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2권 11화 – 이번에는 반역자?
이번에는 반역자?
그래도 첫날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때까지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튼튼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놀 떼가 기습이라도 할 새라 뜬눈으로 밤을 새운 후부터는 얘 기가 달라졌다.
무엇보다 짠 육포를 우걱우걱 먹고 난 뒤 배가 아프다며 근처 숲 속으로 들어간 소피아 수녀가 무섭다고 라이에게 근처에 있으라 신신당부한 뒤부터다. 당시 숲 속 에서 들려오던 요란한 굉음과 함께 요상한 냄새까지.
그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여사제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걸쭉하게 뭔가를 배설한 이후부터는 소피아의 행동과 말이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소피아 수녀는 툭 하면 다리 아파, 배고파, 목말라…….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성직자라면서 인내심이라고는 말라 비틀어진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만약 라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소피아의 투정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 줬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녀는 아름다웠고, 고귀한 성직자의 신분이었으니까. 하지 만 라이는 그 누구보다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식량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도망을 치다 보니 지금은 배고픔에 지쳐 자칫 아사할 지경이었던 것 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소피아 수녀가 계속 힘들다, 배고프다면서 투정을 부리니 라이의 그녀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깨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와, 정말 양심도 없네. 어떻게 내 육포의 대부분을 뺏어 먹은 주제에 배고프다는 말이 나와? 그리고 물은.. 물도 자기가 다 마셨잖아.’
아주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었던 것이 겨우 하루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라이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소피아의 투정은 심했다. 하지만 이건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었 다. 리치몬드 일행과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파티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맡은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 내고 있었으니까.
그녀로 하여금 이 정도 역경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만든 건 순전히 그동안 같이했던 파티원들 탓이었다. 신전을 나온 이래, 그녀는 지금까지 아쉬운 것 하나 없이 생활해 왔었다. 자신이 결정하거나 생각한 것도 없다. 그렇기에 오랜 세월 모험을 해 왔지만, 정작 그녀가 알고 있는 지식은 극히 적었다. 그리고 할 줄 아는 일 도 거의 없었다.
그 누가 가녀리고 인형처럼 아름다운 수녀에게 감히 일을 시키겠는가. 그저 귀한 보석을 대하듯 아끼고 또 아끼다가 필요할 때 신성마법 한 번 받는 것만으로도 모 두들 감사히 여겼다. 그리고 그런 동료들의 태도가 그녀를 뼛속까지 철없는 소녀로 만들어 놨던 것이리라.
그리고 남자라 느껴지지 않는 라이의 모습에 그동안 성직자로서 지켜 왔던 가면이 벗겨진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라이로 하여금 여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 만큼 끔찍한 것이었지만.
‘도저히 이렇게는 못살겠어.’
한참 동안을 고민하던 라이는 결국 마음을 굳혔다. 다음 날 아침에 몰래 혼자 떠나기로. 산속에 홀로 남겨진 소피아 수녀가 어떻게 될지 볼 보듯 뻔했지만, 그는 애 써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수녀보다 자신이 먼저 죽게 생겼으니까.
‘그래, 그것만이 내가 살길이야.’
““빨리 걸으시죠, 수녀님. 어제는 그럭저럭 뱃속에 들어온 게 있어서 놀들이 사냥을 나오지 않았는지 몰라도, 오늘은 어떨지 모른단 말입니다.”
“알아! 지금 최대한 빨리 걷고 있잖아. 헉헉……..
거친 숨소리, 그리고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만 봐도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라이는 더 이상 소피아를 채근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소피아가 헐떡거리며 물었다.
“혹시 물 남은 거 없어?”
라이는 짜증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수녀님이 다 드셨잖아요.”
“아앙, 나 목말라.”
“좀 참으십쇼. 서둘러 걸으시면 오늘 저녁때쯤에는 개울가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요.”
