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1권 4화 – 복수를 위한 유희의 시작

복수를 위한 유희의 시작

알카사스 왕국의 수도 다란스에 도착한 후, 브로마네스가 아르티어스를 데리고 간 곳은 뒷골목에 위치한 허름한 술집이었다. 워낙 구석진 어두운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단골이 아닌 한 찾아오기가 힘들 것처럼 보였다.

“용병단에 대한 정보와 용병 신분증이 필요하다더니… 왜 이리로 데리고 와? 혹시 저기가 도둑길드냐?”

“도둑길드? 흐흐,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좋은 곳이지.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브로마네스는 자신만만하게 앞장서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뒷골목에 위치한 술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실내는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더 군다나 슬쩍 손님들을 쳐다보는 중년의 바텐더는 학자라고 말해도 믿겨질 정도로 중후한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만약 우연히 들어온 사람이라면 바깥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술집의 분위기에 눈이 휘둥그레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묘한 분위기에 당황하기에는 둘의 나이나 경험이 너무 많았다. 그들이 봤을 때는, 이놈이나 저년이나 다 쓰잘데기 없는 호비트일 뿐이었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손님. 자, 이쪽으로…….”

미모의 아가씨가 다가와 그들을 비어 있는 자리로 안내하려 했지만, 브로마네스는 그녀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곧장 바텐더가 있는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갔다.

바텐더는 브로마네스의 우람한 근육질을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브로마네스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브로마네스는 바텐더 앞의 의자에 털썩 앉으며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사이 바텐더가 바뀌었군.”

중년이 다 된 바텐더로서는 그 말이 꽤나 의외였다. 상대는 아무리 많이 봐 줘도 30대 중반 정도. 저놈이 코흘리개 시절인 열 살 때 여기에 와 봤다면 몰라도, 어떻 게 저런 소리를 내뱉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이곳은 저런 머릿속까지 근육으로 꽉 찬 것 같은 용병 나부랭이가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중이떠중이 손님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술을 꽤나 비싸 게 팔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바텐더는 내심을 감추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예전에 오신 적이 있으십니까?”

대답 대신 브로마네스는 주머니에서 낡은 금화貨) 한 개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금화에 새겨진 천사상(像)을 중심으로 십자가가 깊게 파여 있었 다. 누군가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서 의도적으로 흠집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금화를 본 순간, 중년 바텐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최고 등급인 VIP고객들에게만 지급되는 금화였기 때문이다. 이곳이 부유한 알카사스 왕국의 수도였 지만, 금화를 지급받은 인물의 수는 80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객들의 신상은 자신이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고객인가?”

중년 바텐더는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시 물었다.

“누구의 소개를 받고 오셨습니까?”

“푸른 잔 속으로 사라지는 실리에르.”

그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바텐더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놀라 당황한 자신의 얼굴을 사내에게 보이지 않도록.

잠시 후, 고개를 든 바텐더는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이름이로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텐더는 여종업원을 한 명 불러 지시했다.

“이 손님들을 특실로 안내해 드려.”

“이쪽으로 오십시오, 손님.”

자리에서 일어난 브로마네스가 몸을 돌려 특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그 순간, 바텐더는 사내의 등에 메여 있는 검을 살펴볼 수 있었다. 순간, 그의 얼굴이 놀라 움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아주 단순한 디자인으로 제작되기는 했지만, 이 바닥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저 검은 엄청난 보검이었다. 그것도 드워프가 직접 세 공했음 직한…..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저런 보검을 지니고 있지??”

최고 등급인 VIP고객인 만큼 보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부러 저렇게 공을 들여 싸구려처럼 보이도록 제작하지는 않는다.

사내가 그런 검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그의 경각심을 더욱 자극시켰다.

