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7권 9화 – 언데드들의 기습 공격
언데드들의 기습 공격
수많은 언데드의 갑작스러운 기습은 용병들이 곤히 잠든 한밤중에 일어났다.
“이, 이게 뭐냐?”
“적이다!”
무지막지한 기세로 쏟아져 들어오는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언데드들! 사막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몬스터는 물론이고, 사자나 늑대 같은 맹수들, 그리고 영양이나 낙타 등과 같은 초식성 동물. 심지어는 쥐나 도마뱀처럼 아주 작은 것들까지 다종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언데드라는 공통점을 제외한다면 다른 비슷한 부분은 거의 없었다. 언데드가 된 지 오래되어 새하얀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들부터, 말라비틀어진 가죽과 썩 어들어가는 고깃덩이가 뼈에 달라붙어 있는 것들까지 고루 섞여 있었다.
문제는 그 모든 언데드들이 한데 섞여서 노도와도 같이 밀려들다 보니 어떻게 감당할 방법이 없다는 데 있었다.
더군다나 한밤중이라 짙은 어둠 때문에 작은 언데드들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아 알아채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달 하나가 떠 있어 희미하나마 형체를 알아 볼 수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시야를 확보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원형으로 방진을 짜라!”
“모두들 정신 차려!”
여기저기서 장교급 간부들이 부하들을 통제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이미 공황상태에 빠져버린 부하들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정예병으로 유명한 페가수스 용병단원들이었지만, 이런 대처가 힘든 상황은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용병들의 공포는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아무리 방패로 방진을 형성해도 그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오는 초소형 언데드들! 작은 언데드들이 깨문다고 해서 그리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는 않는다. 이미 바짝 말라붙어버린 뼈와 가죽만 남아있는 언데드에게는 시독(屍毒)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뭔가가 자신을 깨물게 되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공포에 질린 용병들이 방진에서 하나둘 이탈하며 군데군데 구멍이 뚫리게 되었다. 그리고 구멍이 뚫린 엉성한 방진으로는 대형급 언데드의 돌진을 막을 수가 없었 다.
“이럴 수가…….”
이때, 기습 후 대처가 늦긴 했지만 빛 덩어리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주위를 환히 밝히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가 마법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수많은 언데드들이 떼로 몰려온다 해도 자신에게 작은 피해조차 입힐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공포심을 가질 리가 없다.
그의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능력을 드러내 언데드들을 퇴치하면 전투가 끝난 뒤 결국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그는 현재 공식적으로 삼류 마법사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용병단이 전멸할 게 불 보듯 뻔했다.
아르티어스가 잠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망설이는 동안, 전황은 순식간에 파멸로 치닫고 있었다. 숙영지를 습격해 들어온 언데드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 던 탓이다.
하지만 하늘 위로 빛 덩어리가 날아올라 주위를 밝혀주자 조금씩 전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랜 실전경험으로 다져진 용병들답게 시야가 확보되자마자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부대별로 뭉쳐 대항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홉킨스는 악을 쓰듯 소리치며 연신 명령을 내리기 바빴다.
“연대 전 대원은 동쪽으로 탈출한다! 방진을 흐트러트리지 말고 천천히 이동해라. 정신 차려! 허무하게 이런 곳에서 죽을 생각이야!”
용병들이 방진을 형성한 채 후퇴를 시작하자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호위병들에게 급히 지시를 내렸다.
“나는 여기서 부대원들의 후퇴를 지원하겠다. 그러니 스승님을 잘 부탁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가시게 해서는 안 돼.”
마치 죽음을 각오한 듯한 아르티어스의 명령에 그의 호위병들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현재 연대에서 움직일 수 있는 마법사는 아르티어스 혼자밖에 없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빛 덩어리들로 인해 겨우 아군들이 용기백배하여 언데드들과 싸우 고 있는 중이다. 만약 그가 빠진다면 방금 전처럼 혼란밖에 남지 않게 된다는 걸 그들도 잘 아는 것이다.
“맡겨주십시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스승님을 무사히 링카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르티어스가 프라이스를 아끼는 마음에 호위들을 떠나보낸 건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들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적당히 마법을 쓰든, 아니면 이대로 유희를 쫑치고 집으로 돌아갈지를 결정할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아르티어스가 쉽게 결정을 내리기 힘들 정도로 상황은 급속도로 전개되고 있었다.
엄청난 언데드들의 기습 공격에도 불구하고 용병단이 그럭저럭 생존하여 후퇴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기사단의 막강한 전력 덕분이었다.