어르고 달래며 걸어가고 있긴 했지만 생각보다 별로 속도가 나지는 않았다. 이런 상태로는 내일 아침은 되어야 개울가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이때 라이 의 눈에 토끼 한 마리가 보였다. 라이는 재빨리 소피아를 쳐다봤다. 다행히 소피아 수녀는 아직 토끼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토끼를 발견했다는 걸 라이가 소피아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사실 점심때쯤에도 토끼를 한 마리 봤었다. 크고, 통통하고, 맛있어 보이는 토끼를. 라이는 즉시 소피아에게 그 사실을 알렸었다.
“쉿! 저기 토끼가 있어요.”
토끼를 잡게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알려 줬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소피아 수녀의 반응은 라이의 예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와아! 귀여워!”
지쳐서 더 이상 못 걷겠다며 징징거리던 그녀가 갑자기 토끼를 껴안겠다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팔짝팔짝 뛰어갈 줄이야 라이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토끼는 다 리야 날 살려라 하면서 도망쳐 버렸고, 라이는 기가 막혀 미칠 지경이 되어 버렸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소피아는 라이가 왜 화가 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왜…, 왜 그러는 거야?”
“몰라서 물으십니까? 토끼를 잡아야 먹을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저렇게 귀여운 토끼를? 안 돼! 잡지마. 난 그렇게는 못해.”
아직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된 듯 어이없는 대답을 하는 소피아의 말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라이의 짜증이 드디어 폭발했다.
“그러면 배가 고프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던가요!”
라이가 언성을 높인 후에야 소피아 수녀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 미안해. 나 때문에 화났어?”
소피아 수녀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애처롭게 말하면 라이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소피아의 진실 된 모습을 라이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토끼를 잡 아서 구워 놓으면 한 조각이라도 더 먹겠다고 군침을 줄줄 흘릴 것이라는 것을.
“에이, 가증스러운 년.’
라이는 욕설을 애써 속으로 삼킬 뿐, 차마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어떻게 저 애처로운 얼굴에 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마왕이나 변태가 아니고서야……. 살그머니 소피아 수녀의 눈치를 살피던 라이는 재빨리 화살통에서 화살을 뽑아 활시위에 걸었다. 시위를 끝까지 당겼다가 놓자, 퓨웅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커다란 화살. 이렇게 큰 화살을 고작 토끼 한 마리 잡겠다고 쏘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할 뿐이다.
퍽!
다행히도 화살은 토끼의 머리를 단박에 꿰뚫어 버렸다. 소피아 수녀는 그때까지도 라이가 화살을 왜 쐈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왜 화살을 쏜 거야? 혹시 몬스터라도…….”
“아뇨. 수녀님께서 굉장히 귀여워하시는 토끼라는 놈을 잡기 위해서죠.”
“어,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애를…….”
라이가 죽은 토끼를 들고 오는 것을 보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던 소피아는 갑자기 두 손을 모아 웅얼거리며 뭔가 기도를 올렸다.
“먹고 살자니 어쩔 수 있습니까. 그런데 수녀님께서는 토끼 고기 드셔 본 적 없으십니까?”
“먹어는 봤지만…, 이렇게 죽어 있는 건 본 적이 없어.”
소피아는 쪼그리고 앉아 토끼털을 손으로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정말 부드럽다…….”
“필요하시면 가죽을 벗겨 드릴까요?”
벗겨 준다는 말에 소피아의 얼굴이 흠칫 굳는다. 그녀는 토끼에게서 재빨리 손을 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가죽도 벗기는 거야?”
“아뇨. 통째로 구워 버릴 거예요. 가죽 벗기기도 귀찮은 데다가, 잘 구워 놓으면 맛있으니까요.”
아직 해가 지려면 꽤 여유가 있었지만, 라이는 이쯤에서 자리를 잡고 야숙을 하기로 했다.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서 야숙하기로 하죠.”
주변에서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워다 불을 피울 때도 소피아 수녀는 옆에 쭈그리고 앉아 구경만 했다. 라이는 으레 그렇거니 하며 수녀에게는 일을 시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모닥불이 기세 좋게 타오르기 시작하자, 라이는 토끼를 집어 들었다.
