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7권 11화 – 탈출은 항문으로

탈출은 항문으로

라이는 타이탄을 이끌고 샌드웜의 가장 뒤쪽에 도착했다. 샌드웜의 장갑판들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며 한곳에 작은 구멍을 만들고 있었다. 그 구멍이 항문일 가능 성이 컸다.

“찾았다!”

하지만 항문을 찾은 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항문을 뚫고 밖으로 나갔을 때 깊은 모래 속이라면 그대로 죽을 게 뻔했으니까.

그래도 이대로 주저앉아 있다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어쨌거나 탈출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 도달했어. 그런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라이는 조원들 중에서 실력이 뒤떨어지는 자신이 가장 먼저 당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당한 것을 본 조원들이 분명 이 괴물을 잡으려고 할 때 탈 출하는 게 가장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젠장, 하지만 이놈이 그냥 모래 속에 처박혀 있다면 내게 탈출할 기회는 아예 안 온다는 얘기잖아.”

그래도 기대를 걸어볼 만한 건 자신보다 실력이 월등한 조장이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뿐이었다.

만약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샌드 웜이 또 다른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서 모래 위로 올라왔을 때뿐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뭔가 변화가 있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샌드웜의 몸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울퉁불퉁 솟아있는 돌기들이 맹렬한 속도로 움직이는 거야 변함없었지만, 갑자기 몸이 한쪽으로 확 기울어지는 게 느껴진 것이다. 분명 놈이 급히 방향을 꺾은 것 이다.

라이는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기회가 생각보다 좀 더 빨리 찾아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샌드 웜이 모래 속을 움직이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하다.

물고기가 물을 삼켜 옆의 아가미를 통해 내뱉듯, 앞쪽의 모래를 입으로 삼켜 옆쪽으로 내뿜어 앞쪽에 공간을 만든다. 그 공간 속으로 몸 전체를 덮고 있는 장갑판 같은 비늘들을 움직여 앞으로 나가기에 속도가 빠를 수가 없다.

지면 위로 올라간다면 상당히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긴 했지만, 그건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언데드가 된 상태에서도 샌드웜은 본능대로 모래 속으로만 이동하고 있었다.

조장과 부조장이 샌드 웜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그 부하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그때 동료들이 도망친 것도 모르고 검의 세계에 빠져있던 라이가 마지막으로 놈의 뱃속에 들어가게 된 것이고.

라이까지 잡아먹은 후, 샌드 웜은 또 다른 먹잇감을 물색하며 움직였지만, 이미 먹음직한 먹잇감들은 모두 전력으로 도망쳐 버린 후였다. 기사들과 달리 상대적으 로 속도가 느린 탓에 뒤쪽으로 처져있는 용병들이나 사냥하는 수밖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말에 탄 용병들은 비교적 빠른 속도로 도망치고 있었지만, 식량이나 물 등을 싣고 있는 마차들은 속도가 느려 뒤로 처질 수밖에 없다. 전속력으로 내달리고 있는 수송부대의 속도조차 샌드 웜이 이동하는 속도보다는 빠르다.

하지만 샌드 웜은 언데드였기에 며칠이고 간에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데 반해 마차부대는 그렇지가 못하다. 지금은 언데드들을 피해서 전속력으로 도망치고 있 었지만, 그 속도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에는 가장 뒤에 처진 사람들부터 하나하나 샌드 웜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수송부대를 노리고 전속력으로 이동하고 있던 샌드 웜의 감각에 더욱 먹음직한 새로운 먹잇감이 포착되었다. 샌드 웜이 언데드로 다시 태어난 이래 이렇게까지 강 한 생명의 기운을 뿜어내는 먹잇감은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샌드 웜은 재빨리 방향을 틀어 그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샌드 웜의 촉각에 걸린 사람은 다름 아닌 브로마네스의 명령을 받고 그 뒤를 따르며 은밀히 호위하고 있던 올란도였다.

