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3권 3화 – 무조건 잡아 와!
무조건 잡아 와!
몰몬트 산맥에 나 있는 길들 중에서 정식 무역로로 쓰이고 있는 것은 3개였는데 각기 쟈크 국가연합, 엔테미어 공국, 트루비아 왕국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 중 에서 엔테미어 공국으로 연결되어 있는 무역로가 가장 잘 정비되어 있었고, 가장 많은 화물이 운송되고 있었다.
이런 전략적인 요충지에 알카사스에서 요새를 건설해 놓지 않았을 리가 없다. 세브롱 요새는 유사시 1개 사단급의 병력이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요새였 고, 몰몬트 산맥에 배치된 유일한 기사단 전력인 호크 기사단 분견대가 배치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세브롱 요새가 가지는 중요도는 엄청나게 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부에서조차 이 요새를 산적이나 몬스터 소탕의 전진기지 그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크라레스는 이쪽으로 쳐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고, 그 외에 다른 고만고만한 나라들이야 알카사스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쁜 상태다. 그걸 잘 아는 국왕이기에 이곳 요새를 원로원 소속인 호크 기사단의 관할 아래에 놔둔 것이다.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라 세금을 두둑하게 챙길 수 있었기에 영주들은 모두들 군침을 흘리는 곳이었지만, 기사들은 이곳으로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옷을 벗어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저주받은 부임지였다.
면적에 비해 기사의 숫자가 적어 할당되는 임무는 엄청나게 많았지만, 거의 대다수가 잡다한 일들뿐인지라 전공을 세울 기회는 눈 씻고도 찾기 힘든 곳이었다. 그 렇기에 상관에게 찍힌 골통들이나 문제가 많은 기사들을 좌천시키는 장소로 애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이곳의 분견대장인 스트론도 그런 케이스였다.
그렇기에 막강한 힘을 지닌 마법사 길드의 동부지구장이 통신 수정구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 분견대장과의 면담을 요청한 것은 세브롱 요새에 분견대가 배치된 이 래 최초, 최대의 사건이었다.
“크, 큰일났습니다, 대장님.”
책상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늘어지게 자고 있던 스트론은 허둥대며 자신을 깨우는 마법사를 보며 짜증스럽다는 듯 소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무슨 일인데 깨워?”
“빨리 토, 통신실로 가셔야겠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는 마법사를 향해 스트론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좀 조용히 얘기해라. 골이 울린다. 젠장, 어제 너무 마셨어…….”
머리를 싸잡고 투덜거리던 스트론은 마법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의 입에서는 짙은 술냄새가 풀풀 풍겨나오고 있었다.
“통신실? 통신실에는 왜?”
“도, 동부지구장님께서 대장님을 찾으십니다.”
동부지구장 직책만으로 본다면 어딘가의 동부지구를 책임지는 놈인 모양이다. 하지만 스트론의 기억에는 전혀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아마 어딘가의 상인연합 에 소속된 놈이리라. 낮잠을 방해받은 탓인지 스트론은 짜증을 벌컥 냈다.
“젠장, 난 그딴 놈 모른단 말이야! 에효, 이런 곳에 처박혀 있다 보니 별 시답지 않은 놈들까지 날 귀찮게 하네.”
“저, 그게. 마법사 길드의 동부지구장님이신데요.”
스트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술이 번쩍 깨 버린다. 마법사 길드의 동부지구장이라면 길드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지위에 있는 거물이 었으니까.
“뭐야! 그럼 진작에 그렇다고 말해야 할 거 아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스트론은 곧바로 통신실을 향해 허둥지둥 달려갔다. 하지만, 부하들 앞에서 체면이 있지, 그는 통신실 바로 앞에서는 속도를 줄여 천천히 걸 어 들어갔다.
“대장님, 오셨습니까.”
스트론은 별것 아니라는 듯 평온한 어조로 마법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동부지구장이 나를 찾는다고?”
“예. 두 번째 수정구입니다.”