“그거 정말 먹을 거야?”
“당연하죠.”
토끼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자 특유의 구린내가 진동을 한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소피아는 코를 막고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난 안 먹어. 그거 절대로 안 먹을 거야.”
고기가 다 구워지면 태도가 바뀔 것을 잘 알고 있는 라이로서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예, 예. 그러시든가요.”
“내가 두 번 다시 사제하고 여행을 하면 사람이…….?”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건 수녀가 걸어 줬던 신성마법이 가져왔던 그 무시무시한 살상력! 아마 그것 때문에 리치몬드가 소피아 수녀를 데리고 다녔던 것이겠지. 적당히 그녀의 비위를 맞춰 주면서.
“맞아. 소피아가 문제였던 거야. 다른 여자…, 아니 남자 사제는 괜찮겠지.’
더 이상 여자 사제는 꼴도 보기 싫은 라이였다.
토끼를 통째로 기다란 나뭇가지에 꿰어 불 위에 올려 털부터 태웠다. 보드랍던 토끼털이 타오르며 노린내를 풍기던 것도 잠시, 곧이어 맨들맨들한 토끼 가죽만이 남았다. 라이는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돌려 고기가 타지 않고 골고루 익게 만들었다.
귀엽던 토끼가 점차 고깃덩이로 화해 가는 것을 소피아는 불만 가득한 눈길로 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소한 냄새가 풍기자 그녀의 표정이 조 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뱃속의 아우성을.
고기 표면에서 기름이 부글부글 끓으며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소한 냄새는 더욱 짙게 풍겨 나왔다. 라이는 고기에서 눈을 떼지 않고 타지 않게 계속 나뭇가지를 돌렸다.
이때, 갑자기 뒤에서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그녀는 라이의 바로 뒤에 와 있었다. 노릿하게 구워지는 토끼 고기 냄새의 유혹을 참지 못했던 것이리 라.
“이제 다 익은 거 아냐?”
“좀 전에 이 고기는 안 드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순간 소피아 수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잘못을 모른 척할 정도로 그녀의 심성이 삐뚤어진 것은 아니다. 뭐니 뭐니 해도 신 을 섬기는 사제였으니까. 그녀는 솔직히 사과했다.
“그런 말 해서 정말 미안해. 이렇게 맛있게 바뀔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그러시겠죠.”
이 상황에서 소피아 수녀를 질책해 봐야 뭐 하겠나. 라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를 내줬다.
“자, 이쪽으로 앉으세요.”
“이제 다 익은 거 아냐?”
“속까지 다 익으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합니다.”
소피아는 황홀한 듯한 표정으로 냄새를 맡더니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날 줄이야.. 라이는 요리 솜씨가 정말 대단한 거 같아.”
“과찬이십니다. 그냥 내장 꺼내서 구운 것밖에 없는데요.”
한참을 더 소피아의 애를 태운 후에야 라이는 고기를 불 밖으로 꺼냈다.
“이제 대충 익은 것 같네요.”
라이는 토끼 뒷다리 하나를 뜯어 소피아에게 건네줬다.
“고마워.”
생긋 미소 지으며 고기를 덥석 받아 드는 소피아. 겉모습만 봤을 때는 정말 천사 같았다. 라이는 사람의 겉과 속이 이토록 다르다는 것에 신비함마저 느꼈다. 어제 까지만 해도 흠모의 대상이었던 아름답던 수녀가 이제는 젠장녀와 민폐녀를 넘어 웬수덩어리로 바뀔 줄이야.
‘젠장, 그래도 쓸데가 한 가지는 있네. 눈이 즐겁다는 거. 그래, 많이 드십쇼. 이게 제가 차려 드리는 마지막 식사니까요.’
이번에는 자신이 먹기 위해 토끼의 다른 쪽 다리를 붙잡았을 때였다. 어디선가 머리털이 쭈삣 설 것만 같은 매서운 파공성이 들려왔다. 라이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 는 찰나, 화살 하나가 그와 소피아 사이를 지나가 나무에 푹 하고 박혔다.
