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3권 9화 – 우수한 키메라의 조건
우수한 키메라의 조건
단단하게 구속되어 있는 몬스터 한 마리. 트롤과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훨씬 더 무섭게 생겼다. 터져나갈 듯 커다랗게 부풀어 올라있는 근육, 무시무시한 송 곳니. 더군다나 덩치도 일반적인 트롤에 비해 20% 정도는 더 컸다.
이놈이 바로 트롤의 신체에다 마수(魔獸)의 정제된 피를 접종시켜 만들어 낸 키메라 TG086이었다.
“크르르릉…….?
TG086은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내며 적의를 표출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이곳 제8연구동의 책임자 로므렌은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또다시 정신제어 술식이 깨진 것이다.
광기에 번들거리는 무시무시한 두 눈동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비롯한 연구원들을 향해서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던 모습이다. 도대체 왜 정신제어술식이 깨 진 것일까?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키메라 제조술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정신제어였다. 키메라는 살아있는 전투병기나 다름없다. 그런 녀석이 주인의 명령을 무시하거나 반항한다면 큰일도 그런 큰일이 없다. 특히, 비무장상태인 연구원들이라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키메라의 뇌에 삽입되는 정신제어술식은 수백 년에 걸쳐 수도 없이 많은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며 수정되고 보완되어 완성되었다.그 후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키메 라 제조에 이용되고 있음에도 술식이 깨졌다는 보고는 단 한건도 접수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곳 연구소에서만 유독 이런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정확한 원인을 아직 찾지는 못했지만, 마물의 피 때문일 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다 른 연구소에서 키메라를 제조하는 방법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것뿐이었으니까.
로므렌은 미간을 찌푸리며 부하 연구원에게 지시했다.
“50cc 더 주사하게.”
“한계치를 한참 상회했습니다, 조장님. 더 이상 주사했다가 자칫 내부에서부터 조직괴사가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진정제는 맹독성을 함유하고 있는 약품이었다. 이것을 인간에게 사용한다면 단 한 방울만으로도 수십 명을 즉사시킬 수 있을 정도다. 이런 위험한 성분의 진정제를 사용해야만 할 정도로 그들이 연구하고 있는 키메라의 생명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시키는 대로 해!”
연구원은 마지못해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
잠시 후, 트롤의 모습에서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표정에서 적의(意)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몽롱하게 풀리기 시작한다. 트롤의 눈이 점차 감기기 시작하는 것 을 보며, 로므렌은 걱정이 앞섰다. 나중에 정신을 차린 후에도 이런 증상이 계속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연구소장이 뭐라고 하건 그때는 폐기처분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으리라.
이때, 누군가가 연구동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낀 그는 고개를 힐끗 뒤로 돌렸다. 싸늘한 안색의 연구소장이었다. 로므렌은 허둥지둥 연구소장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지만, 소장은 인사나 받고 있을 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그는 곧장 용건부터 꺼냈다.
“어떻게 됐나?”
“겨우 안정시키기는 했습니다.”
연구소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트롤을 살펴본다.
“괜찮을 것 같나?”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깨어나 봐야…….”
“아무래도 마수의 피와 살을 이용하는 방법을 바꿔야겠어. 그 많은 트롤들 중에서 어떻게 단 한 개체도 성공한 것이 없다니…….”
표정 변화가 별로 없던 연구소장으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나게 만든 것을 보면 트롤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험난했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마물을 획득한 이래 그들은 지금껏 놀, 코볼트, 오크를 거치며 키메라 제작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트롤에 이르러서는 아직 단 한건도 성공하지 못했다. 어쩌면 기존의 키메라 제작방법이 트롤에게 뭔가 맞지 않는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잠시 아무 말 않고 이리저리 서성거리던 연구소장은 로므렌을 향해 자신이 방금 떠올린 생각을 말했다.
“트롤이 지닌 재생력이 원인일지도 몰라. 지금 떠오른 생각인데 말이야. 마수의 피를 좀 더 정제해 보면 어떨까? 트롤의 재생력이 강한 만큼 마수의 피를 정제해 그 힘의 균형을 맞추자는 소리야. 어떤가, 내 생각이?”
아직까지 마수의 피에 함유되어 있는 성분조차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 그럼에도 일반 몬스터에게 주입하면 트롤에 맞먹는 엄청난 재생능력과 힘, 그리고 방어력 을 얻을 수 있었다. 단점이라면 마수의 피를 주입해서인지 곧잘 흉성이 폭발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마수의 피를 정제해서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연구소장이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궁리를 하고 있다는 걸 느낀 로므렌은 자신의 생각 을 건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제작 방식 때문이 아니라, 실험체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기에 연구소장은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실험체에?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예. 지금까지 저희들은 연구의 방향을 소형에서 대형으로 점차 확대시켜 왔습니다. 아무래도 소형 쪽이 구하기도 쉽고, 연구하기도 좋으니까요.”
