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2권 6화 – 그, 그래듀에이트?

그, 그래듀에이트?

브로마네스는 시원한 맥주를 양껏 마시며 여유롭게 휴식을 취한 후에야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그것도 말을 몰아 산길로 움직인 게 아니라, 공간이동 마법으로 단숨에 이동했다.

소심한 아르티어스는 찌질한 성격 탓에 매사에 조심 또 조심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브로마네스는 이런 자잘한 것들까지 신경 쓰는 드래곤이 아니었다. 흰둥 이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는 사막 지역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고작 마법 몇 번 쓴다고 해서 별일이야 있겠냐는 게 통 큰(?) 그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에 받은 임무는 어딘가로 계속 이동 중인 부대를 찾아내는 것이었기에 금방 끝날 일도 아니었다.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을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으 니까.

물론 단서는 하나 있었다. 그건 소식이 끊기기 전, 페델 중대장이 대대장에게 올린 보고서였다. 페델 중대장은 적들이 악마의 골짜기 쪽으로 이동한다면 그곳에서 일망타진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적들이 악마의 골짜기가 아닌 다른 길로 북상해서 올라간다면 주도로와 합류하기 직전에 있는 험한 골짜기에서 기습을 하겠다고 했다.

브로마네스는 일단 악마의 골짜기로 들어가는 분기점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대가 이동한 듯한 많은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어지럽게 나 있는 수많은 발자국들……. 브로마네스는 그걸 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자국들이 앞뒤로 겹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저 골짜기 쪽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되돌 아 나왔음에 틀림없다. 그걸 보던 브로마네스는 혀를 찼다.

“뭐야, 이거? 악마의 골짜기로 끌어들여 일망타진한다더니, 오히려 당한 모양이군. 쯧쯧, 하여튼 멍청한 놈들은 이렇게 멋진 지형을 가지고도 활용을 할 줄 모른다 니까.”

어쩌면 페델의 중대도 적의 뒤를 따라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페델이 일부러 놔줬다면 몰라도 저 안쪽 어딘가에서 적이 방향을 돌려 되돌아서는 순간, 뒤따르던 페델의 중대와 정면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흠, 어떻게 된 일인지 거 되게 궁금하네…….”

한참을 달려 올라가자 악마의 골짜기로 들어가는 방벽이 보였다. 적들이 남긴 흔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방벽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하 지만 적들의 뒤를 쫓던 페델 중대의 발자국은 관문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관문 여기저기에 뿌려져 있는 말라붙은 핏자국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그렇다면…, 이쪽인가?”

곧바로 절벽 쪽으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브로마네스. 그의 예상대로 절벽 아래쪽은 시체들로 가득했다.

“에이, 병신 같은 놈들. 오히려 적들에게 전멸을 당했잖아. 그나저나 제법 전투가 치열했던 모양이지?”

브로마네스는 일단 절벽 밑으로 내려가 시체를 살펴보기로 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시체를 살펴보면 제법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니까.

그는 비행마법을 사용하여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브로마네스는 절벽 밑까지 내려와 시체를 확인해 보겠다는 자신의 결정이 탁월했음을 느 꼈다. 군더더기 없이 갑옷째로 깔끔하게 토막 난 시체들.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그래듀에이트? 하지만…, 이런 변두리 영지 싸움에 그런 놈이 참가할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브로마네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동족인가?”

만약 드래곤이 유희를 나온 것이라면 작금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유희랍시고 끼어들었는데 하필이면 패배하는 쪽에 속해 있었다면, 심술이 나서 깽판을 쳤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까.

물론 유희를 하면서 이렇듯 대놓고 능력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왜냐하면 드래곤이 본신 능력을 쓰면 쓸수록 유희가 재미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감 안해본다면 용의자는 십중팔구 분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드래곤이리라.

“흠, 이건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겠군. 만약 우리들이 이곳에서 유희를 하고 있다는 게 다른 드래곤들에게 알려지는 건 조금 곤란하니까 말이야.”

그리고 어쩌면 그 어린놈이 실버 드래곤일 수도 있는 만큼 확실하게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

멍하니 걸음을 옮기고 있던 라이는 갑자기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이…, 이게 도대체……?”

탈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지 않았던가. 라이는 재빨리 손을 들어 손가락 끝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상처라고는 전혀 없었다.

“내가 꿈을 꾼 건가? 아니면, 이게 꿈인가?”

