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4권 7화 – 내 실력이 이 정도였어?

내 실력이 이 정도였어?

5일 후, 하천을 따라 내려가던 라이는 다란툼 영지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요새도시 델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새도시답게 주 병력이 상주하는 내 성(城)은 아주 튼튼하게 건설되어 있었고, 경비 또한 삼엄했다. 하지만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외성(外城)은 내성에 비해 높이도 낮 았고, 경비 또한 그리 철저하지 않았다. 외성의 높이는 겨우 4미터 정도. 이 정도라면 경비병들의 눈만 조심한다면 침투하기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외성을 몰래 넘어들어온 라이는 인적을 피해 냄새나는 하수도가 흘러 지나가는 다리 밑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고 하루 종일 곯아떨어졌다. 여관 같 은 데서 잠자기에 충분한 돈이 있긴 했지만, 불심검문 같은 데 걸릴지도 모른다는 우려 탓에 노숙을 택한 것이다.

다음날 오후 늦게서야 깨어난 라이는 주변을 살피기 좋은 노점식당을 찾아갔다. 음식을 허겁지겁 먹으면서도 주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은, 혹여 경비병들이 그의 주변으로 올 것을 염려한 탓이다. 하지만 하루 정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느낀 건, 우려한 것과 달리 마을 내부를 순찰하러 다 니는 경비병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마음을 조금씩 풀어놓을 수 있었다.

델카는 다란툼 영지 북쪽의 관문도시답게 마을의 규모가 꽤 컸고, 사람들은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산맥에 위치한 만큼, 독특한 물건들을 취급 하는 상점들이 많았다. 상점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 중 라이의 눈길을 끈 것은 각종 몬스터로부터 뽑아낸 부산물들이었다. 특이한 생김새의 가죽, 그중 어떤 것은 너무나 두껍고 딱딱해 과연 칼이 들어가기나 할까 생각될 정도였다. 그리고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뼈, 이빨, 발톱 등등.

주민들의 상당수가 사냥을 주업, 혹은 부업으로 하고 있는 만큼 활이나 창 따위로 무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대장간에서 취급하는 것도 농 기구보다는 각종 사냥 도구나 무기들이 더 많았다. 색다른 모양의 화살촉이라든지 쇠뇌, 투척용 창…….

이곳을 벗어나 고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위조 신분증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어떻게 구해야 할지 고민하다 무작정 거리로 나선 라이는 원래 목적과 달 리 구경하는 재미에 정신이 팔려 이리저리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그런 탓에 웬 사내놈들이 어느 순간 자신을 빙 둘러싸기까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이봐, 형씨. 괜시리 칼침 맞지 말고, 저쪽으로 함께 가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구경하던 라이에게 웬 사내 하나가 비릿한 조소를 띤 어조로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순간, 라이의 눈은 험상궂게 생긴 사내의 얼굴과 허리께를 빠르게 훑었다. 사내가 입고 있는 낡아빠진 망토 한 귀퉁이가 위로 삐죽 솟아올라 있었다.

그 속에 날카로운 대거 (Dagger)가 숨겨져 있을 건 뻔한 사실. 라이는 재빨리 자신의 주위를 빙 둘러봤고, 사내와 한 패거리인 듯한 놈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사내의 패거리를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었다. 짐짓 딴청을 피우고 있긴 했지만 자신을 둘러싸고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눈빛과 냄 새나는 허름한 복색만 봐도 뻔했으니까.

단검을 뽑아들고 대항을 해 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 전에 사내의 대거가 먼저 자신의 배를 쑤실 게 뻔했다. 그렇다고 재빨리 움직여 사내와의 거리 를 어느 정도 벌린 후에 단검을 빼는 것도 힘들었다. 녀석의 패거리들이 어느새 자신의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뒤편에 있던 놈들 중 하나가 라이의 허리춤에 꼽혀있던 숏 소드를 검집 채로 가져가 버렸다. 게다가 주변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을 이용해 능청스럽게도 라이에게 바짝 붙어 또 다른 무기는 없는지 몸을 더듬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라이는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가급적이면 협조적 인 자세로…………….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라이는 지금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껏 사람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워 본 적이 없다. 그가 지닌 실전 경험은 전부 몬스터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은 모두들 라이보다 한 수쯤 위인 노련한 사람들뿐이었고.

