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5권 6화 – 잘못 걸렸다!

잘못 걸렸다!

소년은 라이와 소녀를 시장 안의 허름해 보이는 여관으로 안내했다.

“여깁니다. 어르신.”

소녀는 지부장이라는 인물이 잭이라는 사내에게 얼마나 굽실거렸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제법 괜찮은 여관을 내심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낡고 허름한 여관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이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잘 지어진 깔끔한 건물보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낡은 건물을 선호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통해 누가 다가오는지 바깥의 동정을 살피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건물 1층은 식당이었고, 그 위로 2층부터 4층까지가 여관인 모양이다. 창밖에서 내부를 힐끗 들여다보니 식당 안은 꽤 많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요새도시 델카에서 라이가 묵었던 여관도 이런 모습이었다. 식당에 손님들이 많은 걸 보면 허름한 외관에 비해 음식 맛이 그리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어차피 며칠 묵지도 않을 건데…?

소년은 여관까지 안내해 준 후 곧바로 돌아가 버렸다. 요새도시에서 라이를 안내했었던 당코…, 아니 루크라는 놈이 라이의 숙박비를 모두 계산해 줬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대접이다. 이곳 지부장이 라이의 실력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지금껏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었던 라이였기에 전혀 부당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들어가자.”

라이는 소녀와 함께 1층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점원인 소녀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두 분이신가요? 이쪽에 자리가 있어요. 이리로 앉으세요.”

점심 식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저녁 식사라고 하기에는 꽤나 이른 시간이었지만 놀랍게도 식당 안에는 꽤 많은 손님들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라이는 점원을 따라가 그녀가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뒤따라 온 소녀를 향해 손짓과 함께 자리를 권했다.

“뭐 하고 있어? 이리 와서 앉아.”

“예, 어르신.”

겁에 질린 눈빛으로 라이를 힐끔힐끔 훔쳐보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는 소녀. 라이를 만난 후, 단둘이 되어본 것은 이게 처음이다. “식사는 어떤 게 되지?”

“이거하고 이거, 그리고 이거 빼고는 다 돼요. 재료가 떨어져서…………..?”

라이는 배가 몹시 고팠기에 일단 이것저것 맛있을 만한 걸로 몇 가지를 시켰다. 점원이 주문을 받고 떠난 후, 라이는 소녀를 향해 물었다.

“지금까지 이름을 물어보지도 않았군. 이름이 뭐냐?”

“리・・・ 릴리라고 합니다. 어르신.”

“어르신은 무슨, 그냥 잭이라고 불러.”

라이의 말에 릴리는 난감한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름을 부르기에는 어르신께 너무, 실례되는 거 같아서…………….”

“괜찮아. 내가 지금 이런 모습인데, 그런 나를 보고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

‘이런 모습인데’라는 말에 릴리는 라이가 보기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사내고, 지금은 젊은 청년으로 변장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물론 그전에도 중년사내들이 라이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걸로 봐서 뭔가 있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예, 알겠습니다.”

마침 점원이 빵하고 스튜를 먼저 내왔기에 둘은 대화를 중지하고 식사부터 하기 시작했다.

“숙박을 하려 하는데 방 두 개 있냐?”

“따로 묵으시려고요?”

“응.”

“마침 빈방이 있긴 한데.

“가격은 어떻게 되지?”

숙박비는 라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저렴했다. 그가 요새도시에서 묵었던 그 허름했던 여관보다도 가격이 쌌다.

‘손님이 별로 없는 모양이지?’

그건 라이의 생각이었고, 그가 점원과 주고받는 얘기를 엿들은 식당 손님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그들 나름대로는 라이에게 들리지 않도록 나지막한 어조로 속삭인 것이었지만, 요즘 들어 내공수련에 매진하고 있던 라이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 사람들은 며칠이나 버틸까?”

“가격이 싸니까, 그래도 3일은 버티지 않을까?”

“글쎄…, 나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거 같은데…………”

그러더니 언제쯤 라이 일행이 나갈 것인지를 두고 내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라이로서는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점원이 꽤 친절하고, 인상도 좋아 보였는데 비딱한 시선으로 보니 그 친절함조차도 수상쩍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뭔가 사기를 당하는 듯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이 방하고 저 방이에요. 자요, 열쇠.”