극에 달한 마나의 힘이 응축된 검식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수북한 뼛조각만이 남았다.
언데드의 크기는 상관이 없었다. 커다란 자이언트 울프부터 시작해 손가락만 한 사막생쥐들까지, 모든 언데드들이 맞는 순간 가루가 되어버렸다.
라이놀을 비롯한 기사들이 라이로부터 배운 검술을 전력으로 전개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이렇게나 강해졌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모두들 환희에 빠져 검을 휘둘렀다.
예전에는 정규기사들의 보조 노릇이나 하다 정찰조에서 생을 끝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이 검술만 있다면, 자신들도 타이탄을 지급받는 정규기 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검술의 위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기사들은 더욱 힘을 내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용병들이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우리가 벌어줘야 한다!”
잠시 후, 어두운 밤하늘에 둥근 구체 다섯 개가 둥실 떠오르며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마법사가 구형의 빛 덩어리를 하늘에 띄운 것이다.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기사들은 미약한 달빛 정도만 있어도 충분히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마나를 운용하지 못하는 용병들은 그렇지가 않다. 어둠 속에서 언데드의 공격에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용병들은 빛 덩어리가 떠오른 후, 그제서야 급격히 안정을 되찾았다.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용병단이 아닌, 정예로 구성된 실력 있는 용병단이라고 하더니 그 이름값은 하는 모양이다.
“용병들이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뒤를 막아줘야 한다. 모두들 조금만 더 힘내!”
“옛!”
전력을 다해 무한정 공격을 펼칠 수는 없다. 하지만 용병들이 점차 혼란을 수습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잠시만 더 시간을 끌면 될 듯 보인다. 힘 이 부쩍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사들은 이를 악물고 물밀듯 밀려드는 언데드들을 향해 검술을 퍼부었다.
그중에는 라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아르티어스가 전력을 다해 검술을 시전하고 있는 라이의 모습을 봤다면 자신의 아들인 다크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라이가 자신의 아들이 환생한 거 라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라이에 대한 관심을 끊은 아르티어스는 마지막 남은 용병들과 함께 빠르게 후퇴하고 있었기에 기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대원 간에 거리를 너무 벌리지 않도록 주의해!”
“옛, 조장님.”
라이놀 일행이 언데드 떼와 싸워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홉킨스 연대장에게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것도 수많은 종이 모인 언데드 떼거리를 상대로 자신들이 싸우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옛 고전에 쓰여진 언데드들이라고 해봐야 흡혈귀(Vampire)나 아니면 그 종자인 굴(Ghoul)이 수백, 좀비나 스켈레톤 같은 건 많아 봐야 몇백이나 몇천이 고작이 다. 영웅담에서는 주인공 일행이 학살을 벌이는 대상으로 자주 등장하는 허접한 것이 바로 언데드였다.
하지만 자신들이 지금 싸우고 있는 언데드 집단은 영웅담 속의 언데드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굴이나 좀비, 아니면 스켈레톤 따위가 같은 종으로 몇백 마리씩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 아닌, 사막에 서식하는 거의 모든 생명체가 뒤섞여 공격해 오고 있다. 게다 가 크고 작은 것들이 함께 섞여 있다 보니 상대하기가 아주 까다로웠다. 대형 언데드를 상대하고 있을 때, 그 빈틈을 뚫고 수많은 중, 소형들이 쏟아져 들어오다 보 니혼란스럽기 짝이 없던 것이다.
아마 최근 라이로부터 입수한 새로운 검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그들은 엄청난 타격을 받고 용병들을 버려둔 채 도주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새로 배 운 검법이 언데드들을 상대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자 기사들은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이 언데드들을 학살하며 생명의 불꽃이라 할 수 있는 마나의 광채를 내뿜자, 주변의 모든 언데드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언데드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자 라이놀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아무리 막강한 검법으로 해치우고 있다고는 해도 더 이상 언데드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안 되겠다. 우리도 탈출한다!”
하지만 바로 그때, 라이놀이 딛고 있던 모랫바닥 주위로 마치 벽이라도 솟은 듯 뭔가가 불쑥 튀어 올랐다. 워낙에 많은 언데드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던 탓에, 발밑에서 벌어진 변괴를 알아차리는 게 늦을 수밖에 없었다.
“헉!!”
라이놀이 변괴를 눈치채고 급히 허공으로 뛰어오르려 했을 때는 이미 그 뭔가에 갇혀버린 후였다. 그리고 칠흑과도 같은 어둠과 함께 뭔가가 갈리는 듯한 불길한 소음…….