라이는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또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녀석들의 실력이 어떤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기에 긴장감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특히나 그의 뒤통수를 치고 달아난 대장이 남겨 준 강렬한 기억은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해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처음 봤을 때 인상이 만만해 보인다는 그 이유만으로 언제든 대가리를 도끼로 찍어 버릴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차 있던 적도 있었지 않은가. 만약 그때 생각대로 행동에 옮겼더라면 지금쯤 저 산맥 어딘가에서 시체로 썩어가고 있을 게 뻔했다. 그만큼 대장의 실력은 뛰어났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녀석들은 몸 여기저기에 흉터가 나 있는 험상궂은 얼굴들이다. 폭력에 단련된 노련한 표정과 떡 벌어진 어깨. 라 이를 포위하고 있는 다섯 명 중 라이보다 덩치가 작은, 아니 덩치가 비슷한 사람조차 단 한 명도 없다. 특히 앞에서 칼침을 놓을 듯 이죽거리며 협박 을 하고 있는 사내는 라이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는 더 커 보였고, 어깨너비도 한 배 반은 더 넓어 보였다. 라이로서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새꺄. 저쪽으로 가. 어허~, 동작 봐라. 빨리 안 가?”

사내는 고갯짓으로 인적이 드문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라이로서는 녀석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비록 무기는 뺏겼지만, 지금껏 그 가 겪었던 수많은 고난들 덕분인지 공포로 정신줄을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싸가지 없는 여자로부터 뺏은 가죽갑옷까지 입고 있지 않은가. 라이는 끌려가면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려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왜 저놈들이 나를 끌고 가려는 거지? 내가 이 마을에 들어온 건 어젯밤이었는데, 저것들이 나를 어떻게 알고……….??’

현재 라이가 두르고 있는 망토는 여성용이라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탓에 눈에 확 띄는데다가, 한눈에 고가의 제품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 을 정도로 재질이 고급스러웠다. 이걸 본 녀석들이 자신이 돈 많은 집안의 자식인 줄 알고 덮친 것이리라. 그것 외에는 달리 생각할 만한 다른 이유가

없었다.

물론 품속 깊은 곳에 숨겨 둔 돈주머니 안에 꽤나 많은 돈이 들어 있는 게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그걸 녀석들에게 건네준다고 해서 그냥 순순히 놓 아줄까? 설혹 무사히 놔준다고 해도 돈주머니를 건네줄 수는 없었다. 자신도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돈이 꼭 필요했으니까.

이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녀석들의 소굴로 끌려들어 간 후에는 너무 늦어 버린다.

인적 없는 골목 안으로 들어와 녀석들이 방심을 했는지 포위망이 느슨해지자, 라이는 순간적으로 앞서 가는 녀석을 밀치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마 음 같아서는 이대로 계속 도망치고 싶었지만, 혹시 놈들이 뒤에서 단검이라도 던진다면 목숨을 내놔야 했다. 라이는 재빨리 뒤로 돌아서서 방어 자세 를 잡았다.

아는 것이 많은 게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해야 할까?

라이가 맨손 격투술을 배워 본 적이 없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초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검술 대련을 하는 와중에 방패로 상대를 밀거나 가격 하기도 했고, 기회만 있으면 팔꿈치로 치거나 무릎, 혹은 발로 차기도 한다. 특히 격투술에 익숙한 사람들 중에는 코끝이 뾰족한 판금장화를 착용하 는 것은 물론이고, 갑옷의 팔꿈치나 무릎에까지 스파이크를 달기도 했다. 그런 것에 한 번이라도 찍히면 목숨이 날아가는 것이다.

아는 게 많은 만큼, 적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는 다양한 경로들을 다 예측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하려고 하다 보니 라이로서는 머릿속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나마 좁은 골목길이라는 지형은 라이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좋은 장소였다. 세 사람 정도가 겨우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갈 수 있을 정 도로 좁은 골목! 그 탓에 상대는 숫자가 다섯이나 됨에도 불구하고 라이를 포위하지 못하고 있었다.

