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권 8화 – 최초의 전쟁
최초의 전쟁
10일 후 드디어 흑풍단은 당당히 몽고와의 국경선을 넘었다. 하지만 이틀 동안 계속 진격했어도 몽고의 병사는 만나 볼 수 없었다. 대신 말이나 양 을 치는 순박한 몽고인들을 간혹 만났다. 흑풍단의 주위에는 계획대로 1백 개의 십인대가 물샐틈없는 정찰망을 갖춰 끊임없이 상황을 대장군에게 보 고했다. 그러다가 칠삼사 십인대에서 긴급 연락이 도착했다.
「전방 진령골에 2만 정도 추정되는 몽고군이 매복하고 있습니다.
칠삼사 십인대장 장패張)」
부단장 옥염왕(玉閻) 마길수(馬) 상장군이 옥 대장군을 바라봤다.
“대장군, 진령골로 진입할까요? 본 흑풍단이라면 충분히 돌파할 수…..”
“아냐, 구태여 위험을 안고 진령골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 진령골은 험준한 골짜기. 매복한 적들에게 공격당한다면 기마대에다가 중갑주를 입은 우 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해. 위쪽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경공을 전개해야 하는데, 그런 무거운 걸 입고 속도가 나겠나? 그렇다고 갑주를 벗자니 적 의 화살이 문제가 될 테고………….”
옥영진 대장군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어 펼치면서 말을 이었다.
“오천하쪽으로 나가서 이곳 진풍령(進楓嶺)을 넘지.”
“하지만 진풍령으로 가려면 거의 4백 리(약 160킬로미터)를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도 며칠 손해 보는 것 말고는 거의 피해가 없어. 하지만 적이 있는 걸, 그것도 매복한 걸 뻔히 알면서 들어가서 죽을 필요는 없잖아.”
“죽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약간의 피해는 있겠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약간의 피해가 될지 아니면 더욱 큰 피해가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르네. 적도 이쪽에 대해 잘 알 것이고 그만큼의 대비를 했을 테니 돌아가는 게 좋 “아.”
“정 그러시다면……”
“대신 본대는 보병 때문에 진격 속도가 느리니까 진령골로 가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기로 하지. 그러면서 천인대 둘을 보내 진풍령을 장악하는 거야. 그러고 나서 우리가 진풍령 쪽으로 꺾어지면 적은 미처 대비를 못 할 테지…………..
“묘책입니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두 천인대의 대장들에게 주의를 단단히 주게나 적의 매복에 걸리지 말라고…………. 지금 눈앞에 있는 소수의 적에게 피 해를 조금씩 입기 시작하면 나중에 진짜 운명을 건 회전(回戰)에서는 참패를 면하기 힘들어.”
“명심하겠습니다.”
다행히도 진풍령에는 1천 명 정도의 몽고군이 저지대(沮止隊)를 만들고 있을 뿐 대량의 매복군이 없었기에 흑풍단은 별 피해 없이 진풍령을 넘을 수 있었다. 진풍령을 넘자 파죽지세………. 엄청난 속도로 철진천이 도사리고 있는 오지(奧地)로 진격해 나갔다. 그러면서 주위에서 만나는 모든 몽고 부족 으로부터 말, 양 등 식량이 될 만한 것들을 징발했다. 전쟁이 어느 정도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후방에서 보급이 된다고 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보급물자를 아껴야 했다.
드디어 철진천의 주력 부대와 흑풍단은 진령하(震河) 주변에서 만났다. 몽고의 국경선을 넘은 지 15일이 지난 후였다. 몽고는 수많은 소수 부족들 이 모인, 국가라고도 부르기 힘든 나라였기에 이들을 만났다는 것은 이제부터 철진천의 영토라는 뜻이었다.
서로가 대치한 곳은 진령하 주변의 그렇게 넓지 않은 평원이었다. 하지만 대 부대가 기마전을 펼치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넓이였다. 옥영진 대장군은 무수히 많은 몽고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많군…….”
그러자 마길수 상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언뜻 봐도 10만 밑은 아니겠군요. 아무래도 우리 쪽의 숫자가 적으니까 처음부터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생각인 모양입니다.”
“맞아, 거의 11만 정도는 될 거야. 이번 전투는 꽤 재미있겠군. 정찰조로에게서 연락은 없나?”
“저들의 주둔지 후방 1백 리쯤에 몽고인들의 군락이 있다는 보곱니다. 주민이 5천 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꽤 큰 부족이군. 그래 특이한 점은?”
“남자들이 하나도 없답니다. 아마도 모두 이곳에 투입된 모양입니다.”
