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8권 24화 : 기적은 2번도 일어날 수 있다 – 2
기적은 2번도 일어날 수 있다 – 2
잠시 후, 작전관의 전달을 받은 클리프 바그룩 자작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찾으셨습니까, 각하.”
그루시아 후작은 방금 전에 작전관과 주고받았던 얘기를 대충 알려주며 왠지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
“라이의 타이탄을 회수하러 갔던 게 경이었지?”
“예, 각하.”
“내 기억으로는, 라이가 언데드 샌드웜에게 잡아먹혔기에 타이탄 회수를 할 수 없었다고 하지 않았나?”
“예, 각하, 틀림없습니다.”
그루시아 후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녀석이 죽은 게 확실한가?”
침중한 후작의 물음에 클리프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4개월 전의 일이었지만 지금도 하늘 위로 치솟던 샌드 웜의 모습이 눈에 선할 정도다. 그만큼 인상적인 장면은 난생처음이었으니까.
“물론입니다, 각하. 그때 용기사의 도움을 받아 본부로 돌아왔었는데,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들도 라이가 웜에게 삼켜지는 걸 목격했습니다. 저는 모래 먼지 탓에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만, 그들은 상공에서 확실하게 봤다고 했습니다. 샌드 웜에게 삼켜지고도 살아나올 수 있는 인간은 절대로 없다고 조언한 것도 그들입니다.”
클리프는 만일을 대비해 용기사와 마법사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들이 상공에서 확실히 목격했다고도 첨언했다.
“자네가 한 가지 잊고 있는 게 있군. 라이가 타이탄을 노획한 곳이 바로 샌드 웜의 뱃속이라는 걸 말일세.”
그루시아 후작의 말에 클리프는 살짝 당황한 것 같았지만,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런 기적과도 같은 일이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번 그런 지옥과도 같은 웜의 뱃속에서 살아나왔던 녀석이야. 두 번째는 더욱 쉬웠을 수도 있지 않을까?”
웜의 구강구조와 섭식 형태로 봤을 때, 절대로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없다. 살이나 근육은 물론이고 뼈까지 몽땅 가루가 되도록 갈려서 뱃속으로 들어가는 구조였으니까.
하지만 온전한 상태의 시체를 얻기 위한 알파3의 조정으로 인해 시체에 최대한 상처가 적게 나도록 한 후 삼킬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 덕분에 라이가 살아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속사정을 알 수가 없으니 라이의 생환은 기적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사실, 라이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웜이 대충 씹었다고 해도 즉사를 면키는 힘들었다.
만약 라이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클리프의 책임이 된다. 그렇기에 클리프는 그루시아 후작의 말에 최대한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그런 기적이 두 번이나 녀석에게 찾아오리라 믿기는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그루시아 후작은 어깨를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글쎄・・・・・・ 그걸 잘 모르겠으니 경을 부른 걸세. 경이 그걸 조사해 줬으면 하네.”
클리프는 그루시아 후작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각하, 조사를 시작한다면 가장 먼저 323정찰조부터 뒤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제게는 라이의 신상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라이의 경우, 그가 지닌 검술로 인해 모든 게 극비로 처리되고 있었다. 물론 일부 대원들이 알아야 할 소소한 부분들은 전달되고 있었지만, 검술에 대한건 완전한 극비였다.
그렇기에 단장의 허가 없이는 라이에 대한 조사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벨에게 통보해 두겠네. 라이놀이 살아있다면 좋았겠지만, 뭐 이미 죽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라이놀에게 듣기로는 정찰조원 전체가 거기에 매달리고 있다고 했으니, 어느 정도 도움은 될 걸세.”
“알겠습니다, 각하.”
클리프 바그룩은 군례를 올리고 물러났다.
“라이가 살아있다면 클리프가 처리해 줄 거고, 이제 남은 건 서쪽 놈들이 개입해 온 건 아닌지 알아보는 일만 남았군.” 서쪽 대륙의 개입이 확실하다면, 이번 언데드의 준동 또한 놈들이 획책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아주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온 작전일 거라는 거다.