수정구에는 60대 초반 정도의 깐깐해 보이는 노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동부지구장쯤 되는 거물이 자신을 보자고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시킬 일이 있을 것이라는 건 닳고 닳은 스트론으로서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스트론은 자신이 신뢰하는 선임 마법사에게 눈짓을 하며 지시했다.
“자네가 통신을 주관해 주게.”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실내에 있는 다른 마법사들에게 명령했다. 마치 자신이 지구장과 동급이라도 된다는 듯한 말투다.
“나는 지구장과 은밀한 얘기를 나눠야겠으니 자네들은 잠시 밖에 나가 있게.”
당직 마법사들을 밖으로 전부 내보낸 후, 스트론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수정구 앞에 섰다. 방금 전 부하들에게 보여줬던 근엄한 모습은 그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의 얼굴에는 아부성 짙은 미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선임 마법사는 이미 그런 그의 모습을 알고 있었던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대신 눈길을 옆으로 슬쩍 돌렸을 뿐이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동부지구장님.”
「허허, 그쪽에 좀 골치 아픈 일이 생겨서 말이야. 그런데 자네가 무척 유능하다는 소리에 이리 통신을 넣게 되었다네.」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만족하실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역시 듣던 대로 꽤나 유능한 친구로군. 그런데 이번 일은 철저히 비밀을 요하는 일인데, 할 수 있겠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시나 해서 다른 마법사들은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지금 통신을 주관하고 있는 마법사는 제가 가장 신뢰하는 부하니까요.”
「역시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일처리가 마음에 드는군. 이런 유능한 친구가 왜 그런 한지에 처박혀 있는지 모르겠어.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내 다른 곳으 로 발령날 수 있도록 힘을 좀 써 주겠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지구장님. 시키실 일이 있다면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완벽하게 보안을 유지해 지구장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단과 길드, 군대로 친다면 육군과 해군만큼이나 거리가 있는 집단이다. 그런데도 스트론이 마법사 길드의 동부지구장에게 이렇게 납작 고개를 수그리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집단 다 원로원의 휘하에 속해 있다. 저런 거물이 손을 써 준다면 이 시골구석에서 벗어나는 것도 꿈은 아닌 것이다. 스트론이 체면불구하고 꼬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동부지구장은 만족스런 미소를 보냈다. 부하의 조언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는 스트론에게 2시간 전에 우연히 입수하게 된 놀라운 정보에 대해 말해줬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 자들을 붙잡아서 나에게 보내 줄 수 있겠나?」
비록 이런 곳에 좌천되어 있다고는 하나 분견대장을 맡을 정도면 머리가 둔해서는 힘들다. 스트론은 동부지구장이 말해 준 정보의 가치를 곧바로 알아차리고 자신 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정보가 진짜라면 동부지구장쯤 되는 거물이 직접 자신을 찾은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 말은 결국 자신에게도 엄청난 기회라 는 말이었다. 만약 이 일만 완벽히 해낸다면 마법사 길드의 동부지구장이라는 엄청난 거물을 뒷배경으로 지니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스트론은 잔뜩 긴장한 어조로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쇼, 지구장님.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군. 내 이 보답은 충분히 하도록 하지. 그런데…….」
여기까지 말한 지구장의 얼굴이 돌연 수정구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목소리를 나직하게 깔며 속삭이듯 말했다.
「명심하게. 만약 이 일이 외부로 흘러나가기라도 한다면 자넨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게야. 알겠나?」
“거, 걱정하지 마십시오. 쥐도 새도 모르게 은밀하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잘 부탁하네.」
수정구에서 동부지구장의 모습이 사라지자, 옆에 서있던 선임 마법사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급히 물었다.
“이러다 혹시 그자들을 붙잡는 데 실패라도 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크크, 괜찮아. 뭔가를 얻으려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게다가 저런 거물이 뒷배가 되어 준다는데 내가 무슨 짓인들 못하겠나.”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감찰부에서 운영하는 킬러들은 보통 2인 1조로 움직인다고 들었습니다. 하나는 검객, 또 하나는 레인저죠. 산속에 숨어들어간 레인저를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대장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런 일을 길드 본부가 아닌 동부지구장이 직접 부탁을 해 왔다는 건..
