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4권 15화 – 분투와 계책
분투와 계책
수천 구도 넘는 시신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늘을 불사르는 듯한 붉은 놀 덕분에 대자연조차도 그들의 주검에 피눈물을 흘려주는 듯 보일 정도였다. 시체 를 배불리 쪼아 먹은 새들이 황혼을 타고 푸드덕거리며 둥지로 날아가는 것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내. 저녁놀의 빛을 받아서 그런지 사내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 벌어진 이틀간에 걸친 격전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오늘이 그날이군.”
검붉은 피가 엉켜 붙어 산뜻하던 청의가 여기저기 찢어진 흑의가 다 되어 있었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믿음직스러운 사내의 넓은 등을 보며 웃음 짓던 음희는 시선을 돌려 멀리 포진한 정파의 본거지를 바라보며 그의 혼잣말에 대꾸했다.
“예, 오늘이죠.”
하지만 그녀가 애써 생기 있게 보이려 해도 전신에서 퍼져 나오는 피로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사내는 잠시 할 말을 잊고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음희와 세 명의 수하 무사들을 자랑스러운 듯 바라봤다. 모두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사내의 눈에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늠름하고, 또 가장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 노부조차도 수라도제를 상대로 이토록 오랫동안 분전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으니 말이다.”
“수라도제 쪽에서도 피해를 줄이려고 애쓰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죠.”
수라도제는 선발대 역할을 한 젊은이들 덕분에 상대방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수라도제가 알기에 그 젊은이들도 개개인의 실력은 상당히 뛰어났지 만 순식간에 전멸하고 말았다. 그것은 섬서분타에 상당한 수준을 갖춘 마교의 정예가 주둔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구사일생으로 살아 도망친 몇몇 젊은이들에게 받아 낸 진술과 섬서분타에 첩자를 파견해 둔 문파들에게서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필승을 얻기 위해 수라도제는 철저한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방패와 갑옷 등 상대의 화살에서 무사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장비들을 완전히 갖추었을 때는 이미 4일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 다. 주야로 작업했지만 겨우 몇 안 되는 대장간들을 이용해서 2천여 개의 방패와 갑옷을 만들었으니, 그 정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사이 수라도제는 섬서분타 에 집결되어 있는 마교 세력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대비했다. 이제 눈앞에 있는 먹이를 최소한의 대가만 지불하고 포식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노회(老)한 수라도제는 섬서분타 전투에서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로서는 확실한 승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선 섬서분타 외곽을 1천5백여 고수들 로 넓게 포위하고 3천 명의 고수를 집중 투입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처음 젊은 아이들처럼 너무 깊숙이 들어갔다가 오히려 포위당하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착실하게 퇴로를 유지하면서 한 개씩 한 개씩 보루들을 침몰시켜 나갔다.
그 때문에 분타의 외당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 하루하고도 반나절이라는 시간이 들어갔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별로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언제 마교 총타에서 구원병이 도착할지, 그것만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잘못하면 마교의 지원 부대에게 역으로 포위당해서 괴멸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 다.
수라도제가 천천히 압박해 들어온 덕분에 천진악은 자신에게 부여받은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임무를 완수해 낸 지금 수천에 이르는 외당을 지키던 호위 무사 들이 모두 죽거나 항복했다는 사실이나 염왕대 고수 40여 명이 전사했고, 거의 대부분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총단을 공격하기 전까지 섬서분타가 함락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완수해 낸 뒤의 희열만이 있을 뿐이었다.
천진악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둠이 내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런 밤에 전서구 따위는 날릴 수 없다. 섬서분타에서 묵향의 세력이 패퇴했다는 사실을 첩자 가 총단에 보고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내일 점심때쯤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 악전고투하며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철수하자!”
천진악의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딱딱한 음성에 음희 이하 세 명의 대주들은 재빨리 응답했다.
“옛!”
세 명의 대주들은 각기 자신의 수하들을 인솔하기 위해 그들이 포진하고 있는 구역으로 몸을 날렸다. 1각도 채 지나지 않아 염왕대의 무사들은 훈련받은 대로 비 밀 통로를 이용해 섬서분타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교주님.”
“아니, 지금 들어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급한 혁무상 장로의 목소리와 그를 말리는 호위 무사들의 목소리에 장인걸은 잠에서 깼다. 그의 옆에는 한중길 전 교주의 손녀인 한영영이 거의 벌거벗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장인걸은 이불을 끌어다가 그녀의 몸을 덮어 주고 천천히 일어나 문을 열며 약간은 짜증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뭔가?”
혁무상은 교주가 모습을 드러내자 다급하게 말했다.
“몇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기에 늦은 시간이지만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혁무상이 이렇듯 허둥대는 일은 매우 드물었으므로, 교주는 불호령을 내리려다가 노기를 억눌렀다.
“말해 보라.”
혁무상은 교주의 심기가 어떻든 또렷한 어조로 자신이 온 목적, 즉 자신이 이비대를 통해 수집한 정보 중에서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을 설명했다. 섬서분타는 거의 3천여 리(약 1천2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기에 정보가 도착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다, 또 그것을 취합해서 뭔가 알아내는 데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기에 혁무상은 이렇듯 늦은 시간에 교주 방문을 두드린 것이다.
“예, 섬서분타 건인데 말입니다. 섬서분타에는 천랑대와 염왕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투력은 교주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섬서분타는 근본적으로 내당과 외당으로 나뉘어 있고, 그 둘의 경계점은 백영환혼진(魄影還混陣)이죠.
백영환혼진의 장점은 내부의 강력한 세력을 즉시 외부로 투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묵향 쪽에서 주력의 투입을 꺼리고 있습니다. 겨우 수라도제 따위가 며칠씩이나 공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서분타의 전력은 약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거의 대등한, 또는 우세한 전투를 펼쳐야 정상이죠.