이게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아얏!”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적들에게 사로잡혀 무자비하게 고문을 당했던 기억이 이토록 생생한데, 눈 씻고 살펴봐도 몸에는 그 어떤 상처도 남아 있지 않다니……. 이럴 수도 있는 것인가?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렇다면 그게 꿈이었나? 하지만 손톱 밑을 파고들던 송곳과 나뭇가지로 인한 끔찍했던 고통이 아직까지도 이렇게 생생한데…….’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하던 라이는 문득 자신의 몸이 너무 서늘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주위를 둘러보니 울창한 삼림이 우거져 있었고, 해가 지려는지 조금씩 어 둠이 깔리고 있었다. 아마 그 때문에 한기를 느낀 것이리라.

그런데 좀 이상했다.

‘지금 내가 껴입고 있는 옷이 몇 벌인데 한기가 느껴져??

더군다나 가죽갑옷 위에는 두꺼운 로브까지 입고 있지 않던가. 로브자락을 여미려고 했지만 손에 잡히는 감각이 이상했다.

“어라?”

고개를 숙여 보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헉! 내 갑옷! 내 옷! 그러고 보니 말[馬]하고 식량! 이거 다 어디 갔어?”

자신이 입고 있는 것은 허름한 속옷 한 벌뿐, 그 외에 다른 것은 모두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그렇다면 그게 꿈이 아니었다는 건가?”

꿈이 아니라면 더 이상하다. 적들에게 포로로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을까? 백번 양보해서 놈들이 그냥 놔줬다고 해도, 몸에 상 처 하나 남아 있지 않다는 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설마 자신이 기절해 있는 동안 친절하게 신관을 불러서 상처를 깨끗하게 치료해 줬다면 몰라도.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튀지 말고 그냥 있을 걸…….”

그동안 자신을 잘 보살펴 준 선배를 배신한 탓에 지금 천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왜 이렇게 집 떠난 이후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건지…….”

투덜거리던 라이는 곧,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한가하게 고민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속옷만 하나 달랑 입고 있을 뿐, 라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비상식량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물 한 방울조차 없다.

“우선 물부터 찾아야 해. 나머지는 그 이후에 생각하기로 하자.”

억지로 힘을 쥐어짜 터벅터벅 걸으며 라이는 중얼거렸다.

“그래, 어디 한번 갈 때까지 가 보자. 이 빌어먹을 운명이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하지만 그 음성에는 전혀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

“이상하네……. 왜 이리로 왔지?”

브로마네스가 의아해 할 만했다. 그래듀에이트의 흔적을 쫓다 보니 자신이 출발했던 본대가 있는 지점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기왕에 관여한 거, 아예 끝장을 내려는 것인가?”

하지만 그건 곤란했다. 이곳에 파견된 페가수스 용병단이 붕괴되어 버리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미치게 될 테니까. 혼자서만 유희를 즐기는 것이었다 면 호비트 따위야 어떻게 되든지 알 바 아니었지만, 이걸 방관해 버렸다가는 자신이 그동안 쌓아 올린 공로가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르티어스에게 무슨 잔 소리를 듣게 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젠장! 콩알만 한 새끼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만들다니. 어디 걸리기만 해 봐라. 이쪽 방향으로는 아예 오줌도 싸고 싶지 않도록 만들어 주마.”

브로마네스는 추격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

***

페가수스 용병단 제35대대는 도렌 영지군과 힘을 합해 적을 더욱 몰아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적의 숫자가 이쪽보다 워낙 많은 데다가, 그들 또한 전투로 다져진 용 병들이다. 약간의 틈이라도 주면 정신을 차리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반격을 가해 올 우려가 있었다.

“좀 더 몰아붙여라!”

이쪽에서 워낙 바짝 추격하고 있다 보니, 적들은 도망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적들을 더욱 공포에 질리게 만들고 있는 건 페가수

스 용병단의 선두 부대가 들고 있는 장대 끝에 매달린 머리들이었다. 그건 지휘관급 간부의 머리들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숫자는 점차 불어나 현재는 다섯 개 가 되어 있었다.

“후훗, 이 상태라면 이틀 내로 완전히 끝장을 낼 수 있겠군.”

미하엘 대대장은 이번 전투가 기대 이상으로 쉽게 풀려나가고 있었기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적군의 규모가 예상외로 큰 탓에 아주 어려운 전투가 될 거라고 예상 했었는데 말이다. 이게 다 그렉 크레스터라는 혈기 넘치는 소대장 덕분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아무런 공치사도 없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지. 흠, 다른 용병단에서 중대장까지 했었다고 했나? 이번 전투가 끝나면 녀석에 게 줄 포상과 진급을 단장님께 청원해야겠군.’

이렇듯 신상필벌을 공정하게 하는 미하엘 대대장이었기에 부하들이 그토록 따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워낙 전투가 잘 풀리고 있는 탓에 미하엘 대대장이 잠시 잡생 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대, 대대장님! 저기를 보십쇼!”

