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4권 18화 – 제자리 찾기
제자리 찾기
당황, 당혹, 황당. 그 어떤 단어로도 지금 수라도제의 마음을 표현하기는 힘들었다. 만반의 준비를 다하여 총공격을 가하고 보니 상대는 이미 오래전에 도망치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당황하기는 질문을 받은 쪽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연히 가주인 수라도제보다는 책임감의 무게를 덜 느꼈기에 그들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말라붙은 검붉은 피가 군데군데 묻었지만,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옅은 청의를 입은 50대 중반쯤 되는 인물의 대답은 꽤나 빨리 튀어나왔다.
“적의 간계에 걸린 것 같습니다, 가주님. 빨리 결정을 내리십시오. 놈들에게 역으로 포위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수라도제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흑의를 걸친, 날카로운 인상의 나이든 무사에게 소리쳤다.
“자네는 파마대(破魔隊)를 이끌고 반경 1백 리 이내를 철저히 수색하라.”
“존명!”
“그리고 자네는 파사대(破邪隊)를 이끌고 반경 3백 리까지 수색하라.”
“존명!”
각기 2백여 명의 무사들로 이루어진 파사대와 파마대는 파요대(破妖隊)와 함께 서문세가 최고의 정예였다. 사악한 마교의 무리들이 이곳에 어떤 함정을 마련해 놓고 외곽으로 빠졌다가 다시 외곽에서부터 압박해 들어온다면 상당한 타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네는 각 문파들에게 적의 습격에 대비하라고 전해 주게.”
““예.”
“놈들이 이토록 철저하게 준비했을 줄이야…….”
자책 어린 가주의 혼잣말에 나이든 노신(老臣)들은 몸둘 바를 몰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놈들이 어떤 식으로 나오든, 허무하게 당하는 것만은 절대 로 막아야 했다.
수라도제의 명령으로 그들은 적의 외습에 철저하게 대비했다. 그리고 내부에 있을 함정, 예를 들면 독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 내부로 진입했던 모든 무사들을 재빨 리 철수시키고 몇몇 뛰어난 고수들을 보내어 샅샅이 수색을 시작했다.
모두 독에 대비하기 위해 즉시 운기요상(運氣療傷)까지 해 봤지만 독 따위는 없다는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그리고 독 따위를 살포하기 위한 그 어떤 기 관 장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곧 밝혀졌다. 안으로부터의 우환거리는 없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 외곽을 정찰하기 위해 나갔던 파마대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마교도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수라도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놈들의 속셈은 뭐지? 더욱 아리송하군.”
“혹시 이곳 섬서분타의 전투는 뭔가 또 다른 큰일을 벌이기 위한 미끼가 아니었을까요?”
“미끼? 그럴지도 모르지. 자네는 개방에 연락을 보내게나. 혹시나 맹(盟)이 공격당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서문길제는 말을 여기서 끊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기는 했지만, 차마 그것을 입에 담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굳어진 서문길제의 표정을 보고 노신들은 노가주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눈치 채고는 얼굴이 핼쑥하게 질려 버렸다. 화경의 경지에 이른 노가주가 저렇 듯 굳어진 표정을 짓게 만들 만한 일은 몇 가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가에 빨리 전서구를 띄워라.”
한 노신의 우렁찬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문길제는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놈들이 본가에 노부가 없는 틈을 노린 것이었다면, 마교도의 씨를 말려 줄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가주님.”
“너무 오랜 시간 떠나 있었다. 첫 목표는 달성했으니 돌아가기로 하지. 각 문파에 연락해라. 노부는 떠나겠다고.”
“알겠습니다, 가주님.”
수라도제 서문길제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들이 마교와 같은 강대한 단일 집단이어서 본가를 수비할 만한 충분한 세력이 남아 있다면, 그는 결코 이 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가 만약 서문세가의 가주가 아니라 그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노신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서 문세가의 가주였고, 또 서문세가의 거의 모든 정예를 끌고 전장에 나왔기에 빈 집을 털릴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문길제는 나중에야 마교 내의 권력 다툼에 대한 정보를 주워들었고, 또 그때 섬서분타에 마교가 수백 명 정도의 고수를 투입한 것도 대단히 무리한 행위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이지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그때 서문길제가 마교의 형편을 알고 있었다면 섬서 쪽에 퍼져 있는 모든 마교 세력은 완전히 근절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무영문의 할망구는 일부러 알 려 주지 않았고, 모든 기회가 지나가 버린 후에야 그것을 넌지시 알려 주어 서문길제의 속만 벅벅 긁어 놨던 것이다. “정보력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 알겠어요? 호호호호”하고 비웃으면서 말이다.
누렇게 변색되어 가는 덩굴의 잎사귀들을 바라보며 매영인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뛰어난 무공, 무영문의 금지옥엽이라는 튼튼한 배경, 무공으로 다져진 날씬한 몸매, 그리고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아름다운 얼굴.
모든 무공을 익히는 소녀들의 목표이자, 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인 4봉에 들어 있는 그녀가 한숨을 내쉴 이유는 하나도 없을 듯이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휴우우.”
그녀의 방은 마화의 지시로 시녀들이 정성을 쏟아 단장을 했기에 꽤나 예쁘게 꾸며지기는 했지만, 조금도 그녀의 마음을 달래 줄 수 없었다. 이 방에서 한 발자국 도 나가지 못한 것이 벌써 보름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높은 무공을 익혀 심신이 튼튼하지 못했다면, 또 악양소소와 마화라는 대화 상대가 없었다면 벌써 미쳐 버렸을 정도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왜 그렇게 한숨을 쉬니?”
“요즘 들어서 뭔가 더 이상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뭐가?”
