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0권 5화 – 붉은 전갈 용병단
붉은 전갈 용병단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을 하던 도중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봐, 일어나!”
화들짝 놀란 라이는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새 날은 훤히 밝아 있었다. 급히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곰처럼 커다란 덩치의 소년이 서있는 게 보였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 정도인 듯 했다.
그런데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곤히 자고 있는데 깨워서 미안한데……. 너 어제 저녁밥도 안 먹었잖아. 아침까지 굶으면 안 될 거 같아서 깨웠어. 어제 왔으니까, 오늘 평가를 받아야 할 거 아 냐. 그러니 식욕이 없더라도 먹어두는 게 좋아. 참, 난 로크라고 해.”
허물없는 로크의 말에 라이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잘 부탁해. 나는 라이야. 라이 위너스.”
로크는 이곳에 온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신병이라고 했다. 처음 용병단에 입소한 신병들은 낮에는 훈련소에 가서 훈련을 받고, 밤에는 대기대로 돌아와 잠을 잔다고 했다. 그러다가 일정 수준의 실력이 되었다고 판정을 받으면, 각자의 특기와 실력에 맞춰 자대(自隊)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쩔그렁! 하는 쇠사슬 소리가 들리더니, 신경질적인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새끼들아! 조용히 안 해? 여기에 너희들만 사냐? 개잡놈의 새끼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라이가 황급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험악하게 생긴 사내가 침대에 앉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사내의 발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재빨리 로크가 라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쪽으로 고개 돌리지 마. 저 사람은 노예병이야. 얽히지 않는 게 좋아. 어제도 일부러 시비를 걸어서 신병 하나를 반쯤 죽여놨다구.”
이때 사내의 으르렁거림이 또다시 들려왔다.
“야, 이 새꺄. 뭘 봐? 딴 데로 대가리 안 돌려? 확, 눈깔을 뽑아버릴라.”
라이가 노예 생활을 경험하다 보니, 진짜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은 말이 많지 않고 조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저렇게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온 갖 인상을 써대는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괜한 시비가 붙어봐야 좋을 게 없었기에, 라이는 슬며시 시선을 로크에게로 돌렸다. 그런 라이의 모습에 사내는 실망했는지 또다시 걸쭉한 욕설을 내뱉었 다.
“에잇, 겁쟁이 새끼들! 저런 것들이 좆 달고 태어났다고, 사내새끼 대접을 받고 있다니…….”
쩔그렁, 쩔그렁….
사내는 바닥에 침을 찍 뱉더니, 쇠사슬을 질질 끌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마도 아침을 먹으러 가는 모양이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실내 공기가 훨씬 가벼워졌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 노예병은 어제 실력 테스트를 받았으니까, 아침 식사 후에는 여기를 떠날 거야.”
“그런데 실력 테스트를 받는다는 게 무슨 말이지?”
“너는 여기가 처음이라서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싸울 줄도 모르는 사람을 용병으로 받아들여 줄 리는 없잖아. 이곳 훈련소에서 싸우는 법을 가르친 다음, 테스트 를 해서 일정수준 이상의 실력이 되어야 써준다는 말이야. 그런데 저 사람은 우리들 같은 신참이 아니라, 포로 출신 노예라구. 싸우는 데는 이미 도가 터있다는 말이 지. 인상을 보아 하니 수십 명은 죽인 것 같은데……. 훈련소에서 더 이상 가르칠 것도 없는 사람을 여기에 그냥 놔둘 리 없잖아. 곧 자대에 배치해서 부려먹게 될 거라는 거지.”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라이에게 로크는 자신의 배를 슬슬 문지르며 말했다.
““배고프다. 우리 얼른 아침부터 먹으러 가자.”
아침 식사를 한 라이는 로크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돌아온 로크는 곧바로 낡은 갑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훈련이 시작된다고 하면서 말이 다.
“너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행정과에서 곧 사람이 나올 거야. 그 사람을 따라가서 용병단 입단 절차를 밟으면, 갑옷과 무기 같은 것도 지급해 줄 거야.”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주 난감했을 거야. 정말 고마워.”
라이의 말에 로크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정말이지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순진한 사람이었다.
“히히, 내가 너에게 뭘 해준 게 있다고 고마워 하냐?”
두 사람이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병사 한 명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포로 출신 노예라는 사람을 데려가 버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또 다른 병사 하나가 복도 에 서서 사람들의 이름을 큰 목소리로 호명하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동작 봐라! 빨리빨리 안 뛰어?”
