새벽을 틈타 기습을 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중 국광이 거느린 30기는 그의 요청대로 매복대에 합류하기로 했다.
당일 새벽 25개 백인대의 기습이 시작되는 것을 국광은 멀리 초원에서 말들을 눕혀 놓고 구경했다.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격렬한 전투가 개시되 었다. 무술을 모르는 몽고인들을, 그것도 기습을 했으니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그것은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찬황흑풍단은 그렇게 패잔 병과 그들을 도와준 지울 부족의 마을 하나를 없애 버렸다. 적들은 사방으로 도망쳤지만 매복한 5개의 백인대가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
모든 전투가 종료되었을 때 이미 해는 중천에 떠올라 있었고, 세 명의 천인대장들의 지시로 몽고병 부상자와 포로들을 모두 처형했다. 그리고 그들 을 도와준 마을 사람들은 젊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였다. 곳곳에서 살인, 방화, 강간, 약탈이 자행되었다. 마을은 그야말로 지옥 의 아비규환이었고 수많은 시체가 뒹구는 묘지가 되었다.
국광은 휘하의 30기를 거느리고 마을에서 거리를 둔 채 아직도 매복 장소에 있었다. 국광은 대 송제국 최고의 정예인 찬황흑풍단이 이렇게까지 잔 인하게 전투를 이끌어 가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무리 멀찍이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훤히 보였고, 또 군 데군데서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팔짱을 끼고 지그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옆의 임충에게 말하는 듯, 아니면 혼잣말을 하는 듯 나직이 중 얼거렸다.
“과연 전쟁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의 마음을 안다는 듯 임충이 말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몽고족들은 아주 강인한 민족이라 이렇게 뜨거운 맛을 보여 놓지 않으면 언제 또다시 반기를 들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렇지, 병사도 아니고 민간인들을 저렇게까지…….”
국광의 안색을 살피면서 임충이 화제를 돌렸다. 계속 이런 얘기를 해 봐야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대장,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매복했던 다른 백인대들은 모두 약탈에 참가했습니다. 우리만 이렇게 떨어져 있다구요.”
“음…….”
국광은 잠시 생각하더니 큰 소리로 부하들에게 물었다.
“약탈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
모두 멀뚱멀뚱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단장의 지엄한 명령 때문이지 이따위 돈도 안 되는 몽고족 약탈을 하고 싶은 자들은 많지 않 았다. 거기에 몽고족 계집들이 빼어난 미인도 아니고, 추위 탓에 목욕도 거의 안 하는 것들을 안아 봐야 그것도 별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국광은 수 하들의 표정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여기 계속 있어 봐야 별 볼일도 없으니 관지 대장에게 통지하고 회군한다. 대장군의 본대에 합류해서 쉬는 게 남는 거겠지. 그리고 떠날 때 마화에 게 살짝 일러 놨으니 운 좋으면 술맛도 볼 수 있을 거야. 지금까지 관지 대장의 부대는 움직이지 않고 있나?”
술맛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모두들 기대감에 차서 군침을 삼키며 ‘역시 우리 대장’하는 표정으로 국광을 바라봤다. 국광의 옆에 있던 임충도 미소를 띠며 국광의 질문에 대답했다.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럼 관지 대장에게 전령을 보내라. 우리는 회군한다고. 그리고 만약 있을지도 모르는 적의 매복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그도 허락할 거야.” “예.”
“그리고 이 지옥에서 언제 떠날 건지 물어보는 것도 잊지 말고. 단장한테 보고해야 하니까.”
“예.”
전령이 달려갔다가 돌아오자 국광은 바로 본대를 향해 출발했다. 더 이상 피비린내 나는 이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추격전과는 달리 회군 할 때는 수하들을 다그치지 않았는데도 돌아가서 오랜만에 술을 실컷 마시고 푸근히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자연히 속도가 빨랐다.
4백 리 정도 이동했을 때 국광의 코에는 짙은 피 냄새가 느껴졌다.
“우리가 매복 기습을 당했던 장소에 도착하려면 멀었지?”
