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4권 4화 – 복수의 첫걸음
복수의 첫걸음
음산한 마기를 뿜어 대는 흑의인 하나가 그 주변에 모인 여러 흑의인들을 둘러보았다.
“제2, 3대는 진령문(振逞門)을 포위, 쥐새끼 한 마리도 도망가지 못하게 해라.”
두 명의 흑의인이 그에 답했다.
“존명!”
“제1대는 정면을 맡는다. 상대의 이목을 최대한 그쪽으로 집중시켜라.”
“존명!”
“제4대는 하인들이 거주하는 곳을 맡아라. 최대한 많은 인질을 재빨리 확보하여 끌고 나오라.”
“존명!”
“제5대는 본좌와 함께 행동한다.”
“존명!”
“될 수 있다면 살상은 최대한 억제하라. 이따위 문파 잡아먹어 봐야 별것도 아니야. 이번 일만 끝나면 이곳은 곧 포기할 거니까……. 알겠느냐?” “존명!”
“자, 행동을 시작하라.”
흑의인들이 저마다 수하들을 거느리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다!”하는 비명성과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진령문 곳곳에서 들려 왔다. 진령문은 정파 계열 문파로 주변의 평이 좋았고, 그 문주 막충(忠)이 정인검(正仁劍)이란 명호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나고 광명정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살아가 면서 원수진 일도 없었고 또 자신도 원수질 만한 일을 한 적도 없었다. 그렇게 사람 좋은 인물이다 보니 그의 대에 진령문을 크게 키우지는 못했지만 주위 많은 문파 들의 지지를 받는 위치에는 올라섰다. 따라서 그날 밤의 기습은 막충의 입장에서는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막충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 부근에서 꽤나 명성을 날리고 있는 자신의 문파를 공격해 들어온 하룻강아지들을 응징하기 위해 재빨리 옆에 놓인 검을 집어 들고 뛰쳐나갔다. 그는 지금 자신이 속옷 차림에, 그나마 상의는 입지도 않았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신발 신을 시간도 아까워 맨발로 뛰어나간 막충은 정문 쪽에서 담을 넘어 들어온 2백여 명의 흑의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챙챙챙!
일단 검을 섞어 본 막충은 상대방의 실력에 놀랐다. 마기를 풀풀 풍기는 것으로 보아 어디 소속인지는 대강 감이 잡혔고, 그의 예상이 맞다면 상대의 실력이 이 정 도로 뛰어나다는 게 이해가 갔다. 하지만 마교가 이런 시골구석까지 와서 자신의 문파를 핍박할 이유가 없었다. 마교에서 노리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아침 에 자신들의 뜻에 동참하라는 서신을 가지고 온 놈이 있긴 했다. 물론 그는 정도를 걷는 무인으로서 그 요구를 거절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손을 써 오리라고 는…….
2백여 명의 흑의인들을 상대로 달려든 진령문의 무사는 거의 1천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상대가 담을 등지고 있기에 포위를 할 수 없으니 그 숫자는 말짱 헛거였 다. 오히려 많은 숫자 때문에 서로가 방해가 되어 뒤에 있는 자들은 푹 쉬고 있었으니까.
이때 나지막하지만 충분한 내력이 실려 있기에 싸우는 와중에도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멈춰라, 막충! 인질들의 목숨이 소중하다 생각한다면 검을 버려라.”
순간적으로 막충은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에는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 하인, 하녀들, 진령문 내에서 살림을 차린 무사의 아녀자들과 자식들이 주르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주위에는 4백여 명의 흑의인들이 검을 뽑아 들고 서 있었다.
“빨리 검을 버려라. 본좌가 본보기를 보여야만 무기를 버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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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충이 대답을 하지 않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흑의인이 무자비한 어조로 말했다.
“열 명만 무작위로 끌고 나와 베어 버렷!”
“존명!”
흑의인들 중 열 명이 재빨리 움직이더니 자신의 손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하나씩 잡아서는 일렬로 쭉 세웠다. 그리고는 그들의 검이 싸늘한 광채를 뿌리며 검집에 서 뽑혔고, 곧이어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
“멈추시오! 항복하리다.”