‘헉! 언제??
토끼를 굽는 것에 너무 정신을 판 것을 후회하며 라이는 급히 일어섰다. 허리에 꽂아 둔 도끼를 뽑으려는 순간, 싸늘한 경고성이 들려왔다.
“꼼짝 마!”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괴한은 둘. 그중 뒤쪽에 서 있는 사내가 화살을 쏜 것이었다. 궁수는 어느새 새로운 화살의 장전을 끝내 버린 상태. 그 재빠른 속도에 라이는 그의 궁술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더군다나 궁수가 쓰고 있는 가죽투구를 보자 라이의 경계심은 더욱 높아졌다. 용병대 내에서 저런 가죽투구를 쓰고 있었던 건 모라이어스와 같은 레인저들뿐이었 다.
레인저들이 강철투구 위에 가죽을 한 겹 덧씌워 놓은 형태의 투구를 애용하는 이유는, 수풀 사이를 통과할 때 나뭇가지가 투구에 부딪쳐도 소리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의외의 괴한들, 그런데 산적이라고 보기에는 실력이 너무 뛰어나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을 통해 라이는 한 가지 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궁수를 너무 믿고 있는 탓인지 앞쪽에 서 있는 중년 사내가 아직 검조차
뽑지 않고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검뿐만이 아니다. 투구조차 쓰지 않고 있다.
아마 50은 되고도 남았으리라. 중년 사내의 나이가 많다는 점이 더욱 라이를 고무시켰다. 중년 사내의 순해 보이는 인상 탓에 라이는 그를 은연중에 만만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는 중년 사내와 자신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거리가 조금 멀었다. 중년 사내 혼자라면 충분히 해치울 수 있겠지만, 궁수까지 상대해야 하는 걸 감안한다면 무리였다. 지금은 항복하는 척하면서 다음 기회를 엿보는 게 나으리라.
생각을 정하자마자 라이는 재빨리 두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반항할 생각이 없다는 표시였다.
“저희들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제 동굴을 탐험하다가 놀 떼를 만나 가진 걸 몽땅 다 날려 버렸거든요.”
라이의 말에 중년 사내가 빙긋 미소 지었다. 옆집 아저씨처럼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투는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놀? 그런 삼류 몬스터에 쫓겨 짐을 몽땅 놔두고 도망쳤다고? 그렇게 형편없는 놈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한두 마리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우리를 습격한 건 거의 삼백 마리가….”
소피아 수녀가 그 상황에 대해 뭐라고 거들어 줄까 싶어 옆을 힐끗 바라본 라이는 기가 막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소피아 수녀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모닥 불 근처에 퍼질러 앉아 토끼 고기를 뜯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여자였다.
“이런 떠그랄! 저런 년한테 잠시라도 기대를 한 내가 등신이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니 중년 사내의 뒤에 서 있는 궁수와 눈이 마주쳤다. 중년 사내와 달리 궁수의 눈매는 정말 매섭기 짝이 없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눈빛이다.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좀 더 높게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 넘어 보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중년 사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식사 중에 미안하네만, 우리는 지금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야. 자네는 우리가 찾는 사람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말이 지. 자네 이름이 뭔가?”
순간 라이의 눈은 번개와 같은 속도로 괴한들의 장비를 훑었다. 가볍고 실용적인 무장. 그리고 그 위를 허름한 군청색 로브로 가리고 있다. 용병들이 즐겨 입는 옷 차림이다.
“설마……??
순간, 용병단에서 자신을 잡기 위해 파견되어 나온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덜컥 들었다. 저 중년 사내의 묘한 분위기가 마음에 걸리던 차였는데, 사람을 찾 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이 깊은 산속에서 말이다.
라이는 가급적 담담하게 대꾸하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올리버 트리스티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열심히 토끼 고기를 뜯고 계시는 이분은 겉모습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가시겠지만, 소피아 수녀님이시구요.” 올리버 트리스티라는 말에 중년 사내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신분증은 있겠지?”