연구소장은 퉁명스런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뻔히 알고 있는 얘기는 집어치우고…, 그래서 자네가 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가 뭔가?”
“트롤에서의 계속된 실험 실패. 지금까지는 그저 실험체의 크기가 커졌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만 생각해 왔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어서 말입니다.”
아직까지 로므렌이 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파악하기 힘들었던 소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아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그 이유가 뭐라는 건가? 뭔가 짚이는 게 있으니까 이런 얘기를 꺼낸 거겠지?”
“어쩌면 집단생활을 하는 몬스터냐, 아니냐의 차이가 이런 문제를 불러일으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연구소장은 지금까지 그쪽으로는 생각을 전혀 해 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신제어술식에 의해 컨트롤되는 키메라가 종족의 특성을 간직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물론 저도 그게 억지가 다분한 추론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해명이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
연구소장은 지금까지 가슴속에 께름칙하게 걸리던 것의 정체가 바로 이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로므렌의 말마따나 이게 아니라면 트롤이나 오우거 같 은 대형 몬스터에서만 유독 정신제어가 계속 실패하고 있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
“흐음…, 한 번쯤 검토해 볼 만한 가치는 있을지도 모르겠군.”
연구소장이 자신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로므렌은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저는 연구대상을 다른 종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딱히 실험체로 쓸 만한 집단형 몬스터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개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능력으로 봤을 때 사인족(獅人族)이 최고이기는 했지만, 그런 최고급품을 실험체로 소비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각 개체의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구할 수 있는 숫자도 몇 되지 않았다. 현재의 연구비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다. 연구소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사인족 같은 걸 연구하자는 건 아닐 테고…, 혹시 오크를 강화하는 쪽으로 되돌아가자는 말인가?”
“아닙니다. 몬스터가 아닌, 인간을 실험체로 써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연구소장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인간을?”
“예.”
연구소장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 제정신인가? 인간 따위를 키메라로 만들어서 어디다 쓰게?”
인권(人權) 때문에 인간이 키메라의 재료로 사용되지 않는 게 아니다. 지능을 제외한다면 몬스터에 비해 아무런 장점도 없기 때문이다. 근육이 잘 발달된 젊고 튼 튼한 사내라고 해도 평범한 오크 한 마리와 싸워서 이기기 힘들 정도로 허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었으니까.
“종족의 특성이 나타난다는 말은 개체의 개별적인 성향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요?”
“기억…, 이라고?”
“예. 어쩌면 지금까지 만들어진 키메라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지능을 갖춘 걸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흠, 지능이 우수한 키메라라……?”
로므렌의 당치않은 주장에 어이가 없었던 연구소장은 따끔하게 질책을 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상식을 깨는 이론이 튀어나와야 마법이 발전한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트롤의 키메라화 실험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속 실 패만 거듭할 뿐, 아무 진척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연구소장의 마음을 움직인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연구비였다. 실험체로 사용하고 있는 몬스터의 조달 가격은 상당히 비쌌다. 그 때문에 생쥐 처럼 크기도 작고, 가격도 저렴한 실험체를 통해 충분한 데이터를 확보한 후에야 몬스터로 손을 뻗칠 수가 있었다. 그것도 크기가 작은 놀부터 시작해서 코볼트, 오 크, 트롤의 순서로 발전시켜 왔다.
개체의 크기가 커지면서 실험체의 조달 단가는 급증하고 있는 중이다. 덩치가 크면 클수록 생포해서 잡아 오기가 힘들어지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게 인간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노예시장을 통해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조달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이곳 연구소에는 10개의 실험조가 있었고, 그들이 한 달에 소비하는 실험체의 숫자는 엄청났다. 특히 실험체가 트롤로 바뀐 이후, 엄청난 돈을 재료 조달에 뿌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실험 재료를 제 시간에 구하지 못해 연구가 지체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닌 상황이다.
그러니 이곳 실험조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실험체를 소비해 오던 로므렌의 조가 실험체를 인간으로 바꾼다면 다른 연구 조들의 숨통이 트일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장은 크게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 인간에 대한 실험을 허락했다. 어쨌거나 그가 연구하려 하는 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 니까.
“흠, 의견을 낸 사람이 자네니, 인간에 대한 실험은 자네가 전적으로 맡아서 한번 해 보게.”
“감사합니다, 소장님.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로므렌에게 연구소장은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선 따위의 말장난은 필요 없네. 우리에게는 성과가 필요해, 성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