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1권 1화 – 보물창고 습격 사건
보물창고 습격 사건
삐익— 삐익—.
요란스런 경보음에 엘프 왕국 건설 업무에 지쳐 잠깐 졸고 있던 그랜딜 공작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이게 무슨 소리지?”
하지만 그는 곧이어 경보음이 통신용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신호음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랜딜 공작은 급히 수정구 쪽으로 달려가 손을 대고 통신마법을 걸 었다. 순간 수정구에서 빛이 번쩍하더니, 곧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엘프의 모습이 나타났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 소란이냐?”
무뚝뚝한 그랜딜 공작의 질책에 수정구 속의 엘프는 다급한 어조로 외쳤다.
「드… 아니, 브로마네스님께서 오셨습니다.」
브로마네스가? 브로마네스가 왜 왔단 말인가. 레어 주인인 아르티어스는 이곳에 있지도 않은데…….
“그곳이 어디냐?”
「예, 보물창고입니다.」
순간 그랜딜 공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아니, 그 망할 놈의 레드 드래곤은 왜 갑자기 남의 보물창고에 나타난 거지?”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아르티어스를 만나기 위해 왔다면 응당 자신이 있는 이쪽으로 왔어야 할 게 아닌가. 이곳 레어에 한두 번 온 것도 아니 면서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보물창고로 직행했을까. 설마 도둑질이라도 하러 온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브로마네스는 아르티어스의 절친한 친구였으니까.
“혹시… 내가 보물들을 슬쩍 빼돌린 것을 눈치 채고는 그걸 조사하기 위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상황에 그랜딜 공작의 머릿속은 말도 되지 않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찔리는 구석이 많았던 그랜딜 공작은 마치 얼음물로 온몸을 뒤집어쓴 듯한 아찔함을 경험해야 했다. 그 외의 다른 생각은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던 그랜딜 공작은 곧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그랜딜 공작이 허겁지겁 보물창고를 향해 달려가 보니, 보고 받았던 것과는 달리 창고에는 브로마네스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 돌아왔는지, 레어 주인인 아르 티어스도 함께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그랜딜 공작은 심장이 멈춰 기절할 뻔했다. 설마하며 우려했던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 거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노회한 그랜딜 공작은 사력을 다해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그동안 아수라장 같은 정치판에서 구를 만큼 굴렀던 그가 아니던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머 릿속에서 수많은 변명과 핑계거리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그랜딜 공작이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자신의 죄를 추궁하기 위한 질책과 추궁이 아닌, 브로마네 스와 아르티어스가 서로 다투는 소리였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을 필요조차 없었다. 둘은 꽤 큰 목소리로 다투고 있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랜딜 공작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빌어먹을 드래곤 두 마리가 보물창고로 불시에 들이닥친 건, 보물의 재고 조사 따위가 아니 었던 것이다.
브로마네스는 신경질적인 움직임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금은보화를 닥치는 대로 집어다가 한곳에 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것은 보물의 주 인인 아르티어스의 행동이었다. 다른 드래곤이 쳐들어와서 자신의 보물을 약탈하려고 한다면 가만히 있을 드래곤이 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겠는가. 더군다나 아르 티어스는 노룡이 다 되어 가는 막강한 드래곤인데 말이다.
사생결단을 내야 정상이었지만, 아르티어스의 반응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브로마네스에게 애걸하고 있는 게 아닌가.
“치, 친구, 자네 정말 이러긴가?”
아르티어스의 그런 모습이 불쌍하지도 않은지 브로마네스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이죽거렸다.
“이 새끼는 꼭 지가 아쉬울 때만 친구 타령이야. 오냐, 이럴 거다. 네놈이 날려먹은 동상 값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줄 알아? 생각 같아서는 여기 있는 거 몽땅 다 박 박 긁어 가도 속이 시원하지 않겠지만, 마음 좋은 나니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어. 그러니 고맙게 생각하라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 아르티어스에게 맨날 당하고만 살아온 브로마네스다. 그동안 친구랍시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넘기긴 했지만, 마음속에 쌓인 앙금이 전 혀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런데 오늘 이렇게 통쾌하게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브로마네스는 마치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했다.