“크크크, 모두란 말이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라도 이 전쟁 뒤에는 그 마을부터 본보기로 쑥대밭을 만들어야겠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정찰조들은 어디까지 나가 있나?”
“이 부근 150리까지 나가 있습니다.”
“내일까지 20개 정찰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적의 뒤편에 집결해서 적의 후미가 떨어져 나오면 기습하라고 일러라.”
“예.”
“녀석들은 숫자를 믿고 내일 날이 밝으면 도전해 올 거야. 원래 야전(戰)은 숫자가 적은 쪽에서 하는 거니까. 이쪽에서는 일부 군사를 뽑아 교대로 함성을 지르며 쳐들어가는 척하면 아마 오늘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겠지. 잠을 못 자면 처음에는 표가 안 나지만 장시간 싸우면 당연히 피로가 빨리 오지. 내일 아침에 전면전이 시작될 거야. 가능성이 거의 없긴 하지만 적의 야습에 대비해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예.”
옥영진 대장군은 포진해 있는 몽고군을 가리키며 세부 작전을 설명했다.
“내일 적이 공격해 오면, 저곳에서 막은 다음 바로 8개의 천인대를 투입해서 난전을 벌인다. 나머지 1개의 천인대는 이쪽으로 돌아가서 후미를 본대 와 분리시키면서 공격을 하고, 이때 또다시 뒤쪽에서 기습이 가해질 테고…………… 철진천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적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더욱 철저 히 부숴 버리면 될 것 같군.”
“묘책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천인대를 우회하도록 보내실 요량이신지?”
“지금 정찰 나가 있는 게 제7천인대인가?”
“예.”
“그렇다면 제8천인대를 이용하도록 하지.”
“제4천인대가 아니고요? 지금 천인대들 중에서는 그들이 가장 강합니다.”
“아냐, 제4천인대는 적과 격전을 벌이는 가장 전면에 세워라. 그러면 아군의 피해가 줄어들지도 모르지. 그리고 제4천인대장에게 사륙 백인대를 가 장 앞에 세우라고 지시하게.”
“예? 거기는 대장군이 아끼시는 국광이란 자가 대장인데, 왜 가장 위험한 곳에…………?”
“사람은 써먹으려고 아끼는 거지 놀려 두려고 아끼는 게 아냐.”
“존명”
이런 저런 작전을 논의 중인데 연락병이 급히 다가왔다.
“대장군께 아룁니다. 칠삼이 십인대의 보곱니다.”
그러면서 작은 종이 하나를 건넸다. 옥영진 대장군은 그걸 유심히 읽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 녀석들이 아주 웃기는군.”
“왜 그러십니까?”
“지금 2만의 적병이 후방에서 접근 중이다.”
“예?”
“그러니까 처음부터 철진천이 모은 군대는 13만이란 말이지. 이 녀석들이 오고 있는 방향으로 보아 아무래도 진령골에서 매복했던 녀석들이 우리가 이쪽으로 돌아 나오니까 매복을 풀고 따라붙은 모양이야.”
“괜찮은 작전이군요. 그 2만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할 텐데…
“적이 두 방향에서 압박해 오면 보통 일이 아니지…………….. 어림군에게 연락해서 5천의 병력으로 후방 30리 지점 숲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에게 기습을 가하라고 일러라. 그리고, 그리고…….”
“보병만 보내면 쉽사리 먹이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쪽으로 흑풍단을 잘라서 보내는 것도 문제군요.”
“음, 제5천인대를 그리 보내지. 그리고 자네가 후방을 맡아 주게.”
“예.”
“적들과 교전이 시작되면 불을 놓아 신호를 해 줘. 적들이 교전을 회피하고 우리 뒤로 기습해 올지도 모르니 준비는 해 둬야 예의지.”
“존명!”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양측은 폭넓게 진을 짜고 적과 일전을 벌일 준비를 시작했다. 몽고 측은 숫자를 믿고 정공법(正法)을 취해 왔다. 주위가 밝아 지자 몽고의 기마대는 곧장 돌격을 감행했다. 수만의 인마(人馬)가 달려 나오자 그 말굽 소리는 지축을 뒤흔들었다.
어림군은 옥영진 대장군의 지시대로 제일 앞줄에는 큼직한 사각 방패를 가진 병졸들이, 그 뒷줄에는 장창(長槍)을 가진 자들이 나열해서 손잡이의
끝을 땅에 대고 창날을 들어 올려 기병의 돌입에 대비했다. 궁병(弓兵)들은 모두 화살을 먹인 상태로 대기했다. 그 뒤에는 1백 틀의 쇠뇌가 상대에게 쏘아 붙일 시간만을 기다리며 잔뜩 화살을 머금고 있었다. 쇠뇌의 뒤로는 8천에 달하는 흑풍단이 포진했다.