그 와중에 이름을 불린 로크도 밖으로 뛰쳐나갔다. 갑옷을 입은 다른 훈련병들과 함께. 이름을 불린 것은 아니지만 라이는 문 앞까지 로크를 따라 나가 복도 밖을 바라봤다. 복도 앞쪽은 이미 수많은 신병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설마, 올란도가 나를 데리러 오는 것은 아니겠지?”
이때, 병사 한 명이 라이 옆을 지나쳐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병사는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누구 찾으세요?”
“라이라는 사람 못봤냐? 어제 들어왔을 텐데.”
“제가 라이인데요.”
라이의 대답에 병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라이의 아래위를 훑어봤다. 그러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로 물었다.
“허, 이거 참. 네가 정말 150골드짜리 라이 맞냐?”
병사의 말에 기분이 상한 라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가 150골드인지는 모르겠지만, 라이인 것은 맞습니다.”
“이거야원, 10골드만 줘도 충분할 것 같은데 대체 윗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 병사는 라이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를 따라와라.”
“예.”
붉은 전갈 용병단의 규모는 거의 5천에 달했다. 5천 명이라면 정규군으로 쳐도 여단 급에 해당될 정도로 거대한 규모다. 한낱 용병단이 이렇게 커다란 규모로 성장 할 수 있었던 것은 지정학적인 영향이 컸다.
붉은 전갈 용병단이 자리 잡은 곳은 알카사스 제국의 서쪽 경계선으로, 광활한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이곳은 서쪽 대륙과의 무역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엄청난 양 의 무역품들이 오가는 만큼 그것을 노리는 도적떼가 항시 출몰했기에 용병에 대한 수요가 넘쳤다. 그리고 사막을 주 무대로 하는 몬스터들도 득실거렸다. 그야말로 용병단이 성장하는데 있어서는 최적의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이 일대에 둥지를 틀고 있는 용병단들 중에는 붉은 전갈 용병단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는 용병단이 한둘이 아니었다. 전갈성에는 용병단만이 거 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용병들의 월급은 꽤나 후한 편이다. 그런 만큼 그들의 돈을 노리는 장사치들 또한 득실거릴 수밖에 없었다.
술집이나 매춘부처럼 용병 개개인의 주머니를 털어먹으려는 것들부터 시작해서, 용병단에 각종 물품을 대주는 장사치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 다. 전갈성의 거리로 엄청난 사람들이 왁작거리며 오고가는 것을 본 라이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길 잃어버리지 않게, 잘 따라와.”
대부분의 용병단에서는 신입 지원자에 한해 단 한 번 기초적인 보급품을 지급해 준다. 돈이 없어서 갑옷이나 무기 따위를 갖추지 못한 신병이 맨주먹으로 싸우게 할 수는 없기에 취해진 조치였다. 물론, 자신의 장비를 갖추고 있는 용병에게까지 보급품을 지급해 주지는 않는다.
병사가 라이를 데리고 간 곳은 커다란 보급창고였다. 창고 앞에는 작은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꽤 깐깐해 보이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병사는 그 사내에게 뭐라 고 말을 하더니, 무슨 서류인가에 서명을 했다.
그런 다음 라이에게 돌아서서 손짓했다.
“이쪽으로 와.”
병사가 창고 문을 열자, 곰팡이 썩는 것 같은 쾌쾌한 냄새가 안에서 풍겨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서, 너한테 필요한 걸 골라서 가지고 나와라.”
“이 안에 있는 건 아무거나 다 골라도 되는 겁니까?”
“물론이지. 앞으로 네가 쭉 쓸 장비들이니까 잘 골라보도록 해라.”
창고 안으로 들어간 라이는 왜 병사가 따라 들어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공기가 너무 안 좋았던 것이다. 창고 안은 나름대로 정리가 되어있기는 했 다. 정리라는 게 갑옷은 갑옷대로, 투구는 투구대로, 온갖 장비들이 종류별로 수북이 쌓아놓은 것 정도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장비들은 거의 다 낡은데다가 손질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이 오랫동안 써야 할 물건들인 만큼, 라이는 장비들을 고르는데 꽤나 정성을 들였다. 하지만 창고 안쪽 깊숙이까지 뒤져봐도 좋은 물건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 았다. 공기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무거운 장비들을 뒤적이다 보니, 어느새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올랐다.
‘하기야, 노예한테 좋은 것을 줄 리가 없지. 젠장, 괜히 뒤진다고 힘만 썼네.’
라이는 상태가 괜찮은 게 있는지 찾는 것을 포기했다. 이리저리 뒤져보니, 모두들 상태는 거기서 거기인 상황. 그래서 대충 자신의 몸에 맞을만한 것들만 끄집어내 는 것으로 만족했다.