“알아, 알아. 길드 내 권력 싸움에 한방에 훅 갈 수도 있다는 걸. 그러니까 성공하면 좋은 거고, 만약 실패한다고 해도 동부지구장의 이런 행위를 길드 본부에 꼰지 르면 그것도 제법 두둑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게 아니겠나. 그렇게 되면 동부지구장이 나한테 복수를 하고 싶어도 할 수조차 없겠지. 동부지구장에서 쫓겨날 테니 까, 흐흐흐…..
스트론이 이런 분야에는 워낙 닳고 닳은 인물이었기에 선임 마법사는 그제야 환히 웃으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대장님, 공로를 인정받아 영전을 하시게 되거든 저를 잊으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걱정 말게. 내가 마누라를 잊어버리는 일은 있어도 자네를 잊는 일은 결단코 없을 걸세.”
이때, 갑자기 수정구가 점멸하는 게 보였다. 누군가가 통신을 보내오고 있는 것이다. 선임 마법사는 수정구 위에 손을 쓱 올려 채널을 열었다. 채널을 열자 상대편 의 모습이 수정구에 드러났다. 지금껏 본적이 없는 시커먼 로브를 입고 있는 음침한 분위기의 인물이었다.
“여기는 호크 기사단 몰몬트 분견대입니다. 그쪽의 소속을 밝혀 주십시오.”
「이쪽은 감찰부요.」
감찰부라는 말에 선임 마법사는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감찰부…, 라고요? 감찰부에서 무슨 일로.
「여섯 시간 정도 후에 귀 요새의 이동마법진을 쓰고 싶소. 가능하겠소?」
알카사스 내에는 여러 대도시에 건설되어 있는 마법탑에서 공간이동을 방해하는 역장을 방출하고 있었다. 초대형 마법진을 통해 얻어진 방대한 마나를 이용할 수
있었기에 역장의 효력은 반경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간이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각 도시에 건설되어 있는 ‘공간이동 문’을 이용하면 된다. 공간이동 문의 경우 도시에서 생산된 방대 한 마나를 이용할 수 있기에 출력도 좋았고, 또 각 마법탑에서 방출하고 있는 역장들의 간섭에 대해 정밀하게 계산하여 보정한 뒤에 설계했기에 안전한 공간이동이 가능했다.
감찰부에서 ‘공간이동 문의 사용 가능 시간을 물어보는 이유야 뻔했다. 바로 배신자들을 척살할 부대를 보내겠다는 뜻이리라. 이에 생각이 미친 선임 마법사는 급히 잔머리를 굴려 대책을 강구했다.
“안타깝습니다만…, 한동안은 마법진을 사용하실 수 없을 듯합니다.”
「뭣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는 거요?」
“하아, 그게 몇몇 마법탑에서 방출되는 역장의 수치계산에 문제가 생겨서 지금 보정하고 있는 중입니다. 작업이 아직 완전하게 끝나지 않은 관계로 조금 위험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쪽이 전적으로 책임지실 용의가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사용하십시오. 수리가 끝날 때까지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을 테니까요.”
공간이동이 위험하다는 것만큼 커다란 공포심을 지니게 하는 말도 드물다. 공간이동의 실패는 곧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었으니까. 특히 그 위험 성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그 충격이 더욱 컸을 것이다. 상대는 대답도 하지 않고 통신을 끊어버렸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스트론은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하여간에 잔머리 하나는 끝내준단 말이야. 그나저나 이로써 동부지구장이 얻은 정보가 가짜가 아니라는 게 확인이 된 셈이로군.”
선임 마법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흐흐, 마법사가 아무나 되는 줄 아십니까? 어지간한 머리로는 꿈도 꾸기 힘든 직업이 마법사입니다. 그나저나 감찰부에서 좀 더 은밀하게 움직일 줄 알았는데, 이 렇게까지 대놓고 마법진을 쓰겠다고 요청해 올 줄이야…….”