“호오, 이런 것도 있었네.”
“끄응!”
“흐흐, 이것도 제법 좋은데?”
“젠장!”
시간이 지날수록 일그러지는 아르티어스의 표정을 보는 게 재미있어 계속 보물을 집어서 가져다 놓다 보니 어느덧 커다란 산더미처럼 수북이 쌓였다.
“치, 친구,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울상을 짓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표정을 보는 게 얼마나 통쾌한지……. 마음 같아서는 광소(狂笑)라도 터뜨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대신 브로마네 스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매몰차게 외쳤다.
“충분하긴 뭐가 충분해! 내가 손해 본 것을 만회하려면 아직 멀었어.”
“친구, 정말 이러긴가?”
“웃기고 있네. 만약 내가 그랬어 봐. 네놈이 어떻게 나왔을지를 말이야. 아마 당장에 나를 잡아 죽이겠다고 달려들었을걸?”
“그, 그럴 리가 있겠나, 친구. 그건 오핼세.”
“흥! 오해는 무슨 오해. 하지만 안심해. 나는 너처럼 그렇게 몰인정한 드래곤은 아니니까. 기왕에 날려 버린 동상, 돌려달라고는 하지 않겠어. 대신 값은 제대로 쳐 줘야 하지 않겠어?”
탐욕에 가득 찬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어디 쓸 만한 게 없나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는 브로마네스를 보며, 그가 이 정도 챙기고 끝낼 리가 없다고 아르티어스 는 확신했다. 속으로는 피눈물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 보니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저 망할 놈을 이 자리에서 당장 때려죽여 버 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대로 멍하니 손을 놓고 있다가는 창고의 보물 절반 이상은 탈탈 털릴 게 분명한 만큼, 일단 놈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게 급선무였다. 이때, 문득 좋은 계책이 떠올랐다.
“젠장! 마음대로 해. 그렇게 내 보물들이 탐나거든, 아예 창고 전체를 다 털어 가지 그러냐? 그래, 가져가는 김에 저것도 가져가 버려!”
신경질적으로 버럭 외치는 아르티어스를 보며 브로마네스는 속으로 찔끔했다.
“내가 너무 심했나??
하지만 그는 곧이어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내가 저런 수법에 어디 한두 번 당했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삐친 척하는 걸 거야.’
둘의 다툼이 벌어졌을 때, 언제나 손해를 보는 쪽은 브로마네스였다. 그의 패인은 한결같았다. 아르티어스보다 조금 더 모질지 못하다는 것. 브로마네스도 그 사실 을 잘 알고 있었다.
호비트들 속담에도 있지 않던가. 똑같은 수법에 세 번 당하면 그건 바보, 천치라고 말이다. 자신이 그런 바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브로마네스는 아르티어스가 아무리 화를 내 봐야 자신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조각상 하나를 집어 들고는 살펴보는 척했다. 하지만 속마음까지 완벽하게 무심할 수 없었던 브로마네스였기에, 그의 눈은 아르티어스의 뒤를 조심스럽게 좇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아르티어스가 창고 벽에 걸 린 커다란 검 한 자루를 신경질적으로 잡아 내리는 것을 보며 흠칫했다.
‘저건 왜?”
하지만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르티어스가 그 검을 자신에게로 획 집어 던졌기 때문이다.
길이가 무려 1.5미터에 달하는 거검(巨劍). 검집과 손잡이를 드워프들이 혼신의 노력을 다해 장식해 놨기에 예술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검이 었다. 그런 검을 상대가 주겠다고 하면 냉큼 받아야 정상이겠지만, 브로마네스는 손을 뻗지 않았다.
거검은 브로마네스의 옆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 산더미처럼 쌓아 둔 보물 속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어느새 브로마네스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신경질을 내는 척하고 있었지만, 약간의 장난기가 어려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 에서는 불길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진심으로 분노한 것이다.