“예, 지금 4백여 리를 왔으니 아직……………”
“그럼 이 피 냄새는 뭔가? 이 근처에서 전투를 벌인 기억은 없는데?”
“예? 피 냄새라구요?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그런가? 내가 잘못 맡았을 리는 없는데……….”
”하여튼 좀 더 속도를 내라.”
국광이 수하들을 이끌고 5리 정도 나가자 그곳에는 수많은 시체와 타다가 남은 마차, 죽어 넘어진 말과 양, 갖가지 짐들이 흩어져 있었다. 국광이 그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임충이 어찌 된 일인가를 눈치 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만났던 타지크 부족입니다. 관지 대장의 후속대가 한 짓인 모양입니다. 아마 포로들과 약탈한 물건들은 먼저 몇 사람 뽑아서 본대로 보냈겠 죠.”
“여기서 지켜보고 있다고 별수 있겠습니까? 이 시체들을 다 묻어 줄 수도 없구요. 출발하기로 하죠.”
“그러자…….”
본대는 아직도 그 자리에 주둔 중이었다. 국광이 도착하자 마화가 뛰어나와 국광을 반겼다.
“모두 무사하군요. 정작 패잔병 본대의 싸움은 싱거웠던 모양이죠?”
국광의 떨떠름한 표정에 옆에 있던 임충이 거들었다.
“몽고병들이 마을에서 야영 중인 것을 새벽에 기습했으니 싱겁다뿐이겠어? 그래 술은 구했어?”
“말도 마. 그 술 구한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또 마유주(馬乳酒? 난 그놈의 마유주 냄새만 맡아도 올라올 것 같아. 어떻게 그걸 마시고 사는지 원…………
마유주란 몽고 전통의 토속주로 말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다. 비교적 약한 술로 이상야릇한 냄새가 나고 맛이 시금털털해서 중원 사람이라면 도저히 맨정신에 마시기 힘들다. 그걸 몽고인들은 사발로 벌컥벌컥 들이켰고 거의 주식(主食)처럼 늘상 입에 달고 살았다.
“언제 맛으로 마셨냐? 취하는 기분에 마셨지. 그게 아니고 고량주야. 꽤 오랫동안 여기 머물렀으니까 가까스로 구할 수 있었다고. 어때?”
고량주라는 말에 임충이 꿀꺽 군침을 삼키며 힐끗 국광의 눈치를 보았다. 역시나 국광의 목젖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걸 보니 모두들 술에 굶주 리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중원의 술에……………
국광은 주변을 한동안 살피더니 마화를 돌아보았다.
“인원이 많이 준 것 같은데?”
“예, 4개 천인대가 주변을 돌며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어요. 연일 몽고 계집들과 약탈품들이 쏟아져 들어온다구요.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 는 게 아닌가 하는…………….”
“잔소리 말고 나중에 만나자. 나는 먼저 단장 나으리를 만나 봐야겠어.”
“그럼 나중에 보죠. 임충의 막사로 오세요.”
“알겠다.”
오랜 시간 고생한 수하들에게도 고량주를 보내고 나서, 대장급들은 임충의 막사에 모여들어 술맛은 이래야 한다고 외치며 서로 장시간의 노고를 위 로하고 치하하면서 마셔댔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시작된 술자리가 해가 진 후 끝이 나자 국광은 임충과 함께 나가 떨어진 네 명의 십인대장들을 한 팔에 한 명씩 집어 들고 나왔다. 마화를 먼저 옆의 막사에 던져 넣으며 임충에게 투덜거렸다.
“이 계집들은 술도 약하면서 왜 이렇게 마셔 대는 거야.”
그의 말에 임충도 맞장구를 쳤다.
“글쎄 말입니다. 여자만 아니면 그냥 같이 뒤엉켜 자도 상관없는데, 원・・・ 날 잡아 잡수 하면서 먼저 뻗어 버리니. 그런데, 대장!”
“왜?”
“빨리 안 가시면 하부르한테 두들겨 맞지 않을까요?”
“하부르?”
