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권 9화 – 또 다른 현경의 고수
또 다른 현경의 고수
묵혼을 뽑아 든 다음 새로운 투지를 불태우며 묵향이 목수에게 몸을 날렸다. 둘의 사이는 순식간에 좁혀졌고 묵향은 곧바로 어검술을 전개하며 상대의 목을 향해 묵혼을 휘둘렀다. 하지만 상대는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 어떤 반격도 하지 않았다. 묵향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공력을 투입한 어검술이라면 어떤 방어적인 행동을 했을 것이다. 피한다든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행동으로 대응을 하든지…. 묵향 자신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 공격을 호신강기 따위를 이용해서 몸으로 때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묵혼검은 상대의 목 반 촌 거리에서 멈췄다. 묵향의 입에서 딱딱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죽고 싶소?”
그러자 목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이 오기를 기다렸지. 정말 놀랍군. 자네는 내 목을 칠 충분한 자격이 있어. 자… 뜸들이지 말고 실행하게나.”
“뭐, 부탁을 들어 드리는 것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이유나 알고 싶은데요.”
그러면서 묵향이 묵혼검을 검집 속에 집어넣고는 허리에 차자 상대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자네는 나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닌가?”
“선배를 만나러 온 것은 사실이지만, 죽일 생각까지는…….”
“그럼 자네는 청해성의 살겁(劫)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청해성의 살겁이라뇨?”
목수는 아무 말 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묵향에게 말했다.
“일단 이것도 인연이니……. 따라오게나. 술이나 한잔하세.”
목수가 첫 번의 출수로 인해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린 초가의 옆쪽에서 구덩이를 파자 안에서 자그마한 항아리가 하나 나왔다. 목수는 항아리를 꺼낸 다음 그것을 들고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묵향을 이끌고 갔다. 목수는 그런대로 운치 있는 자리를 골라 묵향에게 앉기를 권한 다음 묵향과 자신의 사이에 항아리를 놓았다. 목수가 항아리를 열자 그윽한 주향(酒香)이 흘러나왔다. 목수가 항아리 안으로 꼭 잔을 쥐고 있는 것 같은 손짓으로 술을 뜨자 놀랍게도 진기로 형성된 무형의 그 릇에 술이 담겨 올라왔다. 목수는 그것을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부가 누군지 자네는 아는가?”
“글쎄요…….”
“노부는 과거 혈마(血魔)라 불렸었네.”
그제서야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묵향이 대꾸를 했다.
“혈마 선배셨군요. 사파의 인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강기를 자유로이 사용하신다는 말을 들었었습니다.”
“클클클, 아닐세. 노부는 사파의 인물이 아니야. 노부의 사문은 전진일세.”
“아… 그 정과 마의 무공을 함께 익힌다는?”
“자네도 알고 있었군. 노부의 나이 180세에 더 이상 무공은 증진되지 못하고 어떤 벽에 막혔지. 바로 현경의 벽이야. 그래서 노부는 그 벽을 부수기 위해 주야로 무 수한 노력을 했어. 너무 과도하게 노력한 탓에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려 그 마성(魔性)이 은연중에 골수에까지 침투해 버렸지. 노부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것은 거의 1백 년 전이었네. 그때 노부가 느낀 것은 어떤 촌민의 심장을 내 오른손이 움켜쥐고 있다는 것이었지. 그리고 정말 많은 사람이 죽어 있었어. 그들의 시체를 검 사해 보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내가 모두 죽였다는 것을 알았지.
나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네. 그래서 사문에 돌아가서 죄를 청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었지. 사문에 돌아가 보니 그곳은 황폐하게 변해 있더군. 수많은 동 문들이 백골이 되어 군데군데 쓰러져 있었네. 그 흉수는 곧이어 알 수 있었지. 아무리 뼈만 남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손쓴 흔적을 찾기는 쉬웠어. 노부는 마성에 미쳐 날뛰며 동문과 사부까지 모두 죽여 버린 거야.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을까도 생각해 봤네만, 나까지 죽어 버리면 사문의 맥이 끊어지기에 그럴 수도 없었지. 그래서 자그마한 문파를 하나 만들고 그들에게 한 번 씩 찾아가 사문의 절학을 알려 주면서 여기저기를 떠돌며 참회를 하고 있는 중이었어.
