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6권 5화 – 일생일대의 기회

일생일대의 기회

“여긴가?”

“예, 두목, 저 아래쪽에 계십니다.”

박스터의 질문에 부하가 가리킨 곳은 다리 밑의 어두운 공간이었다. 박스터가 눈에 힘을 주어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항아리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 옆에 잭이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잭을 발견하자 치밀어 오르는 기쁨도 잠시, 박스터는 눈살을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새끼! 이런 데 처박혀 있었으니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지.”

박스터가 잭을 애타게 찾았던 이유는 워커가 원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가게에서 밀실로 자신을 데려간 워커는 잭만 넘겨준다면 칼릭스처럼 뒤를 봐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워커가 속해 있을 정도의 거대 조직이 뒤만 봐준다면 이곳 요새도시 델카의 암흑가를 주름잡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바친 보석과 마법 아이템을 조직을 재건할 수 있도록 돌려주겠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만약 잭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아예 조직 전체를 말살시켜 버리겠노라고 으르렁거렸다. 그러니 박스터로서는 눈에 불을 켜고 잭을 찾아다녀야 했던 것이다.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니 잭은 술에 취해 깊이 잠들어 있었다.

주변에 나뒹굴고 있는 항아리만 해도 거의 다섯 개. 결코 작은 항아리가 아니기에 그 많은 술을 다 마셨다는 게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코를 막고 싶을 정도로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쭈그리고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패배의 충격이 그만큼 컸던 모양이다.

자세히 보니 아직 앳된 모습에 안쓰럽기도 했지만 박스터는 애써 그런 나약한 생각을 몰아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이다. 조직을 위해서 그 어떤 감언이설을 동원해서라도 잭을 워커에게 넘겨야만 했다.

“이봐, 이봐, 좀 일어나 봐!”

아무리 잭을 흔들어 봤지만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깰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짜증 난 박스터는 주변에 굴러다니고 있던 빈 항아리 하나를 들어 다리 밑을 흐르는 물속에 푹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그 물을 잭의 얼굴에 들이부었다. 마을의 온갖 음식 찌꺼기와 분뇨가 흘러나가는 물인 만큼 더럽기 짝이 없었지만, 박스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기가 마실 것도 아니었으니…………,

“읏, 차거!! 이게 뭐야?”

엉겁결에 잠에서 깬 라이는 얼굴에 흘러내리는 차가운 물을 대충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았다. 얼마나 오래 이곳에서 술에 취해 잠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리 밑에서 풍기는 퀴퀴한 악취에 코가 마비된 것인지 구정물 냄새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제 잠이 좀 깨냐?”

“이게 무슨 짓이야!”

라이는 물 묻은 손바닥을 대충 옷에 문질러 닦으며 짜증어린 얼굴로 소리쳤다. 이런 짓을 한 게 두목만 아니었다면 박살을 내놨을 것이다.

하지만 박스터는 오히려 라이보다 훨씬 더 신경질적인 어조로 으르렁거렸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부상을 당해 도망치는 걸 보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런데 이런 곳에 숨어서 팔자 좋게 술이 떡이 되라 마시고 잠이나 퍼 자고 있다니……”

성질을 내면서도 박스터의 시선이 자신의 상처 부위를 살피고 있다는 걸 눈치챈 라이는 더 이상 신경질을 낼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이 걱정되어 이렇게 달려온 것이었으니까.

“그건.. 미안해…….”

“치료는 했냐?”

“응. 대충.”

하지만 말과 달리 워커의 칼에 베어진 옷과 가죽갑옷에는 아직 검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건 라이가 자신이 혹시 키메라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절망감에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술을 마신 뒤 인사불성이 되어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처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걱정하지 마. 겉보기와 달리 상처는 심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됐지?”

“워커 말인가?”

“그 사람 이름이 워커였나?”

박스터는 고개를 끄덕인 후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자신을 아론 워커라고 하더군. 이런 촌구석이 아닌, 대도시에 자리 잡은 거대 조직의 간부인 듯해. 내가 자네를 찾은 건 그거 때문이야. 워커가 자네를 데려오래.”