방어구의 선택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적당히 타협할 수밖에 없었지만, 무기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라이는 세심하게 무기들을 살펴봤다. 각종 도 검들부터 시작해서 도끼, 창, 철퇴 등등…….
라이는 그 무기들 중에서 검 종류를 세심히 살펴봤다.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은 검술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선뜻 고르기가 힘들었다. 워낙에 상태가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갑옷이라면 몰라도 무기까지 이 모양이라면 도저히 싸울 수가 없기에, 라이는 일단 창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병사에게 물었다.
“이곳에 있는 거 말고, 다른 무기는 없습니까?”
“용병단에서 무상으로 지급해 주는 무기는 이곳에 있는 게 다야. 좀더 고급품을 가지고 싶다면 네 돈으로 대장간에 가서 구입해라.”
결국 이곳의 무기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말이었다. 라이는 지금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였으니까.
“저, 한 가지 질문드릴 게 있는데요. 우리들이 싸워야 하는 대상은 누굽니까? 산적인가요? 아니면..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은 몬스터들이지.”
몬스터가 상대라면 길고 날렵한 장검보다는, 짧지만 두꺼운 브로드 소드(Broad Sword)와 같은 무기가 유리하다. 몬스터가 휘두르는 두꺼운 몽둥이를 얇은 장검 으로 막았다가는 바로 두 토막이 나버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묵직한 도검은 한 자루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들보다 좀 더 무겁고 두꺼운 검이나 도는 없습니까?”
병사는 기다리기 지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좀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런 건 대장간에 가서 직접 구입해. 모두들 그런 무기를 원하는데, 이런 데서 신병들에게 무상으로 지급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냐. 뭐, 저런 싸구려 검들이야 전투를 한 번만 해도 거의 폐품이 되어 버리지만, 중검(重劍)은 그렇지 않거든.”
“아,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라이가 선택한 무기는 한손으로 휘두를 수 있는 도끼였다. 날은 뭉툭하기 짝이 없어 이걸 가지고 과연 장작이나 제대로 팰 수 있을까 싶긴 했지만, 날의 폭이 넓은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뭉툭한 날의 공격력을 보완해 주는 것은 도끼날 반대편의 뾰족한 부분이었다. 날 부분으로 몬스터의 공격을 막고, 그 반대편의 뾰족한 걸로 찍어버린다면 충분히 사냥이 가능하리라.
예전에 아버지로부터 중장보병(重裝步兵)들 중에는 도끼를 주무기로 쓰는 사람들이 꽤 많다며, 그런 적을 상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거꾸로 적용해 본다면, 그런대로 쓸 만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운이 좋아, 나중에 중검이라도 한 자루 획득하면 더욱 좋은 것이 고 말이다.
보급품을 다 고르자, 병사는 라이를 훈련소로 데리고 갔다.
“따라 들어와라.”
교관들의 사무실로 라이를 데리고 간 병사는, 교관들 중 한 명에게로 라이를 안내했다.
“루베르크 교관님, 이번에 실력 테스트를 받아야 할 신병을 데리고 왔습니다.”
병사의 말에 라이를 힐끔 쳐다본 루베르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설마, 이런 뼈다귀가 150골드짜리야?”
훈련소 교관들은 150골드씩이나 되는 돈을 주고 사오는 노예가 있다는 소문에 모두들 경악했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그렇게 엄청난 거금을 주고 사 온다는 말인가.
‘포로로 잡힌 전쟁 영웅쯤이라도 되나?”
놈의 출신성분이야 어찌되었건, 코앞에 닥친 문제는 누가 그놈의 실력을 평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만약 놈의 성격이 잔인하고 거칠다면, 평가에 임하는 교관은 목숨을 걸어야 하리라. 당연히 교관들 모두가 하기 싫다며 뒤로 내빼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어젯밤에 올란도가 술 한 병을 들고 갑자기 찾아와, 자신보고 평가를 해달라며 정중하게 부탁을 해왔다. 물론 루베르크는 그것을 부탁이 아닌, 협박으 로 받아들였지만.
라이의 삐쩍 마른 모습을 본 루베르크는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미친놈! 이래서 실력이 좀 떨어지더라도, 평가를 좋게 내려달라고 내게 협박을 한 거였군. 허, 이런 놈이 무슨 150골드짜리야. 아마 최소한 130골드 이상은 삥땅 을 쳤겠지. 그래놓고 그게 뽀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좋은 평가를 내려달라며 내게 협박을 해? 젠장! 나중에 들통 나면 나까지 골로 가는 거 아냐?”