“이게 뭐야?”
라이놀은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랐지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은 그 순간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모래 속에서 엄청난 크 기의 괴생명체가 솟구쳐 올라와 라이놀을 한입에 삼켜버리는 것을…….
“샌드 웜이다!”
“빨리 조장님을 구해!”
라이놀 주위에 있던 대원들은 일제히 샌드웜을 향해 검을 날렸지만, 전혀 먹혀들지가 않았다. 샌드 웜의 외피가 너무 두껍고 단단해서 검이 박히지를 않았던 것이 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일제 공격을 할 수 있었던 기회도 단 한 번뿐, 대원들이 최대한의 마나를 끌어모아 공격을 했음에도 전혀 피해를 입히지 못해 허탈해하고 있을 때 샌드 웜 은 라이놀을 삼킨 채 곧이어 모래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남은 대원들은 그저 황망할 따름이었다. 새로 익힌 막강한 검법의 위력에 하늘까지 치솟던 자신감은 샌드 웜이라는 거대 언데드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샌드웜에게 삼켜진 조장을 구해야 했지만 방법이 전혀 없었다. 모래 깊숙이 파고 들어간 그놈을 어떻게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샌드 웜을 따라 자신들도 모 래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대원들은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라이놀 조장이 살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더욱 큰 문제는 그 거대 샌드웜이 조장 하나로 만족할 리 없을 거라는 점이 다. 그렇다면 조만간에 다시금 자신들을 공격하러 올라올 텐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장님을 놔두고 갈 수는 없다.”
그 순간에도 사방에서 수많은 언데드들이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조장을 구출하려면 한시가 급한 상황이지만, 모여서 의논을 할 여유조차 없다. 아니, 의논은 고 사하고 한자리에 모일 틈조차 없었다.
“이런 젠장! 조장님! 어디 계십니까?”
알파17이 이곳에 샌드 웜을 의도적으로 배치해 놓은 건 아니다. 샌드 웜은 사막의 모래 속을 은밀히 배회하는 데 특화된 몬스터인데다 일반 언데드와는 비교가 되 지 않을 정도로 막강했다. 그렇기에 샌드 웜들은 사막 위를 단독으로 떠돌며 경비를 하는 데 이용되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도시국가로 침투해 들어오는 그래듀에이트였다. 먹잇감을 찾아 우연히 이 근처까지 왔던 샌드 웜의 예민한 감각에 라이놀 일행이 재수 없게 걸려든 것뿐이다.
리치 알파3이 맡고 있는 주 임무는 마신의 은혜가 설치된 장소를 순회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언데드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샌드 웜의 관리도 그의 소관 이었다.
그런데 도시국가 외곽 경비를 위해 풀어놓은 샌드웜들이 사막을 횡단하여 도시로 침투해 들어오는 그래듀에이트를 사냥하고 있는 줄은 그는 꿈에도 몰랐다. 그 모든 시체들을 데스 나이트로 만들었다면 엄청난 전력이 확보될 수 있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샌드 웜은 살아있을 때는 사막 밑으로 은밀히 이동하며 먹잇감을 찾아다니다가, 적당한 먹이를 발견하면 기습하여 잡아먹는다. 그 과정에 입속에 방대한 모래가 쏟아져 들어오게 되지만,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화가 가능한 부분은 이빨로 잘게 다져 일부 모래와 함께 위장 속으로 넣고, 대부분의 모래는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옆쪽에 마련된 미세한 구멍들을 통해 배출되게 된다.
언데드 샌드 웜이 삼킨 그래듀에이트들 또한 그런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문제는 소화기관이 남아있지 못했기에 입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방대한 모래들과 함께 사 막에 흩뿌려졌다는 것이었지만.
그 때문에 알파3은 통제하고 있던 샌드 웜이 그래듀에이트를 사냥하고 있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빨이 잔뜩 돋아나 있는 입 부분을 빠져나와 식도를 통과하면, 그다음은 광활한 저장공간으로 이어진다. 살아있는 샌드 웜이었다면 내장과도 같은 부속기관이 자 리 잡고 있어야 할 공간이었다. 하지만 언데드가 된 지금 샌드웜의 뱃속은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샌드 웜은 사막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자기 딴에는 쓸만하다 생각되는 걸 덥썩덥썩 삼킨 뒤 뱃속에 저장해뒀다가 알파3에게로 가져왔다. 그 대부분이 쓰레기 들이었기에 알파3은 확인조차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그중에 타이탄이 온전한 상태로 들어있는 걸 발견한 알파3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알파3은 즉시 휘하의 모든 샌드 웜들을 소집해 녀석들의 뱃속을 확인했다.