“후회하지 않겠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의 분노에 동조하여 대기가 요동치는 듯했다. 서로의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며 교환했던 검이다. 그걸 되돌려 준다는 말은 곧, 이제 친구 사이를 끝내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브로마네스가 분노했건 말건 아르티어스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더욱 화가 났다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의 어조에는 씁쓸함과 서 글픔이 느껴졌다.
“그 검… 나는 내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건 내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준 검이었으니까.”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붙잡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드래곤들에게 있어서 자신들 일족의 색깔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강한지는 너도 잘 알 거야. 그런 내가 이 머리카락 색깔을 찬란한 금발에서 이런 볼품도 없는 시뻘건 색으로 바꾼 이유가 뭐였는지 너는 벌써 잊어버린 거냐?”
브로마네스가 그것을 잊었을 리 없다. 레드 드래곤이면서도 찬란한 황금빛 머리색을 하고 돌아다니는 드래곤은 그 혼자밖에 없었으니까. 둘은 우정의 상징적인 증
표로써 서로의 머리색을 교환했었다.
“하지만 오늘 보니, 그 친구는 없더군. 내가 그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우정이, 실상은 겨우 동상 하나의 가치도 없는 싸구려였으니 말이 “야.”
착 가라앉은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보던 브로마네스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풀렸다.
챙그랑!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조각상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토해 냈다. 하늘조차 뚫어 버릴 듯했던 그의 분노는 어디로 갔는지, 브로마네스는 곧바로 기어들 어 가는 듯한 풀 죽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 미안하네, 친구. 금은보화가 탐이 났던 건 결코 아니었어. 내가 누군데 친구의 보물을 탐하겠나. 단지 자네가 난처해 하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서 장난을 좀 쳤던 것뿐이라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됐네. 그렇게 억지로 변명할 필요는 없어. 이게 다 친구를 잘못 사귄 내 탓이니까.”
아르티어스는 돌아서서 창고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보물이 좋다면 몽땅 다 가져가라구. 그따위 것 내겐 없어도 상관없으니까 말이야.”
문 쪽으로 힘없이 걸어가는 아르티어스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애잔하게 보였다. 브로마네스는 짙은 죄책감을 느꼈다. 사실, 그놈의 동상이 뭐가 그리 대단하겠는 가. 자신의 창고에 수북이 쌓여 있는 보물들만으로도 마음만 먹는다면 수십, 아니 수백 개라도 만들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브로마네스는 재빨리 아르티어스의 뒤를 쫓아가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일부러 장난기 어린, 그러면서도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사정했다.
“에이, 짜식.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흐흐, 화 풀어. 장난이었다고 했잖아, 장난!”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아르티어스는 브로마네스의 팔을 거칠게 뿌리치며 싸늘하게 소리쳤다.
“집어치워, 새꺄. 빨리 저 보물들이나 챙겨서 꺼져.”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르티어스의 붉은 머리카락 색깔은 금빛으로 변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브로마네스는 아직까지는 용서를 구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허허, 이거 참. 이보게, 친구. 그만 마음 풀게나. 우리가 하루 이틀 우정을 쌓아 온 게 아닌데, 겨우 이깟 일 때문에 깨진다면 말도 안 되지.”
보물들 위로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거검을 향해 브로마네스는 황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검이 둥실 떠오르더니 그의 손으로 날아왔다. 그는 거검을 아르티 어스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애교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둘의 우정의 증표가 바로 이 녀석이 아니겠나. 자네였기에 내가 이 검을 준 것이지, 다른 드래곤이었다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그래도 아르티어스가 전혀 화를 풀 기색을 보이지 않자, 브로마네스는 더욱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가 준 검은 당연히 내 침대 머리맡을 장식하고 있다네. 그것보다 더 내 마음에 드는 예술품은 지금껏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어허, 계속 이러긴가? 자, 받게. 내 사과하겠네. 우린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가 아닌가. 친한 친구 사이에 장난 좀 칠 수 있는 거잖아. 그런데 그게 자네 마음을 그 토록 아프게 했을 줄이야……. 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내 약속하지.”
브로마네스의 계속되는 권유에 아르티어스가 못 이기는 척 손을 뻗어 검을 받았다. 그제야 브로마네스는 환하게 웃으며 아르티어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기분도 풀 겸 오랜만에 술이나 같이 한잔할까?”