살짝 일그러진 중년 사내의 표정이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라이는 품속에 넣어 두었던 신분증을 꺼내 중년 사내에게 던져 줬다. 중년 사내는 신분증을 꼼꼼히 살펴본 다음, 라이를 몇 번이고 쳐다보며 확인하는 듯했다.
“과연, 맞군.”
이때, 궁수가 냉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올리버 트리스티는 지금 어디에 있지?”
가죽투구 사이로 보이는 매서운 눈초리. 그걸 보자마자 라이는 심장이 멎을 만큼 깜짝 놀랐다. 올리버 트리스티의 신분증을 보여줬는데도 그를 찾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상대가 찾는 게 정말 올리버 트리스티인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좀 더 정보를 얻어 보려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궁수의 가죽투구 사이로 보이는 눈빛에 서서히 짙은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죽기 싫다면 순순히 실토하는 게 좋을 게다.”
리치몬드는 분명히 올리버 트리스티가 모험을 하는 와중에 죽었다고 했었다. 아직 리치몬드에 대한 신뢰가 채 가시지 않은 라이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라 이는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기 신분증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올리버 트리스티입니다. 오랜 모험 탓에 살이 좀 빠지기는 했습니다만, 틀림없는 사실이죠.”
그러자 중년 사내는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가 종이를 활짝 펼치자 누군가의 얼굴이 아주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 게 보였다.
‘설마 정말로 올리버를 찾고 있는 건가??
중년 사내는 초상화를 라이가 보기 좋게 펼쳐서 보여 주며 말했다.
“네놈과 별로 닮은 것 같지는 않지? 하지만 본인이 올리버 트리스티라고 주장하니 어쩔 수 없군.”
여기까지는 꽤 재미있다는 듯한 말투로 말하던 중년 사내가 갑자기 무시무시한 음성으로 외쳤다.
“네놈을 반역죄로 체포하겠다.”
반역죄라는 말에 라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설마 얘기가 이렇게 꼬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헉! 바, 반역죄라니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중년 사내는 쏜살같이 달려들어 라이를 포박하려 했다. 밧줄을 들고 접근해 오는 찰나의 시간을 활용해 어떻게든 대항할 수도 있었겠지만, 라이는 그러지 못했다. 반역죄라는 말에 정신이 멍해져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닉이라는 놈을 닮은 초상화, 그리고 반역죄. 지금까지 리치몬드 일행과 함께 움직이며 이상하다고 느꼈던 부분들이 일순간에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리치몬드와 젠슨이 왜 어리숙한 녀석을 그렇게까지 감싸고 돌았는지를.
“그랬던 거였어. 그래서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닉을 동료인 척 함께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 비싼 말을 헐값에 팔아 치운 거나 오크 떼가 있음에도 강행군을 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 빌어먹을, 바보같이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지금까지 토끼 고기를 뜯어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어 라이의 속을 뒤집어 놓았던 소피아 수녀. 그녀는 중년 사내가 갑자기 라이를 포박하자 더 이상은 못 본 척 할 수 없었는지 끼어들었다.
“그는 올리버 트리스티가 아니에요.”
꽁꽁 묶은 라이의 몸에서 무기들을 빼앗아 땅바닥에 던져 버리며 중년 사내가 소피아 수녀에게 물었다.
“그럼 이 사람은 누굽니까?”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였지만, 신을 받드는 사제로서 예우를 해 주는 것만 봐도 중년 사내가 막돼먹은 인물이 아님은 확실했다.
“라이라고 하는 아이예요. 성은 없고, 그냥 라이요.”
소피아는 라이를 언제 만났고,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짐짓 흥미롭다는 듯 경청하던 중년 사내. 하지만 소피아의 말이 끝나자마 자 비꼬듯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제가 섬기는 이레네(Irene)님의 이름을 걸고, 이 모든 게 단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맹세하겠어요.”
