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5권 4화 – 샤헨시를 향하여
샤헨시를 향하여
다음 날 아침, 일행은 여관을 나섰다. 어제와 같은 차림의 다크를 제외하고 모두들 옷차림이 많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골이나 어둑한 산골에 만 들어가도 산적 정도가 아니라 바로 몬스터들이 설치는 곳에서 간단한 옷차림에 달랑 돈주머니 하나 들고 여행할 골빈 놈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모두들 말을 가지고 있었고, 가장 가볍게 무장한 사람이 미네리아였다.
미네리아는 35세였지만 절대 25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대단한 미모를 지닌 사제로, 가죽 갑옷을 입고 위에 그 독특한 흰색 바탕에 검은 문양을 새긴 정식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2척 길이의 얄팍한 검을 차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녀의 검술 실력은 형편없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눈에 확 띄는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이유는, 대지의 여신 케레스를 모시는 사제들은 공격 마법을 거의 몰랐고, 대부분 치료 마법 계통을 익혔기에 상대가 해 칠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었다.
미네리아와 좋은 대조를 이루는 인물이 미디아 가드너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안에는 사슬 갑옷(Chain Mail)을 입고, 그 위에 가죽 갑옷을 입었다. 말안장 왼쪽에는 자그마한 금속 방패가 매여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활과 화살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2척 반 정도 길이 의 내로우 소드(Narrow Sword : 협검, 狹劍)라 불리는, 비교적 가느다란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 외에 가죽 갑옷 위에는 여덟 개의 투척용 작은 단검이 줄줄이 꽂혀 있었다. 듣기로는 그녀의 단검 투척 솜씨는 대단하다고 했다. 하여튼 여자가 다루기 알맞은 작고 가벼운 무기들을 줄줄이 휴대하고 있었고,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큼직한 망토로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스톤을 제외한 모든 남자들이 미디아보다 더 엄청난 무장을 갖췄는데, 완전히 중무장을 했다. 상체만이기는 하지만 두터운 강철 갑옷 (Half Plate Armor)을 입었고, 두터운 강철 방패, 3척 이상 길이의 검, 심지어 무예 수업자라는 미카엘, 라빈 엘느와 지미 도니에는 한 대 맞으면 아 침까지 일어나지 못한다는 공포의 대명사 모닝 스타(Mace : 철퇴)까지 안장에 매달고 있었다.
미카엘이나 라빈, 지미의 경우 셋 다 무예 수업자들이지만 30대 초반의 미카엘에 비해 라빈이나 지미는 20살 정도의 애송이들이었다. 라빈과 지미 는 엠페른 왕국에 있는 카로사 아카데미 기사학부를 수료한 동기이자 친구로, 함께 여행을 하면서 무예 수업을 한다고 했다. 아마도 기사(Knight)들 은 철퇴를 정식 메뉴로 배워야 하는 모양이었다. 모두들 흉측하게 생긴 철퇴를 안장에 하나씩 매달고 있는 걸 보면…………
이들이 모두 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시장(馬市場)에서 15골드나 주고 말을 사서 합류한 다크―그가 그 돈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슬쩍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모두들 처음부터 그가 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다까지 일행은 여덟 명으로 늘어났 다. 그들이 천천히 말을 몰아 성문 쪽으로 향하는데 뒤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갈라지는 것이 흘낏 보였다.
그것을 눈치 챈 팔시온이 무리를 이끌어 길옆으로 일행을 인도했고, 잠시 후 거의 50기(騎)가 넘는 기마병들이 번쩍거리는 갑주(鉀胄)를 자랑하며 한 손에는 랜서(손잡이 앞부분이 둥그런 찌르기 전용의 장창)를 잡고 보무도 당당히 지나갔다.
다크도 이 정도 장관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자세히 그들을 살펴봤다. 갑옷부터가 중원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여기서는 완전히 옷처럼 생긴 갑옷을 입었다. 은백색의 철로 빈틈없이 감싼 기마병들 사이로 흑색의 갑주를 입은 한 사람이 보였다. 그들을 보면서 팔시온이 말했다.
“이야, 안드레이 남작의 행차시군. 저분도 소드 그래듀에이트지만, 아들까지 그래듀에이트 시험에 통과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명문이야.” “흐음, 소드 그래듀에이트가 무슨 말입니까?”