뜻밖에도 쏟아져 나오는 타이탄들! 어지간한 것들은 이빨에 갈려 산산조각이 나 뼈들 사이로 흘러나갔지만 거대한 크기의 강철 타이탄은 이빨들에 갈리면서도 비 교적 온전한 상태를 유지한 채 뱃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뱃속에 든 타이탄들의 절반 정도는 박살이 난 상태였는데, 예외 없이 그 속에는 그래듀에이트의 사체가 들어있었다. 샌드 웜의 기습을 피해 운 좋게 탑승하는 데까 지는 성공했지만, 삼켜져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샌드웜이 원하는 것은 그래듀에이트가 지닌 강한 생명력이다. 웜의 이빨에 갈린 타이탄의 수복에 모든 마나를 다 빨린 탑승자가 사망하면 샌드 웜의 저작 활동도 멈춘다. 더 이상 씹어봐야 아무것도 나오지를 않기 때문에.
오너가 기습을 당해 사망해 버린 경우, 주인을 잃은 타이탄은 공간을 열고 밖으로 나오게 된다. 주인이 없는 타이탄은 새로운 주인을 찾아 이동을 할 수 있다. 하지 만 그걸 방지하기 위해 미스릴 코팅을 하여 타이탄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그 때문에 주인을 잃은 타이탄들이 공간을 열고 밖으로 나와 있다가
샌드웜의 뱃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생명체가 아닌 만큼, 씹지 않았기에 온전한 상태로 뱃속에 들어가 있다가 알파3의 눈에 띄게 된 것이다.
그날 이후, 알파3은 샌드 웜들에게 그래듀에이트를 씹어서 가루로 만들지 말 것을 철저히 교육시켰다. 생명력을 흡수하려면 일단은 씹어야 하겠지만, 죽인 다음에 는 그 시체를 더 씹어 가루로 만들지 말고 뱃속에 넣어서 오라는 것이다.
지능이 떨어지는 샌드 웜에게는 좀 어려운 명령이긴 했지만, 오랜 시간에 걸친 반복된 교육은 나름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샌드 웜은 본능적으로 주변에서 포착되는 존재들 중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한 자를 노려 기습을 가했다.
모래 속에서 솟구쳐 오르며 한입에 삼켜버리는 샌드 웜의 공격에 고스란히 당한 먹잇감은 절대 살아날 수가 없다. 샌드 웜의 입 안은 모래를 파고 들어가기 위한 강하고 날카로운 수많은 이빨들로 뒤덮여 있다. 굳이 샌드 웜이 씹지 않아도 위쪽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중력으로 낙하하여 지면과 충돌하는 그 순간, 관성에 따라 샌드웜의 입속을 뒹굴면서 그 많은 이빨들에 찔려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강철보다 더욱 단단한 이빨들 사이로 피와 함께 생명력이 흡수되기 시작하면 샌드웜은 목구멍을 열고, 조심스레 이빨을 움직여 먹이를 뱃속으로 삼킨다. 생명력 을 흡수하는 것뿐이라면 굳이 뱃속에까지 넣을 필요가 없었지만, 지시받은 대로 시체를 온전히 유지한 채 가져가야 알파3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타이탄 탓에 그래듀에이트를 씹어버린 걸 들키는 것이었지만, 그 인과관계를 샌드 웜은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입 안을 비운 샌드 웜은 그제서야 모래를 삼키며 재빨리 모래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거대한 덩치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모래 속으로 들어간 샌드 웜은 두 번째로 공격할 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모래 위쪽에 있는 것들 중에서 라이놀 다음으로 높은 생명력을 지닌 놈을 특정한 샌드 웜은 모래 속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모래 위쪽에서 느껴지는 먹잇감의 기척은 일곱씩이나 된다.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만난 진수성찬이다. 생각 같아서는 몽땅 다 모래와 함께 꿀꺽꿀꺽 삼켜 가루를 내버리고 싶었다. 그게 훨씬 빠르고 효과적이었지만, 알파3의 엄중한 지시로 인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원통스러울 뿐이다.