도대체 어떤 방이기에 모두들 수군거렸던 것인지 찜찜함과 함께 궁금증이 치솟았다. 싼 만큼 방이 형편없는 건가? 릴리와는 저녁식사 때 다시 만나기로 하고, 우선은 각자 방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상한 것보다 너무 괜찮았다. 최악을 가정하고 있었던 탓에 더욱 좋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침구도 깨끗했고, 매트리스의 짚은 새로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막 교체해 향긋한 풀냄새까지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까지는 폭신한 탄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네? 이 정도면 꽤 괜찮은데, 왜 그런 소리를 한 거지? 설마, 유령이라도 나오는 방인가?”

사악한 기운이 모이는 특별한 장소라면 언데드 몬스터가 나오기도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런 도심지 한가운데서 그런 게 나온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설혹, 우연이 겹쳐서 그런 게 나온다고 하더라도 이런 곳은 언데드 몬스터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신관들도 자주 왕래하는 도심인 만큼,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토벌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령 같은 것에도 내 검이 먹힐까? 뭐, 그건 해 봐야 알 수 있겠지.’

라이는 침상 위에 정자세로 앉아 검술 수련을 시작했다. 그가 하는 건 꿈속에서 본 검술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검의 움직임과 함께 몸속 무형의 기운을 어떻게 함께 동조시켜 움직여가야 하느냐 하는 것에 대한 심상수련(心象修練)이었다. 실제로 검을 뽑아들고 휘두르는 게 가장 좋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검을 뽑아들고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그래서 라이가 선택한 수련방법이 바로 이 심상수련이었다.

몸 안의 내공의 움직임을 머릿속 깊이 각인시키는 데 있어서 오히려 이 방법이 더 뛰어난 수련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건 소 뒷걸음질에 쥐를 밟은 것과 같은 행운이었다. 육체적인 수련에는 한계라는 게 존재했지만, 마음이라는 건 한계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근래에 검술을 발현했던 것을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 번 떠올리면서 자신이 실수했던 부분을 찾아내는 것도 매우 유익한 방법이었다.

검을 처음 익히는 초보에게는 이런 수련법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라이의 몸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엄청난 수준의 내공이 이미 갈무리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그에게는 급선무였는데,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가장 효과적인 수련법을 찾아서 행하고 있던 셈이었다.

정자세를 튼 라이의 의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깊은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온 라이. 창문을 보니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라이는 아직 저녁이 되지 않았다고 착각했지만, 사실은 그가 이 방에 들어온 후 벌써 하루가 지나 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먼 것 같긴 한데…………. 지금 밥 먹자고 하면 싫다고 하지 않으려나?’

꼬박 날밤을 새운 라이는 뱃가죽이 등에 붙을 정도로 극심한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뭐, 아무려면 어때. 정 안되면 나 혼자서 내려가서 먹으면 되지.’

똑똑…..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좀 더 세게 두드렸다.

똑똑!똑똑!

그래도 기척이 없었기에 돌아서려고 하는데, 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라이는 괜히 릴리를 깨웠다고 생각했다. 피곤해서 잠시 잠이 든 모양인데……………

삐그덕 하고 문을 여는 릴리. 방금 전에 헤어진 것 같았는데, 그동안 릴리의 얼굴은 꽤나 많이 변해 있었다. 피곤에 찌들어 있는 퀭한 눈동자…………….

“미안, 자고 있는데 괜히 깨웠네. 나는 같이 저녁이나 먹으러 가려 했는데…………

“저…, 저녁이요?”

멍한 듯 중얼거리는 릴리.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힐끗 쳐다보더니, 도저히 못 참겠는지 창문 쪽으로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고개를 밖으로 꺼내 해가 떠 있는 방향을 살핀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릴리는 재빨리 라이 앞으로 돌아왔다. 아직

점심때도 되지 않은 게 확실했다. 하지만 그걸 눈앞의 무시무시한 사내에게 말할 담력은 없었다. 안 그래도 시장하던 참이니 잘 되긴 했다.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습니다, 어르신.”

“어르신이라 부르지 말라니까. 그냥 잭이라고 불러, 잭.”

뭔가 이상했다. 1층 식당으로 내려와 보니 이건 평상시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이 시간 때쯤 되면 일을 마친 뒤 죽이 맞는 동료들끼리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테이블이 몇 개 정도는 보여야 당연했다. 하지만 술잔을 기울이는 테이블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창밖으로는 햇볕이 쨍쨍………….

뭔가 위화감을 느낀 라이는 릴리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이상하네. 릴리, 거짓말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라. 내가 너하고 헤어진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릴리는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여관에 들어온 지 벌써 하루가 지났어요. 지금은…, 점심 때구요.”