갑자기 부관이 부르짖는 듯한 소리에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볼 수가 있었다.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전위부대를 향해 접근 하고 있는 것을. 놀랍게도 사내는 말을 타고 있지도 않았다.

“그, 그래듀에이트?”

그래듀에이트급의 강자가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주 전력이 용병들로 이뤄진 전쟁터에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그것도 전략상으로 하등의 매력도 없는 이런 작은 영지전에 말이다.

사내는 멀리서 엄청난 거리를 도약하더니 아주 간단하게 기마병 하나를 말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그가 들고 있던 장대를 낚아챘다. 적 연대장의 목이 매달려 있는 장대였다.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왜 저 장대를 뺏는 거지??

미하엘이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전방의 상황은 점차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사내가 적 연대장의 목이 매달린 장대를 빼앗자, 그 주변에 있던 용병과 병사들이 그걸 다시 탈환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사내가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반월형의 은빛 선들이 번 쩍이는가 싶더니, 그에게 달려들었던 병사들이 줄줄이 말 아래로 쓰러져 버렸다.

사내는 장대 위에 매달린 적 연대장의 머리를 내려 품에 안더니, 맹렬한 속도로 말을 몰아 순식간에 전장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 그의 뒤를 쫓아 20여 기의 병 사들이 추격하는 게 보였다.

그제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미하엘은 악을 쓰듯 소리를 지르며 추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추격 중지해! 그자를 추격하지 말란 말이다!”

하지만 그건 이미 때를 놓친 명령이었다. 부하들 역시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사내를 추격해 달려간 뒤라, 전장의 혼란스러움을 뚫고 그의 음성이 전달되기엔 거리 가 너무 멀었다.

“가장 빠른 말을 가진 녀석이 누구냐? 빨리 저 녀석들을 쫓아가서 돌아오라고 전해라.”

“옛!”

부관에게 지시를 하자마자 미하엘은 방금 전 접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급하게 말을 몰았다. 곧이어 현장에 도착한 미하엘은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병사들. 그들의 몸은 갑옷째로 깨끗하게 토막이 나 있었다.

시체 주위에 서 있던 병사들은 작금의 사태를 이해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시체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일검에 사람이 두 토막이 날 수가 있는 거지?”

“전설의 마검(魔劍)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지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웅성거리고 있는 용병들. 그들 중 산전수전 다 겪은 고참 용병 몇몇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 역시 미하엘처럼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런데 왜?”

미하엘의 걱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연대장의 목만 가져간 걸로 봐서는 그와 뭔가 연관이 있음에 틀림없다. 설마, 연대장의 아들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 다면 그자가 자신들을 가만히 놔뒀을 리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쟁터를 뚫고 들어와 연대장의 목을 회수해 갔을 리가 없으니까.

문제는 그자의 행동이 이쯤에서 그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자가 연대장의 복수라도 하겠다며 달려든다면? 겨우 용병 1개 대대 따위는 그래듀에이트를 상 대로 10분도 채 안 돼 전멸당할 게 뻔했다.

미하엘은 급하게 전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중대장들에게 전령을 보냈다.

“작전을 중지하고, 모두 회군하라.”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도망쳐서 도렌 영주와 합류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제아무리 그래듀에이트라고 해도 국왕이 임명한 영주의 목을 베는 짓은 하지 못할 테니까.

올란도는 가능하면 적들을 베지 않고 그냥 놔두려고 했었다. 용병이라는 게 돈을 위해 목숨을 거는 직업인 만큼, 연대장을 죽인 것에 대해 복수할 생각까지는 없었 다. 악마의 골짜기에서 수십여 명의 적들을 벤 것만으로도 그의 분노는 이미 어느 정도 가라앉은 상태였으니까. 더군다나 이곳에 와서도 꽤 많은 적병들을 베지 않 았나.

하지만 끈질기게 뒤쫓아 오며 화살까지 쏴 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으드득. 조용히 가려 했건만, 이것들이 명을 재촉하는군.”

올란도는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우지도 않고, 곧바로 말 등에서 뒤쪽으로 도약했다. 추격하던 적병들은 설마 말 위에 탄 사람이 저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을 거 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달려오는 적병들과 올란도의 몸이 교차하는 순간, 그의 주변으로 은빛 궤적들이 빛을 내뿜었다.

“크아악!!”

“크윽!”

사람은 몽땅 다 해치웠지만, 말은 단 한 필도 죽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본대로 돌아가려면 말 한 필이 필요했으니까. 저들 중에서 가장 실한 놈을 한 마리 고를 생각 이었던 것이다.

“어떤 놈을 가져갈까?”