잠시 국광은 하부르가 뭔가 생각했다. 곧 하부르가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과 그 애가 자신의 막사에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군. 주워 왔으면 돌봐줘야 되는 건데… 정말 얻어터지지나 않을지 걱정이군.”
“빨리 가 보시죠.”
국광은 왼팔에 쥔 사람을 막사에 집어 던지며 인상을 썼다.
“그래야겠지. 잘 자게나, 내일 보세.”
임충의 웃음 섞인 말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대장도 잘 주무십시오. 내일 일 보시려면, 오랜만에 만났다고 너무 힘쓰시면 안 됩니다.”
국광이 막사에 도착해 보니 하부르는 자지 않고 국광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광이 도착해서 수하를 시켜 보낸 그의 갑주와 말만이 도착했을 뿐, 정작 사람은 밤이 되어서야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들어오니 얄미울 만도 하련만……………. 하부르는 국광이 들어오는 걸 보고 쪼르르 달려와 국광에게 안겼다. 국광은 그런 하부르를 마주 안고 토닥거렸다.
“얌전히 있었냐?”
“…..”
“밥은 제때 먹었어?”
“…….”
“너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냐?”
“…….”
“말을 해라.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어디 얼굴 좀 볼까?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렸군. 이게 며칠만이지?”
국광이 살며시 턱을 잡고 올리자 아직 앳된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후광이 있어 옆에서 괴롭히는 녀석이 있을 리는 없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늑대 같은 살벌한 남자들과 같이 있는다는 사실 자체가 소녀에게는 고역이었을지도 모른다. 국광으로서는 이 아이를 빨리 어디론가 보 내고 싶었지만 마화의 말대로 4개 천인대가 주변을 돌며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든다면 이 아이를 맡길 만한 마을을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국광은 한숨을 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저녁은 먹었니?”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보니 국광을 기다리느라 아직 안 먹은 모양이었다.
‘이미 수하들과 배 터지게 음식과 술을 먹었지만 그래도 이 녀석이 나를 위해 장만해 놓은 음식이니 같이 먹어야겠지. 가만… 더 먹어도 될까?’ 슬쩍 배를 한번 찔러 보고 그나마 가능성이 보이자 국광은 하부르에게 손짓을 했다.
“그럼, 같이 먹자.”
하부르는 재빨리 몽고식으로 준비해 놓은 음식들을 가져왔다. 뼈째 삶은 양 다리, 그리고 뭐로 만들었는지 모르는 걸쭉한 국물이 작은 그릇에 담겨 있다. 아마 여기에 고기를 찍어 먹는 것이리라. 그리고 마유주……………. 작은 식탁 위에는 작은 칼 두 자루가 놓여 있었다.
‘이걸로 썰어 먹는 모양이지? 그건 그렇고 내 위장이 버틸지 모르겠군…………’
국광은 어색한 표정으로 식탁을 바라보면서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용감하게 식탁으로 달려들었다.
‘저 아이를 데리고 있는 내가 멍청한 놈이지…………..
국광이 식탁에 앉자 하부르는 국광에게 칼을 건네줬다. 그리고 자기도 국광 옆에 앉아 칼을 잡았다.
몽고인들은 짐승을 잡으면 어떤 때는 통째로, 어떤 때는 적당히 토막을 쳐서 삶아 먹는다. 토막이 크니까 칼은 식사할 때의 필수품이다. 서로 칼을 든 채 식사를 하다 보니 이놈의 식사 때 문제가 생기곤 한다. 종종 식사하다가 살인이 벌어지기도 하기에 식사를 같이 했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상당 한 신뢰의 표시였고, 또 담력이 크다는 징표였다.
양 다리는 두 개…………. 한 개씩 집으면 딱 맞는 숫자다. 국광이 양 다리를 들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자 하부르가 살며시 웃으며 양 다리의 드러 난 뼈 부분을 잡고 자신의 소매 위에 올렸다. 국광이 따라하자 칼날을 자신의 쪽으로 오도록 칼을 잡고서 고기를 썰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고기가 덜 익어서 핏기가 배어 나오는 걸 보고 국광은 멈칫했다.