“그래? 어쩐지 배가 너무 고프더라. 그렇다면 그동안 식사는 어떻게……?”

아무 대답도 못하는 릴리를 향해 라이는 애써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는 나를 기다리지 말고 때가 되면 먼저 내려가서 먹어라. 밑에다가 말을…, 아니 이걸 쓰도록 해라. 그게 편하겠네.” 라이는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돈을 적당히 잡히는 대로 꺼내 주었다. 이 정도라면 어지간한 음식이라면 며칠 동안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렇게 많이…………..

그리 많은 액수가 아니었음에도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걸 보고 라이는 빙긋 웃었다. 이런 순진함이 마음에 들었다. 릴리는 딱히 예쁜 생김새도 아닌데다,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는 주근깨로 인해 더욱 못나 보였다. 그리고 빨강색,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적갈색

머리카락이 소녀의 인상을 굉장히 촌스럽게 느끼게 했다. 하지만 라이는 그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그린 듯 아름다웠던 무녀에게 죽을 뻔한 경험을 한 후였기에, 오히려 이런 인간적인 모습이 더욱 그의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괜찮아. 한동안 이곳에 있을 텐데 한 끼만 먹고 말건 아니잖아. 그리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여관 밖으로 나가서 사 먹도록 해.”

“감사합니다, 어르신.”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하지 말라니까. 그냥 잭이라 불러.”

라이의 질책에 릴리는 멋쩍은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잭.”

“그건 그렇고,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냐?”

순간 릴리의 안색이 급변한다.

“아, 아뇨.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전혀 신경 쓰실 것 없어요.”

릴리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지만, 라이는 그녀의 어색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뭔가 있었다는 감이 확 와 닿았던 것이다. 라이가 추궁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릴리는 마지못해 털어놨다. 위층에서 남녀 간의 요란한 신음 소리가 밤새 울려대는 통에 한숨도 제대로 못 잤다는 것을.

목조건물인데다 워낙 낡아서인지 층간소음이 아주 심했다. 위층에서 묵는 사람이 살금살금 걸어도, 낡은 목재가 삐걱거리는 탓에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그가 지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런 낡은 건물이야말로 누군가에게

기습당할 염려 없는 안전한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릴리의 대답을 들을 때만 해도 인적 없는 야외에서 노숙하던 것과 비교하면 당연히 시끄러웠을 거라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왠지 붉게 물든 얼굴을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식의 소음이 밤새도록 이어질 리도 없었고, 그렇다고 잠을 못 잔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이때, 문득 어제 자신들이 투숙한다고 했을 때 주위 손님들의 반응이 떠올랐다.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저렴한 방값까지. 이곳이 여관이라는 걸 감안해서 생각해 보니, 이건 분명 위층에 자리 잡은 손님들의 문제인 게 틀림없었다.

“내가 올라가서 얘기해 두지. 좀 조용히 하라고 말이야.”

별생각 없이 말했을 뿐인데, 일순 릴리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다. 눈앞의 사내에 의해 자잘한 고깃덩이로 변한 달톤의 시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위쪽 방에 묵고 있는 사람도 그런 처참한 꼴이 되는 게 아닐까?

자신의 말 한마디로 인해 그가 죽임을 당한다면 이건 자신이 살인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조용히 하라고 하며 저 살인귀가 어떤 행동을 할지 뻔히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몰랐지만, 포크를 쥐고 있는 릴리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보자 라이도 그제서야 눈치챘다. 눈앞의 소녀가 얼마나 공포에 질려있는지를 말이다. 순간, 식욕이 뚝 떨어진 라이는 먹으려고 스튜에 찍고 있던 빵을 그냥 그릇 위에 던진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먼저 올라갈 테니, 너는 천천히 먹고 오도록 해라.”

밤새 시끄럽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위층에 묵고 있는 연놈들을 회쳐 놓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도 상식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 또한 없었다.

라이는 위층으로 올라가기에 앞서 점원을 불러 자신들의 위층에 묵고 있는 사람들이 나간 건 아닌지 확인부터 했다. 그러자 ‘그들은’ 언제나 늦게 일어나서 점심때를 훌쩍 지난 후에야 밥을 먹으러 내려온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니 아직 방에서 자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라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똑똑.