자신들을 몰던 주인들이 사라지자 말들은 걸음을 멈추더니 휴식을 취하거나 풀을 뜯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중 딱 한 필만이 주인의 시체에 다가가 코를 박고 냄새 를 맡고 있었다.

“허, 미물이긴 하지만 주인을 위하는 충정이 정말 기특하구나.”

중얼거리긴 했지만, 사실 그는 이미 마음을 정한 후였다. 주인을 그리워하는 놈. 주인이 얼마나 녀석을 위해 줬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녀석의 충성심만은 마음에 들었다. 꼭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을 정도로.

올란도가 이마에 하얀 점이 길게 나 있는 밤색 말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이상한 기운이 등 뒤쪽에서 느껴지는 걸 느꼈다. ‘설마?”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 느낌이 그냥 무시하고 가기에는 힘들 정도로 강했다. 힐끗 뒤를 돌아보는 순간, 올란도는 자신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 지 않은 곳에 잘생긴 청년 한 명이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황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거리며 굳건한 어깨 위로 드리워져 있다. 완벽한 전사의 몸매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저렇게까지 이지적(理智的)인 얼굴을 가질 수가 있다니.

“귀하는 누구……?”

청년이 대답하기도 전에 올란도는 상대의 정체를 눈치챌 수가 있었다. 이지적인 얼굴에 감춰져 있는 순수한 광기(狂氣)를 읽은 것이다. 맨 정신인 사람이 저런 눈 빛을 가질 수는 없다. 완전히 미치지 않고서야…….

청년은 잠시 올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젠장! 철모르는 애송이가 지랄을 한 걸로 생각했더니, 하찮은 호비트였잖아. 이런 쓰레기 같은 것이 감히 나로 하여금 헛걸음을 하게 만들어?”

그 말에 올란도는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다. 눈빛에 일렁이는 순수한 광기를 보고 혹시나 했는데, 그 짐작이 맞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신줄을 놔 버릴 수도 없는 상황.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드래곤과 직접 대면한 것은 이게 처음이었으니까. 타이탄이 떼거리로 덤빈다고 해도 대적이 불가능한 유일한 생명체가 바로 드래곤이 다. 그런 상대를 앞에 두고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전력을 다해 도망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올란도에게 청년의 모습을 한 드래곤이 문득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그래듀에이트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누구의 명령을 받고 온 거냐?”

“제 자의로 온 것입니다. 이분께 신세 진 게 있었으니까요.”

올란도는 들고 있던 목을 드래곤에게 슬쩍 들어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복수까지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시신만 수습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드래곤이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기에 그렇게 말을 맺은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에게서 의외의 질문이 날아왔다.

“자의로 왔다니……. 국왕을 섬기는 검(劍)이 자의로 움직인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저는 국왕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럼 너는 누구를 섬기고 있느냐?”

“… 아무도 섬기고 있지 않습니다.”

올란도가 침통한 표정으로 어렵게 대답을 하자, 드래곤은 곧바로 상상하기 힘든 제안을 해 왔다.

“그래? 그것 참 잘됐군. 너, 나를 섬길 생각은 없냐?”

“서, 섬기라구요……?”

순간, 올란도의 뇌리에는 드래곤과 관련된 수많은 전설들이 무질서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그중에는 사람을 세뇌하여 노예로 부린다는 것도 있었다.

올란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삶에 대한 미련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마뱀의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사는 건 싫었다. 더군다나 세뇌를 당해 자신을 잃 고, 마치 꼭두각시처럼 살게 되는 건 더욱 싫었다. 하지만 싫다고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그럼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죽이든지, 아니면 세뇌해서 노예로 쓰겠지.”

어떻게 할까 갈등하는 올란도에게 청년이 으스대듯 입을 열었다.

“너같이 하찮은 호비트 놈에게 내가 이런 제안을 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도록 해라. 에이, 성질 같아서는 내 맘대로 확 뒤집고 싶은데. 그러면 노랭이 놈이 지랄할 게 뻔하니, 쩝.”

워낙 갑작스런 일이었기에 올란도가 생각을 채 정리하지 못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청년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 보수는 섭섭하지 않게 챙겨 주도록 하마.”

그 말에 올란도의 두 눈에 약간이나마 희망의 빛이 어렸다. 그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자유롭게 풀어 준다는 의미이지 않겠는가.

물론 이건 순전히 올란도만의 생각이었고 상대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 드래곤이 지불하는 보수가 꼭 재화(財貨)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최악의 경우 실컷 일해 주고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드래곤의 뱃속에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신데 절 필요로 하십니까, 위대한 분이시여.”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야. 핫핫핫.”

사내답게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는 호쾌한 웃음.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올란도의 마음은 더없이 찜찜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