“그만큼 똥줄이 빠질 정도로 급하다는 소리겠지. 바꿔 말하면 우리가 잡으려는 놈들의 가치가 크다는 말일 테고.”
“어쨌거나 빨리 움직이셔야겠습니다. 역장을 핑계로 이곳 마법진을 쓰지 못하게 했다고 해도, 감찰부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건 하루나 이틀 정도밖에 되지 않으 니까요.”
잠시 머리를 굴려 대원들을 생각해 보던 스트론은 선임 마법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도튼을 찾아 내 방으로 데리고 오게. 그리고 자네는 다른 마법사들의 입단속을 확실하게 시키고. 알겠나?”
“염려 놓으십시오. 잘 처리해 두겠습니다.”
스트론이 자신의 집무실에 돌아온 후 십여 분쯤 지났을까? 밖에서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선임 마법사와 함께 건장한 기사 한 명이 실내로 들어왔다. 허리에 차고 있는 검 한자루 외에는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았지만, 용맹스런 기운이 물씬 풍기는 야성미 넘치는 기사였다. 사실 그건 좋게 표현했을 때 얘기고, 나쁘게 표현한다면 단순무식해 보이는 인물이라는 얘기다.
“대장님, 찾으셨습니까?”
“용기사들 중에서 자네가 길눈이 제일 밝다고 알고 있기에 불렀다네.”
스트론은 동부지구장에게서 들었던 정보들 중에서 추적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만 적당히 추려서 이야기해 줬다. 그 자료는 소피아 수녀가 추격대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 최대한 상세하게 작성해 놓은 자료였다. 일행이 마지막으로 들렀던 마을 이름, 그곳에서 어떤 방향으로 출발해 며칠 정도를 걸었고, 도 중에 본 몇몇 특징 있는 장소들의 설명들까지.
광활한 산맥이었지만, 그 일대 지리에 밝은 도튼이었기에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어디를 말씀하시는지는 대충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그건 왜……?”
“그쪽으로 가 보면 사내 3명으로 이뤄진 파티를 찾을 수 있을 걸세. 둘은 좀 나이가 많고, 하나는 어리다고 하더군.”
“3명으로 이뤄진 파티라구요? 뭐, 그들에게 전달하실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도튼의 질문에 스트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놈들을 잡아 오라는 걸세.”
그 말에 도튼은 난색을 표했다.
“쉽지 않은 일인데요. 잡아 오라고 하는 걸 보니 그들이 도망치는 중일 텐데, 우리가 상공에 나타나기만 해도 곧바로 몸을 숨길 게 뻔한데…….?
도튼의 부정적인 반응에 스트론은 인상을 왈칵 찡그리며 소리쳤다.
“숲 속을 걸어가면서 하늘을 날고 있는 와이번을 발견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그리고 재수가 없어서 그 놈들이 와이번을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별 상관없을 거 야. 정기적인 순찰을 돌고 있는 걸로 생각할 테니까 말이야.”
스트론은 그들이 감찰부에서 쫓아오는 것에 대한 대비만을 할 뿐, 이곳의 기사단이 자신들을 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들도 감찰부의 첩자인 수녀가 원로원파인 이곳 기사단에 지원을 요청할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앓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놈들을 잡아 와! 자네에게 말해 준 건 3일 전의 정보야. 놈들이 이동하고 있는 속도와 방향을 생각한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는 대충 감이 오지? 그 일대를 샅샅이 뒤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산맥이라는 게 광활해 보여도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은 게 아니니까.” “그건 대장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으십니다만…….”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도튼은 혼자서는 무리라는 생각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시다면 수색 작업에 몇 명 더 지원해 주십쇼. 혼자서 그 넓은 면적을 샅샅이 훑는다는 것도 쉽지 않고, 설사 발견했다 치더라도 놈들을 잡아 실어 나르려면 쉽 지 않은 일입니다. 비록 제 귀염둥이가 힘이 좋긴 합니다만, 건장한 사내를 셋씩이나 실고 오는 건 좀……”
휘하에 있는 용기사들을 몽땅 다 투입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스트론이 몰라서 도튼만 불러 은밀히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게 아니다. 동부지구장이 특별 히 비밀 엄수를 부탁한 일이다. 가급적이면 아는 사람이 적은 게 좋은 것이다. 더군다나 와이번의 경우 워낙 덩치가 커서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것을 요새 안에 거주 하고 있는 수많은 눈들이 목격하게 된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요새 내의 모든 와이번들이 일제히 날아오른다면 사람들의 쓸데없는 관심을 살 수 있다.