“갑자기 방에 가둬 두고, 또 하녀가 음식을 가져오거나 어쩌다가 한 번씩 마화 언니가 들어올 때 힐끗 보면 문 앞에서 무사들이 감시하고 있고……. 이 모든 게 예 전에는 없었던 일이잖아요. 혹시 무슨 큰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저들을 보세요.”
매영인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여러 명의 무사들을 가리켰다.
“예전에는 경비를 서는 무사들이 도저히 경비 무사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뭔가 모를 숨 막히는 기운을 강렬하게 뿜어 댔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요. 그들은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저는 그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요.”
“괜찮아, 괜찮아. 다 좋아질 거야.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자, 응?”
소소가 매영인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동시에 그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험상궂은 마인이 서 있었다. 마인이라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방금 전 경비 무사에 빗대어 표현했던 엄청난 마기를 뿜는 고수였기 때문이다.
악양소소는 상대의 그 막강한 마기에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끼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간신히 그녀가 냉정을 유지하며,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상대의 태도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고갯짓을 했다.
““따라와라.”
상대의 으스스한 등판을 보며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 그들은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이제 드디어 처형되는 것은 아닐까? 아닐 거야. 그럴 거라면 무기를 그냥 휴대하게 놔뒀으려고. 아니면 마화 언니가 불러서? 아니지, 그 언니라면 자신이 찾아오 지 저런 무례한 인물을 보내지는 않았을 테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들은 어느새 널찍한 방에 도착했다. 그 방에는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매서운 눈초리의 사내가 커다란 탁자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거기에 앉아라.”
사내의 말에는 상상하기 힘든 위압감이 있었다. 그들은 감히 찍소리도 못하고 의자에 앉았다. 숨 막힐 듯한 괴이한 기운. 자신들을 안내했던 인물도 엄청난 마기를 뿜었지만 저 인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너희들의 이름이 매영인과 악양소소가 맞나?”
조용히 앉아 있던 사내가 갑자기 입을 열었기에 잔뜩 긴장한 매영인은 하마터면 검을 뽑으며 일어설 뻔했다. 하지만 그녀보다는 그래도 연륜과 침착성이 앞서는 소소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나직하게 답했다.
“예.”
“흠..
사내는 흡사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그들을 잠시 노려봤다. 사내의 눈이 훑고 지나가자 그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너무 마른 것 같은데? 원래 이런 거야, 아니면 밥을 제대로 안 준 거야?”
“원래 날씬한 거예요.”
자신의 몸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자 매영인이 발끈해서 답했다. 그녀의 자부심 섞인 분노가 공포심을 눌러 버렸던 것이다. 그녀의 당돌한 태도에 사내는 역시나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녀를 잠시 쏘아보더니 이죽거렸다.
“그래? 그런대로 물품의 상태는 괜찮은 것 같군. 왕각(王珏)!”
“옛! 대주(主).”
뒤에서 답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비로소 밥을 안 준 게 아니냐는 질문의 대상이 자신들이 아니라 뒤에 서 있는 왕각이란 인물이었음을 알았다.
“확실하게 돌려주고, 인수증(引受證)을 받아오도록!”
‘인수증? 웬 인수증?”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사이도 없이 그녀들은 왕각이란 사내에게 이끌려 마차에 올라탔고, 목적지가 어딘지 묻지도 못한 채 10일간이나 끌려 다녀야만 했다. 정춘각(晸琫閣)이라는 주루에 닿았을 때 왕각은 매영인과 악양소소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옥화무제가 들어왔다. 매영인은 할머니를 보 고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
“오냐, 오냐. 고생이 심했지?”
매영인의 언니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옥화무제는 매영인을 부드럽게 안으며 토닥거렸다. 이때 왕각이 품속에서 종이쪽지를 꺼내며 조손 상봉의 분위기를 망 쳐 버렸다.
“상봉의 기쁨은 나중으로 미루시고, 여기 서명부터 해 주시죠.”
왕각의 손에는 「매영인 및 악양소소를 무사히 돌려받았음을 증명합니다」하는 글자가 또렷하게 쓰인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손녀를 품에서 떼어 놓고는 종잇 조각을 받아 들며 이죽거렸다.
“자네, 일 처리를 아주 철저하게 하는군.”
“감사합니다.”
하지만 왕각의 얼굴은 전혀 감사를 느끼는 표정이 아니었다.
“자네 직책이 뭔가?”
“그건 밝히기 곤란합니다. 이해해 주시기를.”
자신이 염왕대의 제12대 소속 무사라고 말한다면, 영리한 옥화무제는 그 한마디에서 염왕대의 위치를 파악해 낼 수도 있었다. 또 잘하면 현 마교의 상황까지도 눈 치 챌 가능성이 있었기에 왕각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대답을 거절했다. 하지만 옥화무제는 왕각이 그런 식으로 거절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 럼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서명한 종이를 건네주었다.
“여기 있네. 손녀를 무사히 넘겨줘서 고맙다고 교주에게 전하게나.”
교주라는 말에 왕각의 눈썹이 꿈틀했다. 총단에서 매우 조용히 일어났고, 또 수습된 일을 벌써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과연 중원 무림 최고의 정보 조직 무영문의 수뇌답다고 그는 내심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교주님께서 만나 뵙기를 청한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좋아. 한 달 후, 그곳에서.”
왕각은 ‘그곳’이 어디를 뜻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자신은 다만 그렇게 전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교주가 알아서 할 것이다.
“안녕히 가십시오.”
정중히 포권하는 왕각의 몸가짐에는 정과 마를 떠나서 위대한 무인에 대한 경외심이 내포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