그때까지 싸늘한 표정을 풀지 않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브로마네스는 입으로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연신 투덜거렸다.
“에이, 친구라고 하나 있는 게 이런 쫌생이 같은 놈이니.’
물론 아르티어스가 그런 쫌생이는 아니었다. 그저 브로마네스가 멍청하게 속아 넘어간 것뿐이다. 그는 냉정할 수 없었지만, 아르티어스는 필요하다면 완벽하게 냉 혹하게 바뀔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결과가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면에 약간 둔한 브로마네스는 자신이 또다시 아르티어스가 던진 미끼를 물고, 퍼덕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계략이 제대로 먹혀들자 아르티어스는 광소라도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래서는 다 된 밥에 콧물을 빠뜨리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렇기에 그 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그랜딜 공작에게 명령했다.
“술과 음식을 준비하라고 일러라. 난 포도주를, 그리고 내 친구에게는 내가 특별히 아끼는 브랜디를 준비하도록. 알겠느냐?”
평소 브랜디를 술맛도 모르는 놈들이 마시는 싸구려 술로 취급하던 아르티어스였다. 그걸 잘 아는 그랜딜 공작인 만큼, 주인의 명령은 그를 내심 당황스럽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님이 아끼던 브랜디가 있긴 있었나??
순간, 그는 자칫했으면 주인에게 그런 브랜디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는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하지만 그의 오랜 연륜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 을 막아 줬다.
그랜딜 공작은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즉시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인님.”
아르티어스의 기분이 풀릴 기미가 보이자 브로마네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이야~ 드디어 자네 레어도 제법 살 만한 곳으로 바뀌어 가는구먼.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는 듣는 척도 안 하더니, 웬일로 노예를 부릴 생각을 했데?”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둘이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엘프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식탁 위로 음식을 나르고 있는 중이었다. 아르티어스는 그런 엘프들이 눈에 거슬린다는 듯 퉁명스레 명령 했다.
“이제 됐으니 나가 보거라.”
그러자 대부분의 엘프들이 식당 밖으로 나갔고, 두 명의 엘프만이 남아 아르티어스와 브로마네스의 뒤쪽에 다소곳이 섰다.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랜딜 공작은 문 앞쪽에서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 잡았다. 그런데 아르티어스는 뒤를 돌아보며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모두 나가라고 했다!”
“저, 시중은…….?
“필요 없다.”
그러자 그랜딜 공작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이 편하게 식사를 하시도록, 저희가 시중을 드는 게 좋….”
그때 갑자기 브로마네스가 인상을 왈칵 찌푸리며 으르렁거렸다.
“이놈의 자식들이! 노예면 노예답게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친구, 자네 마음이 너무 좋다 보니 이놈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구먼. 어때, 내가 확실히 교육을 시켜 줄 까?”
순간 어마어마한 살기가 브로마네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에 그랜딜 공작은 깜짝 놀라 온몸을 벌벌 떨면서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런 의도는 아니었…….”
“알았으니 그만 나가 봐.”
아르티어스가 끼어들어 손짓으로 나가라고 하자 그랜딜 공작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엘프들을 이끌고 황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랜딜 공작은 시중 을 들 엘프들을 문밖에 대기시켜 놓은 뒤 지시를 내렸다.
“주인님께서 나를 찾으시면 지체 없이 연락하도록 해라.”
“염려 놓으십시오, 공작 전하.”
“참,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주인님에 관한 거라면 하찮게 생각 말고 곧바로 보고를 하도록.”
“옛 명심하겠습니다.”
최근 엘프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랜딜 공작이었기에 작은 정보 하나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대륙 정세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 하는 드래곤의 움직임은 당연히 요주의 대상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주인인 아르티어스가 어디 평범한 드래곤인가. 얼마 전에는 다크라는 검은 머리 호비트를 양아들로 삼아 대륙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는 짓도 서 슴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최대한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랜딜 공작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귀를 쫑긋 세우고 방에서 주고받는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나 들어 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