다른 언데드들은 샌드 웜만큼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지 못했기에 도망치는 용병들의 뒤를 쫓아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샌드웜은 방향을 틀어 북쪽 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브로마네스의 뒤를 쫓아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올란도를 포착하고는 그의 앞쪽으로 질러가 기습을 하려는 것이다.

링카 성에 도착한 올란도는 자신의 주인인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과 만날 수 있었다.

밤에 몰래 찾아온 드래곤은 자신이 현재 유희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속해있는 용병대가 베이라 성을 기습하기 위해 출동할 것임을 알려줬다.

올란도에게 주어진 임무는 먼 거리에서 주인 뒤를 따르며 보호하다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그때 나와서 도와달라는 것이다.

덧붙여 주의할 점도 전달되었다. 용병단 내에 마법사가 몇 명 있으니 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가급적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 도록 비밀리에. 비밀리에 돕는 게 불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게 우연히 만난 것처럼 가장해서 도와달라는 명령이었다.

올란도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임무였다. 아무리 유희 중이라고는 하지만 천하에 드래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드래곤이 하라니 하는 수밖에.

“나에게 위급 시 도와달라는 말을 한 거 보면,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걸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그 뒤로 보여준 드래곤의 행태는 아무리 봐도 조심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골드 드래곤임을 과시라도 하듯 눈에 확 띄는 화려한 긴 금발. 몬스터가 나타나면 앞장서서 목을 베며 실력 과시를 하고 있지 않은가. 저러면서 왜 자신에게 은밀 히 도와달라고 한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편히 뒹굴뒹굴 놀고 있는 게 배가 아파 사막에서 고생이나 좀 하라고 부른 건가?”

브로마네스가 그를 부른 건 이곳 사막지대가 실버 드래곤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올란도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어찌되었든 별 탈 없이 흘러가는 듯하던 주인 놈의 유희가 갑자기 이상하게 꼬인 건 수많은 언데드의 출현 이후부터였다.

작은 토성에 언데드 떼가 득실거리더니, 이제는 거대한 언데드 전갈까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이 언데드 거대전갈을 어떻게 하지 못해 쩔쩔매는 걸 보고 올란도는 이제 자신이 나설 때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곧이어 알카사스의 정규 기사들이 나타나 모든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들이 용병단에 합류하자 올란도는 쌍방간의 거리를 더욱 벌렸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위험에 처했을 때 빠르게 돕기는 힘들어지겠지만, 그게 무슨 문제겠는가.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들이 가세했는데 말이다.

물론 제대로 된 기사분대는 아니고 정찰조이기는 했지만, 그것만 해도 충분할 듯 보였다. 이제 며칠만 더 가면 링카 성이었으니까.

“젠장, 이 지긋지긋한 임무도 이제 다 끝나가는군.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임무였어.”

물을 구하기 힘든 것도 문제였지만, 건조식량만 씹으며 은밀히 따라다니는 게 더욱 큰 고역이었다.

자신의 주인은 은밀히 뒤를 쫓으라는 주문을 내렸다. 더구나 용병단에는 마법사들까지 있다. 그 때문에 올란도는 감히 불을 피울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지금까지 뒤따라온 것이다.

이 모든 게 숨을 곳이라고는 전혀 없는 삭막한 사막 지역이다 보니 더욱 고통스러웠다.

기사단이 합류했기에 한숨 놨더니, 최악의 사태는 바로 그날 밤에 벌어졌다.

설마하니 저렇게 엄청난 언데드 떼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용병단을 기습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올란도는 섣불리 뛰어나가지 않고 일단 지켜만 보았다. 아무리 언데드 떼의 숫자가 많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문제 될 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언데드 떼를 전멸시키는 것이라면 몰라도, 용병단의 후퇴를 엄호하며 함께 퇴각하는 정도라면 기사들만의 힘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걸 노골적으로 즐기는 자신의 주인도 분명 한몫 끼어 도울 테고 말이다.