1대1, 잘해야 1대2 정도만이 가능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내들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런 상대방의 여유가 라이를 더욱 긴장 시키고 있었다. 방금 전에 라이의 몸을 더듬어 비무장이라는 것을 확인했던 털북숭이 사내놈이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허 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라이에게 겨누며 이죽거리는 어조로 위협했다.

“애새끼, 정말 사람 귀찮게 만드네. 그냥 순순히 끌려가지, 감히 반항을 해?사지 중 한두 군데를 잘라 병신이 되면 두 번 다시 도망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겠지. 이리와, 새꺄! 크흐흐흣……………”

살기 어린 털북숭이 사내의 표정에 소름이 쫙 끼쳤다. 오늘 여기서 자칫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라이의 긴장감에 후들거리던 손발이 차츰 진정되기 시작했다. 만약 죽게 된다면 절대 그냥 죽지는 않겠다는 독기가 치솟은 것이다.

그런데 곧이어 라이는 어이가 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털북숭이 사내가 공격을 한답시고 단검을 휘둘렀는데, 동작이 쓸데없이 너무 컸을뿐더러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이의 경험이 일천해서 그렇지, 뒷골목을 배회하는 깡패들의 수준이라고 해 봤자 뻔한 것이다. 5급 용병패를 지급받았을 정도의 실력을 인정받은 라이가 봤을 때, 웬만한 깡패들의 실력이라고 해 봐야 어린애 수준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허, 이 새끼 봐라. 감히 어르신의 검을 피해? 적당히 손만 봐주려 했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넌 오늘 죽었어!”

털북숭이 사내는 자신의 공격을 라이가 쉽게 피하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얼굴이 붉게 변해 미친 듯이 단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어? 뭐야. 혹시 나를 방심시키려고 일부러 실력이 없는 척하는 건가?

한동안은 털북숭이 사내의 공격을 피하기만 하며 지켜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털북숭이 사내의 실제 실력이 저것밖에 되 지 않는다는 것을.

기가 막혔다. 저런 놈들을 상대로 방금 전까지 자신이 바짝 쫄았다는 것에.

골목길이라는 지형적인 페널티로 인해 잘해 봐야 1대 2 정도밖에는 덤벼들 수 없는 상황! 녀석들은 도망칠 수 없게 라이를 골목길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런 허접한 실력들이라면 이런 좁은 골목길이야말로 라이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인 것이다.

“개뿔도 안 되는 실력으로 감히 나를 병신을 만들겠다고 협박을 해!”

라이는 일부러 틈을 보여 털북숭이 사내의 공격을 유도한 뒤 단검을 잡고 있는 사내의 손을 붙잡아 앞으로 확 끌어당겼다.

“어, 얼라! 이게 무슨…….”

당혹감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의 눈을 보며, 라이는 털북숭이 사내의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세차게 가격했다. 퍽!

그 한 방에 털북숭이 사내는 철푸덕 쓰러지더니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동료가 단 한 방에 뻗어 버리는 것을 보고 뒤에서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고 있 던 사내들의 표정이 흠칫 굳는다.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어리숙해 보이지만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어쭈, 제법 한가락 한다는 거야? 아니면 운이 좋아 한방 제대로 들어간 건지도 모르지.”

“시끄럿! 놈이 도망가지 못하게 계속 공격해. 설사 실력이 있는 놈이라고 해 봐야 쪽수로 밀어 버리면 돼!”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골목길이 좁은 탓에 제대로 된 포위망을 형성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직 어려 보이는 라이의 얼굴 때문인지 사내들은 큰 긴 장감 없이 주저하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휭, 휭.

악다구니를 쓰며 검을 휘두르긴 했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사내들의 공격을 피해 라이의 주먹이 차례로 꽂혀 들기 시작했다.

퍽, 퍽퍽!