순간 루베르크는 갈등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단장에게 달려가 발정난 여우새끼의 비리를 고자질하느냐, 아니면 녀석의 협박에 넘어가 주느냐. 한참을 고민하던 루베르크는 결국 한숨을 푹 내 쉬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발정난 여우에게 협조하기로.
녀석의 성격상 130골드를 혼자 처먹을 리 없는데다가, 왠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단장이 여우놈을 꽤나 총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고자질을 했다가 단장 이 놈을 징죄하지 않고 그냥 봐주고 끝낸다면, 되려 여우놈에게 자신만 박살날 게 아니겠는가. 그놈이 얼마나 뒤끝이 더러운 놈인데…..
루베르크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젠장, 어쩔 수 없지.”
루베르크는 병사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너는 돌아가 봐.”
하지만 병사는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루베르크에게 우물쭈물 말했다.
“실력 테스트가 끝난 다음, 데리고 오라는 행정관님의 명령이 있어서.
“그럼 나중에 일과 끝난 다음에 데리러 와.”
“옛, 교관님.”
루베르크가 병사를 돌려보낸 것은 완전범죄를 위해서였다. 만약 라이의 진짜 실력을 병사가 봐버리면, 자신이 엉터리 평가서를 쓴 게 곧바로 들통이 날 게 아니겠 는가. 그놈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소문이라도 퍼뜨리는 날에는 자신은 끝장이었다.
병사를 돌려보낸 후, 뒤로 돌아서는 그의 시선에 라이가 들고 있는 녹슨 도끼가 보였다.
“호~, 도끼를 들고 있군. 잘 쓰냐?”
“아뇨. 처음입니다.”
라이의 대답에 루베르크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뭐야? 도끼도 다룰 줄 모르는 녀석이, 무기로 도끼를 택했다는 말이냐?”
“예, 저희들이 주로 상대해야 하는 것은 몬스터라면서요? 그렇다면 얄팍한 장검보다는, 도끼가 훨씬 더 좋을 거 같아서 선택했을 뿐입니다.”
그 말에 루베르크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호오, 그런 이유로 도끼를 선택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뭐, 어쨌건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니까.”
중얼거리던 루베르크는 사무실 벽면에 걸려있는 무기들 중에서 방패와 도끼를 꺼냈다. 물론 라이가 들고 있는 것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고급품들이었다. 그 는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따라오너라.”
루베르크는 일단 훈련장으로 나갔다. 그 뒤를 졸졸 따라가는 라이. 훈련장에는 많은 신병들이 훈련을 받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아침이라 서늘했지만, 얼마나 빡세게 훈련을 받는지 그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루베르크는 훈련장 한쪽 구석으로 간 뒤 왼손에 든 방패로 몸을 가리고, 오른손에 든 도끼로 자세를 잡으며 라이에게 말했다.
“한번 공격을 해 보거라.”
“예.”
쉭!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라이의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일격이었다. 검과 도끼는 엄연히 다른 무기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끼로 싸우 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아직 손에 익지 않아서 힘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방패의 경우는 꽤 오랫동안 다루는 기법들을 익혀온 상태였다. 그렇기에 공격은 조금 어설펐지만, 루베르크의 공격은 수월찮게 막아내는 라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라이의 몸이 아직 완벽하게 회복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얼마 싸우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얇고 가벼운 검도 아니고, 묵직한 전투도끼를 들고 설치다 보니 체력 소모가 훨씬 컸던 것이다.
루베르크는 라이가 도끼 말고 다른 무기를 다루는 법을 오랜 세월 수련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 챘다. 도끼 공격은 어설펐지만, 방패를 다루는 기술은 대단히 뛰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놈을 구입하는데 150골드씩이나 줬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여우놈이 삥땅쳤을 거로 예상되는 액수가 조금 줄어들었을 뿐이다.
“흠, 확실히 도끼를 다루는 게 어설프긴 하군. 도끼를 다룰 줄 모른다고 했으니, 내가 도끼술 하나를 가르쳐 주마. 루톤식 도살법(屠殺法)이라고 하는 건데, 가장 많 이 사용되는 기본적인 도끼술들 중 하나지. 기본기이긴 하지만, 이것만 잘 익혀둬도 큰 도움이 될게다.”
예정에도 없던 도끼술을 가르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어제 저녁 여우놈에게 좋은 술 한 병을 얻어먹었다는 죄 때문이었다. 이걸 꼬투리로 녀석에게 술 한 잔을 더 얻어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행정과에서 나온 병사 녀석을 내쫓아버렸으니,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때울 필요도 있었다.