그러면서 소피아는 평화의 여신을 모시는 신전에서 발행한 신분증명서를 꺼내 보여 줬다.
“제가 이레네님을 섬기는 수녀라는 것을 못 믿으시겠다면 신성마법을 시연해 보여 드릴 수도 있어요. 혹시 상처를 입으신 분이 계시나요?”
소피아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중년 사내는 한발 뒤로 물러섰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녀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래, 리치몬드라는 사람이 일행의 리더였던 모양인데,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리치몬드의 얘기가 나오자 소피아 수녀의 안색이 급격히 우울해졌다. 닉은 별로였지만, 리치몬드나 젠슨은 아주 괜찮은 동료였으니까.
“그는 동굴에서 죽었어요.”
소피아는 일행들이 왜 동굴로 갔는지를 설명하고, 그들의 최후가 어떠했는지까지 자세히 말해 줬다. 그러자 중년 사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초상화를 소피아에게 보여 주며 물었다.
“혹시 그 일행들 중에서 이 초상화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있었습니까?”
소피아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닉이네요. 니키 던컨. 그의 아버지가 아주 부유한 상인이라고 하더라고요. 리치몬드 씨의 말로는 이번 모험에 그 사람이 꽤 많은 금액을 투자했다고 했어요. 그리 고 감시역으로 붙여 놓은 게 그의 아들 닉이었고요. 저는 리치몬드나 젠슨이 닉을 정중하게 대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제서야 사태의 전말을 이해했는지 중년 사내가 소피아 수녀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친절하신 협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방금 전에 말씀하신 게 사실인가요? 그가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게…….”
“유감스럽게도 사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역죄를 저지른 백작가의 장남이지요.”
중년 사내는 라이에게로 시선을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제 자네와 진지한 대화를 좀 나눠 봐야겠군. 수녀님의 말씀대로라면, 신분증을 산적들에게 강탈당했다고?”
“예, 맞습니다.”
“흠, 여신께 맹세까지 하신 수녀님이 거짓말을 하실 리는 없고. 그렇다면 자네가 거짓된 정보를 수녀님께 알려 드렸다는 게 맞겠지. 그, 냥, 라이 군. 자네는 끝을 뾰족하게 갈아 놓은 나무 막대 따위로 오크를 찔러 죽인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자신이 했었던 일이었기에 라이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오크를 나무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
까.
“가능하던데요.”
순간 중년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리긴 했지만, 그는 참을성 있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물론 약간 비꼬는 듯한 어투로 말이다.
“산적 따위에게 전 재산을 몽땅 털릴 정도의 애송이 보따리 상인이 활과 도끼로 오크 십여 마리를 순식간에 도륙했다고? 그리고 오크가 어디에 매복하고 있건 아 주 족집게처럼 척척 찾아내고 말씀이야.”
역시 중년 사내는 허투루 나이를 먹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라이의 말속에서 빈틈을 매섭게 찔러 들어왔다. 절대 어설프게 상대해서는 안 될 닳고 닳은 사내였던 것이다. 라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크만 잘 찾아내는 겁니다. 오크만요. 녀석들의 지독한 악취를 제코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중년 사내는 손가락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며 라이의 말을 부정했다.
“그게 아니지. 그것보다는 네놈이 트리스티 백작이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붙여 놓은 비밀 경호원이라고 보는 게 옳겠지.”
라이는 순간 현재 자신의 상황이 아주 웃기게 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치몬드에게 속아 반역도 놈들에게 이용당한 것만 해도 억울한데, 하지도 않은 죄까 지 뒤집어쓰게 생긴 것이다.
탈주 노예와 반역죄 중 어느 쪽이 죄질이 가벼울까? 그건 생각해 보나 마나였다.
“잠깐만요! 모든 걸 실토하겠습니다.”
중년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어서는 안 돼. 그랬다간..”
“사실 저는 붉은 전갈 용병단에서 탈출한 도망병입니다.”