순식간에 세 명의 사내가 라이에게 맞아 땅바닥에 나뒹굴었고, 골목길 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망을 보고 있던 사내 하나만 남았다. “너도 덤비려면 이리와.”

이제 느긋한 표정을 넘어서서 사내들을 때려잡는데 재미까지 붙인 라이가 까딱까딱 손짓까지 했지만, 핼쑥하게 질린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빼 버렸다.

“덩치는 제일 큰놈이 겁은 많아서………….”

이번 접전에서 제일 놀란 것은 아마 라이일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강하다는 것을 지금 처음 알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한 놈은 도망쳤고, 넷이 남아 있다. 모두 기절해 있긴 했지만………….

라이는 놈들을 깨워 심문을 하기에 앞서 녀석들이 떨어뜨려 놓은 자신의 단검부터 주워 허리에 찼다. 기절한 녀석들 중 하나를 깨우려던 라이는 생 각을 바꿔 일단 녀석들의 장화를 뒤져 대거를 뽑아들었다. 장화 속에 숨기기 좋도록 칼날받이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어 놓은 기형적인 형태다.

위협용 소품이 갖춰지자, 라이는 기절해 있는 놈들 중 하나를 깨웠다.

“이봐, 일어나. 일어나라고!”

흔드는 정도로는 사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이번에는 세차게 뺨을 후려쳤다.

짝짝!

이윽고 놈이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부여잡긴 했지만 아직 제정신이 아닌지 멍한 표정이다.

“이, 이게 무슨……?”

“이봐, 한 가지만 좀 물어보자.”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린 깡패 녀석은 자신의 목에 시퍼런 대거의 끝이 왔다 갔다 하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허억!!”

“뭐 좀 물어보자고.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

“뭐, 뭘 물어보겠다는 거냐?”

“혹시 너희 조직에서 위조 신분증 같은 거 취급 하냐?”

사내는 라이가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일단 부정부터 하고 봤다.

“그, 그런 걸 할 리가 없잖아. 우린 그저 어리숙한 놈들을 골라 푼돈이나 뺏는 그런 놈들이라고.”

“혹시 위조 신분증 같은 거 취급하는 조직이나 사람, 알고 있는 거 있어?”

사내가 눈치만 보고 대답을 하지 않자 라이는 대거를 녀석의 코앞에 들이대며 으르렁거렸다.

“죽고 싶으면 지금처럼 눈치만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좋아. 어차피 너 말고도 얘기해 줄 놈은 여기에 셋이나 더 있으니까.” 순간 녀석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구르더니 아직 기절해 자빠져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고는 흠칫해서 라이 쪽으로 재빨리 돌아왔다.

“빨리 말 안 해?”

그러자 녀석이 황급히 대답했다.

“우, 우리들 같은 좀도둑이 그딴 걸 취급하긴 힘들지. ‘샐러맨더(Salamander)’ 파라면 취급하고 있을지도 몰라.”

샐러맨더 파는 이 마을에서 가장 강력한 폭력조직이었다. 나름 시장 바닥에서 험하게 굴러먹던 사내였기에 라이의 협박에 순순히 대답하기보다는 경쟁 조직에 라이의 관심을 슬쩍 떠넘긴 것이다. 하지만 라이는 그걸 알 수가 없었다.

“샐러맨더 파 녀석들은 어디에 있는데?”

“우, 우리 같은 쫄짜들이 뭘 알겠는가. 한 번 생각을 해 보게. 이쪽 바닥의 일이란 게 면상을 제대로 까고 점포를 차려 놓고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흠, 그럼 혹시 놈들인지 알아볼 수 있는 표식 같은 거라도 없어? 아니면 잘 다니는 곳이라든지.”

잠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궁리하던 녀석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손바닥을 탁 치며 소리쳤다.

“그래, 문신! 놈들은 문신을 하고 있어. 조직 이름처럼 손목에 붉은 도마뱀 문신을 새겨 놓고 있지.”

“붉은 도마뱀 문신이라고?”

“그, 그래. 아마 이 정도 크기의 도마뱀 문신이야.”