손님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그는 슬쩍 홀 주변을 둘러본 뒤, 카운터 위에 놓여 있는 인형 모양의 장식품들을 재빨리 살펴봤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장 식품에 박혀 있는 7개의 유리조각들은 술집 주변에 설치되어 있는 경보(警報) 마법과 연동되어 있었다. 만약 침입자가 있다면 유리조각들이 붉은빛으로 빛나게 되 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우려와는 달리, 그 어떤 이상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이렇듯 예민하게 반응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손님의 등급에 따라 주어지는 표식은 금화, 은화, 동화로 총 세 가지다. 그리고 표식을 보이며 접선할 때의 암 호는 1년마다 바뀌었다. 따라서 바텐더는 손님이 제시하는 암호만 들어도 그 손님이 언제 가입했는지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뜻밖의 일을 당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손님이 제시한 암호는 253년 전에 발행된 암호였던 것이다. 혹시 자신이 암호를 잘못 들은 게 아닌지 몇 번을 떠올려 봤지만 분명했다. 만약 수인족과 같은 고객들이 어쩌다 이곳을 찾는 경우가 없었더라면, 자신도 몇백 년 전의 암호를 외우려 개 고생을 하지 않았으리라.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야?”

표식은 절대로 상속되지가 않는다. 만약 자신의 후계자가 있어서 그가 새롭게 조직에 접선하게 된다면, 기존의 표식은 회수되고 새로운 표식을 발급하게 되어 있 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등급과 함께 새로운 암호를 지정해 주게 된다.

그런 이유로 바텐더는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만약 손님이 누군가의 대를 이어 표식을 물려받은 후계자였다면, 분명 어리숙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자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테니까.

만약 상대가 엘프와 같이 수명이 긴 아인족(亞人)이었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사람은 분명 인간이었다. 그것도 마법사나 신관이 아닌 전사(戰士).

물론 고도로 수련을 한 검객들의 경우 노화를 억누르는 신통한 재주를 부리기도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253년씩이나 되는 세월 동안 새파란 쌍판때기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했다.

바텐더는 점원 하나를 불러 자신을 대신하도록 한 다음, 주위를 슬쩍 살핀 뒤 지하로 내려갔다. 접객 담당인 레베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일단 레베카의 얘기를 들어 보고 결정하기로 하자. 만약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게 포착되면, 그때 없애 버려도 늦지 않을 테니까.’

사내들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설혹 그 덩치 좋은 사내가 전설에 회자되는 영웅쯤 되는 실력자라고 해도 접객실에 비밀리에 설치되어 있는 함정이 발동되면 살아서 나갈 수는 없을 테니까.

조직이 창설된 지 이미 수백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이렇게 유사시를 대비한 기반 시설들을 잘 갖춰 놓은 덕분이 었다.

여종업원은 두 사람을 데리고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지하에 위치한 어느 방 앞이었다.

“이곳입니다.”

문이 열리자, 허름한 술집의 지하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실내가 드러났다. 여종업원은 문을 연 다음,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함정 따 위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줘 손님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한 발자국 정도 들어간 후 멈춰 서서, 손짓으로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입니다, 손님.”

접객실로 손님들을 안내한 다음에야, 여종업원은 이들이 어쩌면 범상치 않은 신분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화려한 실내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정에는 그 어떤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경험해 본 대부분의 손님들은 실내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그림이나 예술 품에 시선을 빼앗기곤 했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담당자께서 오실 겁니다.”

손님들에게 의자를 권한 후, 그녀는 접객실 옆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손님들에게 권할 차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향긋한 차가 나왔지만, 담당자라는 사람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얼마나 더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거지?”

붉은 머리의 사내가 입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상대가 여자인 줄만 알았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도 머리카락이지만, 여자라고 해도 속을 만큼 아름다운 미모 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음성은 분명 까칠한 남자의 것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봐. 곧 오겠지, 뭐.”

여성적으로 생긴 것과는 달리 붉은 머리 사내 쪽이 노랑머리 사내에 비해 인내심이 부족한 모양이다.

이때, 반대편 문이 열리며 미모의 중년여인이 들어왔다. 그녀가 바로 여종업원이 말한 담당자인 모양이다. 그녀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레베카라고 해요.”

인사를 건네는 그녀에게 노랑머리 사내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현재 왕국 내에 있는 용병단들 중에서 그 전력상 상위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용병단들의 목록과 구체적인 전력(戰力)까지.”

미모의 여성이 들어와서 나긋하게 인사를 건넴에도 불구하고, 인사조차 받아 주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노랑머리 사내. 그런 사내의 태도가 레베카로서

는 뜻밖이었다. 더군다나 나이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젊은 놈이 초면에 반말 짓거리라니…….