“놈들 중에서 둘만 잡아 오면 돼. 어린놈은 필요 없고 나이 많은 두 놈만. 참, 그 대신 반드시 살려서 데리고 오도록. 말만 할 수 있다면 병신이 되도 상관없으니까. 알겠나!”
“쩝, 놈들이 뭔 죄를 지어서 도망치는 겁니까?”
“그건 자네가 알 필요 없고, 나이가 많은 둘 중에 한 놈은 전직 레인저라고 하니 참고하도록 하게.”
“나머지 두 놈은요?”
“나도 잘 몰라. 명심할 거는 지금 이 임무가 극비라는 사실이야. 쓸데없이 주둥아리를 나불거렸다가는 어떻게 될지 잘 알지?”
그 말에 도튼은 인상을 왈칵 썼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
산악전에 특화된 레인저가 길을 안내하는데다가, 트롤과 맞짱을 떠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검술실력을 자랑하는 대장까지 있다. 덕분에 쉽게 산맥을 넘어 갈 수 있을 거라고 라이는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며칠 지나지 않아 산산이 깨져 버렸다. 산맥 위를 유유히 날고 있는 와이번을 샘이 운 좋게 발견한 것이다. 샘은 다급히 품속에 지니고 있던 외눈 망원경을 꺼내 자세히 살펴보더니 대장에게 보고했다.
“와이번입니다.”
와이번이라면 예전에 사막에서 한번 본 적이 있다. 그때의 와이번을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라이는 신이 나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번 것 은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작았다. 좁쌀만 한 점을 보고 그게 와이번이라는 것을 알아본 샘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될 뿐이다.
샘은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망원경을 대장에게 건네주며 투덜거렸다.
“망할 년이 벌써 보고를 마친 모양이군요. 용기사(Dragon Knight)까지 날아온 것을 보면.
하지만 대장의 생각은 샘과 달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여기서 가장 가까운 국왕파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곳은 엔테미어 공국의 수도야. 그것도 말이 주둔이지, 휴양차 가 있는 거지. 거기에 있는 용기사가 그 짧은 시간동안에 여기까지 날아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나.”
“그럼 우리가 지나온 길을 훑으며 이리로 다가오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우연이겠지.”
“우연이라고요?”
“그래, 우연, 세브롱 요새에서 정기순찰 나온 용기사일 거야. 자세히 보면 제대로 무장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잖아.”
“그게 더 이상하죠. 저런 복장으로 순찰을 도는 용기사를 저는 본적이 없거든요. 뒤에 앉아있는 마법사도 평상복을 입고 있잖아요.”
망원경으로 보니 샘의 말 그대로였다. 용기사나 마법사. 둘 다 가벼운 평상복 차림이다. 용기사는 허리에 검 한 자루만 달랑 차고 있을 뿐이다. 저렇게까지 하고 있 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대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정기적인 순찰이라면 휙 지나가겠지만, 저건 마치 뭔가를 찾기라도 하듯 천천히 저공비행하고 있잖아요. 아무래도 감이 안 좋아요.”
여기까지 말한 샘은 분하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빌어먹을! 그때 아무리 대장님이 말리셨더라도 뒤쫓아 가서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망할 년! 끝까지 사람 애를 먹이고 있네.”
혼잣말인 것처럼 샘이 떠들어댔지만, 자기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 것을 대장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 착잡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까지도 수녀가 감찰부 의 첩보원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대장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찝찝하다면 자네 내키는 대로 하게. 그래,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되겠나?”