사내가 손가락을 벌려 문신의 크기를 알려주자 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거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런 라이의 행동에 이제는 죽지 않을 거라 생각 했는지 사내는 활짝 웃으며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알려줘서 고맙다.”

“뭘…….”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라이의 주먹이 녀석의 관자놀이를 향해 냅다 내리꽂혔다.

퍽!

사내를 다시 기절시킨 후, 라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환히 웃었다. 저렇게 덩치가 크고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수 있을 줄이야. 그것도 비무장인 상태로. 라이는 그동안 못 미더웠던 자신의 실력에 어느 정도는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워낙에 쟁쟁한 놈들만 가까이 있다 보니 한없이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좋았어. 이제 샐러맨더 문신을 하고 있는 놈만 찾아내면 되는 거로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라이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

“저.. 저놈이야.”

손가락 끝으로 라이를 가리킨 것은 몇 시간 전에 라이에게서 도망친 바로 그 덩치 좋은 사내였다. 하지만 그가 라이를 가리키기도 전에 상대는 이미 라이를 향해 표독스런 시선을 날리며 째려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상인을 통하지 않고 사냥꾼에게서 고급 가죽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겠다는 생각으로 일행과 잠시 떨어져 있던 자신을 기절 시킨 뒤 옷을 빼앗아 간 천하의 개망나니 같은 놈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현재 라이가 입고 있는 옷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애지중지 하며 아껴 입고 있었던 바로 그 옷이었다.

“손가락질하지 마. 이미 찾았으니까.”

황급히 손을 내리는 사내를 향해 늘씬한 미녀는 이를 으드득 갈아붙이며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요 며칠 동안 얼마나 분하고 열이 받는지, 잠도 제대로 자질 못했다. 잘 만났다. 이 천하의 불한당 같은 놈.”

“생긴 건 저렇게 어리숙해 보여도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놈이야. 한순간에 내가 데리고 있던 애들 넷을 때려눕혔다니깐. 루산나, 그러니 일단 두목님께 말해서…………….”

그러자 라이를 씹어 먹을 듯 노려보고 있던 루산나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쏘아붙였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내가 해치울 테니까. 겁이 난다면 넌 여기서 지켜보고만 있으라고.”

말을 마친 그녀는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며 라이를 향해 조금씩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서로 간의 거리가 지척으로 좁혀졌을 때, 그녀는 품속에 손 을 넣어 자신의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건 코르크 따개처럼 T자형으로 생긴 작은 송곳이었다.

엄지손가락 굵기의 손잡이는 꽉 쥐고 힘을 주기에 적합했고, 중지와 약지 사이로 빠져나와 있는 뾰족한 강철침은 가죽갑옷쯤은 손쉽게 꿰뚫고 들어 간다. 판금 갑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다면 모를까, 가죽갑옷이나 사슬갑옷을 착용한 상대를 기습하는데 있어서는 비수나 단검보다도 훨씬 효용성이 좋았다. 게다가 강철침 끝에는 치명적인 독약까지 발려 있으니 일단 찔리기만 하면 끝인 것이다.

라이의 등 뒤로 다가서는 순간 루산나는 송곳으로 상대의 겨드랑이 아래쪽, 옆구리 부분을 푹 찔렀다. 그녀가 노린 곳은 가죽갑옷의 앞판과 뒤판이 가죽끈으로 연결되는 부위였다. 상대가 자신의 체구에 맞지도 않는 갑옷을 억지로 껴입으려면 그 틈이 훨씬 더 넓게 벌어져 있을 건 뻔한 이치. 두목 이 선물한 아끼던 갑옷에는 아무런 흠집도 남기지 않고 놈을 없애버릴 수 있는 최고의 포인트였던 것이다.

폐에 구멍이 뚫리면 흉강(胸腔)으로 공기가 새 나간다. 호흡을 하기 위해 폐가 공기를 잔뜩 머금으려면 팽창할 만한 공간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공간이 폐에서 빠져나간 공기로 채워진 탓에 폐가 팽창하지 못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질식사하게 된다는 게 정답이었다.