쇠뇌란 것은 노(弩)라고도 부르는데, 사람이 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활 몇 개를 붙여 놓은 장치이다. 일반 화살보다 좀 더 긴 것을 열 개 정도 동시 에 발사할 수 있는데, 사정거리는 활보다 길지만 정확도는 아무래도 떨어진다. 그러나 한 명씩 겨냥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떼거리로 접근 중인 적 에게는 적중확률이 컸으므로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몽고의 기병이 접근해 오자 먼저 쇠뇌가 날아가 수많은 말들을 한꺼번에 거꾸러뜨리는 장관을 연출했다. 그렇게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몽고의 돌 격은 중지되지 않았다. 몽고병들이 더욱 가까이 접근하자 이번에는 궁병들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고 몽고의 기병들도 달려 나오며 활을 마구 쏘아 댔다. 몽고의 기병들은 달리면서도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줄 안다. 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말과 함께 생활하기에 기마술이 뛰어났다.
몽고병과 어림군이 격돌하고 나서야 흑풍단이 투입되었다. 흑풍단은 양옆에서 적을 몰아붙이며 폭넓게 공격해 들어갔다. 아무리 몽고병들이 수가 많고 강하다고 하지만 무술이 뛰어난 흑풍단을 순식간에 제압할 수는 없었다.
기병전이 시작되자 마화는 자신의 앞에서 달려 나가며 장도(長刀)를 휘두르는 국광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몽고병들의 화살이 날아왔지만 그는 검지 판의 그 한 치 정도 되는 좁은 면으로 튕겨 내거나 장도를 비스듬히 들어 받아 냈다. 그런 식으로 화살을 튕겨 내는 기술은 힘도 적게 들 뿐 아니라 다 른 적과의 대결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아주 효과적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숙달된 칼놀림을 보이려면 하루 이틀 칼을 휘둘러서는 어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마화는 착완순으로 화살을 막았다.
‘그럼 그렇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착완순을 안 했지…………….’
국광의 무공은 정말 엄청났다. 국광의 장도를 받아 내는 상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멋모르고 달려드는 적이 장도에 검과 방패까지 두 토막이 났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검이나 방패를 함께 노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상대의 빈틈에 도를 쑤셔 박는 걸 보고 주변의 수 하들은 놀랐다.
‘화경이란 정말 무섭군…………. 나도 화경에 올라갈 수 있을까?
수하들은 주변에 달려드는 적을 베면서 약간이라도 틈이 나면 국광의 검술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국광은 적의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허리의 묵혼검 까지 뽑아 왼손에 들고는 눈에 띄는 적을 모두 베어 버리며 돌아다녔다. 국광은 최대한 넓게 돌아다니며 몽고병들을 베면서 수하들을 보호했다. 몽고 병이 많은 곳에는 언제나 국광이 뛰어들어 상당수를 죽여 버리고 상태가 호전되면 또 다른 위험한 곳으로 급히 이동했다. 그러다 보니 가엾은 말은 아무리 국광이 경갑주만을 입었다 하더라도 이미 마감(馬)의 무게가 있는지라 눈에 띄게 지쳤다.
국광은 다시금 달려드는 몽고병 두 명을 거꾸러뜨리고는 말 한 마리를 낚아채 올라탔다. 기병전을 장시간 벌일 때 지친 말을 버리고 상대의 생생한 말로 바꿔 타는 것은 흑풍단 단원의 필수 기술이다. 처음 돌격 때 적의 화살에 말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터운 마갑을 입힌 데다가 기수도 중 갑주를 입었기에 말은 빨리 지쳤다. 하지만 말이 지쳤다고 해서 예비 말로 바꿔 타기 위해 본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상대의 말을 빼앗아 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마화가 멍하니 국광의 몸놀림을 지켜보는데, 바로 옆에서 마화를 향해 달려들던 몽고병이 검을 맞고 쓰러졌다. 임충은 마화에게 돌진해 오던 몽고병 을 쓰러뜨리고는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는 마화에게 소리쳤다.
“야, 너 죽고 싶냐? 싸우다가 한눈을 팔면 어떡해? 제기랄! 이번이 세 번째란 말이야.”
문득 정신을 차린 마화가 국광을 가리키며 감탄했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봐!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말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황궁무공의 정수(精髓)가 저 안에 있다구.”