대장은 아직까지도 용기사가 정기순찰을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용기사가 겁날 게 없지만, 마법사의 탐지능
력은 엄청났다. 저들이 자신들을 찾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깊은 산속을 세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걸 발견했다는 것은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이다. 흔 히 있는 일이 아닐 테니까. 그들이 누군가에게 재미삼아 이 얘기를 흘린다고 해도, 재수가 없다 보면 그게 돌고 돌아 감찰부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세브롱 요 새에 감찰부의 첩자가 없다고는 장담할 수가 없었으니까.
“저쪽으로 가죠. 그게 최곱니다.”
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길이 나있지 않은 울창한 숲이었다.
“숲속에 숨는다고 해결이 될까? 동굴 속 깊은 곳에 몸을 숨기지 않는 한, 마법을 피해갈 수는 없잖나.”
“저기에 숨자는 게 아니라, 저쪽으로 가자는 겁니다.”
없는 길을 개척하며 가자면 몇 배는 힘이 더 들 것이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산길에 있어서는 샘이 그보다 아는 게 훨씬 더 많았으니까. 앞으로 의 고생이 눈에 선했기에 대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샘과 대장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도 모르고 라이는 와이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와이번과의 거리는 조금 더 좁혀져 있는 상태.
“저 혹시 안 보실 거면 제가 좀 망원경을 봐도 될까요? 와이번이 어떤 건지 자세히 보고 싶어서요.”
떨떠름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대장은 망원경을 건네줬다.
“용기사는 처음이지? 저게 바로 용기사다. 잘 봐 둬라. 이제 두 번 다시 보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망원경으로 보니 저 멀리 저공비행하고 있는 와이번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와이번 위에 한 사람만 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두 명씩이나 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와이번이 날고 있는 속도는 그리 빠른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날개 젓는 모양새로 봤을 때 아주 천천히 날고 있는 것 같은데요?”
“당연하지. 아래쪽을 살펴봐야 할 테니까.”
“그럼 숨어 있다가 화살로 공격하면 어때요?”
라이가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했다. 낮은 고도를 천천히 날고 있는데다가 갑옷조차 입고 있지 않다. 몰래 저격한다면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라이의 말에 샘이 콧방귀를 뀌며 빈정거렸다.
“그거 지금 웃자고 하는 농담이지?”
한심하다는 듯한 샘의 시선에 라이는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아직 어리다 보니 잘 모를 수도 있는 건데, 뭘 그렇게까지 빈정거린단 말인가. 그때 옆에서 대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와이번에 대해 설명해줬다.
“와이번은 아주 희귀하다 보니 엄청나게 비싸지. 그런 와이번에 어중이떠중이들을 태울 것 같으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기에 라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와이번을 향해 화살 수백 발을 날려 봐라. 죽일 수 있는지. 오히려 우리 위치만 노출될 뿐이야.”
그러자 옆에서 샘이 한 마디 거들었다.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만이 용기사가 될 수 있어. 우리 정도 실력으로는 떼로 덤벼도 상대가 안 된다는 말이지.”
그래듀에이트라는 말에 라이는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올란도가 성벽을 뛰어오르던 장면이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당시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경악해 서 외쳤었다. 그래듀에이트라고.
라이가 올란도를 떠올리며 조용히 있자 대장은 겁을 집어먹은 거라고 착각했다. 그는 일부러 자신감 있는 미소를 씨익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용기사가 그래듀에이트라고 해서 그렇게 겁먹을 건 없다.”
그때 샘이 옆에서 다시 끼어들었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용기사보다 마법사가 더 짜증나는 존재야. 나무 밑에 숨는다고 해서 마법사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샘이 마법사를 운운하는 것을 보니, 용기사와 함께 타고 있는 사람이 마법사인 모양이다. 샘은 라이의 손에서 망원경을 뺏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자, 시간이 없다. 빨리 움직이자.”
라이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지 몇 초 되지도 않아 등 뒤에서 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그쪽이 아냐. 이쪽이야.”
샘은 숲속으로 들어가 단검을 뽑아 들고 나뭇가지들을 잘라 길을 만들며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