하지만 레베카는 참았다. 상대는 손님이다. 그것도 최고 등급의 금화를 제시한. 더군다나 신분도 좀 수상쩍은 인물이었다. 그런 참에 상대방이 내뱉는 저런 오만방 자한 태도는 그의 신분을 유추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어쩌면 하고 있는 겉모습과 달리 꽤 높은 신분을 지닌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사내가 의뢰한 정보의 내용이었다. 이곳은 최고 수준의 정보들만을 취급하는 곳이다. 당연히 한번 의뢰를 하려면 엄청난 액수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런데 도둑길드에만 가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싸구려 정보를 이곳까지 찾아와서 의뢰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확실히 지부장님의 말씀대로 뭔가 꿍꿍이가 있어 찾아온 놈들이거나, 아니면 여기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기어 들어온 애송이들이거나 둘 중 하나 겠군.’

하지만 이어진 요청은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 용병단 단장의 성격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원하는데……. 언제쯤 준비해 줄 수 있지?”

아무리 방대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해도 개개인의 성격까지 파악하고 있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망설이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들러 주시면, 그때까지 준비해 놓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 두 사람의 용병패와 용병수첩을 마련해 줘.’

“용병 등급은 몇 급 정도로 해 드릴까요?”

“당연히 특급이지.”

이때,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만 있던 붉은 머리 사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특급은 무슨 얼어 죽을 특급. 2급 정도로 해.”

레베카도 붉은 머리의 사내를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아름다운 미모에 갑작스럽게 까칠한 사내의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얼마나 당황했는지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헤벌리고 바라봄에도 불구하고, 둘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말다툼을 벌였다.

“2급이라니? 내 체면이 있지… 어떻게 날 2급 따위 용병으로…….”

퍽!

“쿠엑!”

“이 녀석이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붉은 머리 사내는 주먹 한 방으로 가볍게 노랑머리 사내를 제압한 뒤 레베카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우리 둘 다 2급으로 해.”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하실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사용기간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기에…….”

그녀의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한 며칠 사용하고 버릴 신분증명서와 몇 달, 혹은 몇 년간 사용할 신분증명서의 정밀도는 천지 차이다. 며칠 사용하고 버릴 것은 죽은 시체에서 슬쩍한 것을 사용하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장기간 사용할 것은 얘기가 다르다. 신원조회를 아무리 꼼꼼하게 한다고 해도 헛점이 드러나지 않도록 모든 것을 철저하게 짜 맞춰야 했다. 사용자의 외모 는 물론이고, 말투나 지나간 행적까지도……. 그런 만큼 장기간 사용할 신분증명서일수록 그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비싸지는 게 당연했다.

붉은 머리 사내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노랑머리 사내는 머리통을 부여잡고서 줄기차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저 녀석은 2급이라도 상관없지만, 난 무조건 특급으로 해!”

레베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정밀도의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곳은 왕국 전체를 뒤진다고 해도 자신들 외에는 찾을 수가 없을 테 니까.

“특급으로 준비하려면 최소한 2주일은 기다리셔야…….?”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붉은 머리 사내가 인상을 왈칵 찡그리며 소리쳤다. 곱상하게 생긴 얼굴과 달리 성격은 엄청나게 급한 모양이었다.

“뭐야! 그럼 2주일이나 여기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라고?”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노랑머리 사내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어허,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완벽한 게 좋잖아?”

“완벽한 거 좋아하고 있네.”

붉은 머리 사내는 시선을 획 레베카에게로 돌리며 물었다.

“마법사 용병 신분증으로 대충 만들어 놓은 거 없어?”

레베카는 난감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대충이라고 하시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용병단 정문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면 돼.”

그 말에 레베카는 충격을 받았다. 그런 싸구려를 여기서 구하는 멍충이가 있을 줄이야. 하지만 그녀는 급히 표정을 감추며 공손하게 말했다.

“그것조차도 내일은 되어야 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 따로 준비해 놓은 것은 없어?”

“여러 직업군의 신분증을 비치해 두고 있긴 합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용병용은 미처 준비해 두지 못했습니다. 지금껏 그런 걸 찾으신 손님은 단 한 분도 없으셨으 “니까요.”