그런데 이때 루산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그 순간 상대가 번개처럼 뒤로 몸을 돌리며 송곳을 쥔 그녀의 손 을 턱 하고 잡아 왔던 것이다. 순간, 루산나의 얼굴이 두려움에 창백하게 질렸다.

“이, 이거 놔!”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느낌. 살기를 감지한 것이었지만, 지금껏 살기를 느껴 본 적이 없었던 라이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왜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까? 주변은 시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한가롭게 상인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혀 위험하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왜? 그냥 무시하고 걸 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 뒤통수가 간질거리는 듯한 느낌을 참지 못한 라이가 고개를 뒤로 돌려 힐끗 쳐다보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뭔가를 들고 찌르려고 하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웬 미녀의 모습을.

라이는 한순간에 벌어진 이 상황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뭔가를 찌르려는 여자를 본 순간 어느새 몸이 움직여 여자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게 아 닌가. 뭘 어떻게 해야겠다고 전혀 의식조차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내 몸놀림이 이렇게 재빨랐던가? 나도 모르게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 듯한 기분까지 들 정도니.’

“이거 !”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몸부림을 치는 여자의 손에서 라이는 일단 그녀가 쥐고 있던 무기부터 빼앗았다. 상당히 특이한 형태의 무기였다. 길쭉한

송곳처럼 생긴 이런 걸로 사람을 찌른다고 죽겠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뾰족한 강철침 끝 부분이 퍼렇게 물들어 있는 걸로 봐서 어쩌면 독이 발라져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라이가 무기를 뺏고, 또 그걸 살펴보느라 잠시 신경이 분산되어 있는 틈을 노려 여자는 붙잡혀 있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라이는 일단 무기부터 다른 사람들이 줍지 못하게 근처 지붕 위쪽으로 던져 버렸다. 독이 발라져 있을지도 모를 흉기를 품속에 넣고 다니는 건 너무 위험했기 때 문이다.

‘누군데 날 다짜고짜 저런 송곳으로 공격하려 했던 거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낯이 꽤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라이는 곧바로 그 느낌을 무시했다. 난생처음 와본 이 마을에 자신이 아는 여자 가 있을 턱이 없었으니까. 그것도 저렇듯 눈에 확 띄는 미녀가.

이때, 그의 뇌리에 몇 시간 전에 자신을 털어먹으려고 달려들던 깡패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돈푼 꽤나 있는 집의 자식으로 오해했는지 골목길로 몰 아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어진 난투. 처음에 무기까지 빼앗겨 맨손이었던 라이는 검까지 들고 설쳐대는 녀석들을 아주 손쉽게 때려잡았다. 그것도 네 놈이나.

‘아까 그 깡패들과 연관된 여자인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을 안에서 다짜고짜 자신을 살해하려고 하는 여자를 만난 것이다. 짚이는 거라고는 얼마 전에 깡패 넷을 박살 낸 것 외에는 없다. 어젯밤에 몰래 성벽을 넘어들어온 이래 그와 충돌을 일으킨 건 그들밖에 없었으니까.

어찌 되었든 그냥 넘기기에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뭘 잘못했기에 독이 발린 것 같은 송곳으로 몰래 찌르려 한단 말인가. 게다가 아주 날카로 웠던 강철침으로 미뤄 봤을 때 만약 찔렸다면 절대 가벼운 상처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받은 대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한 것도 바로 얼마 전이다. 이 를 으드득 갈아붙인 라이는 여자를 붙잡아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는 마음으로 그녀의 뒤를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루산나는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염집 아가씨처럼 단출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에 비해 그녀의 뒤를 쫓고 있는 라이는 발이 제대로 들어가지 도 않을 정도로 꽉 끼는 가죽바지, 묵직한 가죽갑옷, 더군다나 그 위에 두툼한 망토까지 걸치고 있는 상황이다.

어릴 때부터 뒷골목에서 성장한 루산나였기에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를 지닌 데다, 주변 골목길의 지리까지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등 뒤로 미친 듯 뒤쫓는 사내까지 있다 보니 자신이 이렇게 빠르게 달릴 수가 있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놀라운 속도로 재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 안 서! 이 망할 년아!”