막충은 이따위 무리들과 타협을 하거나, 항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겨우 2백여 명을 상대로 1천여 명이 모였지만 단 한 명도 죽이지 못한 데다가, 상대의 월등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살수는 쓰지 않았기에 부상자는 꽤 많았지만 죽은 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상대방은 처음부터 인질로 승부를
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여기서 그가 거절한다면? 저 마교도들은 그야말로 진짜 손을 쓰기 시작해서 피바다를 만들 게 분명했다. 저놈들이 한다고 했으면 분명히 해낸다는 것은 역사가 증 명해 주지 않는가? 2백 명도 어떻게 하지 못했는데, 6백 명이라면 분명히 이곳을 도륙 내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또 밖에서 얼마나 많은 숫자가 포위망을 이루고 있는지 알 수도 없지 않는가?
진령문의 문주 정인검막충이 검을 버리자 그의 문도들도 하나하나 억울함과 원통함이 가득한 얼굴로 무기를 내던졌다. 하지만 막충은 도저히 이것으로 끝낼 수는 없다는 듯 상대방을 향해 항의했다. 물론 이런 항의가 먹힐 상대는 아니었지만, 항의라도 하지 않는다면 수하들에 대한 자신의 체면은 두 번째로 하고, 울화가 터져 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보시오, 대관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대들과 원수진 일이 없거늘 이래도 되는 거요?”
흑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수하들이 떨어진 병기를 모아서 한곳에 쌓고 있는 것을 보며 느긋한 어조로 답했다.
“잘 생각해 보시게나. 오늘, 아니 지금이 인시(寅時 : 새벽 3시) 초니까 어제군. 어제 아침에 본좌는 그대에게 본교에서 움직일 만한 거점이 되어 줄 것을 정중히 부 탁했지. 자네는 거절했고. 그래서 발생한 결과지.”
“마교에서 정파를 건드리면 주위의 문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막충의 협박은 우두머리에게 그 어떤 압박도 주지 못했다. 우두머리는 싱긋이 웃으며 품속에서 편지 몇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걸 믿고 있는 모양이군. 물론 이걸 가지고 가던 녀석들은 모두 본좌가 잡아 뒀네.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이제 한동안은 같은 길을 걸을 동지들끼 리 처음부터 나쁜 인상을 가지고 시작할 수는 없지 않겠나? 어쨌든 자네의 연락을 받고 이쪽으로 뛰어올 문파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지.”
막충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어렸다.
“원하는 게 뭐요?”
상대는 절망감 어린 막충의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봤다. 여태껏 자신이 깨부수며 온 문주들의 반응은 어떻게 이렇게도 한결같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진령문은 이제부터 본교의 보급 기지 역할을 하게 될 거네. 물론 우리가 추진하는 일이 끝나고 나면 조용히 물러나 주지. 이곳을 본교가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이곳은 곧 전쟁터가 될 거야. 우리들은 철수하면 그만이지만, 아마 그날로 진령문은 문을 닫게 될 거네. 아시겠나?”
상대의 말에 막충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외부에 알려지면 왜 우리가 피해를 입는다는 거요? 그대들이 피해를 입겠지.”
“우리가 지금 싸우고 있는 상대는 정파가 아니네.”
“마교가 정파와 안 싸우면 누구와 싸워?”
상대는 막충의 의아한 듯한 표정을 보고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본타는 본교 총단과 투쟁을 벌이고 있지. 이곳 진령문은 총단 공격의 보급 기지가 될 거네.”
그러자 막충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냉소를 흘렸다.
“크하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마교끼리 싸움이라니……?”
흑의인 우두머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믿고 안 믿고는 그대의 자유. 하지만 본좌는 그대에게 경고를 했고 그 경고를 어겨 벌어지는 모든 책임은 자네에게 있네.”
우두머리는 주위를 보며 외쳤다.
“병장기를 한 곳에 모으고, 인질들도 한 곳에 가두고 철저히 감시해라. 그리고 동쪽에 있는 수련장 건물에 저자들을 수용한 후 감시하라.”
“존명!”
“막충, 자네는 이리 오게.”
막충은 상대가 무슨 짓을 하려나 생각하면서도 수하들에게 주눅 든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당당하게 걸어갔다.
“왜 그러시오?”
“한 문파의 문주인데 그래도 약간은 나은 대접을 해야지. 그대가 할 일도 있고.”
“무슨……?”
“주위에 얼굴이 잘 알려진 인물 둘을 뽑게. 본좌가 마기를 안 풍기는 녀석 둘을 붙여 줄 테니 이제부터 주위의 민가들을 돌며 안심시키러 다녀야지. 물론 자네가 직 접 돌아다닐 필요는 없을 테고……. 자네가 돌아다니면 오히려 의심을 살지도 모르니 수하들을 보내자는 거야. 알겠나?”