레베카는 자신들 쪽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피력하기 위해 그따위 싸구려 용병 신분증을 찾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는 아주 눈에 띄는 직업이다. 그런데도 굳이 신분을 위장해야 한다면, 마법사일 때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적게 받는 곳에 침입할 때 뿐이다. 즉, 마법사들이 많이 들락거리는 마법사 길드라든지, 연구소와 같은..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마법사로 침투하기에 가장 부적합한 곳이 바로 용병단이다. 용병단 내의 마법사 수가 워낙 극소수이다 보니, 어떻게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때문이다. 용병들 사이에 끼어들어 흔적 없이 묻혀 지내려면, 마법사보다는 검사(劍)계열의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었다.

“젠장! 없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내일 올 테니까 모두 다 준비해 둬.”

“내일? 친구, 이 아가씨는 2주일 후에 오라고 했네만…….?

노랑머리 사내가 끼어들자, 붉은 머리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2주일씩이나 어떻게 기다리고 있냐?”

“친구, 기다리는 게 짜증난다는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게 좋지 않겠나.”

그러자 붉은 머리 사내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확실한거 좋아하네. 이런 일 한두 번 하냐? 신분증 따위는 발가락으로 만든 거라도 상관없어! 왜 중요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2주일씩이나 시간을 낭비해.” “하지만… 그렇다면 여기에 나 혼자 2주일씩이나 있으라는 말인가, 친구?”

“그게 싫다면 나하고 함께 움직이든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노랑머리 사내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에이, 그래도 기왕에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마음대로 해.”

붉은 머리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획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내일 다시 올 테니, 확실히 준비해 놓도록.”

“알겠습니다, 손님.”

사내들과 대화하면서 레베카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의뢰를 함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액수를 지불해야 하는지부터 물었었다. 그들 이 요구하는 정보료가 그만큼 비쌌기 때문이다. 물론 최상위급 고객들이야 그깟 돈에 그리 연연하지도 않는 게 사실이긴 했지만.

레베카는 환하게 웃으며 정보 이용료 가격을 말했다. 슬쩍 찔러보는 것인 만큼 바가지를 듬뿍 씌워서.

“금액은 모두 합해서 650골드입니다.”

650골드라는 거액을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내는 얼굴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온 손님들의 대부분은 정보 이용료가 너무 비쌈에 경악을 금치 못 하곤 했었다. 그런데도 두 사내는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평소보다 2배나 되는 금액을 불렀는데도 말이다.

레베카는 내친김에 한 번 더 슬쩍 찔러봤다.

“관례상 절반은 선금(先金)으로 주셔야겠는데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노랑머리 사내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묵직해 보이는 가죽주머니를 하나 끄집어내 그녀 앞에 던졌다. 그 어떤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 고, 거액을 태연히 지불하는 사내를 보며 레베카가 오히려 기가 질려 버렸다.

“안녕히 가십시오, 손님.”

바텐더는 친절을 가장해서 두 사내를 문밖에까지 배웅했다. 그러면서 슬쩍 주위를 살펴봤지만, 그 어떤 이상 징후도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조직원 몇을 시켜 벌써 주위를 샅샅이 훑어보게 한 뒤였다.

“이상하네……. 내가 잘못 짚었나?”

바텐더는 자리를 다른 점원에게 맡긴 후, 다시금 레베카를 만나러 지하로 내려갔다. 사내들이 뭘 요구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바텐더의 질문에, 레베카는 방금 전에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자신이 사내들에게서 받은 느낌을 말했다. 253년 전의 암호만 아니라면, 특급에 해당하는 분위기의 손님들이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점도 많았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싸구려 의뢰들 때문이다. 특히 마법사용 용병패와 용병수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하기 힘들 었다. 위험한 곳만 골라서 쫓아다니게 되는 게 용병 일이다. 그런 만큼 전쟁터만 잠깐 뒤져도 용병패나 용병수첩 따위는 몇 수레를 가득 채울 만큼 흔해 빠진 게 사실이다.

“붉은 머리 사내가 말한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이런 일 한두 번 하냐. 신분증 따위는 어떤 걸 가지고 있어도 상관없어.”