“왜?”

“자기 부하로 삼고 싶다더군.”

라이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거절했다.

“개소리! 내가 왜 그딴 놈 밑으로 들어가?”

“이건 절호의 기회야! 워커는 자네에게 검에 대한 재능이 있다며 제대로 한 번 키워보고 싶다고 했어. 자신은 나이가 너무 들어서 이미 늦었지만, 자네는 아직 젊으니까 말이야.”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고는 있었지만, 박스터의 말투와 표정에는 뭔지 모를 간절함이 느껴졌다. 뭔가 내게 말하지 않은 검은 속내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무슨 속셈일까….?

사실, 워커와 같은 고수가 자신을 키워준다는 건 놀라울 정도로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믿겠는가? 집 떠난 이래 지금껏 세상의 쓰디쓴 맛을 질리도록 봐왔던 라이였다. 그것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의 쓴맛을 말이다. 당연히 자신을 키워주겠다는 워커의 제안이 곱게 들리지 않는 것이다.

라이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자 박스터에게 물었다.

“날 팔아먹은 건가?”

박스터는 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신께 맹세컨데, 내가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먹었다면 천벌을 받을 거야.”

과도할 정도로 반응하는 박스터. 확실히 뭔가 있음에 틀림없다.

라이는 싸늘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사실대로 말해. 안 그러면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는 수가 있으니까. 알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요새를 떠나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말이야.”

라이의 위협에 박스터는 결국 무릎을 꿇고 모든 걸 실토했다.

“제발 나를, 아니 우리를 좀 살려주게. 자네가 그자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은 목숨이야.”

아론 워커가 라이를 키워보겠다고 한 건 사실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걸 거부했을 때의 협박 또한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치졸하게도 라이를 자신에게 건네주지 않는다면 조직원들 전부를 다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라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동안 박스터와는 그럭저럭 괜찮은 사이를 유지해 왔었다. 그런 그를 자신 때문에 죽게 내버려 둔다는 것은 상당히 찝찝한

노릇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든 건 자신이 키메라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착각 탓이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인간답게 행동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설혹 안좋은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키메라의 재생력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는가.

“워커는 지금 어디에 있지?”

“승낙해 주는 건가?”

라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톡 쏘아붙였다.

“어쩔 수 없잖아? 나 때문에 누군가의 목이 잘린다면 아무래도 꿈자리가 뒤숭숭해질 것 같으니까.”

감격한 박스터는 라이를 덥석 껴안았다.

“고, 고맙네. 자네는 정말 멋진 친구야.”

하지만 곧이어 박스터는 인상을 찡그리며 화들짝 떨어졌다. 라이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지독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하수돗물을 퍼붓지 않는 거였는데…………

박스터는 코를 막고 손을 휘휘 내저으며 소리쳤다.

“크으~, 냄새!! 워커를 만나러 가기 전에 일단 좀 씻자, 씻어. 네 몸에서 나는 악취가 너무 지독해.”

놀라운 마음에 라이는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대단한 저택이었다.

지금껏 그가 봤던 집 중에서 가장 훌륭했던 게 마인 테귤러의 저택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서 있는 이곳은 테귤러의 저택을 압도하는 규모였고, 그 호화로움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리 거대 조직이라 하지만 뒷골목 두목이 머무는 곳이 이렇게까지 호화로울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다. 아니, 어쩌면 여기는 두목의 저택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크고 호화로웠으니까. 그렇다면 대체 여기는 어딜까?

이 저택에 오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음에도 워커는 라이의 의문에 속 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질문을 슬쩍슬쩍 회피하며 라이의 신상에 대한 질문만 퍼부었다.

라이 역시 그의 질문에 미주알고주알 대답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두 사람의 대화는 알맹이 없이 겉돌기만을 반복했을 뿐이다.

워커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라이를 커다란 방으로 데려다준 다음, 어딘가로 가버렸다. 그는 라이에게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침대 옆에 드리워져 있는 끈을 당기라고 했다. 그러면 하녀가 달려올 거라고. 아마 저 끈은 하녀 대기실과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다.

