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4권 13화 – 결자해지를 하라면서?
결자해지를 하라면서?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가 있었다. 그때부터는 살기 위해서 죽였고, 나중에는 그것조차 생각하지 않고 본 능적으로 죽였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의 주위에는 살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들 경악에 부릅뜬 얼굴로 죽어 있는 수많은 시체, 시체들……………
갑옷 채로 토막난 시체들로부터 흘러나온 피로 인해 주위는 온통 시뻘건 핏자국과 비릿한 혈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야말로 시산혈해(屍山血海)! 라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자신의 손과 그 손에 쥐어져 있는 검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시뻘건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에, 이 말도 안 되는 살육극을 자신이 벌였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어떻게…..?”
사람을 뼈째로 두 토막을 낸다는 것은 보통 힘든 게 아니다. 목처럼 가느다란 부위도 깨끗하게 토막을 내려면 웬만한 힘과 기술 가지고는 어림도 없 는 일인데, 어떻게 어깨부터 허리까지 대각선으로 잘라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갑옷 채로………
“이게 검술의 힘……?”
그가 죽을 각오를 하고 이곳으로 온 건 옳은 선택이었다. 최소한 검술이라는 것을 익히는 데 있어서는 말이다. 그때, 블러드 엑스를 죽였을 때는 떠 오르지 않았던 검술의 흐름이 지금은 손에 잡힐 듯 명확하게 떠올랐다. 아니, 검의 흐름만이 아니다. 검을 움직일 때, 몸 속 기운을 어떤 식으로 움직 여야 하는 지까지 연계되어 복합적으로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복잡한 작업을 어떻게 그렇게 순간적으로 해낼 수가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곧이어 라이는 현실로 돌아왔다.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한두 사람이 내는 발자국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곧바로 지하실 로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지하실로 내려갔다고?”
“여기 경비 서던 놈은 어디로 간 거야?”
“어? 시쳅니다!”
“설마, 녀석을 아직까지도 해치우지 못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지배인의 통보를 받고 곧장 달려오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녀석을 해치우지 못했을까요.”
“생포하려고 하다 보니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걸지도 모르지.”
저마다 웅성거리던 소리는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이어지는 경악어린 목소리들!
“흐읍, 피 냄새!”
“이게 뭐야?”
라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멍청하게 서서 시간을 낭비한 탓에 또다시 피를 뒤집어써야만 밖으로 탈출할 수 있게 되어 버렸다. 마음을 굳히자 라이 는 칼을 꽉 쥐었다.
“그래, 어차피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망설이지 말자. 망설일수록 죽여야 하는 사람의 숫자만 늘어나게 돼!”
몇 명이나 죽였는지 모른다. 그걸 세고 앉아 있을 정신도 없었다. 검술을 제대로 구현하는 데만 온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만약, 여기서 단 한 번이 라도 실수를 했다가는,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가 정신을 차린 건, 이제 더 이상 살기를 내뿜으며 달려오는 인기척을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쯤이었다. 그제서야 라이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분명 당코 그놈은 지하에 남아 있는 깡패들의 숫자가 몇 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 이 기회를 노려야만 한다면서…
물론 그 녀석이 정보를 입수했을 때는 그랬을 수도 있다. 그리고 뭔가 다른 이유로 밖으로 나갔던 놈들이 돌아왔을 수도 있다. 사실 마지막에 난입해 들어온 적들을 보면, 밖에 있다가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허둥지둥 달려온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기분 탓인가?”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뇌리에 떠오른다. 라이는 품속에 손을 넣어 루크가 건네줬던 종이 를 꺼냈다. 칼릭스의 초상화였다.
“잘 간직하고 있다가 실수 없이 처리하라고 했었지?”