이 경우 콘도르 기사단 아니, 알카사스 제국 혼자만의 힘으로는 감당이 안 될 수도 있었다.
“조사는 정보부에서 해줄 테고, 이쪽은 이쪽대로 마음의 준비는 해두는 게 좋겠지.”
그루시아 후작의 지시를 받은 클리프 바그룩 자작은 4개월여 만에 다시 323 정찰조가 주둔하고 있는 요새를 찾아갔다.
그때는 라이가 도망치고 어쩌고 하는 통에 요새에 주둔 중인 기사들과 얘기를 나눌 여유조차 없었다.
141분대의 오너들과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정찰조에 소속된 기사들 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오너급이야 숫자도 적은 데다, 함께 훈련을 할 기회도 많다. 하지만 정찰조에 소속된 기사들은 숫자도 많은 데다 평소에 접할 기회가 적었기에 친분을 쌓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미 라이 탈출사건 때 안면을 익힌 사이다.
클리프를 보자마자 아벨이 인사를 건네왔다.
“어서 오십시오, 자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조장, 오랜만일세.”
클리프는 아벨에게 라이의 능력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질문을 던졌다.
그 무시무시한 샌드 웜의 뱃속으로 들어가고도 살아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단장의 추측대로 라이가 다시 그곳에서 살아나온 것이라면, 이건 정말 큰일인 것이다.
“라이의 검술이 놀랍기는 했습니다만, 웜에게 잡아먹히고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도 사람이니까요.”
물론 그런 사실은 클리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장에게 직접 지시를 받은 이상 허투루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듣기로는 라이가 알고 있는 무술을 정리하고 있었다고 하던데…………”
“예. 단장님께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리로 따라오시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벨이 안내한 방에는 36권의 책이 놓여있었다.
그중에서 완성된 건 여섯 권. 하나 이상의 초식이 기록되어 있는 건 열두 권 정도. 나머지는 하나의 초식도 제대로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라이가 익힌 검술은 36개 기본 초식에, 각 초식 당 파생형 3가지가 있어서 총 144개 초식으로 이뤄져 있다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링카 성으로
이동해 온 후에는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 제대로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파생형이 세 가지밖에 되지 않는다니…………. 제대로 전수받지 못한 건 아닌가?”
클리프의 의문에 아벨은 팔까지 내저으며 강력히 부인했다.
“파생형은 적지만 불완전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클리프는 완성된 여섯 권부터 집어 들었다.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것부터 살펴볼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고급검술은 마나를 활용하다 보니 강력한 위력을 뿜어낼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엉터리로 익혔다가는 폐인이 되기 십상이라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책에는 상세한 검로(劍路)와 함께 그에 맞춰 마나를 어떤 식으로 흘려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었다.
책을 보던 클리프는 내심 감탄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오, 아주 자세히 잘 기록해 놨군. 특히, 마나 운용에 대해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놨어. 뜻밖에도 라이놀 조장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을 줄은 몰랐군.”
“라이놀 조장님의 능력이 출중한 것도 사실이지만, 라이가 아주 협조적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물론 그런 분위기로 유도한 건 라이놀 조장님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면서 아벨은 라이놀이 어떻게 라이를 구워삶았는지도 자세히 설명했다.
설명을 들으며 클리프는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는 아직 어려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럼에도 자칫 자신이 이용당한다는 걸 눈치챌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걸 라이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분위기를 조정해 검술을 착실히 빼냈으니, 그런 부분에서 라이놀의 능력은 아주 탁월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네의 말대로라면, 라이가 자신이 아는 건 모두 다 실토했었겠군.”
클리프는 책들을 집어 들고 검로만 대충 훑어봤을 뿐, 마나의 운용까지 살펴보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는 검법에 그렇게까지 시간을 투입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놓아져 있던 책의 마지막 권을 내려놓으며 클리프는 아벨에게 물었다.
“이게 어느 정도 위력이 있는 검술인지 알아봐야겠어. 협조해 주겠나?”
“물론입니다. 자작님. 밖으로 나가시죠.”