라이는 방에 혼자 남자 창가로 걸어가 바깥의 동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저택은 규모만 엄청난 게 아니라 구석구석까지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택 전체가 세련된 예술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정원만 봐도 기이하게 생긴 화초들이 그 푸르름을 뽐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저택 안을 분주히 오가는 하인들(어쩌면 노예인지도 모른다)의 숫자보다 경비병들이 더 많이 보이는 게 특이했다. 경비병들은 둘씩 짝지어 서 있었는데, 모두 똑같은 모양의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다. 갑주가 통일되어 있다는 건 일부러 맞췄다는 소리고, 경비병들에게 모두 지급할 정도라면 여기 주인은 엄청나게 돈이 많은 사람인 모양이다. 그리고 갑주의 가슴보호판에 그려져 있는 화려한 문장…………. 이곳의 주인은 깡패 두목 나부랭이는 절대로 아닌 게 확실했다.

“워커는 왜 나를 이리로 데려온 거지?”

설마하니 이 집 주인을 함께 죽이자는 건 아닐 테고, 신원도 불확실한 자신을 이곳에 취직시키려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박스터는 분명 워커가 자신의 재능을 탐내 밑에 두고 싶다고 했었다. 음지에서 사는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면 대충 뻔한 곳일 텐데 이곳은 한눈에 봐도 그런 곳이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라이로서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안감에 휩싸인 라이가 몰래 탈출할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던 그 시간, 워커는 이 저택의 주인을 만나고 있었다.

60세는 족히 되어 보이는 노신사였는데, 길게 기른 수염 탓에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손녀로 보이는 젊은 미모의 아가씨가 얌전히 앉아있었다.

워커는 떨떠름한 눈빛으로 그 아가씨를 바라봤다. 이번 일의 원인을 제공한 상관의 애첩이 바로 이 여자였던 것이다.

“지시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워커는 품속에서 묵직해 보이는 가죽주머니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천 골드입니다.”

“수고했군.”

상관에게 줘야 하는 만큼, 워커는 미친개에게 뜯어냈던 잡다한 금화와 은화가 들어있는 궤짝을 들고 환전소로 가서 반짝거리는 10골드짜리 트롤라 금화로 바꾸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환전소에서는 헌금화 1개와 새금화 1개를 맞바꿔주지는 않는다. 화폐의 액면가가 아니라 무게를 달아 그 무게만큼의 금화로 바꿔준다. 당연히 수수료까지 받고,

금화나 은화의 경우, 낡은 것과 새것의 무게 차가 심하게 난다는 문제가 있었다. 치졸한 놈들이 금화나 은화의 테두리를 살짝 깎아낸 다음 유통시키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깐깐한 인물들의 경우 금화나 은화의 개수가 아닌, 금은 함유량과 그 무게를 정확히 계산해서 거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액 거래라면 몰라도 거액의 거래인 경우 엄청난 차이가 발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워커가 그런 수고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신사는 내용물을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금화 주머니를 애첩 쪽으로 슬쩍 밀어주며 말했다.

“이제 됐느냐?”

그러자 애첩은 노신사의 볼에 가볍게 키스하며 녹아들듯 귀여운 표정으로 애교를 떨었다.

“예, 나으리. 감사합니다.”

“허허, 그래.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애첩은 가녀린 팔로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힘겹게 들고서 고개를 살짝 조아린 뒤 물러갔다. 노신사가 방문객과 함께하는 자리에 그녀가 참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녀가 잠시나마 이 자리에 합석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부탁했던 일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려는 노신사의 배려였던 것이다.

애첩이 방 밖으로 나가고 난 후, 노신사가 워커에게 말했다.

“자네에게 이런 잡무를 맡겨 미안하군.”

노신사의 치하에 워커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덕분에 좋은 인재를 발굴할 수 있었으니 오히려 잘 됐습니다.”

“좋은 인재?”