생각해 보니, 이런 일을 하는 자에게 초상화를 넘겨줄 때 잘 간직하라고 하는 게 말이 되던가? 그가 소싯적에 들었었던 영웅담에 따른다면, 이런 건 곧바로 암기하고 불태워 버려야 되는 거 아니었나? 이런 증거물을 가지고 침투했다가 만약 생포라도 되기라도 하면 아니, 죽어버렸다고 해도 이쪽이 어느 파인지를 뻔히 알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보니, 일부러 이런 증거를 남겨두는 경우가 있다. 그건……
라이는 생각하기도 싫었지만, 그 이유는 뻔했다. 상대를 이간질 시키려고 거짓 정보를 흘릴 때. 그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 다. 배신! 놈들은 자신을 미끼로 삼아 거짓 정보를 샐러맨더 파에 퍼뜨리려고 했음에 틀림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들의 배신에 경악하며 살길을 찾아 도망쳤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흥! 꼴에 배신을? 과연 밑바닥 인생 아니랄까 봐 가지가지들 하는군.”
이제는 예전의 라이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십 명에 달하는 폭력배들을 도륙 내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전설에 나오는 드래곤이라도 때려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깟 폭력배 몇 놈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해서 뭐가 두렵겠는가. 오히려 가소로울 뿐이다.
하지만 여관으로 돌아가는 건 왠지 망설여졌다. 녀석들이 창칼을 들고 달려드는 것쯤이야 두려울 게 없었지만, 자칫 야밤에 불이라도 지른다면 큰일 이다. 낡은 목조 건물인 만큼, 순식간에 불덩이가 될 게 뻔하지 않겠는가.
“잠자다가 통구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일단 녀석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쪽의 실력을 확실하게 보여줬으니, 녀석들도 머리가 장식용이 아니라면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 들이려고 하지 않겠는가. 이번에는 진짜로.
라이는 일단 여관 내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대신, 그 주변에 숨어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부두목과 함께 밖으로 나온 루크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잭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혼자라면 부하들을 동원해 여기저기 뒤지며 찾으면 그만이지만, 지금은 부두목을 그에게로 안내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 보니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 새끼, 지도 보고 블랙울프 쪽으로 가서 접선하고 있는 거 아냐?’
그러면 일이 더욱 꼬이게 된다.
‘설마 녀석이 그렇게까지 나를 신뢰하고 있을 줄은…, 아니 신뢰 여부를 떠나서 그렇게까지 돌대가리일 리가 없잖아? 여왕벌의 둥지 안에 들어가기 만 해도 벌써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았을 텐데.
루크는 먼저 부두목을 ‘돈벼락’여관으로 안내하기로 했다. 거기 가서 찾아 보고, 없으면 그때 가서 부두목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수밖 에 다른 도리가 없으리라.
루크가 부두목을 안내해 돈벼락 여관에 도착했을 때, 우려하던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잭이 그곳에 없었던 것이다.
“어? 어디로 갔지?”
‘정말 지도 따라간 거 아냐? 젠장! 샐러맨더도 골치 아픈데, 이번에는 블랙울프까지 박살 내 놓은 건 아니겠지.’
루크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제가 놈을 찾아서 데리고 오겠습니다.”
계단을 달려 내려가며 루크는 부두목을 향해 소리쳤다. 부두목과 함께 방으로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여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새끼들이 다 어디로 갔어? 장사를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이따위로 장사를 하고 있으니 이 모양 이 꼴이지.’
“이봐! 여기 누구 없어?”
소리소리 지른 후에야 주방 안에서 여주인이 달려 나왔다. 허연 가루가 묻은 손을 앞치마에 쓱쓱 닦고 있는 걸 보면 한창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 양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
“여기 잭이라는 손님 있지? 며칠 전에 온 체구가 작고 바짝 마른 젊은 남자인데…
“아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어?”
“방에 있을 거예요. 3층에……, 어디였더라? 세라! 세라! 어디 있니?”
한동안 부르며 찾았지만 세라라는 사람을 찾지는 못한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라를 찾는 걸 포기한 듯 여주인이 되돌아왔다.
“죄송해요, 얘가 어디로 갔는지 찾지를 못하겠네요. 하기야, 걔도 지금 여기서 일하고 있을 정신이 아니라서…………….”
여주인은 변명 겸, 세라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했다. 어제 시장통에서 경천동지할 정도의 살육극이 벌어진 모양인데, 그때 세라라는 아이의 어 머니도 거기에 휩쓸려 목숨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됐어. 그 사람이 어디에 묵고 있는지는 나도 알아. 젠장, 마을을 뒤지는 수밖에 도리가 없나?”