막충은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해 두면 근처 사람들은 안심을 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 망할 녀석은 아무 거리낌 없이 계속 여기에 눌어붙어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우두머리의 제안에 반대할 수는 없었다. 칼자루는 저쪽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막충은 마지못해 답 했다.
“알겠소.”
“두 명에게 주위를 다니면서, 오늘 밤 기습이 있었지만 모두 물리쳤으니 안심하라고 선전하도록 하게.”
“알겠소.”
막충이 흑의인들에게 끌려가던 문도들 중에서 두 명을 불러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설명하고 있을 때 흑의인의 우두머리도 마기가 비교적 덜 풍기는 녀석 둘을 차 출했다. 상관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은 그들은 진령문의 안전함을 선전하기 위해 뛰어 나갔다.
우두머리는 이제 모든 일을 해 놨는지 느긋하게 마루에 걸터앉아 수하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수하 하나가 주방에서 찾아낸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오자 우 두머리는 자신의 잔에 술을 가득히 따라서 맛있게 한 잔 쭉 들이켰다.
“크, 제법 좋은 술이군. 자네도 이리 오게. 오늘 밤 속 쓰리는 일도 많을 텐데, 한잔하게나.”
““마시기 싫소.”
염왕적자(閻王笛子)는 일부러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레 말했다.
“벌써부터 본좌의 명을 거절할 건가? 안 되겠군. 몇 명 잡아다가 목을…”
그러자 막충은 재빨리 상대의 앞에 앉아서는 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라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었다. ‘제기랄,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똥 씹은 얼굴로 억지로 술을 털어 넣는 모습을 보며 염왕적자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본좌가 오늘 그대 문파 사람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걸 아나?”
“…..”
“사실 본좌가 끌고 온 수하들은 본좌 휘하에 있는 수하들의 반이야. 나머지 반은 군사가 어디에 쓴다고 빌려 갔지. 그렇지만 반만으로도 이 정도 시골 문파 따위 2 각이면 시체의 산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네. 하지만 군사가 쓸데없이 피를 보지 말라고 부탁을 했기에, 노부도 조심을 한 거지. 왜 그런고 하니 후속 부대의 지휘 관이 이런 일에는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거든.”
막충은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예의상 상대의 말에 응대해 주었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들어서 나쁠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데 그러시오?”
“조금 지나면 알게 될 거야. 아마 본타가 그대에게 신세지는 것도 몇 년 되지 않을 거야. 과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것 하나는 약속하겠네. 그대와 그대의 문파에는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노력함세. 대신 그대도 이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해 주게나.”
서로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렇게 반 시진(1시간) 정도 흘렀을까? 흑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세 병째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이제야 왔군.”
막충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온 사람은 없었다. 1각여가 지난 후에야 어떤 지시를 받았는지 흑의인들이 정문을 열었고, 1천여 명의 기병들이 달려 들어 왔다. 그들은 마을 외곽에서 미리 준비해 온 두터운 헝겊으로 말발굽을 몇 겹 감싸 두었기에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먼저 들어온 거대한 흑마(黑馬)에서 두터운 갑주를 걸친 인물이 뛰어내렸다. 그는 우두머리에게 다가오며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염왕적자 대장.”
“어서 오시지요, 관지 공(公). 일이 벌써 끝나 버려 미안하외다. 이쪽은 신세지게 될 진령문의 정인검 막충이요.”
막충은 일그러진 얼굴로 중무장을 갖춘 인물에게 간단하게 포권했다. 이 정도 중무장을 갖춘 인물이 그에 준하는 무장을 갖춘 수하들을 1천여 명이나 끌고 들어오 는 걸 보니, 아마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인 모양인 게 확실했다. 말은 마교도라고 둘러대고 있지만 어쩌면 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반란이라도 일으키려는 무리인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 본거지를 제공해 준 막충으로서는 정말 재수 없으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수가 생기는 것이다. 막충이 상대의 무림인 같지도 않은 엄청난 중무장을 보고 잔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관지는 막충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하며 인사를 건네 왔다.
“관지라 하오. 잘 부탁하오.”
한중평이관지에게 관지 공이라고 높여 주는 것은, 그의 무공 고하를 떠나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나긴 했지만 관직에 머물렀던 뛰어난 장군이었기 때문이 다. 찬황흑풍단의 천인대장이라면 장군급이었다.
“대단히 빨리 끝내셨군요.”