워커는 막대한 부수입을 챙겼다는 사실은 내색하지 않고 곧바로 라이의 얘기를 시작했다.

“예. 주인 없는 그래듀에이트가 거기에 숨어 있더군요. 저는 그를 스승님께 소개할까 생각 중인데……

그 말에 살짝 안색이 변한 노신사는 침중한 음성으로 워커에게 되물었다.

“주인 없는 그래듀에이트라…………. 혹시 첩자일 가능성은?”

워커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환히 웃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다고 생각합니다. 녀석은 원래 그곳 산적패거리에 있을 생각이 아니라, 위조 신분증을 확보하는 대로 산맥을 넘어 외국으로 도피할 생각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 걸 산적 두목 녀석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붙잡아 두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인자하게만 보이던 노신사의 눈매가 일순 실쭉 가늘어진다. 의심스러운 것이다.

“이상하군. 그런 실력자가 고작 산적 나부랭이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게 말이야.”

그래듀에이트의 능력이라면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산적 두목을 죽여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워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놀아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듀에이트라 하나 이제 겨우 열일곱 살로, 스승으로부터 독립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아 세상 경험이 거의 없는 햇병아리니까요.”

워커의 말에 노신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그 나이라면 독립하기에 너무 빠르지 않나?”

제자를 독립시키는 건 더 이상 가르칠 게 없거나, 아니면 가르쳐봐야 시간 낭비라고 판단될 때였다.

그래서 실력이 그래듀에이트급 정도라면 대략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쯤에 독립하며, 스승의 추천서를 가지고 곧바로 기사단에 들어가는 게 일반적인 통례였다.

“이곳으로 데리고 오던 중에 여러 가지를 캐물었습니다만, 그리 많은 걸 알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의 신상에 대해 밝히는 걸 극도로 꺼리는 듯하더군요. 하지만 중요한 건 대부분 알아냈습니다. 우선 부모가 크라레스의 반역자라는 것. 타국으로 도망치던 도중에 부모는 죽었고, 그때 우연히 스승의 눈에 띄어 그의 제자로 들어갔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산맥 속에서 스승과 둘이서만 생활했었는데, 스승이 지병으로 갑자기 죽어 어쩔 수 없이 하산했다고 하더군요.”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라이로서도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이런 거짓말이 진실보다 훨씬 더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고급검술을 누구에게서 배웠냐는 워커의 물음에, 스승은 없고 꿈속에서 배운 대로 해보니 되더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자기가 워커의 입장이라 해도 믿을 턱이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제럴드 폰 로티넨 백작이랍니다.”

라이는 거짓말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아버지가 모시고 있는 촌장의 이름을 팔았다.

설마, 그 이름을 알까? 하는 생각과 함께 반역도라는 걸 상대에게 인지시키기 위해서 써먹기에 가장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덤으로 자신의 신분도 슬쩍 상승시키고 말이다.

“제럴드 폰 로티넨 백작이라고? 로티넨이라……….”

시골 촌부의 이름이라면 그것만 가지고는 찾을 방법이 없겠지만, 귀족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귀족의 성씨는 그가 지배하는 영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크라레스 제국의 로티넨 영지같이 중요한 곳이라면 자료를 뒤지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조차 없었다.

워커의 말에 책장으로 걸어간 노신사는 크라레스 제국 귀족 명부라는 두꺼운 책자 한 권을 꺼내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그리고 곧이어 자신이 원하는 자료를 찾아냈는지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여기 있군. 제럴드 폰 로티넨 백작. 드미트리 폰 란프리아 후작의 주요 가신 중 하나. 란프리아 후작이 권력 투쟁에서 밀려 처형되었을 때, 자신의 가신들과 함께 도주했다고 기록되어 있구먼.”

사건이 벌어진 건 18년쯤 전이다. 그 이후 제럴드 폰 로티넨 백작에 대한 기록은 끊겨 있었다.

슬하에 딸이 두 명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18년이나 공백이 있는 만큼 도망 중에 아들 하나가 더 태어났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게다가 나이도 열일곱이라고 했으니 딱 들어맞는다.