아무래도 잭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는 보고를 하러 루크가 계단을 올라가려고 할 때였다. 뒤쪽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 려왔다.
“같이 온 놈은 누구지?”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공포스런 뭔가가 있었기에 루크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루크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혹시 분노 어린 상대가 칼이라도 뽑아들고 있으면 큰일이니까. 하지만 다행히 상대는 아직 칼을 뽑지 않은 상태다. 그 렇다면 아직 대화의 여지가 있으리라. 루크는 최대한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미소를 지어 보이며 라이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누가 보더 라도 무척이나 어색한 것이었다.
“여, 무사했군, 잭. 안 그래도 자네 걱정을…………….”
“시끄러! 죽고 싶지 않다면 내가 묻는 거나 대답해.”
찔끔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는 루크를 향해 라이가 싸늘한 어조로 되물었다.
“함께 온 놈은 누구지?”
“부두목님이셔. 일이 좀 꼬였다는 걸 알고는 자네에게 직접 해명하려고 달려오셨지.”
“부두목?”
부두목이라면 조직의 두 번째 순위를 지닌 인물이리라. 그런 인물이 직접 달려왔다는 것에 기분이 살짝 풀리려고 했지만, 라이는 느슨해지려는 마음 을 다잡았다. 뭣보다 상대가 진짜 부두목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어느 파의 부두목? 블랙울프?”
비웃는 듯한 잭의 표정만 봐도 이미 눈치를 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또다시 거짓말을 늘어놓을 담력은 루크에게 없었다. 루크는 잭의 눈빛이 너무나도 무서워 시선을 슬쩍 돌리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하지. 우리는 블랙울프 파가 아니야.”
“그럼 뭔데?”
“우리는 블루썬더 파야.”
잭의 눈빛이 더욱 험악해지는 것을 보고는 루크는 찔끔해서 사정했다.
“나, 나하고 이럴 게 아니라 부두목님께 직접 들으라고. 응? 제발………….”
“오랜만이로군. 전에 통성명은 하지 않았었지? 나는 박스터라고 한다네.”
부두목은 간단하게 인사를 건넨 후, 문 앞에 자리 잡고 있는 루크를 향해 지시했다.
“자네는 이만 돌아가 보게.”
“예? 예, 부두목님.”
루크가 밖으로 나갔음에도 부두목은 용건을 말하지 않고 잠시 기다리며 뭔가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삐걱거리는 계단 소리가 들리지 않자 짜증스 런 표정으로 문으로 가 벌컥 열었다. 그러자 문 바로 앞에 루크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내 말을 못 알아들었나? 경비 설 필요 없으니 그만 본부로 돌아가 봐.”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루크는 부두목의 표정을 보고 상대의 마음을 못 알아챌 리 없었다. 눈치 하나만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그였으니까. 그는 황 급히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부두목님. 그럼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잠시 후,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제서야 부두목은 라이에게 말했다.
“이제야 서로 간에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눌 수가 있겠군.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나하고 일해 볼 생각 없나?”
라이는 즉답을 피하고, 될 수 있으면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입을 열면 은연중에 자신의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상대에게 얕보일 뿐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그쪽 파와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엄밀히 말해 자네는 우리 식구가 아닐세. 아직 우리 파의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지 않나.”
그러면서 부두목은 자신들이 이 마을에서 거의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은 ‘블루썬더’라는 산적 조직이라는 것과 함께 자신들의 비밀을 거의 다 밝혔 다. 루산나가 자신들의 조직을 블랙울프라고 하며 상대를 위협했던 것도, 블루썬더라는 조직이 이 마을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탓이었 다.
“두목은 보기보다 속이 좁은 사람일세. 그리고 의심도 많은 사람이지. 그 덕분에 샐러맨더와 블랙울프라는 거대조직이 쟁투를 벌이고 있는 이곳에 서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루산나를 건드린 만큼, 자네는 절대로 두목과 함께 할 수는 없을 걸세. 내 보증하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나하고 함께 사업을 해 보자는 걸세. 안 그래도 갈 데도 없지 않나? 자네는 국경을 넘어가겠다고 하지만, 국경을 넘어가면 자네를 반겨 맞이해 줄 사람이 있기라도 하나?”