“겨우 이 정도 시골 문파, 염왕대 1백 명만으로도 간단하게 쑥밭으로 만들 수 있지요. 그래, 오는 길에 문제는 없었소이까?”
‘염왕대? 가만히 있어 봐라, 어디서 들어 본 듯도 한데??
막충은 둘의 대화를 중간에서 들으며 상대의 소속에 대한 실낱같은 정보가 들어오자 이리저리 두뇌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자성만마대’라는 말을 들 었다면 놀라서 뒤로 자빠졌겠지만 염왕대라는 단어는 그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염왕대는 거의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충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고 있건 말건 둘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이리저리 돌아오느라 늦었습니다.”
그러면서 관지가 염왕적자를 향해 조금 꺼림칙한 시선을 보내자 염왕적자도 곧 눈치 채고는 막춤을 자신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를 딴 사람이 들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막충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관지가 입을 열었다.
“타주의 몸도 안 좋은 이때 움직이는 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군요.”
걱정스러워하는 관지와 달리 염왕적자의 표정은 태평스러웠다. 염왕적자는 딴 건 몰라도 타주의 무공과 그 강인한 생명력만은 거의 신앙과 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
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타주는 본교 최고의 고수! 곧이어 쾌차하실 것이오. 우리는 그분이 일어나시기 전까지 모든 준비를 갖춰 놓기만 하면 되는 거외다. 물론 관지 공의 우려는 알고 있소. 하지만 공이 우려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적들이 타주가 몸져누워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는 한, 결코 선공을 가해 오 지 못하기 때문이오.”
여기까지 말하던 염왕적자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그런데 나머지는?”
“분산해서 이동했으니까 좀 있으면 모두 도착할 겁니다.”
“자자, 그럼 수하들이 도착할 때까지 술이나 한잔하지요. 여기 괜찮은 술이 있더군요.”
“예.”
어둠이 걷히고 동이 틀 때쯤 관지가 거느리는 흑풍대 4천여 명이 모두 도착했다.
흑풍대는 묵향과 합류하기로 결정했을 때 말과 갑주 등 모든 장비들을 버렸다. 게다가 흑풍대 구성원들 개개인의 무공은 마교의 인물들보다 훨씬 떨어졌지만, 기 마전에 능했고 또한 군인들이었기에 집단전을 주 특기로 했다. 그렇기에 설무지는 그들에게 뛰어난 준마(駿馬)와 군용으로 납품되던 전투용 중갑주, 두터운 방패 등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다 장만해 주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 관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과거 이탈했던 흑풍단의 인원들까지 가세해 지금 흑풍대는 4천 명으로 증강되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넓은 평지에서 전투를 벌인다면 염왕대와 막상막하의 접전을 펼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와 있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관지는 염왕적자에게 물었다. 그는 이제 갑주를 벗고 평상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언제 떠나실 겁니까?”
“오늘 밤 해가 지면 출발할까 생각하고 있소. 또 한 곳의 문파를 부숴야 하거든. 하지만 도둑고양이처럼 밤에만 은근슬쩍 움직이자니 죽을 노릇이로군.” 염왕적자의 말투에는 짜증스러움이 조금 묻어 있었다. 염왕적자의 말에 관지는 약간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마교와 전쟁을 한다고 하지만, 이런 상관도 없는 문파를 부숴도 괜찮을까요?”
처음부터 무림인인 염왕적자와 달리 군인이었던 관지가 무림의 생리를 이해하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염왕적자는 관지가 지니고 있는 양심의 가책을 조 금 가볍게 해 주기 위해 그로서는 제법 궁리를 해 가며 설명했다.
“관지 공은 아직 무림을 잘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무림은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켜지는 곳이오. 정(正)이니 협(俠)이니 큰소리를 쳐도 힘없으면 말짱 헛거라 이 말이외다. 과연 정파라 자처하는 무리들이 협이란 걸 지키는지 아무도 모르는 게 사실이지 않소?
사실 본좌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본 정파란 것들 중에도 쓰레기들이 많았고, 또 사파나 마교라 불리는 인물들 중에서도 협의 정신을 지키는 인물들이 있었소. 물 론 노부가 그렇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요. 노부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느낀 것은 이것이오. 문제는 정(正)이냐 사(邪)냐 그런 게 아니라, 지금 관지 공처럼 협을 지키 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느냐 하는 것이지요. 관지 공은 군에 오래 있었으니 잘 알 거외다. 적군을 대할 때 어떤 행위를 했었소?”