라이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중년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용병이라는 게 돈 받고 싸우는 존재들인 만큼, 자기가 하기 싫다면 그만두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용병단에서 탈출을 했고, 그래서 도망병이라니? 정규군도 아닌 용병인 주제에 도망병이라는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뒤에 서 있던 궁수가 중년 사내에게로 살짝 다가와 속삭였다.
“붉은 전갈 용병단은 노예병을 주력으로 사용한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라이는 중년 사내와 궁수와의 상하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중년 사내가 궁수보다 훨씬 윗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중년 사내는 그제서야 라 이의 말을 이해한 모양이다. 갑자기 콧방귀를 뀌며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흠, 용병이 도망을 쳤다기에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너 노예였냐?”
라이는 고개를 푹 숙이며 힘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예.”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네놈이 왜 굳이 다른 사람의 신분증을 이용하려고 했는지를 말이야.”
라이는 재빨리 무릎으로 바바박 기어가 중년 사내 앞에 꿇어 엎드리며 애원했다.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 애처로운 목소리로.
“나으리, 제발 살려 주십쇼. 도망친 노예가 붙잡히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그러니 제발 모른 척 눈감아 주시면 안 될까요? 제 억양을 들어 보 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닙니다요. 저 북쪽의 작은 왕국에서 노예상인들에게 억지로 납치당해 끌려왔습지요. 고향의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집에는 늙으신 어머니와 아직 어린 동생들이 제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제발 도와주십쇼, 나으리.”
라이가 평소 하지 않던 짓을 한 이유는 중년 사내의 선해 보이는 인상 때문이었다. 그리고 얘기를 하면서 슬쩍 중년 사내의 눈치를 살피니 자신의 거짓말이 제법 먹혀들어 가는 것 같기도 했다.
희망이 보이는 듯하자 라이는 자신이 겪었던 노예생활을 최대한 불쌍하게 포장하여 주저리주저리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자신의 신세가 너무 기 구하고 서글퍼져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까지 흘리게 되었다.
아마도 그게 주효했던 것 같다. 말을 듣던 중년 사내의 싸늘한 눈빛이 많이 누그러진 듯했으니 말이다.
“역시 가족을 들먹이고, 인정에 호소하는 게 제일 잘 먹히는구나. 노예상인들과 같은 인간쓰레기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저런 순둥이한테는 직방이지.’ 라이는 초조한 마음으로 중년 사내의 입에서 ‘그간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래, 빨리 고향에 가 보거라’ 하는 말이 튀어나오길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중년 사내는 뭔가 골똘히 궁리만 하고 있을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실제로는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지난 후, 드디어 중년 사내의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수녀님께서는 이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엥? 그럼 나는??
중년 사내는 라이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 동굴로 우리를 안내해라. 올리버라는 놈만 잡으면 네 녀석을 풀어 주마.”
그 순간 하마터면 라이는 큰 소리로 만세라도 부를 뻔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자신을 풀어 주겠다는 언질을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흐흐흣, 겨우 살았다. 역시 내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라니깐. 마음이 약해 보여 슬쩍 감성을 건드려 줬더니,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줄이야……..”
중년 사내는 뒤에 서 있는 궁수에게 시선을 돌려 지시를 내렸다.
“샘, 저 녀석 포박을 풀어 줘.”
궁수의 이름이 샘이었던 모양이다. 샘은 중년 사내의 지시를 받자마자 라이에게 다가와 단단히 묶여 있던 포박을 풀어 줬다. 라이는 얼른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중년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은 감성에 휘둘려 이런 결정을 내렸겠지만,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풀어 준다는 말에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였다. “저…, 어르신. 송구스럽습니다만, 올리버인지 뭔지 하는 놈만 잡게 되면 절 풀어 주신다는 말씀, 정말이시죠?”
“허, 이놈이 속고만 살았나. 내가 하찮은 네놈 따위를 붙잡아서 어디다 써먹을 데가 있겠냐? 허긴 도망쳤다는 용병단에 넘기면 술값 정도는 벌 수 있을지도 모르겠 군.”