“자네는 국외로 나가는 게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사실은 정반대일세.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지 않나. 같은 영지 내에 있는 샐러 맨더나 블랙울프조차도 우리 조직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데, 그 악명 높은 왕실 직속의 감찰부라고 하더라도 자네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건 알아내지 못할걸?”
라이는 부두목의 말 중 왕실 직속 감찰부라는 단어에 자신을 오크에게 던져주고 도망친 대장을 떠올리고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리고 그런 라이의 반응을 살피던 부두목은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자신의 예상이 맞았던 것이다. 일반인은 그 이름조차 생소한 왕실 직속 감찰부 의 존재를 잭이 알고 있었으니까. 한때 미래가 창창했었던 그가 이곳 시골구석에서 깡패 조직 부두목 노릇이나 하고 있는 것도 다 집안이 모반에 연 루되어 풍비박산이 난 탓이다. 그리고 그건 잭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입 밖에 내뱉지는 않았다. 이건 상대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었고, 나중에 잭과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을 때 그를 제거할 수 있는 올가미가 될 테니까.
“구미가 당기긴 하네요. 내가 해 줘야 할 건 뭡니까?”
깡패 조직과 함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라이에게는 지금 시간이 필요했다. 고급 검술의 실마리를 잡게 된 지금, 그게 머릿속에서 잊혀 지기 전에 확실히 체득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국의 여인이 꿈속에 나타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붉은전갈 용병단에 잡혀 있을 때부터 시작 되었으니까.
문제는 이게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지 알 수가 없다는 것. 이번에 꿈에 나온 게 마지막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만큼 그녀가 알려준 검술을 아직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을 때, 그걸 확실하게 익혀 버리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에게는 시간과 장소가 필요했다. 그 검술을 익 힐 수 있는……………. 부두목은 그에게 그걸 제공해 줄 수 있었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바로 달려가서 두목을 없애 버리는 거야. 고블린 무리를 소탕할 때는 일거에, 단 한 마리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처리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 상대에게 시간을 줘서는 안 돼.”
“그렇게까지……?”
“일단 마음을 정했으면 최대한 빨리 실행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역공을 당하게 된다네. 자네도 여기까지 오면서 조금쯤은 느꼈을 게 아닌가.” 공감이 가는 얘기였다.
방에서 쫓겨난 루크는 찜찜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부두목이 잭과 얘기를 나누는 데 있어서 굳이 자신을 내쫓아야만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뭔가가 있어………..?
두목은 소탈하고 대범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아주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부하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었다. 조직 내 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것 같은 낌새만 보여도 그 싹부터 철저하게 짓밟아 버렸다. 지금껏 두목과 부두목 간의 관계가 돈독할 수 있었 던 것도 다 부두목이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부두목은 야심도 없는, 두목만을 향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방금 전의 그건 뭐지?’
부두목의 세력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잭처럼 막강한 실력자가 부두목을 밀어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놈은 혼자서 여왕벌의 둥 지를 쓸어버렸을 정도로,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무력(武力)을 지닌 녀석이니까.
그런 녀석과 부두목이 밀담을 나눈다? 부두목이 왜 이곳에 왔는지는 루크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부두목은 자신을 밖으로 나가라고 했을까? 왠지 수상쩍은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루크는 허겁지겁 본거지로 달려갔다.
“두목! 두목님! 큰일 났습니다!”
요란을 떠는 루크의 모습에 두목이 잔뜩 긴장했다.
“뭔데 그러냐? 설마…, 샐러맨더 파에서……………?”
“아니, 그게 아니라, 부두목이 잭을 포섭해서 모반을 획책하는 것 같습니다.”
루크는 두목이 발끈해서 곧바로 부두목과 잭을 처치할 계획을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두목은 콧방귀를 뀌며 손을 내저었 을 뿐이었다.