“뭐? 자네는 왜 그리 모르는 게 많은가? 전쟁의 신 아레스(Ares)를 모시는 신전에서는 각자가 가진 실력을 평가해서 마나를 움직일 수 있는 고수들 에게 ‘그래듀에이트(Graduate:자격을 얻은 사람)’의 칭호를 주지. 검을 쓴다면 소드 그래듀에이트, 맨손 격투술이라면 그래플(Grapple) 그래듀에 이트가 되는 거지. 정말이지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마스터(Master:지배자, 대가)의 칭호를 받을 수도 있어.”
설명을 해 주면서도 팔시온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자네는 도대체 어디에서 살았나? 그런 기초적인 상식도 모른다니………….”
“트레보크 산맥 주변의 사냥꾼………….”
“트레보크 산맥에서 줄곧 살았다면 아무것도 모를 만도 하지.”
그러면서 저쪽 지평선에 아스라이 보이는 높은 산맥을 바라봤다. 트레보크 산맥 부근의 일부도 안드레이 남작의 봉토였지만 사실 봉토라고 부를 수 도 없었다. 안드레이 남작 자신도 그 근처에는 가지 않을뿐더러, 산세가 지독하게 험악해서 사냥꾼들이나 간혹 들어갈까…………. 거기다가 드래곤들이 우글거리니 감히 주변에 사람이 얼씬도 못 하는 곳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 산골짜기 얘기를 꺼내니 정말 세상 물정에는 거의 백치쯤 되는 사람으로 해석하고 팔시온은 차근차근 설명을 계속했다.
“아레스의 신전에서 그래듀에이트의 자격을 얻는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야. 또 그래듀에이트라면 거의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들을 다 가지고 있지. 대단히 강한 인물들이야.
저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코린트 제국의 경우도 그래듀에이트의 자격을 받은 인물은 1천 명이 채 안 되지. 우리들이 살고 있는 트루비아 왕국처 럼 작은 나라는 34명의 그래듀에이트밖에 없어. 방금 지나간 대열에서도 단 한 명만이 그래듀에이트였다구.
이들은 엄청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지. 그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은 그래듀에이트라면 백작과 같은 등급에 놓기도 하고, 또 일부 국가들은 공작 의 작위에 올려놓은 국가까지 있을 정도라네. 그만큼 허울 좋은 작위 따위보다 강력한 실력이 우선시된다 이 말이야. 다크 자네도 무술을 배우는 입 장이니 열심히 해 보게나.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래듀에이트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저기 있는 저 친구들도 그래듀에이트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겠나?”
“그래듀에이트가 그렇게 대단한 실력인가요?”
“예를 들자면 방금 지나간 50명이나 되는 기사들 중에서 한 명만이 그래듀에이트지. 하지만 그 그레듀에이트 혼자서 나머지 49명의 기사들을 순식 간에 모두 없앨 수 있다면 이해할 수 있겠나?”
‘제기랄, 이해가 안 가는군. 그래듀에이트가 엄청난 실력인 것처럼 말하더니. 나 혼자서도 저런 놈들 쯤은 하루아침 해장거리도 안 되는데………………
말을 달려가는 도중에도 팔시온의 설명은 멈추지 않았다. 그도 이 산골 구석에서 갓 올라온 아이가 헛되이 목숨을 날리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저기, 가스톤이 보이지?”
“예.”
“가스톤은 마법사야. 3사이클 정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꽤 수준급 마법사라네.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차림을 보라구. 저게 마법사의 복장인지. 옷만 봐서는 검사들과 차이가 하나도 없지. 하지만 가스톤은 옷 속에 마법 매개물을 숨겨 둔 진짜 마법사지. 거기다가 검이라고는 거의 쓸 줄도 모르고…………. 그렇다면 가스톤은 왜 저렇게 무거운 차림을 하고 있겠나?”
다크가 고개를 좌우로 젓자 그가 말을 이었다.
“마법사라는 걸 숨기는 거야. 내가 적이라도 기습의 첫째 목표를 마법사로 잡을 거야. 마법사는 회피 동작은 느리지만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거든. 아무리 무식한 오우거(Ogre)라도 그 점은 알고 있다구.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자신들끼리의 공식 집회를 제외하고는 마법사라는 사실을 숨기지
가스톤의 경우 견습 마법사(Magic User)는 벗어났고, 아직은 수련 마법사(Mage)지. 아마도 운이 좋아서 5사이클급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오른다면, 그때서야 마법사 길드로부터 마법사(Magician)로 인정을 받게 되지. 하지만 지금 되어 가는 상황을 본다면 7사이클 이상의 주문 을 행한다는 대마법사(Wizard)라고 불릴 가능성은 정말 눈곱만큼도 없어.”