자신의 몸값이 무려 금화 150개라는 걸 중년 사내가 눈치채면 끝이었다. 그렇다면 절대로 자신을 풀어 줄리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라이는 정색을 하며 중년 사내 에게 말했다.
“술값조차도 받아 내기 힘드실 걸요. 도망 노예가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본때를 보이기 위해 장대 높이 목을 매달아 모두가 보도록 전시해 놓 죠. 비바람에 썩어 목이 떨어질 때까지 말입니다. 안 그래도 죽여 버릴 노예, 잡아가 봐야 몇푼이나 주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어쨌거나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테니, 일단은 푹 쉬고 있도록 하게.”
중년 사내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라이의 무기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놈 장비들은 네놈이 잘 챙겨라. 비무장으로 가기에는 험악한 곳이니 말이야.”
확실히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라이는 너무 기뻐 환호성이라도 지를 뻔했다. 손을 묶인 뒤 그 동굴까지 질질 끌려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묶이기는커녕, 지니고 있던 무기까지 다 돌려받을 줄이야.
‘기회를 봐서 저 둘을 해치워 버리고 도망칠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너무 위험했다. 그동안 라이가 겪은 바로는 세상에는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숨겨진 실력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올란 도만 봐도 그렇지 않았던가. 허구한 날 술만 마시며 놈팽이처럼 굴더니, 실제로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였다.
게다가 며칠 뒤면 풀어 준다고 하는데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사에 조심, 또 조심하는 것만이 내가 살길이지.’
중년 사내는 벌써부터 잠을 자려는 것인지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샘이라는 궁수는 어디론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아마 주변을 둘러보러 간 모양이다.
그 모습에 라이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자신이 어려 보인다고 해도 용병단 출신의 노예병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거리낌 없이 행동한다는 것 은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일 테니까.
라이도 슬그머니 모닥불 옆에 몸을 눕혔다. 온몸이 노곤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동안은 참으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게다가 어제는 경계를 하느라 밤까지 꼴딱 새워야 했지 않은가. 설상가상으로 방금 전에는 중년 사내를 만나 간이 쪼그라들 정도로 놀라기까지 했고 말이다.
며칠 후 풀어 주겠다는 언약을 받고 나니 긴장이 풀린 탓인지 피곤이 더욱 몰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커다랗게 하품을 하던 라이의 눈에 땅바닥에 떨어진 뼈다귀 하 나가 들어왔다. 그건 소피아 수녀가 먹다 버린 뼈다귀였는데, 아직 살점이 제법 많이 남은 것처럼 보였다.
“젠장, 개고생해서 구웠건만 난 한 입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에고, 배고파라.’
라이는 눈을 질끈 감고 애써 잠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곤해서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땅바닥에 버려진 뼈다귀에 붙어 있는 살점을 보고 나자 배가 고파 미칠 것만 같았다.
라이는 살그머니 눈을 뜬 뒤 뼈다귀의 상태를 살폈다. 비록 소피아 수녀가 먹다 버린 거고 흙이 묻어 있긴 하지만 도저히 뼈다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땅에 떨어진 걸 주워 먹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워낙 배가 고프다 보니 이런저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다.
라이는 슬쩍 중년 사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년 사내는 이미 잠이 깊이 든 듯 나직하게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이번에는 소피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피 아 역시 배부르게 고기를 먹었는지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봤지만 샘이라는 사내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마 주변 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는 모양이다.
라이는 누가 볼세라 잽싸게 손을 뻗어 뼈다귀를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품에 껴안듯 가슴 쪽으로 가져와 대충 흙을 털어 낸 뒤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미처 못 털어 낸 흙 때문에 입 안이 버석거리기는 했지만, 뼈에 붙은 작은 살점들은 너무나도 맛있었다.
“이렇게라도 먹어야 살 수 있다. 빌어먹을..
살점을 다 먹은 뒤 뼈까지 쪽쪽 빨아먹던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