그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거든요. 저급한 신분증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잖아요. 아무리 용병단에 입단한 후, 며칠 내로 일을 끝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저급한 신분증으로는 할 수 있는 게…….. 그녀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적군의 시체까지 뒤져 귀중품을 약탈하는 게 당연시되는 세상인 만큼, 신입 용병이 들어왔을 때 그의 신분 확인은 필수였다. 때문에 아무리 경험이 많고 실력이 뛰 어난 용병이 입단했다 해도, 처음에는 중요한 임무를 맡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병단에서는 신입 용병이 들어오면 일단 비중이 낮은 일을 시키며, 그 기간 동안 용병길드에 의뢰해 상대의 신분을 검증한다. 혹시 신분을 속이고 입단한 것은 아닌지 철저히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검증을 통과한 후에야 제대로 된 동료로 받아들이게 된다. 능력이 있다면 높은 직책, 중요한 임무, 그리고 용병단 내의 고위급 간부들과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붉은 머리 사내는 최하 등급의 신분증을 원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이다. 가뜩이나 눈에 띄는 마법사용의 용병패. 그것을 가지고 며 칠 내로 해치울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그것도 도둑길드에서 저렴하게 구입해도 되는 것을 가지고, 그 수십 배나 많은 액수를 지불하면서까지 여기서 구입해서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아.”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바텐더는 눈살을 찌푸리며 지하 은밀한 곳에 위치한 작은 밀실로 들어갔다. 정기 연락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단 상부에 보고를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급히 보고 드릴 게 있어서 연락을 넣었습니다.”

바텐더는 상관에게 방금 전에 있었던 이해할 수 없는 의뢰 내용과 손님들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했다. 얘기를 다 들은 상관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뭔가 생각 하다가 갑자기 수정구 위쪽으로 손을 쓱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수정구 안에는 상관 외에 또 다른 한 사람의 영상이 더 나타났다. 탐스러운 금발을 길게 기른, 조각 상처럼 잘생긴 외모의 근육질 사내.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바텐더는 흥분해서 외쳤다.

“바, 바로 그자가 틀림없습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썹조차 까딱 안 하던 상관의 얼굴색이 순간 노랗게 변했다.

「이자가 틀림없나?」

“예, 맞습니다.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틀림없다면 그가 원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처리해 주도록 하게.」

상관의 지시에 바텐더는 의아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예? 그렇게 중요한 인물입니까?”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말게. 자네 레벨로는 그 사내의 정보에 접근하는 게 허락되지 않으니까 말일세.」

상관의 매몰찬 대답에 바텐더의 얼굴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지부장씩이나 되는 자신조차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정보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 알카사스의 왕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밀스런 일들에 대한 접근 권한까지 다 가지고 있는 자신인데 말이다.

‘코린트나 크루마 제국과 같은 초강대국의 황족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뭐, 알려 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게 될 테니까.?

정보에 대한 다란스 지부장의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상관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밑바닥에 있을 때, 그의 소질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직접 키우다시피 한 녀석 이었으니까. 그런 근성의 소유자가 저렇게 간단하게 물러설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입가에 미묘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지 않은가.

「벌써 아이들을 붙였군.」

“……”

지부장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은 자신의 짐작이 옳다고 확신했다.

「뒤를 밟으라고 내보낸 조직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지금 당장!」

상관의 명령에 지부장은 마지못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명령대로 불러들이기는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은밀하게 뒤를 쫓으라 했기에 다음 정기 연락 시간은 되어야…….”

상관은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한 눈치였다.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마치 누군가 엿듣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상관은 긴장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수정구 쪽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상관이 특급 정보를 털어놓으려 한다는 걸 눈치 챈 지부장 역시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사내는 드래곤이다. 금발을 길게 기른 것으로 보아, 아마 골드 드래곤이겠지.」

얘기를 듣던 지부장의 얼굴에 경악감이 떠올랐다. 상관은 그런 지부장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드래곤은 몇 번인가 우리와 거래를 했었지. 그리고 그때도 자네처럼 그의 신분에 대해 과도한 호기심을 드러낸 지부장이 있었네. 그 결과가 어땠는지 아나?」

말을 하던 상관의 얼굴에는 어느새 짙은 공포심이 어려 있었다. 그의 얼굴만 봐도 결과가 어땠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지부장은 갑작스런 한기에 온몸

이 부들부들 떨려 오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명심해라. 드래곤을 상대로 섣부른 호기심은 금물이다. 그리고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도 마라. 드래곤의 분노는 공포 그 자체니까.」

“며…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