‘맙소사, 설익은 고기군. 그래, 몽고족은 유목 생활을 하지……. 저 큰 고깃덩이를 푹 익히려면 시간이 적잖게 들어가니 당연히 겉만 대강 익혀 먹을 수밖에. 그래도 한 번 칼을 들었으니………….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국광은 모진 결심을 하고 하부르가 하는 대로 고기를 썰어 입속에 쑤셔 넣었다.
‘오, 신이시여. 이걸 먹어야만 합니까…………. 아마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죄를 많이 졌나 보군.’
속마음이야 어떻든 국광이 맛있는 듯 먹자 하부르는 기뻐했다. 둘은 간단한 얘기를 나누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고통은 한 번에 끝내는 게 낫다는 생각에 자신 앞에 놓인 마유주를 한 번에 쭉 마셔 버리자 하부르가 다시 잔을 채워 주었다.
“마유주를 좋아하시는군요.”
“그래…………”
‘돌아가시겠군.’
“천천히 드세요.”
너무 안 마시고 고기만 먹는 것도 힘들어서 이번에는 간간히 마유주도 입도 대면서 앞으로의 살길을 찾아 우회적으로 질문했다.
“몽고에서는 고기를 언제나 삶아서만 먹냐?”
“아뇨, 구워서도 먹어요.”
“구워? 그럼 내일은 구워 먹자.”
“왜요? 맛이 없으세요?”
“아니야, 맛있어. 아주 잘 삶았는데… 그래도 계속 삶아 먹기만 하면 아무리 맛있어도 질리잖니. 가끔은 바꿔야지.”
그러자 하부르는 빙긋이 웃었다.
“예, 마유주 더 드세요. 많이 구해 놨어요.”
국광은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래, 잘했다……”
‘내가 못 살아……………. 얘를 빨리 내보내야 제명대로 살 수 있겠군.’
국광에게는 장도를 들고 전장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것보다 더 지옥 같은 식사가 끝난 후 국광은 자신의 강력한 비위(脾胃)를 믿고 쑤셔 넣은 반 생고 기와 마유주가 반역을 일으킬 것이 더 걱정이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부르는 오랜만에 만난 말 상대를 향해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재잘 거렸다. 전체 내용의 반도 못 알아듣는 국광은 점점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으나 이 멍청한 아가씨는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국광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마음을 돌려 구석에 놓인 검을 집어 들고 다시 하부르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요즘 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청성검과 장도를 정성껏 닦으면서 건성으로 하부르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줬다. 하부르는 갑자기 국광이 검을 꺼내자 움찔하기는 했지만 그가 곧 검을 손질하기 시작했으므로 또다시 쉴 새 없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있는 대로 시간을 끌던 검의 손질까지 끝나자 국광은 자리를 펴고 잘 준비를 했다. 그러자 하부르가 국광의 손에서 가죽을 빼앗아 정성껏 깔고는 국 광을 눕히고 자기도 그 옆에 누웠다. 국광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자신을 완전한 남편이나 남편 대용품쯤으로 생각하는 이 아가씨를 설득 할 수도 없었다.
‘에이, 될 대로 되라지.’
국광은 오른팔을 뻗어 하부르에게 팔베개를 만들어 주고는 옆에서 속삭이는 하부르의 말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오랜 시간 뛰어다니며 거의 잠을 자 지 못했기에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옆에서 속삭이던 하부르는 곧 국광의 편안한 숨소리가 들리더니 더 이상의 형식적인 대꾸도 없자 살짝 국광을 찔러 보았다.
“이봐요………….”
국광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한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국광의 품에 기대 잠을 청했다. 어쩔 수 없이 함께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자기에게 꽤나 신경을 써 주는 이 알 수 없는 이상한 남자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또다시 마화가 국광을 깨우러 왔다. 그녀는 다짜고짜로 막사 안으로 쳐들어왔다.
“대장.”
반쯤 눈을 뜬 국광은 누운 채로 마화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그러자 마화는 국광을 내려다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계속 잠만 자면 어떻게 해요? 할 일이 많은데……………..”
“할 일?”