생명의 근원인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그래듀에이트의 능력이 압도적인 건 사실이지만, 언데드는 그것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불을 쫓아 달려드는 불나방 처럼 그 생명력을 탐해서 무턱대고 달려든다. 언데드들에게 있어서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냐 약하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걸 느낄 자아도 없었고.
막강한 초식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수많은 언데드들이 박살이 나서 흩어지고 있었지만, 곧이어 새로운 언데드들이 그 공간을 비집고 돌진해 들어온다. 쉴 틈이라고 는 전혀 없다. 그리고 단 한 순간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잠시라도 한 자리에 머뭇거릴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거대한 언데드와 싸우느라 잠시 한 자리에 지체되는 순간 모래를 뚫고 솟아오른 엄청난 거체! 또다시 기사 한 명이 샌드웜의 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바로 부조장이었다.
두 번째 희생자가 생기자 기사들은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이곳에 있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모두 도망쳐라!”
하지만 사방에서 덮쳐오는 언데드 떼로 인해 도망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들 전장에서 탈출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을 때, 라이는 자신의 능력에 한껏 취해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렇게 전력을 다해 상대를 공격해 본 적이 없었던 만큼,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는 무수한 언데드 떼는 라이에게 최적의 실험대상이 되어주었다.
사람을 상대로 검격을 날렸을 때는 피떡이 되어 날아가는 바람에 오히려 자신이 혐오감이 깃든 시선을 받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수많은 뼈가 가루가 되어 사방으 로 흩어지고 있을 뿐, 끔찍스런 핏덩이도, 비릿한 혈향도 느껴지지 않는다.
라이는 자신의 동료들이 이미 다 도망쳐 버렸다는 것도 모른 채 검술에 깊이 빠져버렸다.
그의 눈앞에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자신이 검인지 검이 자신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는 모래쥐 한 마리, 한 마리까지 다 느껴진다.
커다란 사막늑대가 커다란 주둥이를 벌리고 달려들었지만, 그의 검에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라이는 언데드들이 그리 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실험해보기 딱 좋은 상대. 하지만 그건 라이 자신이 강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지 언데드들이 약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라이가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언데드들도 부지기수라는 것도 몰랐다.
새로운 세계에 심취해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 갑자기 주변의 모래가 치솟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라이는 시커먼 암흑의 공간 속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암흑의 공간에서는 쇠가 갈리는 듯한 괴이한 금속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죽임을 당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라이는 발이 채 지면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 뜬 상태에서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불꽃이 번쩍였다.
“맙소사!! 이게 뭐지??
순간 라이의 눈에 보이는 건 고슴도치처럼 솟아있는 수도 없이 많은 칼날, 아니 위쪽이 뾰족한 쇠기둥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쇠기둥 같은 것은 머리 위쪽과 발밑 가득 덮여있었다. 쇠기둥의 크기는 언뜻 보아도 라이의 키보다도 더 컸다.
‘쇠기둥 사이의 공간으로 뛰어내리면 되겠어!’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살짝 몸을 틀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자칫 잘못해서 조금이라도 위치를 잘못 잡으면 저 뾰족한 쇠기둥에 꿰뚫려 즉사를 당하게 되리라. 라이는 찰나의 순간을 노려 기민한 판단력과 움직임을 발휘하여 겨우 쇠기둥 사이로 내려앉을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갑자기 중력의 방향이 변했다. 위로 솟구쳐 올랐던 샌드 웜의 거체가 정점에 도달한 후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헉! 이게 뭐야?!”
위로 솟구쳤던 거체가 얌전하게 내려오는 게 아니다. 거체의 무게 때문에 점점 가속도가 붙어 모랫바닥에 도착할 때쯤이면 엄청난 충돌을 일으키며 바닥과 부딪쳤 다.
문제는 라이가 있는 곳이 쇠기둥처럼 뾰족한 것들이 잔뜩 솟아있는 웜의 이빨 사이라는 점이었다.
위아래로 이빨이 촘촘하게 솟아나 있는 공간 속을 관성에 따라 이리저리 구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빛 한 점조차 없는 입안은 칠흑처럼 어두워 상황 판단을 전혀 할 수 없다는 점도 라이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컥!”
갑자기 가슴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 손을 뻗어보니 굵은 쇠기둥들 중 하나가 자신의 가슴에 깊게 꽂혀 있었다. 엄청난 고통과 함께 몸 안의 기운이 쇠기둥을 타고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듯한 몽롱함으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발버둥을 칠수록 상처는 더욱 깊어졌고 심한 출혈과 아찔한 고통으로 인해 라이는 곧이어 정신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