임충이 옆에서 달려드는 몽고병과 엉켜 검을 나누며 마화에게 되물었다.
“황궁무공이라고?”
“응, 화려하지만 군더더기 없고 그지없이 완벽한…….”
“제기랄!”
임충은 욕설을 내뱉으며 상대 몽고병을 밀어냈다. 몇 번 검이 오가자 상대방의 약점이 드러났다.
퍽!
그는 몽고병을 쓰러뜨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궁무공이 맞아? 황궁무공으로 화경에 올라간 사람은 무림 역사상 한 명도 없다구. 내가 청성파 출신이라고 속일 생각하지 마!”
“아니야, 진짜라구.”
“헛소리하지 말고 눈앞의 상대나 잘 봐. 황실에서 저런 고수를 길렀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마화는 입을 실룩거리며 뭐라고 대꾸를 하려고 했지만 그걸 입에서 내뱉으면 옥영진 대장군과 한 약속을 어기는 것이었기에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 었다.
옥영진 대장군은 전장 뒤쪽에서 전세(戰勢)를 바라고 있었다.
“놈들도 꽤 하는군…….”
옆에 대기하고 있던 제8천인대장 장각(張角)이 나섰다.
“대장군, 진격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왜? 모두들 싸우는 걸 보니 몸이 근질근질하나?”
“예, 벌써 개전하고 세 시간이나 흘렀습니다. 왜 출동 명령을 안 내리십니까?”
“음… 저걸 보게나.”
“예?”
“정말이지 황궁무공이 저렇게 아름다울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도 못했어.”
“무슨 말씀이신지?”
“저기, 저자를 보라구.”
“아, 사륙 백인대장 국광을 말씀하시는군요.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야만인들을 상대하는 데 저런 식으로 어기충검술(御氣充劍 術)을 남발했다가는 곧 진기가 달려서 고생할 겁니다.”
그러자 옥영진 대장군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생각은 달랐지만 그걸 구태여 말해 줄 필요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뒤에 떨어진 옥영진이 봐 도 흑색 갑주에 피를 뒤집어쓴 채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장도를 휘둘러 대는 국광의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한 무리의 적 장수들이 국광에게 달려들었 지만 전사자만 더욱 늘어났을 뿐이다.
‘저 녀석이 오지 않았다면 힘든 싸움이 되었을지도 몰라. 철진천이 생각보다 많은 병력을 모은 건 사실이니까.’
이때 한 병사가 후방의 숲을 가리키며 보고했다.
“대장군 각하, 뒤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습니다.”
“음, 이제야 왔군. 장각!”
“예.”
“송 장군에게 어림군의 일부를 뒤로 돌려 기습에 대비하라고 이르게.”
“옛!”
흑풍단과 접전 중인 몽고병들에게 화살을 날리던 어림군의 궁병과 창병, 방패병들은 쇠뇌를 옮기고 병력의 반을 빼서 뒤쪽에서 들이닥칠 몽고 기병 에 대한 방어진을 설치했다.
“문제는 뒤로 어느 정도가 밀려오느냐 하는 건데…, 적병이 너무 많으면 자네가 수고를 해 줘야겠어.”
“애타게 기다리던 말씀입니다.”
하지만 거의 반 시진이 지나도 적병은 숲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적들은 이쪽에 11만이나 되는 대군이 있으니 매복해서 기다리던 흑풍단만 전 멸시키면 본진과 합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옥영진은 난전으로 치닫는 전장을 바라보다가 결단을 내렸다.
‘이제 더 이상은 끌 수 없군…………. 더 이상 기다리면 병사들이 탈진해 버려 아무것도 안 돼.’
“장각!”
“예!”
“2개 백인대만 남겨 두고 적의 후미와 본대를 분리시켜라. 그리고 후군을 몰아붙여.”
“예!”