“예.”
“어떤?”
“그러니까…………….”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임충하고 둘이서 해결해. 잠을 오랫동안 못 잤더니 피곤하군.”
“안 일어날 거예요?”
“야, 잠 좀 자자. 지금이 도대체 몇 신데..
“벌써 해 떴다구요.”
“벌써는 무슨, 해 뜬 지 1각도 안 됐잖아. 나중에 보자구.”
일어날 생각은 안 하고 국광이 가죽을 좀 더 높이 끌어 올리자 마화가 다가오더니 가죽을 확 걷었다. 국광은 저녁에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였다. 그 옆에 역시 옷을 입은 채 누워 있던 하부르는 겁먹은 눈으로 마화를 훔쳐보며 국광을 살며시 껴안았다. 설마하고 있던 마화는 그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
국광은 그사이 내공의 운용으로 능공섭물해 마화가 쥔 가죽을 뺏어서 다시 덮고는 졸린 듯한 목소리로 냉랭하게 말했다.
“나중에 보자구. 쫓아내기 전에 빨리 나가.”
“그러죠.”
국광이 또다시 하부르를 껴안고 잠을 청하자 순순히 물러난 마화는 임충의 막사로 향했다. 마화는 망설임없이 임충이 뻗어서 자고 있는 막사 안으로 쳐들어갔다. 마화는 자고 있는 임충을 툭툭 차서 깨웠다.
“야, 빨리 일어나.”
“으응…, 왜 그래?”
“왜 그래고 자시고 빨리 일어나.”
“끄응…….”
신음 소리와 함께 다시 모포를 뒤집어쓰는 임충을 보고 마화는 이번에도 바로 모포를 뺏어 들었다. 무심했던 국광과는 달리 임충은 비록 바지 안으 로지만 아침을 알리는 양물이 마화 앞에 드러나자 황급히 가리면서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야, 빨리 나가.”
“쳇, 꼴에 남자라고………….”
마화는 앞을 가린 손을 발로 툭 차면서 말했다.
“밖에서 기다릴 테니 빨리 나와, 죽고 싶지 않으면.”
“야, 너 정말 여자냐? 아침부터 미치겠군…….”
팽창한 양물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간수를 잘한 임충이 투덜거리며 나오자 마화가 임충에게 따지듯 물었다.
“야, 대장이 왜 몽고 계집하고 같이 사는 거지?”
“그걸 몰라서 묻냐? 왜 잘 자는 사람 새벽부터 깨워서 헛소리야. 냄새나는 몽고 계집하고 같이 산다면 이유야 뻔한 거잖아.”
“뭐? 성교?”
여자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묻자 임충은 얼굴이 벌게지면서 더듬거렸다.
“그, 그렇겠지.”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아.”
“왜?”
“하부르하고 살기 시작한 다음부터 새벽마다 내가 깨우러 갔는데……………
놀란 임충이 외쳤다.
“너 미쳤냐?”
임충이 경악하든 말든 마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멀쩡해. 그런데 그때마다 둘 다 옷을 입고 있더라구. 그건 서로 성교를 안 했다는 말이잖아. 남자가 그럴 수도 있냐? 전에 보니 양물에도 이 상이 없는 것 같던데…….”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자 임충은 얼굴이 더욱 벌게져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도저히 이런 마화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은 기 분도 아니었다.
‘제기랄, 도대체 누가 우리 대화를 들으면 이게 아침부터 웬 개망신이냐…………….’
“아침부터 헛소리하지 말고 잠이나 좀 더 자. 너야 오래전에 돌아와서 푹 쉬었으니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죽을 지경이라고. 30기만으로 벌판을 헤맨 다는 게 보통 일인 줄 알아. 대장은 거의 한숨도 못 잤고, 나도 그렇다구. 그러니 제발 잠 좀 자자…………”
마화는 막사로 들어가려는 임충의 뒷덜미를 잡고 버둥거리는 그를 말이 마실 수 있도록 임시로 물을 받아 둔 곳으로 끌고 갔다. 그 물통 속에 임충의 얼굴을 처박았다가 꺼내고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이제 정신이 좀 드냐? 그래서 난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몽고와는 식생활이 달라서 하녀로 부려먹을 수 도 없고…………….”