자신의 모든 힘을 투입한다면, 수라도제까지 포함하여 겨우 5천여 고수들쯤은 하루 저녁에 끝장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묵향이 방어만 하면서 전면전을 망 설이고 있느냐 하는 거죠.”
어느 정도 교주의 흥미를 끄는 주제였기에, 대답하는 교주의 어조는 전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음, 자네의 의문이 당연하군. 왜 그럴까? 자네의 생각을 말해 보게.”
“예, 그에 대해서 몇 가지 추리를 해 볼 수 있습니다.”
“뭔가?”
“어떤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가정을 하나 세울 수 있습니다. 전면전을 벌인다면 피해가 너무 크니까 상대의 마음이 헤이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치는 것이죠.” 장인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좋아. 그럴듯하군. 그리고?”
“또 하나는 주력이 거기 없기에 물리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장인걸의 표정은 이제 조금씩 떨떠름해지고 있었다. 혁무상의 말이 뜻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력이 없다?”
“예, 어딘가에 그 주력이 빠져나가 있다고 볼 수 있죠. 천랑대와 염왕대, 둘을 합해 봐야 3천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모두 무공이 뛰어나니 기척도 없이 움직이기 딱 알맞은 숫자죠.”
이제 교주는 짜증스러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혁무상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표는?”
“첫째로 꼽을 수 있는 목표는 정파의 후방을 기습하여 재빨리 전투를 완결 짓는 겁니다. 무림맹은 지금 여러 곳에 고수들을 투입했기에 거의 빈 집이나 마찬가지 죠. 그 정도 전력을 투입한다면 간단히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정파가 어떤 한 사람을 구심점으로 두고 움직인다면 매우 효 과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능성 있는 추리는 정파의 핵심 문파 몇 군데를 기습하여 괴멸시키려 한다는 것이죠. 본거지를 공격당한 각 문파의 고수들은 자연적으로 수라도제의 전 력에서 이탈할 것이고, 결국은 수라도제가 이끄는 서문세가만 남을 겁니다.
또 정예가 다 빠져나간 서문세가를 공격하여 괴멸시키려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라도제는 과연 섬서분타를 계속 공격하겠습니까? 아니면 서문세 가의 정예들만을 이끌고 서문세가로 달려가겠습니까?”
장인걸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일리는 있는 추리야. 어떤 식이 되든 수라도제는 당황할 것이고, 묵향은 때를 기다리지 않고 후퇴하는 정파의 뒤를 치겠지.”
“그렇게 된다면 묵향은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도 수라도제를 격파할 수 있을 겁니다. 저희로서는 별로 탐탁치 않은 전개입니다.”
“좋아. 자네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걸로 끝인가?”
“아닙니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그것을 아뢰기 위해서 찾아뵌 겁니다.”
“뭔가?”
“어쩌면 일부 수하들만을 놔두고 총타를 기습하려고 할지도…….”
혁무상의 말에 장인걸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첫 번째 의견에 비해 두 번째 의견은 현실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장인걸은 혁무상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는 너무 가능성이 희박한 말을 하자 돌연 짜증이 솟구쳤다. 하지만 상대는 혁무상 장로였다. 나중에는 없애 버려야 할 테지만 지금은 필요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 는 짜증을 억누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마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되네. 묵향이 정파와 전투를 벌인 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어. 아무리 그가 방어만 하고 있다고 하지만, 본거지를 놔두 고 총타를 치기 위해 주력을 빼돌렸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네. 섬서분타는 묵향의 본거지. 섬서분타를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자네의 그 비약적인 상상력은 좋지만, 그렇게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비생산적인 상상까지 할 필요는 없네. 여태껏 그 어떤 문파들이 본거지를 비워 두고 싸웠
나?
또 섬서분타와 총타와의 거리는 거의 3천리. 만약 묵향의 세력이 이동을 시작했다면 자네가 거느리는 이비대가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지. 대충 싸우는 것도 아 니고 총단을 공격하는데 만반의 준비가 없을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여러 가지 장비와 무기들을 지녔을 테고, 그런 무리가 3천이나 3천 리를 이동하는 데 흔적이 남 지 않을 리가 있을까?”
교주의 말에 혁무상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사실 묵향으로부터 기습 공격을 당한다면 자신의 책임이 매우 큰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묵향의 대 부대가 3 천리를 이동해 왔는데도 눈치를 못 챘다면, 그것은 이비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무상은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추궁 당하더라도 대를 위해서 총단이 기습당하는 것은 막기 위해 끈질기게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어느 정도 대비는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좋아. 자네의 그 성실함에 답하기 위해서 내 신경 쓰기로 함세. 아침에 날이 밝으면 소무면 장로와 여진 장로에게 본좌가 보자고 하더라고 전해 주게.”
혁무상은 교주가 자신의 생각을 망상쯤으로 치부해 버리자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그렇지만 교주가 묵향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경계를 더욱 강화하겠다고 했기에 그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 자신이 생각해도 총단이 기습당할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아무리 마교의 정보력이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이비대는 정파 최강이라는 무영문에는 뒤질지 몰라도 개방보다는 앞선다고 혁무상은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교주님. 미천한 속하의 말에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자네도 잘 자게나.”
교주는 혁무상을 돌려보내고 한영영의 옆에 누워 그녀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이제 그와의 생활에 익숙해진 탓인지 한영영은 잠결에 그의 품에 안겨 왔다. 부드러 운 여체를 느끼며 장인걸의 언짢았던 마음은 약간 풀어졌다. 그리고 곧 그는 깊은 수면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하지만 그의 수면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