순간 관지에게는 이민족들과 싸우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별로 유쾌하지는 않은 기억. 야만족들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살인, 강간, 폭행, 약탈을 자행 하지 않았던가. 가깝게는 몽고전에서부터 멀게는 자신이 처음 흑풍단에 입단했을 때 있었던 투르판 원정까지…….
“…..”
관지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염왕적자는 구태여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군대란 아주 재미있는 단체라고 할 수 있소. 같은 편은 목숨을 바쳐 보호하고 반대편에 대해서는 살인, 강간, 폭행, 약탈을 감행해도 오히려 높은 공로를 세웠다고 녹봉과 벼슬을 올려 주며 칭찬하지 않소? 무림도 같소. 협이니 뭐니 따질 필요가 없소. 무림은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곳이오.
물론 이 문파는 지금껏 우리의 적이 아니었소. 하지만 이들의 문주는 우리와 같이 행동할 것을 거절했고, 그렇다면 이들은 우리의 행동에 지장을 주는 적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 적을 무참히 없애 버렸다. 그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나는 생각하오. 안 그렇소?”
관지는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느 정도 이해는 되는군요.”
“지금 우리들의 행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밀을 유지하는 것이오. 진령문은 이제 총단을 점령하기 위한 보급 기지로서 아주 소중히 쓰일 곳이라오. 또 필요한 병력을 숨겨 두기도 그만인 곳이고……. 왜 하필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런 시골 문파를 박살 냈겠소? 내일부터는 관지 공이 이곳을 책임져야 하는데, 그때 사소한 인 정을 보인답시고 물컹하게 대했다가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시오. 이런 작은 문파는 본교가 보이지 않게 살며시 뒤에서 지원해 주면 급 속히 힘을 회복할 것이오. 그러니 이들에게 인정을 베푸는 것은 총단을 박살 낸 후에 해도 늦지 않소.”
“명심하겠습니다.”
“며칠 후면 관지 공은 아마도 또 이동하게 될 거요. 군사께 들었는지 모르지만, 이번 길 개척은 노부가 거느린 염왕대가 맡았소. 노부가 부수고 들어가면 관지 공이 뒷수습을 하는 식으로.. 3백리(약 120킬로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문파를 하나씩 부숴 나갈 것이오. 여기서 대산까지는 3천 리 길… 앞으로도 아홉 개의 문 파를 더 부숴야 한다는 결론이 간단하게 나오지요. 아마 흑풍대 뒤로 본타의 주력이 따라올 것이오. 그리고 비밀리에 총단 부근에서 집결하여 혈전을 벌이게 될 것 이오. 길 개척이 끝날 때쯤에는 그분의 상처도 회복될 테니 승산이 있는 싸움이 되지 않겠소? 그때까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보이더라도 꾹 참아 주기를 바라오.”
막충은 인질들 때문에 할 수 없이 협조하긴 했지만, 그 와중에 정말 문파 간의 싸움도 이 정도로 규모가 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문파 사이의 싸움은 상 권(商權) 등의 이권을 놓고 다투는 것으로, 상대방을 멸망시키기 위한 전면전보다는 각 지역을 놓고 제한적인 싸움을 하게 된다. 많이 동원되어야 1천여 명, 보통 5 백여 명도 안 되는 무사들이 검이나 창 등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병장기들로 무장하여 하루 정도 투닥거리고 나면 싸움이 끝나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마교도들에게 점령당한 후 진령문의 창고에는 어디 전쟁에라도 쓸 건지 몸통만을 가리는 약식 갑옷과 활, 화살, 강노(强弩), 연노(連弩), 창, 투석기, 방패 등 별별 물자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진령문에 주둔 중인 흑풍대라는 마교의 집단은, 개개인의 무공은 흑의인들보다 약한 듯 보였지만 그 무장을 보면 아무래 도 정규전 교육을 받은 특이한 인물들 같았다. 무림인들이 잘 쓰지 않는 마상용 무기를 아주 능숙하게 다룰 뿐 아니라, 옆에서 구경하기에도 쇠뇌(弩)나 투석기 등 을 수리, 정비하는 모습이 그런 것들을 많이 다뤄 봤음을 확연하게 보여 주었다.
얼마 후 관지라는 우두머리가 떠나자 진령문에는 관석(關析)이란 자가 3백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주둔했는데, 그때부터 각종 무기와 식량 등이 진령문을 통해 어 디론가 흘러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쪽에서 피바람이 불어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