“여기까지는 꽤나 그럴듯하군. 이상한 부분은 아직 없는 것 같고…

“나중에 한 번 만나보시면 아시겠지만, 아직 순진한 애송이입니다. 하지만 검에 대한 재능은 굉장히 뛰어나 스승님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합………

여기까지 들은 노신사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워커가 입에 올린 스승이라는 존재는 대단한 실력자였다. 게다가 그 자신의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후진을 양성하는 데 있어서도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 감찰부에 있는 청소부들 중 최상위에 포진하고 있는 실력자들의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친 사람들이었으니까.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재능이 상당한가 보군.”

“이제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그래듀에이트면 검에 대한 재능은 확실한 거죠. 그리고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더 클 것 같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노신사는 무심결에 긴 턱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았던 것이다.

노신사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온갖 아수라장을 거쳐 온 인물이다. 수많은 첩자를 쓰기도 했고, 온갖 곳에서 보내온 첩자들이 감찰부 안으로 파고들어오려고 갖가지 술수를 부리는 걸 경험해온 그였다.

그래서 워커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데려온 청년이 크라레스 출신이라는 사실, 그리고 뜬금없이 나타난 주인 없는

그래듀에이트라는 것만으로도 노신사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나도 먹음직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워커가 격찬할 정도의 검술 재능을 지니고 있는데, 거기에 「스승」에게 검술까지 전수받게 된다면 10년이나 20년쯤 후에는 감찰부의 수뇌부 지위에까지 올라갈지도 모른다.

특히나 지금처럼 인력 부족이 극심한 시점이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조차 없다.

더군다나 차기 감찰부장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앤트러스가 얼마 전에 행방불명되어버린 상황이 아닌가.

잠시 고민하던 노신사는 그를 감찰부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출신도 적국인 크라레스인 데다, 감찰부 자체가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노신사의 신경을 계속 건드리는 뭔지 모를 찜찜함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

마침 워커는 녀석의 장래성이 기대된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그 재능을 적절히 키워줄 만한 곳으로 보내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그게 워커에게도 반감을 사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그렇게 뛰어난 인재라니…, 내 그루시아 후작에게 말해두겠네. 내일 오후 3시쯤 찾아가면 될 게야.”

마이크 그루시아 후작이라면 알카사스의 4대 기사단 중 하나인 콘도르(Condor) 기사단의 단장인 거물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노신사의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오자 워커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반발했다. “부장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잭은 콘도르 기사단에 건네주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라고 생각됩니다.” 워커는 라이를 자신의 스승에게 데리고 갈 생각인지 모르지만, 감찰부장인 노신사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딱히 의심스러운 점은 없었지만 계속 그의 본능을 건드리는 찜찜함에 아예 라이가 감찰부에 들어오려는 것 자체를 막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워커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찜찜한 기분 때문에 기껏 데려온 재능 있는 아이를 내친다면 워커가 어찌 생각하겠는가.

“우리 감찰부나 기사단이나 그 본분은 폐하를 받들고 왕국을 수호하는 데 있지. 다만 맡은 바 역할이 다를 뿐이야. 자네가 말한 잭이라는 아이가 그렇게 뛰어난 인재라면 우리가 데리고 있는 것보다는 기사단 쪽으로 보내는 게 그 재능을 키우는 데 더 낫지 않겠나?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야.”

감찰부의 주 업무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음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거의 다였다. 그렇기에 검술 실력도 중요했지만 빠른 눈치와 판단력, 무엇보다 더러운 임무조차 한점 의구심 없이 행할 수 있는 절대적인 충성심이 우선이었다.

노신사의 말에 워커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잭이 지닌 검에 대한 재능만 생각했지, 스승에게 데려다준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간과한 것이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장님.”

“내일 자네가 콘도르 기사단 본부에 그 소년을 데려다 주게. 판단은 그쪽에서 하겠지. 그럼 나가보게.”

“알겠습니다.”