별로 인재가 들어오지 않아 이제 사문도 끝장이라는 절망을 하고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온 왕중양(王仲陽)이란 녀석이 꽤나 쓸 만해 보이더군. 아마도 전진의 미 래를 다시금 넓혀 갈 대들보가 될 테지. 새로운 전진에는 마(魔)의 무공을 전수하지는 않았어. 나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면 안될 것 같아서…….
그나저나 자네도 대단하더군. 자네와 같은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네.”
“과찬이십니다. 제 실력이 조금만 떨어졌다면 선배님의 그 첫 번째 일격으로 가루가 됐을 텐데요…….”
“그건 자네의 말이 틀려. 노부는 1백 년간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참회를 하고 땅을 파다 보니 어느 날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더군. 자네도 대자연에 떠도는 강렬한
기를 느껴 봤나?”
“예.”
“그래. 그렇다면 이해하기 한결 편하겠군. 나는 곡괭이에 기를 담아 그냥 대지를 내려친 것이 아니야. 그렇게 한다면 땅만 파이지 뭐 그렇게 가공할 기운이 뿜어져 나오지는 않지. 나는 나의 기를 대지의 기와 충돌시킨 거지. 그것은 극강한 두 개의 기가 충돌하며 뿜어져 나오는 강기의 회오리야. 노부는 그것을 깨달은 후 이 무 공을 전개했을 때 살아나올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네. 아마 노부도 그것에 당한다면 살아남기 힘들지도 몰라.”
조금 어리둥절한 묵향의 표정을 보더니 혈마는 껄걸 웃었다.
“자네도 오랜 시간 땅을 파 보면 알 수 있을 걸세. 사실 대지의 기를 포착하여 그것과 충돌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지. 참, 그런데 자네는 여기 왜 왔나? 노부와 은원(恩怨)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이곳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
“사실은 작은 식당에서 선배님이 만든 탁자를 봤죠. 그것은 어떤 연장을 사용해서 만든 것이 아니더군요. 아주 단단한 나무를 일격에 강기로 잘라서 판자를 만들 었다는 것을 알고 호기심에 찾아왔습니다.”
“껄껄, 술값이나 벌자고 만든 것 덕분에 오늘 목숨을 날릴 뻔했군. 나는 자네의 발걸음을 보고 놀랐지. 힘과 자신감이 넘치는 발걸음… 그 발자국 소리가 나는 고수고 너를 죽이러 왔다고 말하는 것 같더군. 노부는 내 생애 최고의 고수가 찾아온다는 것을 느꼈어. 아마 상대도 나를 괜히 찾아온 것은 아닐 테니, 나도 나름대 로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내력을 모으고 준비한 후 처음의 일격을 날린 거야.”
“그런데 선배께서는 제가 출수를 하자 곡괭이를 버리시던데, 그것은 왜……..”
“아, 나는 검을 쓰는 사람이 아니야. 장(掌)과 권(拳)을 주로 사용하지. 물론 사문에서 검을 배우기는 했지만 내 나이 1백여 세에 더 이상 검을 쓸 필요가 없더군. 그 다음부터는 검을 잡아 본 적이 없어. 검을 들고 다니는 것도 귀찮았고 말이지. 자네를 보아하니 검을 통해서 거의 극한에 가깝게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데, 나는 그 반대일세. 나는 도중에 검을 버리고 장과 권을 통해서 무(武)의 극한을 깨달았지. 그렇기에 도저히 검으로는 자네와 대결할 자신이 없었어. 설혹 내가 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나는 검을 버리고 손으로 막았을 걸세. 사실 검으로는 자네의 그 엄청난 강기 다발을 막을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비무를 청해도 될는지요?”
“클클, 고수들의 싸움에서 그 정도 초식을 교환했으면 되었지 더 이상 뭘 원하는가? 노부는 거의 3백여 년을 살아왔기에 이제 더 이상 무공이고 은원이고 뭐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어. 그리고 요즘 들어서는 뼈다귀까지 물렁해져서 자네의 공격을 버틸재간이 없어. 그나저나 밭도 새로 갈아야 하고 집도 지어야 하고,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군.”
“다음에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하하하, 이리저리 떠도는 몸이라 아마 힘들 걸세. 사실 이렇게 새파란 몸으로 한 곳에서 10년 동안 있기도 힘들어. 여기서 10년 저기서 10년, 이렇게 살고 있지. 정 만나고 싶으면 전진파에 연락을 해 두게나. 운이 있다면 만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점점 그곳도 기틀이 잡혀 가니 노부도 잘 안 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