올란도는 용병단이 불빛을 밝히며 사막을 질주하는 걸 보고는 정상적인 후퇴라고 판단했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뒤따라가고 싶었지만, 용병단과 그와의 사이에는 언데드 떼가 위치하고 있어 은밀히 따라가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올란도는 용병단과 의 거리를 좀 더 멀리 벌렸다. 그래야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해치워도, 그래듀에이트나 마법사에게 들키지 않을 테니까.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샌드 웜이 나타나 용병단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젠장, 링카 성에 도착하면 시원한 맥주부터 마실 거야. 지하실에서 갓 꺼낸 차가운 맥주로 꺼칠해진 목구멍을 깔끔하게 씻어내는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올란도는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한 강렬한 공포심을 느꼈다. 뭔가 위험한 존재가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 다.

올란도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본능에 몸을 맡겼다. 지체하지 않고 낙타 등에서 벌떡 일어나 힘껏 위로 도약했다.

그 순간 자신이 타고 있던 낙타 주위로 뭔가 둥근 벽 같은 것이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게 보였다. 자신의 위기 감각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헉! 저게 뭐지?”

솟아오르며 낙타를 집어삼켰던 벽의 윗면이 빠르게 닫히는 것을 보고서야 올란도는 그게 샌드 웜, 그것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샌드 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막에 샌드 웜이라는 초대형 몬스터가 서식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저렇게 클 줄은 몰랐다.

샌드 웜의 기습공격을 간신히 회피한 올란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싸울까? 아니면 굳이 싸울 필요 없이 도망칠까.

저 덩치라면 속도는 당연히 느릴 수밖에 없을 테니 뒤쫓아 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먹잇감을 놓친 샌드웜이 어디로 갈 것인가가 문제였다.

아마 올란도를 놓치게 되면 그다음은 이동속도가 느린 용병단의 뒤를 쫓아갈 가능성이 가장 컸다.

“어쩔 수 없지. 저놈이 만약 용병단을 따라가 분탕질을 치게 되면 그 망할 놈의 도마뱀이 날 가만히 놔둘 리가 없잖아.”

용병단원들 몇 명 정도 잡아먹히는 거야 자신이 신경 쓸 일도 아니지만 혹시라도 그게 망할 놈의 드래곤의 신경을 거슬렸을 때의 후폭풍이 두려운 것이다.

얼마 전에 자신을 뒤따르며 은밀히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는 별 헛소리를 다 한다며 내심 비웃었었다. 드래곤이 뭐 무서울 게 있어서 자신을 호위하라고 명

령한단 말인가.

하지만 초대형 샌드웜을 직접 만나보니 비웃었던 예전 생각이 싹 달아나 버렸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저런 거대 몬스터를 죽이려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야만 할 테니까.

올란도는 멀리 도망치는 용병단 쪽을 힐끗 바라봤다. 자신과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때마침 밤이었다. 더군다나 용병단은 수많은 언데드 떼를 피해 뒤도 돌 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이 타이탄을 꺼낸다 해도 알아볼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으리라.

“이 녀석을 다시 불러오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는데…….”

올란도는 일단 전속력으로 달려 샌드웜과의 거리를 충분히 벌렸다. 타이탄이 공간을 열고 나오는 데 약간이나마 시간이 필요했고, 자신이 탑승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 샌드 웜의 공격을 받는다면 답이 없는 것이다.

타이탄을 불러내 간신히 탑승하는 데까지 성공한 올란도는 급히 타이탄의 검부터 뽑아 들었다. 그제서야 안심이 되며, 자신감이 솟아오른다. 저런 괴물은 타이탄 없이 상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야, 라미루스.”

너무 오랫동안 불러내지 않아서 그런지 삐져버린 모양이다.

대답도 않고 있는 라미루스를 향해 올란도는 능청스레 말했다.

“오랜만에 손 한번 같이 맞춰 보자고. 너를 불러낼 수밖에 없는 손색없는 상대니까.”