노신사는 대화를 이 정도에서 끝마칠 생각이었던 모양이지만, 워커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가장 궁금했던 게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사형(師兄)의 행방은 찾으셨습니까?”

노신사의 얼굴에 살짝 불쾌감이 어리긴 했지만, 대답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기밀이긴 하지만 자네와 앤트러스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대답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몰몬트 산맥에 여덟 개 수색조를 급파했네. 그리고 호크 기사단은 물론이고, 마법사 길드 등 의심이 가는 곳은 모두 다 철저히 조사 중이니 조만간에 뭔가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네.”

같은 스승으로부터 검을 배우긴 했지만 앤트러스와 그와의 실력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벌어져 있는 상태였다.

만약 앤트러스가 당했을 정도라면, 그가 달려가 봐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건 뻔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워커는 고개를 조아리며 노신사에게 간청했다.

“감찰부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말게. 살아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구해낼 테니 말이야.”

다음 날 아침, 아론 워커는 라이를 마차에 태우고 감찰부장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워커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말해주지 않았지만 라이는 굳이 묻지 않았다.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입이 무척이나 무거운 사내라는 걸 워커와 함께 여기까지 오면서 이미 파악했기 때문이다.

라이는 지금 자신이 와 있는 곳이 알카사스 왕국의 수도인 다란스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마법진을 통해 이동해 올 때 워커의 말을 엿들은 덕이다.

라이와 워커를 실은 마차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번화가 쪽으로 들어갔다. 수도 중심가로 자신을 데려가나 싶었는데, 목적지는 그쪽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30분쯤 지났을 무렵 마차는 천천히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말을 해줘야 알지, 말을! 젠장!’

하지만 워커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고, 그 꼴이 얄미워서 라이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스쳐 지나가는 마차 주변을 연신 눈을 굴리며 살펴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안좋은 사태가 벌어지면 언제든 튈 수 있도록.

그러다 라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차의 진행 방향 저 앞쪽에 중무장한 병사 수십 명이 도로를 막아놓고 검문을 하고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검문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워커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앉아있기만 했다. 고개가 꼿꼿하게 서 있는 걸 보면 잠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뒷골목 깡패라 생각되는 워커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자, 라이는 될 대로 되라는 듯 마차 의자에 편안하게 앉았다.

그러면서 델카를 떠나기 전 박스터가 급하게 만들어준 위조 신분증을 만지작거렸다. 혹시 신분증이 위조된 게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여차하면 튀면 되니까 말이다.

우려와 달리 검문을 하던 병사들은 마차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그냥 통과시켜 버렸다.

얼마나 많은 뇌물을 처먹였기에 병사들이 마차를 그냥 보내준 건지 어이없어하는 라이의 모습에 워커가 피식 웃었다.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라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오늘, 네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주어질 거다.”

“기회라니요?”

라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워커는 진중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넌 오늘 테스트를 받게 된다. 통과한다면 네 인생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 그따위 허접한 위조 신분증에 의존할 필요는 더 이상 없어지겠지.”

그 말에 라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처음에는 신분증이 필요했었지만, 지금은 별 필요 없어요. 거기에 있었던 건 수련할 장소가 필요해서 붙어있었던 거였으니까요.” 워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렇게 산다면 네 미래의 모습은 뻔한 거야. 밀수업자 등이나 처먹다가 언젠가 토벌군에 걸려 비참하게 죽어가겠지. 그러니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이번 테스트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해.”

“테스트 종목은 뭡니까?”

“당연히 검술이지. 그거 외에 뭐 다른 거 잘하는 게 있나?”

“아뇨.”

“죽을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라. 상대의 사정 따위 봐줄 필요 없다. 오늘 테스트에 참가할 사람들은 너보다도 몇 배나 강한 사람들일 테니까.”

자신의 실력을 너무 무시한다는 생각에 열이 뻗친 라이는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체 어떤 곳이기에 중무장한 수십 명의 병사들이 진입하는 마차들을 검문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여기는 뭐 하는 곳입니까?”

“그건 아직 몰라도 된다. 네 실력이 그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두 번 다시 이곳에 올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