장각은 이제야 내려진 전투 명령에 신이 나서 8개 백인대를 이끌고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소모전의 양상을 띠고 팽팽하게 유지되던 전투의 균형이 갑자기 무너진 것도 이때였다. 제8천인대가 적진을 뚫고 파죽지세로 후방 숲으로 접근해 들어가자 순간적으로 적들이 동요했다. 하지만 겨우 8백 기 정도의 병사였기에 큰 걱정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무리의 몽고병들이 제8천인대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그들의 진격 속도를 저지할 수는 없었다. 곧이어 후군과 제8천인대가 격돌했다. 2 만대 8백.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제8천인대 8백 기는 강력한 무공을 십분 활용해, 넓게 진을 쳐서 포위당하지 않도록 주의 하면서 적의 후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때 몽고병들 후방의 숲 속에서 또 다른 1개의 천인대가 돌격해 나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갑자기 후방이 적의 새로운 병력에게 기습을 당하자 2만이라는 숫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새로 기습해 온 천인대는 돌격하면서 닥치는 대 로 베어 들어갔고 조금 지나자 후방에 자리 잡고 있던 장수들이 흑풍단의 제물이 되었다. 뒤쪽에서 난리가 나 철진천의 안위를 알 수 없게 된 본대의 몽고병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때를 이용해 흑풍단은 더욱 맹위를 떨치며 적을 밀어붙였다. 후방의 기습으로 적이 당황하자 모두 사기가 올라가 새로운 힘을 냈던 것이다.
몽고의 후진은 2천여 기의 흑풍단의 기습으로 완전히 엉망이 되었고, 그들이 중상을 입은 철진천을 호위하여 후퇴하자 남은 본대도 혼란에 빠졌다. 흑풍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숨 돌릴 틈 없이 적을 밀어붙였고, 마침내 몽고군 본대가 후퇴를 시작했다.
본대가 무너지자 그 혼란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건 후퇴가 아니라 도망이라고 봐야 했다. 흑풍단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적들을 따라붙으며 처절한 추격전을 펼쳤다. 원래 가장 피해가 크게 나는 것은 정면전을 벌일 때가 아니다. 정면전에서는 5할 이상의 손실을 주기 힘들다. 하지만 퇴각하는 적 을 따라붙으며 살육전을 전개하면 5할 이상의 피해를 적에게 입힐 수 있다.
도망가면서 화살을 쏘기는 어렵지만 추격하면서 쏘기는 쉽다. 기병끼리의 추격전에 있어서 화살은 필수 무기이다. 몽고의 병사들은 큰 활을 사용한 다. 큰 활이 작은 활보다 더 강해서가 아니라 기술력이 떨어져서 강력하면서도 작은 활을 만들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역시 마상에서의 사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각궁(角弓)인데, 이것은 물소의 뿔로 만든 아주 탄력성이 좋은 활이다. 탄력성이 좋은 만큼 활이 크 지 않아도 화살을 멀리 날릴 수 있기 때문에 말에 탔을 때처럼 운신의 폭이 좁은 경우에 더없이 좋다. 예로부터 각궁은 고려의 것을 최고로 쳤는데, 중원의 기술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각궁을 만드는 실력은 동이(東夷)라 불리는 활의 민족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황제 직속인 찬황흑풍단의 모든 단원들은 고려에서 수입한 각궁을 사용하는데, 1만 자루나 되는 각궁을 수입하기 위해 고려의 중신(臣)들에게 상당한 양의 뇌물을 줘야만 했다.
그렇게 어렵게 구입한 각궁들이 제 위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수많은 적들이 죽었으며 노획한 말도 부지기수였다. 전투가 일단락되자 그 전과를 보고 받으며 옥영진 대장군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한 번의 전투로 거의 9만의 적을 섬멸한 것이다. 뒤쪽에서 접근했던 2만의 병력도 매복한 부대 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아 장시간 전투를 벌이다가, 몽고의 본대가 패퇴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지며 끝장이 나 버렸다. 옥영진 대 장군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적장들을 쓱 훑어보고 명령했다.
“모두 참수(斬首)하여 효시(矢)하라. 그리고 장각!”
“예.”
“자네의 부대가 그래도 피로가 덜 할 테니 먼저 달려가 전방 1백 리 정도 거리에 있는 마을을 점령하고 한 명도 도망 못 가게 잡아 둬라.”
“예!”
장각이 달려 나간 후 나머지 부대는 전장에 흩어진 모든 몽고병 부상자와 포로들을 참수하고 전리품을 챙겨서 마을로 출발했다.
마을에 도착한 옥영진 대장군은 모든 천인대장들을 불러들였다. 천인대장들과 부단장이 모이자 옥영진 대장군이 말했다.
“마을을 약탈하고 쓸모없는 노약자들은 모두 죽여 버려라. 그리고 가치가 있는 젊은 계집들이나 어린아이들은 잡아들여 노예로 본국에 이송해라. 만약 계집을 원하는 자가 있다면 가져도 좋다고 일러라.”
그러자 여태까지 아무런 민폐도 끼치지 않고 마을을 지키고 있던 장각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면 이 부족은 완전히 파괴될 것입니다. 아무리 야만족이라 하더라도 그건 좀……”
“자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네만, 이건 본보기로 삼는 거야. 우리들에게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