라이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켜며 잠을 쫓아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타이탄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그냥 이렇게 멍하니 있다가는 그냥 잠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 다.

“케이론, 네 전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어?”

『잘 모르겠다. 마나의 품질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성격은 어땠어?”

『성격이라는 게 뭐냐?』

케이론의 되물음에 라이는 타이탄과 자신의 생각의 벽이 무지 높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품성? 뭐, 그런 거 있잖아. 다른 사람한테 잘해준다든지 하는 거.”

다른 사람이라고 한 말을 케이론은 다른 타이탄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그가 주인의 의식과 연결되어 주인이 하는 일을 옆에서 구경하는 건 가능했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주인이 뭘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가 주인 과 제대로 소통한 것은 다른 타이탄과의 전투 때뿐이었다.

『다른 타이탄과의 모의전 실력이 썩 좋지는 못했었다. 나로서는 썩 기분이 좋지 못했다. 주인이 미숙하다는 게……. 너는 어떠냐?』

케이론의 질문에 라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자신은 그 미숙하다는 평가의 전 주인보다 훨씬 더한 생초보였으니까.

“그, 그러니까…, 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할게.”

더 이상 할 말도 없던 차에, 단조로운 움직임만 지속하던 샌드웜의 움직임이 갑자기 급변했다. 리드미컬하게 간격이 늘었다 줄었다 하던 뼈대 전체가 급격히 간격 을 줄인 것이다.

샌드웜의 앞쪽 머리 부분이 뒤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고 느껴진 그 순간, 다닥다닥 붙었던 모든 뼈대들이 확 벌어지며 샌드웜의 머리 부분이 위쪽으로 튕겨 나가듯 멀어진다. 보나 마나 뭔가를 공격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이야! 머리 닫아!”

그렇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뭔가를 공격했다는 건, 지금 샌드 웜의 머리 부분이 지상 위로 튀어 나가 있다는 소리였다. 시간이 없다. 공격이 끝나면 샌드 웜은 곧바 로 지하로 파고 들어가게 된다. 그 전에 반드시 탈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머리가 제대로 닫히기도 전에 라이는 케이론에게 지시부터 내렸다.

“저기를 벌리고 나가야 해! 케이론, 힘 좀 써 봐. 할 수 있겠어? 빨리 움직여!”

항문쪽 장갑판에 달려들어 손으로 힘껏 밀었다.

다행히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라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건 샌드 웜이 일부러 항문 쪽을 열어준 것이었다.

샌드 웜도 자신의 뱃속에 살아있는 생명체가 들어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강한 생기를 뿜어대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배 안에 있는 먹잇감을 어떻게 할 수단이 없다는 게 샌드웜으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그 어떤 공격수단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밖으로 배출했다가 다시 입 안에 넣어 이번에는 좀 더 확실하게 죽여서 삼키면 될 일이다.

그렇기에 샌드웜은 라이가 밖으로 탈출할 수 있도록 일부러 항문을 활짝 열어줬던 것이다.

항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사방은 온통 모래였다.

라이는 케이론에게 급하게 지시를 내렸다. 모래 위쪽으로 올라가라고. 자신은 어디로 가야 지표면인지 그것조차 알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게 모두 다 모래뿐이 었으니까.

호흡을 위해 작게 나 있는 환기 구멍으로 모래가 새들어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는 것이다.

“케이론! 위로 올라가 줘. 제발 빨리! 나 죽을 거 같아!”

케이론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모른다. 좌석에 앉아있는 라이의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모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곧이어 케이론이 모래 위로 솟구쳐 오른 것은 라이도 알 수 있었다. 시야가 환하게 밝아지며 밤하늘의 별들이 보인 것이다.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오, 신이시여.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라이는 자신이 지금 신께 감사나 드리고 있을 한가한 상황이 아님을 금방 깨달았다.

멀지 않은 곳에 타이탄이 한기 보였고, 샌드 웜은 그 타이탄에게 공격을 당하면서도 모래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타이탄이 휘두르는 검은 엄청나게 컸지만, 샌드웜은 그보다 더 월등하게 컸다. 거대한 타이탄의 검조차 마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였다.