릴리가 묵고 있는 방 바로 위층에 위치한 방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몇 번이나 노크를 했음에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혹시 사람이 없는 걸까? 하지만 곧이어 나지막이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에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쾅쾅!!

여관 전체가 울릴 정도로 문을 세차게 두들겨대자 그제야 삐그덕 열리는 문.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아직까지도 자고 있었던 듯 속옷바지만 대충 걸친 부스스한 몰골의 사내였다.

하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잘 발달되어 있는 탄탄한 근육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게다가 벌거벗은 상체는 온통 시커먼 털로 뒤덮여 있었고, 인상 역시 상당히 더러웠다. 아마 다른 사람들 역시 너무 시끄럽다며 항의하러 올라왔다가 사내의 흉악한 인상과 등빨에 겁을 먹고는 제대로 항의도 하지 못하고 그냥 내뺐을 게 뻔했다.

어쩌면 사내가 용병이나 몬스터 사냥꾼일 가능성이 크다고 라이는 짐작했다. 사내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연신 하품을 해대며 라이를 노려본 뒤 으르렁거렸다.

“뭐야? 무슨 일인데 남의 방문은 두드리고 지랄이야, 응?”

“노크를 했는데도 반응이 없으니 두드린 거 아닙니까.”

“허어, 이런 미친 새끼를 봤나. 어르신이 주무시는 걸 알았으면 그냥 조용히 꺼질 것이지…, 이 새끼가 뒈지고 싶나.”

인상을 왈칵 일그러트리며 다짜고짜 멱살부터 쥐려는 사내의 굵직한 손목을 꽉 틀어쥐었다. 그와 동시에 분노로 일그러져 있던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놀람과 고통으로 더욱 일그러져 갔다. 라이의 손아귀 힘이 예상외로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큭.”

“뒈지고 싶냐고? 너야말로 뒈지고 싶냐?”

사실, 이렇게 무력을 행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내가 덩치 큰 것만 믿고 까부는 걸 보자 속이 뒤집혔던 것이다. 이런 망할 새끼들 때문에 예전에 고생했던 것도 떠올랐고…………… 라이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다짜고짜 사내의 낭심을 발등으로 차올렸다. 그 즉시 불알이 깨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퍽!

“꾸웨엑!!”

불의의 일격을 당해 낭심을 양손으로 붙잡고 털썩 주저앉는 사내. 얼마나 고통이 심한지 두 눈이 허옇게 돌아가 있었다. 다짜고짜 이런 치졸한 일격을 당할 거라고는 전혀 대비하지 않았던 사내의 말로였다.

‘짜식이, 덩치만 믿고 까불고 있어. 이런 비계만 가득한 놈 하나 제압하는 것쯤이야……………’

그때 열린 문 사이로 침대 위에 벌거벗은 몸을 이불로 감싸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이쪽을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는 놀라움에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상황은 그녀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내와 함께 한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시끄럽다고 방문을 두드렸던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었고, 사내의 험악한 인상과 등빨을 보면 즐거운 시간 보내시는데 방해를 해 미안했다며 오히려 사과를 하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저렇게 단숨에 사내를 무력화시킬 줄이야.

라이는 낭심을 붙잡고 끙끙거리고 있는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려 으르렁거렸다.

“내가 좋은 말로 충고할 때 들어라. 앞으로 떡을 치더라도 좀 조용히…….”

이때, 라이의 귀에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빨리 도망쳐요!”

“도망을 치라고?”

라이는 피식 웃었다. 여자는 이 덩치 큰 녀석에게 혹시라도 험한 꼴을 당하게 될까 봐 도와주려는 듯싶지만, 자신은 이보다 더한 놈들의 피로 지하실을 피바다로 만들었던 사람이다. 여자의 말이 가소롭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라이는 그녀가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주변 객실의 문들이 왈칵 열리며 흉악스럽게 생긴 사내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뛰쳐나왔던 것이다. 오랜 시간 단련되어 탄탄한 근육질의 사내들. 뒷골목 양아치들 수준은 절대로 아니었다.

“어떤 미친 새끼가 감히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

“아함, 밤새 떡을 쳤더니 졸려 죽겠구만. 빨리 조지고 다시 들어가 좀 더 자야겠다.”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은 오랜만에 보네. 개자식, 넌 뒈졌어.”