임충은 물이 뚝뚝 떨어져 옷을 적시고 있는데도 소매로 쓱 눈만 닦고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마화를 돌아봤다.
“젠장, 들을수록 가관이군.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의 요점이 뭔데?”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러니까, 왜 하필이면 몽고 계집을……………. 대장이 원한다면 여기도 여자는 많은데………….”
그러자 멍한 표정으로 임충이 마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많은 여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아니라니까………….”
마화가 발끈하자 임충이 놀리듯 빙글거렸다.
“흥, 네가 아무리 애태워봤자 너하고는 격이 다른 분이야. 냉수 먹고 속 차리라구. 대장이 몽고 계집을 껴안고 자든 요나라 계집을 껴안고 자든 너
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럼 나는 잠이나 좀 더 자야겠다. 일 생기면 네가 알아서 처리해.”
임충이 돌아서자 그 뒷모습을 보면서 마화가 소리를 질렀다.
“야, 잘 생각만 하지 말고 내 말도 좀 들어 보라니까…………….”
임충은 막사 안으로 들어가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잠이나 좀 더 자. 잠이 모자라니까 정신이 헷갈리고 입에서 헛소리가 나오는 거야.”
약이 오른 마화는 임충이 들어가고 나서 펄럭이는 막사의 휘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흥! 내가 말을 말아야지.”
국광이 느지막이 일어나자 먼저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던 하부르가 먹을 것을 가져왔다.
“드세요.”
이번에는 양 다리를 통째로 구운 거였지만 사정은 전과 별로 다른 게 없었다. 겉만 익혔지 안은 똑같이 핏물이 뚝뚝 떨어졌던 것이다. 국광은 사력을 다해 고기를 씹어 삼키고 마유주를 들이켜고는 일어났다.
“좀 더 드세요.”
국광은 억지로 웃으면서, 음식을 권하는 하부르에게 더듬더듬 말했다.
“아. 그러니까, 이거 정말 맛있기는 하지만 나는 원래 식사를 많이 안 해. 그리고 점심은 수하들하고 같이 먹으니까 준비할 필요 없어. 심심하겠지 만 혼자 먹어라, 응?”
맛있다는 말에 하부르는 활짝 웃었다.
“부하들하고 가깝게 지내는 것도 좋은 거예요.”
“아, 지금 생각났는데 저녁도 수하들하고 약속이 있어. 술을 같이 마시기로 했으니까 먼저 먹어라, 응?”
“내일 저녁은 같이 먹는 거죠?”
“그럼 ・・・・・・”
국광은 서둘러 청성검이 매여 있는 검대를 차고 밖으로 나왔다. 옥영진 대장군에게 청성검을 받은 후부터 묵혼검은 깊숙이 보관해 두고 이걸 애용했 다. 마상전에서는 짧은 칼보다 긴 칼이 더 편리했기 때문이다. 국광은 서둘러 임충의 막사로 갔다. 임충과 수하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국광 이 다가오자 모두들 일어나 인사를 했다. 국광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자리에 끼어 앉았다.
“야, 내가 먹을 것도 좀 있냐?”
그러자 그 속사정 뻔히 안다는 듯 흉물스런 미소를 지으며 임충이 비꼬았다.
“아뇨, 대장님 드실 게 어디 있습니까? 저희 먹을 것도 없는데…………. 게다가 대장님은 예쁜 하부르가 만든 아침 식사를 든든히 드셨을 텐데…
“그게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거라면 그렇지. 잔말 말고 빨리 내놔.”
수하 하나가 밥을 한 공기 퍼서 국광에게 줬다. 국광은 열심히 밥과 반찬을 집어 먹으면서 앞으로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궁리를 했다. 하기야 열심히 먹어 대면 나중에는 이골이 나서 어떻게든 먹겠지만 문제는 지금이다. 그리고 하부르를 자기가 평생 데리고 살 것도 아닌데 적응하려 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