“별소리를 다 듣겠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네 녀석 할 일이나 해.”
“하지만 두목,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니까요.”
“그래, 뭐가 이상했는데?”
“밀담을 나눌 게 있다면서 저보고 먼저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녀석을 회유하러 간 건 저도 다 알고 있는데, 뭘 숨길 게 있다 구요.”
두목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잭과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얘기를 나누려면 단둘이서 얘기하는 게 더 나았다고 판단한 모양이지. 네 녀석은 쓸데없는 데 머리 쓰지 말고 샐러 맨더 쪽 동태나 좀 살펴봐. 그것들이 그냥 당하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저…, 그래도…
“네가 신경 써 주는 건 갸륵하다만, 할 소리가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소리가 있는 거야. 알겠냐?”
“알겠습니다, 두목.”
두목의 부두목에 대한 신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런 신뢰를 결정적인 증거도 없이 사소한 의심 하나만을 가지고 뒤흔든다는 건 역시 무리가 있었다. 루크는 자신의 말을 전혀 귀담아 주지 않는 두목에게 더 이상 말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느끼자 조용히 물러나는 수밖에 다른 도리 가 없었다.
‘병신, 나중에 내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할 날이 올 거다.’
하지만 눈치 빠른 루크조차도 그날이 그렇게까지 빨리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부두목은 잭을 데리고 곧바로 두목의 은신처로 갔다. 예전에 루산나의 안내를 받아 찾아갔던 바로 그곳이었다.
똑똑…, 똑…, 똑똑…….
곧이어 철문 위쪽에 네모난 작은 구멍이 열리며 두 개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빨리 문 열어!”
그러자 작은 쪽문이 열리는 대신, 커다란 대문이 크그그 하는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린다.
“다녀오셨습니까, 부두목님.”
부두목은 가볍게 답례하며 사내들을 향해 물었다.
“두목께서는 안에 계시냐?”
“예.”
건물 안으로 들어선 부두목은 라이를 곧장 두목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야.”
똑똑!
문을 두드리자 방 안에서 두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부두목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목이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게나. 그래 갔던 일은 잘…….”
그런데 부두목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오는 잭을 보자 두목의 안색이 흠칫 굳는다. 방금 전에 루크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부두목이 배 신하려 한다는……
하지만 그는 지금도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어? 잭도 함께 왔군. 그래, 어서 오게.”
두목은 라이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내가 실수했네. 내 용서를 받아 주게.”
“두목, 우리가 이리로 온 건 두목을 없애기 위해섭니다.”
일순 두목의 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두목과 잭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두목의 얼굴에 서서히 절망감이 떠오르 기 시작한다.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었기에 호위도 세워 놓지 않은 상황. 하기야 저 잭이라는 녀석의 실력을 생각한다면 완전무장한 호위 몇 명이 경호하고 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반항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힐 것을 잘 알기에 두목은 일단 인정에 호소하기로 했다. 저 능구렁이 같은 부두목 놈에게는 통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의 뒤에서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잭이라는 녀석의 마음을 어떻게든 흔들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네가 이런 식으로 나를 배신할 줄은 정말 몰랐다.”
“나도 두목과 이런 식으로 헤어지게 될 줄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소. 내 예상보다 10년쯤은 빠른 것 같소.”
“그렇게 두목 자리가 탐나던가?”
부두목은 씁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두목 자리가 탐난 건 아니었소. 다만 마음 편히 살고 싶었을 뿐이오.”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 내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큭큭. 두목처럼 자기밖에 모르고, 의심 많은 사람과 함께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뭘 하려면 우선 이걸 두목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혹시 나를 의심하지는 않을까 걱정부터 해야 했습니다.”
“흥! 그렇게 쥐새끼처럼 숨죽이고 살다가 잭이 조직에 들어오니 생각이 바뀌었다?”
“잭은 내 계획을 앞당겨 주었..”
지루한 말싸움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라이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두목의 말에 반박하는 부두목 쪽으로 이동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가 반론을 제기하는 부두목 쪽으로 시선을 옮긴 그때였다. 예의 그 싸늘한 느낌이 두목 쪽에서 쏘아져 들어왔다.