네 명의 사내들은 재빨리 라이의 퇴로를 가로막은 뒤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이 층에 묵고 있는 사내들은 모두 다 한 패거리들인 모양이다. 그녀가 왜 도망가라는 소리를 했던 것인지 십분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오크 굴속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 ‘날 잡아잡슈’ 한 꼴이니 난감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예상했다면 하다못해

몽둥이라도 들고 올라왔을 것이다. 게다가 움직일 공간이라도 넓다면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이곳은 좁디좁은 복도였다.

라이는 순간 아찔해지려는 정신을 급히 수습했다.

‘이 정도에 두려워해서는 안 돼. 칼 한 자루만으로 여왕벌의 둥지 지하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게 바로 나잖아.’

하지만 그때는 검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이런 등빨이 좋은 사내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건 꿈을 통해 배운 검법으로 인함이지, 맨손으로 하는 격투술 따위는 배운 적이 없었다.

이때, 라이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요새도시에서 깡패 녀석들에게 기습공격을 당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도 검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었지만 가볍게 물리치지 않았던가.

‘당시 다수의 적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던 건……..?

맞다. 속도였다. 상대가 생각하지 못한 불의의 일격을 빠른 속도로 날리는 것. 그리고 상대가 공격해 오기 전에 재빨리 안전지대로 후퇴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가, 상대의 공격에 맞춰 빈틈을 노렸었지.

기감(氣感)을 통해 상대의 움직임을 눈으로 보지 않고도 한 단계 앞서 느끼고 있었지만, 라이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이는 네 사내들을 재빨리 훑어봤다. 라이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서 있는 둘은 그래도 어느 정도 방어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손쉽게 일격을 날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에 비해 한 발자국쯤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둘은 아직 아무런 자세조차 잡고 있지 않고 그저 이죽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좁은 복도와 앞쪽의 동료들을 믿고 설마 자신이 공격당할까 하는 생각에 방심하고 있는 것이다. 공격한다면 뒤쪽의 사내들 중 하나를 먼저 공격해 상대의 무기를 탈취하는 게 최선이리라. 하지만 이 좁은 복도에서…, 더군다나 거리까지 약간 떨어져 있는데 무슨 수로 기습을 가할 수 있단 말인가.

‘방법이 없을까…, 방법이…………?’

이때, 낭심을 붙잡고 끙끙거리던 사내가 일그러진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끄으으…, 이런 개자식!”

“야, 괜찮아?”

“아으으……”

고통을 참느라 이를 악물며 끙끙거리고 있긴 했지만 사내가 조만간 일어나 자신에게 덤벼들건 뻔했다. 그렇게 되면 이놈들을 상대하기 더욱 힘들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분명 자신을 절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으리라.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덩치 큰 사내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으르렁거렸다.

“뭐 하고 있어? 새꺄. 빨리 엎드려 빌지 않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면 용서하고 넘어가 줄지도 모르지.”

“그 전에 우리 기분이 풀리도록 자근자근 다져주겠지만 말이야, 크흐흣.”

살기를 물씬 풍기는 사내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온몸에 소름이 쫙쫙 끼친다.

‘어떻게 해야 하지?’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극한 긴장감에 그의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했는지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검법에 따라 검을 휘두를 때, 순간적으로 놀라운 속도를 발휘했지 않았던가. 지금이야 물론 손에 검이 없긴 했지만, 있다고 상상하며 그대로 검법을 전개한다면 어떻게 될까? 검식이야 손에 검이 없으니 제대로 구현되지 않겠지만, 놀라운 속도로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는 것만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을 정리한 라이는 급히 상대를 물색했다. 뒤쪽에 위치한 탓에 방심하고 있는 녀석은 둘이다. 하나는 왼쪽, 하나는 오른쪽. 라이는 그 중 오른쪽 사내를 선택했다. 왼쪽 사내와 달리 오른쪽 사내는 짤막한 몽둥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군데군데 검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는 걸 보면, 단순히 엄포용으로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라이가 검식을 전개한 순간, 몽둥이를 든 사내와의 거리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좁혀졌다. 좁은 복도였기에 눈에 와 닿는 감각적 충격은 더욱 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내는 라이의 코앞에 위치해 있었고, 얼이 빠진 얼굴로 라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다른 놈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라이는 사내의 턱을 힘껏 주먹으로 가격하는 한편, 그가 쥐고 있던 몽둥이를 빼앗아 들었다. 몽둥이가 손에 잡히자 라이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새끼들 다 죽었어!”

그날 아래층 사람들을 괴롭히며 밸도 없는 겁쟁이 새끼들이라고 비웃어대던 악당들은 지옥을 경험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