라이의 검술이 엄중한 기밀로 취급되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위력이 이렇게까지 대단한지는 클리프는 모르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서 검술을 전개했을 때의 파괴력과 안정성.
자신보다 훨씬 실력이 떨어지는 아벨이 전개하고 있음에도 십분 그 위력이 발휘되고 있었다. 결국 클리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였다니…. 단장님께서 극비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군.”
“예. 그래서 라이의 검술에 대한 건 라이놀 조장이 단장님께 직접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봤을 때는 아주 안정적인 것 같은데, 자네가 느끼기에는 어떻던가? 마나를 전개함에 있어서 뭔가 부조화는 느껴지지 않던가?”
클리프의 물음에 아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제가 그전에 익혔던 검술에 비한다면 훨씬 안정적입니다. 저도 라이처럼 이 검술을 처음부터 익혔다면 벌써 오너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저희 조원들 전체가 다 이 검술을 익혔는데, 과거보다 훨씬 더 성장했으니까 말입니다. 링카 성으로 오지 않고 계속 검술 연구를 할 수 있었다면……….”
여기까지 말하던 아벨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서로 대련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너무 방심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클리프는 자신이 속마음을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뜻밖에 라이놀 조장이 전사한 탓에 모든 게 중단되어 버렸으니 경의 말이 잘못된 것도 아니지. 정말 안타까운 일일세. 일단, 검술서는 내가 가져가도록 하겠네. 여기에 계속 놔두기는 너무 위험한 물건이야.”
“알고 있습니다. 자작님.”
라이놀이 남긴 검술서의 가치를 알아본 이상, 그걸 안 익히고 넘어갈 수는 없다.
보다 완벽한 상태의 검술서였다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몇 가지 초식을 건진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클리프는 계획을 연장하여 일주일간 323정찰조의 숙소에 묵으며 밤에는 검술서를 연구하고, 낮에는 조원들과 대련하며 검술을 익혔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클리프는 라이가 익힌 검술이 보통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크라레스의 검술이야. 그것도 극소수에만 비밀리에 전수된다는 최강급의 검술. 막힘없이 자연스레 전개되는 마나. 검기의 발현이 이렇게까지 자연스러울 수 있다니…………?
클리프는 라이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이야 아직 어려서 단전에 마나를 쌓지 못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겠지만, 2~30년쯤 지나면 대단한 고수가 되었으리라.
지금에 이르러서는 단장이 라이가 웜에게서 다시금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상상 이상으로 강한 검술을 익힌 녀석이었다.
문제는 지금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건 라이가 익힌 것의 극히 일부분일 거라는 점이다. 검술 외에 다른 것들도 그의 스승에게서 전수받았을 가능성이 크니까.
스승이 살아오며 경험한 것들에 대한 전수. 물론 실전경험보다는 급수가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월등히 도움이 된다.
어쩌면 엄청난 고수였을 그 스승의 가르침 덕분에 그 사지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한번 탈출했다면, 두 번째는 더욱 쉬울 게 아니겠느냐는 단장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가능성은 극히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녀석이 그곳에서 살아서 탈출했다고 치고. 그렇다면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정찰조원들에게 라이에 대해서 알아본 결과 상당히 세상 물정에 어두웠었다는 걸 알았다.
단장에게서 건네받았던 자료에도 나와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스승과 함께 둘이서 산에 들어가 오로지 수련만을 했었다고. 그러다가 스승이 갑자기 죽어버리는 통에 하산하게 되었다고. “그렇다면 세상 살아가는 지식은 상당히 모자랄 게 뻔한데…………….”
클리프는 아벨을 불러 라이가 정찰조에 배속된 이후 어떤 교육을 받아왔는지를 물었다.
뜻밖에도 라이는 정찰조에 있으면서 그리 많은 걸 교육받지는 못했다. 대부분이 예절이나 피아식별 등 기사로서 가장 기초적인 교육만을 받았다.
대신 대부분의 시간은 라이가 기억하고 있는 검술을 함께 익히는데 할애되었다고 했다. 검술 전체를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완전히 수련하지는 못했기에 라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걸 가르쳐주며 자연스레 그의 검술을 훔쳐 배울 수가 있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