“헉헉!!”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죽어라 도망치고는 있었지만, 저 흉악한 놈은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쫓아올 것만 같았다. 아무 원한 관계도 없었는데 처음 본 자신을 때려눕히고 옷을 벗겨 간 게 바로 저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이 공격하려는 걸 놈이 눈치채고 무기까지 빼앗기지 않았는가.

만약 붙잡힌다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몇 대 맞고 끝나는 게 아니라 목이 잘린 시체가 될지도…………. 그런 생각에 공포에 질린 그녀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도와줄 만한 사람을 찾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이리로 데리고 온 한스 녀석은 벌써 눈치를 채고 튄 모양이다. 덩치는 곰만 한 게 겁은 왜 그렇게도 많은지. 이 위기만 벗어나게 되면 절대 가 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한스 녀석이 두목에게 이 상황을 전해 준다면 정말 좋을 텐데.

몇 분간 전력으로 벌어진 추격전은 뒤를 쫓던 라이가 루산나의 머리카락을 낚아채면서 끝이 났다. 바람 따라 눈앞에서 나부끼고 있는 긴 적갈색 머 리카락은 커다란 유혹이었고, 그걸 마다할 라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꺄악!!”

“이게, 서라고 하면 설 것이지!”

머리털이 몽땅 뽑힐 것 같은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공포에 질려 숨을 헐떡거리며 털썩 주저앉아 버리는 루산나. 그러면 서 그녀는 자신에게 날아올 주먹에 대비해 온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사내는 주먹질부터 하는 게 아닌, 자신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눈치를 살피던 루산나는 자신과 그렇게 격렬한 추격전을 벌였음에도 사내가 땀방울은 고사하고,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는 것에 깜짝 놀 랐다. 자신이 입고 있었던 가죽갑옷은 모험가들이 입는 실전용으로 제작된 것이기에 그 무게가 상당했다. 그런 갑옷을 입고 몇 분간 전력질주를 했음 에도 전혀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을 수 있다니, 그제서야 루산나는 자신이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망할 년, 다짜고짜 흉기를 휘두른 주제에 뭘 잘했다고 째려봐!”

받은 대로 돌려주겠다며 마음을 먹긴 했지만 겁에 질린 여자를 때리기도 그렇고, 그냥 없던 일로 하자니 조금 전에 봤던 흉기가 떠올라 화를 참기 힘 들었다. 자연히 라이의 얼굴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정제되지 않은 흉폭한 살기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 구르고 키메라 오크들과의 치열했던 전투를 벌이며 생긴 거친 살기는 조직생활을 한다지만 여자인 루산나로서는 견디기 힘들 만큼 극심한 공포를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두려움에 질린 루산나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힘겹게 입을 놀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을 것만 같았기에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었다.

“나, 나를 해치면 우리 두목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블랙울프(Black Wolf) 파의 조직원이란 말이에요. 살아서 이 마을 을 떠나고 싶다면 나를 그냥 놔주는 게 신상에 좋을 거예요.”

사실, 루산나는 블랙울프 파에 속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마을 뒷골목의 태반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 조직이 블랙울프 파였기에 그렇게 둘러댄 것 이다. 혹시라도 사내가 블랙울프 파의 악명을 안다면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하지만 루산나는 몰랐다. 급하게 돌린 얄팍 한 잔머리 때문에 자신의 발목이 잡히게 될 줄은.

위조 신분증을 만들기 위해 조직을 찾고 있었던 라이로서는 뜻밖의 아주 반가운 소리였다.

“호오, 그거 아주 좋은 일이군. 이봐, 네가 소속된 조직이라는 곳으로 나를 안내 좀 해 줘야겠어.”

“거, 거기는 왜…………?”

겁먹으라고 블랙울프 파의 이름을 사칭했는데 상대가 오히려 반갑다는 듯 환히 웃으며 좋아라 하자 루산나는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가 먹었냐? 너희 조직이 있는 곳으로 날 안내하란 말이야. 그곳에 의뢰할 일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