순간, 라이는 신기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샌드 웜과 싸우던 타이탄의 검이 갑자기 밝은 빛을 뿜은 것이다. 그건 라이도 익히 알고 있는 기술이었다.

“상승검법?”

타이탄을 탄 상태로 상승검법을 구사할 수 있다니. 라이는 그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상승검법이 지니는 파괴력이 얼마나 엄청난지도 잘 알고 있었던 라이였 기에, 그 엄청난 검격을 당한 상태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모래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샌드웜에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괴물은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밖에서 보니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샌드 웜은 더욱 컸다. 더군다나 저 단단한 맷집! 상승검법의 엄청난 공격을 당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모래 속으로 미끄 러지듯 파고 들어가고 있다니.

샌드 웜의 두려움에 한기가 느껴지며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저놈의 뱃속에서 살아서 나왔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꿀꺽!”

이대로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저 사람과 힘을 합쳐서 싸워야 하나?

재빨리 상황을 판단한 라이는 전력을 다해 도망쳐 버렸다. 타이탄을 조종하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저런 거대 언데드와 전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 위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샌드웜의 공격을 피하자마자 올란도는 전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다.

한껏 마나를 끌어모은 오러 블레이드 공격에 막강하기 그지없던 샌드 웜의 외피가 엄청난 충격을 받고 들썩였다. 그중 일부는 박살이 나며 떨어져 나갔지만, 순식 간에 옆쪽에 있는 다른 외피들이 움직여 대체된다. 이런 식이면 얼마나 많은 공격을 가해야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때 샌드 웜의 뒤쪽 모래 속에서 웬 타이탄 하나가 불쑥 올라오는 게 보였다.

“저건 또 뭐야?”

‘들킨 건가? 용병단에 합류한 건 정찰조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너가 하나 끼어 있었네.’

곧이어 올란도의 시야에 상대 타이탄에 그려져 있는 문장이 들어왔다. 다른 문장은 없고 오로지 검은 황소 하나만 흉갑에 그려져 있을 뿐이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 내지 않으려는 타이탄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었다.

아마 어딘가의 나라에서 이곳에 언데드가 창궐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살펴보러 온 것이리라.

“어이, 이봐.”

올란도가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저 타이탄은 전속력으로 달아나 버렸다. 올란도는 어이가 없었다. 달아나고 싶은 건 자신인데, 그걸 저 망할 놈이 먼저 해버리다 니.

“젠장, 내가 먼저 도망쳤어야 하는 건데……..”

방금 전의 충돌로 올란도는 정확히 적과 자신의 능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건 자신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정면대결이라면 어떻게든 해볼 만하겠지 만, 방금 전처럼 일격을 날리고 재빨리 모래 속으로 숨어버리는 식의 공격이 계속된다면 상대하기가 아주 까다롭다.

정체불명의 타이탄이 샌드 웜의 뒤쪽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아마 놈에게 삼켜졌다가 항문을 뚫고 탈출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게 아니라면 모래를 뚫고 샌드웜의 뒤에서 갑자기 타이탄이 솟아나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나도 이대로 도망치는 게 좋겠군. 물론, 저 망할 놈이 도마뱀이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게 적당히 멀리 끌고 가야 하겠지만 말이야.”

마음을 정한 올란도는 전장에서 이탈해 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빨리 달리면 샌드 웜이 쫓아오지를 못한다. 그렇다고 너무 느렸다가는 공격을 당한다. 샌드 웜이 쫓아올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속도로 달려야 했다. 샌드 웜이 전속력으로 따라오고 있는 만큼 소음이 발생하는 건 당연했다. 물론 미세한 소음이긴 했지만, 용병단 쪽에서 눈치챌까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올란도는 샌드웜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적당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놈을 유인해 용병단이 있는 곳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가 떼놓으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