잠시 뜸을 들이더니 팔시온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가스톤은 조금 늦게 마법을 배웠고 아직 별 볼일 없는 마법사라는 거지. 하지만 나중에 몬스터와 싸울 때 그를 본다 면 별 볼일 없다는 말이 쑥 들어갈 거야. 그만큼 마법사의 위력은 대단해. 아군 쪽에 있다면 대단한 보탬이 되지만 적이라면 아주 위험한, 그것이 마 법사지.
그렇기에 자네도 명심할 것은 어떤 싸움이 벌어진다면 상대방 마법사가 누군지를 빨리 알아내는 게 가장 중요하지. 그런 다음 마법사를 저세상으로 보내고 격투를 시작해야 해. 그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가 상대가 마법을 쓰기 시작하면 아주 힘든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구.”
“명심하죠.”
다크는 팔시온에게서 이 시대, 이 세계에 대한 수많은 지식들을 얻어 들을 수 있었다. 하다못해 시 외곽에만 나가도 몬스터들이 출몰하기에 모든 도 시들은 두터운 성벽으로 싸여 있었고, 힘없는 주민들은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고 보는 게 옳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노예 제 도가 있었고, 농노(農奴) 제도를 토착화하고 있었다. 농노 제도 하에서는 영주의 한마디는 곧 법이었다.
이런 지독하게 폐쇄적인 사회였지만, 젊은이들은 단 하나의 꿈을 가지고 무예를 닦았다. 사실 체계적인 수업 없이 무턱대고 노력만 한다고 익혀지는 게 무술이 아니지만, 그래도 운이 좋다면 변방의 수비대 정도로 출세할 수는 있었다. 더욱 운이 좋다면 어떤 도시의 수비대원이 될 수도, 전공(戰) 만 잘 세운다면 수입도 괜찮을 수 있었다. 몬스터는 버글거렸고, 변경에서는 평화 시라도 몬스터와의 전쟁으로 하루해가 뜨고 지는 판이었다.
운이 좋다면, 정말 운이 좋다면 우수한 동료나 상관을 만나 제법 족보에 있는 무술을 배울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 실력대로 조금 더 승진할 수 있 을 것이고, 돈을 벌어 자신의 아들을 아카데미에 보내 기사나 학자, 혹은 마법사로 키울 수도 있었다. 물론 그 아들 녀석이 잘해 준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야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장사 쪽으로 진출한 자들이 더욱 유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뛰어난 상인을 아버지로 둔 뛰어난 기사들은 의외로 수가 적었다. 아마도 자라나는 환경 때문이리라……………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자손대대 무가(武家)인 집안이 더욱 유리했고, 또 사실상 대부분의 뛰어난 기사들은 각 명문에서 탄생했다. 게다가 무가의 경우 남들보다 더욱 유리한 점이 있었다. 가전(家傳)의 무술이 그것이다. 뛰어난 기사들을 계속 배출한 집안은 예외 없이 막강한 가전 무예를 보유하고 있 었다.
코린트 제국이 자랑하는 소드 마스터(Sword Master) 키에리 발렌시아드 공(公)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은 모두 다 그래듀에 이트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고, 키에리 공이 가장 아낀다는 셋째 아들은 다음 세대의 소드 마스터가 될 가능성이 컸다. 아직은 미숙하다고 하지만 황 제조차도 그 셋째 아들의 실력을 아낀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뛰어난 무가의 사병(私兵)으로 들어가도 좋은 무술을 교육받을 수 있다. 개인의 군대인 만큼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 가전 무공의 일부를 가르 칠테니 말이다.
비참한 지경에 처해 있는 농노들은 신분 상승의 가장 확실한 방법인 무예 수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 단계씩 차곡차곡, 성문 수비병이라도 좋았 다. 언젠가 자신의 아들은 진짜 수비병이 될지도 몰랐고, 손자는 뛰어난 무가의 사병이라도 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이런 식으로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기사를 바라보고 노력하다 보면 이름난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때는 외곽 수비대에서 한자리 차지하는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