루톤식 도살법은 기본적인 도끼술인 만큼,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공격과 방어 기법만을 다루고 있었다. 물론 초식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루베르크는 루톤식 도살법의 자세들을 라이 앞에서 천천히 시연해서 보여줬다.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고, 그와 동시에 도끼로 적을 찍어버리는 게 동작의 핵심이었다.
루베르크는 루톤식 도살법의 초식들을 2번에 걸쳐 천천히 시연해서 보여준 후, 라이에게 물었다.
“기억하겠냐?”
“어느 정도는…….?”
“한번 해봐라. 틀린 점이 있다면 내가 교정해 주겠다.”
처음 배우는 도끼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의 동작은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아버지로부터 검술을 익혀왔던 그였기에, 도끼술에 대한 적응 또한 빨랐던 것이다.
대충이나마 초식을 외웠다고 판단한 루베르크는 대련을 통해 그 초식들이 어떤 방식으로 실전에 응용되는지를 가르쳐주었다. 처음에는 시간이나 대충 때운다는 생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라이가 무서운 속도로 배워나가자 그는 가르치는 재미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배우는 사람이 잘하면, 가르치는 사람 역시 신이 나는 법이니까.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빨리 흘러갔다. 가르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루베르크는 라이를 대기대 식당으로 보내지 않고, 간부 식당으로 데리고 가 영양가 있는 음식들로 듬뿍 먹였다.
식사가 끝난 후 곧바로 교육이 이어졌다. 식후 바로 대련을 하기는 힘들었기에, 잠시 동안은 이론수업을 했다. 그런 다음 이어진 대련. 시간이 흐를수록 라이의 어 설펐던 도끼술은 급속도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겨우 반나절을 배웠을 뿐인데, 이 정도까지 적응을 해내다니! 루베르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루베르크는 훈련을 중단했다. 그리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봉투 하나를 라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행정관님을 뵈면 이걸 전하도록 해라.”
“예.”
“그리고 이건 네 용병패다.”
루베르크가 라이에게 내민 것은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용병패였다. 용병패 앞쪽에는 붉은 전갈이 새겨져 있었고, 그 뒤쪽에는 6급이라고 써져 있었다. 처음 입단 한 햇병아리가 곧바로 6급 용병패를 받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지만, 라이는 용병패를 힐끗 쳐다본 후 그냥 주머니 속에 쑤셔 넣어버렸다. 6급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감흥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6급 용병패를 주머니 안에 쑤셔 넣는 라이의 모습을 보며 루베르크는 오해했다. 자신에게 겨우 6급밖에 주지 않았다며 라이가 서운해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급히 덧붙였다.
“당분간은 체력을 기르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체력만 받쳐준다면 네 재능으로 4급으로의 승급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게다. 알겠냐?”
“예.”
이번에도 심드렁한 표정이다. 그렇기에 루베르크는 좀 더 인심을 쓰기로 했다.
“혹시 뭐라도 좀 더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너라. 용병의 몸값은 실력이 좌우한다. 어느 정도 배웠다고 자만하거나 게으름 피우지 말고, 기회 가 되는 대로 최대한 배우고 익히도록 해라. 알겠냐?”
“예, 교관님.”
해가 질 때쯤 와서 기다리고 있던 병사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행정관님과의 약속시간이 다 되어서 말입니다.”
“데리고 가라.”
“예, 교관님. 수고하셨습니다.”
병사와 함께 점차 멀어지는 라이의 뒷모습을 보며, 루베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6급 용병패를 줬는데도 전혀 기뻐하지 않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놈이군. 어쨌건 대단한 놈이야. 정말 재능을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는…….”
여기까지 생각하던 루베르크는 아차 싶었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다. 라이의 몸값이 150골드였다는 것을. 그렇다. 단장이 150골드씩이나 되는 거금을 주며 그 를 구입해 온 것은, 현재의 실력이 아니라 장래성을 본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젯밤에 올란도가 보여준 행동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평가를 후하게 내려달라며 좋은 술 한 병을 뇌물로 건네준 것도 모자 라, 그렇게 협박까지 퍼부어댔으니 말이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는 놈이군.”
교관실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루베르크. 하지만 그의 걸음은 얼마 가지도 않아 딱 멈췄다. 여우놈이 왜 그런 짓을 한 것인지, 그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개새끼! 내가 그런 인재도 몰라볼 정도로 멍충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잖아. 지가 아쉬울 때는 친구친구 하며 알랑거리더니, 속으로는 날 그렇게 깔보고 있었 어? 어디 두고 보자! 뿌드드득!”
올란도가 왜 자신에게 술을 가져다가 바치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알지 못했던 루베르크였기에 이렇게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