라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 기운은 살기(殺氣)! 두목이 부두목과 말싸움을 하는 척하면서 책상 밑으로 은밀히 준비했다가 던진 회심의 일격이었다. 워낙에 서로 간의 거리도 가까웠던 데다, 감정이 서서히 고조되고 있던 부두목이 막 대답하는 그 순간을 노려 던진 것이었기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 다.
두목이 노린 것은 부두목이었다. 부두목과 대화해 본 결과, 두목은 부두목만 죽이면 이 모든 사태가 진정될 것을 확신했다. 잭은 그저 부두목의 꼬임 에 빠져 따라온 것일 뿐, 자신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는 듯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두목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챙!
부두목의 뒤쪽에 서 있던 잭이 한걸음 성큼 앞으로 내디디며 발검과 동시에 휘둘러 부두목을 향해 날아가던 비도를 쳐서 날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부두목이 발검하여 공격 직후 거의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두목의 이마를 장검으로 꿰뚫어 버렸다. 두목의 머리를 관통하여 뒤통수를 뚫 고 삐죽이 솟아나와 있는 피 묻은 칼끝. 멍한 얼굴로 앉아 있던 두목의 상체가 서서히 무너진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시작되고, 또 끝나 버린 공방전이었다.
두목을 해치우고 나서 부두목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너무 쉽게 성공하다 보니, 두목의 시체를 보며 승리의 기쁨보다는 허망함을 먼저 느낀 것이 다. 부하가 행여 배신이라도 할까 눈에 불을 켰던 두목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손쉽게 목이 날아가는 걸 보면, 두목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 그런 자리를 위해 이렇게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니………
이때 들려온 잭의 목소리가 그로 하여금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해 줬다.
“이런 망할 새끼! 끝까지 치졸한 수를 부리고 있어!”
‘두목은 과연 치졸했던 것일까? 하기야, 부하들의 배신이 두려워서 몸을 사린다면, 나 또한 두목과 똑같은 최후를 맞게 되겠지. 나는 절대 당신 같 은 삶을 살지는 않을 거요. 나에게는 꿈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때 잭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댁의 말대로 두목을 죽이긴 했는데,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되는 거요?”
설마 조직원들을 모두 다 죽이면서 여기를 탈출해야 하는 그런 개 같은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하고 묻는 것이리라.
부두목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다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어찌 되었건 나도 현재는 당신과 연관이 있다 보니 알고 싶군요.”
“이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자네는 샐러맨더 파의 수뇌부를 처치해 줘. 할 수 없다고는 하지 마. 여왕벌의 둥지에서 살아서 나온 것만 봐도 이 일을 수행하기에 실력은 충분하고 넘치는 게 확실하니까.”
“여왕벌의 둥지보다 훨씬 더 많다면 아무리 나라도………….”
“아,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이곳의 지부가 괴멸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지원세력을 출발시켰을 테니까. 이곳 사정을 정확히 모르는 한 샐러맨 더 파의 두목이 직접 오지는 않을 거야. 너무 위험하거든. 잘돼 봐야 부두목 정도가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오겠지.”
“흐음…….”
얼마 전에 루크에게 속았던 소리와 뭔가 비슷하다고 느끼며 라이가 찝찝함을 감추고 있자, 부두목이 급히 말을 이었다.
“자네로서는 이 일을 수행할 수밖에 없어. 두목의 지시대로 행한 것밖에 없긴 했지만, 자네가 샐러맨더 파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버린 것은 사 실이니까. 만약 여기서 자네가 손을 털고 싶다고 해도 샐러맨더 파에서 자네를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을걸.”
“한번 발을 담았으면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인가……?”
“뭐, 그런 셈이지.”
“어쩔 수 없지.”
검술을 익힌 이래 라이는 심적으로 많이 강해졌다. 예전이었다면 참고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른 것이다.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라이가 방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부두목이 급히 불러 세웠다.
“이봐, 이봐. 지금 어디로 가려는 겐가?”
“결자해지(解之)를 하라면서?”
<묵향> 35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