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5권 6화 – 충돌 I
충돌 I
다크는 하늘에 박쥐같은 날개에 목과 꼬리가 길쭉한 이상하게 생긴 거대한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팔시온에게 물었다.
“우와, 저게 뭐죠?”
팔시온이 하늘을 자세히 살피더니 설명했다.
“으음…, 길이가 15미터쯤 되는 거 보니 야생 와이번이야. 흔히들 비룡(飛龍)이라고도 부르지. 여기서 봤을 때는 작게 보이지만 다 자란 녀석이네. 저걸 길들여서 용기사단에서 사용하지. 입에서 화염을 뿜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한 녀석들이라구. 야생의 와이번은 아주 흉폭해. 가축이나 사람도 공 격하지.”
“용기사단에서 사용한다구요?”
“응. 저 녀석을 타고 날아다니는 기사를 특별히 용기사(Dragon Knight)라고 부르는데, 사실 기사급이 와이번을 타면 정말 당할 자가 거의 없지. 모 두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요즘은 정찰하는 데나 긴급한 서신을 전한다든지, 뭐 그런데 사용하지.”
“길들이기는 쉽나요? 저 위에 타고 하늘을 날면 기분 좋을 거 같은데…………….”
“하하하, 아주 성질이 지독한 놈들이지. 새끼 때부터 길들여야 해. 안 그러면 길들이는 게 거의 불가능하지. 길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길들인 와이 번의 가격은 아주 비싸다구. 아마 1만 골드쯤 할 거야.”
“1만 골드라구요? 그럼 황금으로 1백 킬로그램이나 된다는 말이에요?”
“응, 원체 가격이 비싸니까 저 남부 최강이라 불리는 마케론 제국의 적룡 기사단(赤龍騎士團)도 와이번이 5백 마리 정도밖에 없지. 꽤 무섭기도 하지 만 편리하기도 한 존재야. 참, 자네 돈이 좀 있으면 샤헨에서 좋은 갑옷을 살 수 있을 거야.”
“갑옷이요?”
“갑옷 하면 와이번의 비늘을 가공해서 만든 게 좋지. 샤헨에는 저 마도 왕국 알카사스로부터 ‘마법의 불’로 와이번의 비늘을 녹여 만든 각종 갑옷이 수입되지. 아주 가볍고 튼튼하다구. 물론 와이번이 아니라 드래곤의 비늘을 녹여 만든 것이 훨씬 좋지만 너무 비싸고, 뭐 와이번만으로도 충분히 가 볍고 탄탄하다구.
딴 나라는 마법이 안 되니까 비늘 갑옷(Scale Armor)밖에 못 만들지만, 알카사스는 마법으로 비늘을 녹여서 꼭 쇠로 만들 듯이 여러 종류의 갑옷을 생산하지. 사슬 갑옷(Chain Armor), 통짜 갑옷(Flate Armor), 뭐 없는 게 없어. 그걸로 만든 방패도 판다니까.”
“방패도 와이번 비늘로 만들어요?”
“응, 저기 미디아 양이 가지고 있는 얄팍한 방패가 와이번 비늘을 마법으로 녹여서 만든 거지. 아주 가볍고 튼튼하다구.”
“상당히 귀한 걸 가지고 다니는군요.”
“미디아 양은 근래에 우리 파티에 합류한 용병이지. 나이를 말하지 않지만 아무리 적게 봐도 서른 살은 되었을 거야. 여자로서, 그것도 용병으로 그 정도 오랜 시간 살아왔다면, 자신을 지키는 몇 가지 비장의 술수는 간직하고 있다고 봐야지. 참, 좋은 거 하나 알려 주지.”
“뭔데요?”
“저 장갑 보이지?”
그러면서 팔시온은 미디아가 끼고 있는 스파이크가 박힌 검은 장갑을 가리켰다.
“예.”
“저게 과거 마도 시대에 대량 생산되었던 여자용 장갑 ‘다크네’야. 가볍고 질긴 회색 늑대 가죽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자주 볼 수 있는 물 건은 아니지.”
“여자용치고는 조금 무작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군요. 윗부분에 스파이크도 몇 개 박혀 있고………….”
“하지만 정작 무서운 건 그게 아냐. 저건 아까도 말했지. 마도 시대에 만들어진 물건이라고. PUG(Power Up Gloves)라고도 불리던 건데…, ‘파워 업(Power Up)’하고 주문을 외우면 두 배까지 힘을 뽑을 수 있지. 다 쓰고 나서 ‘파워 다운(Power Down)’하면 원상태로 돌아가고…………. 아주 편리하 지 않나? 잠시만 사용한다면 정말 유용한 물건이지. 사실 물건 따위는 잠시만 들어도 되는 경우가 많거든. 활을 쏠 때도 그렇고……………
다크, 너도 생각해 보라구. 싸움이 붙었을 때 상대가 여자라면 여자의 힘을 어느 정도로 대강 예상하고 싸우게 되지. 더군다나 도중에 몇 번 검을 섞 어 보면 그건 예상이 아니라 확신이 되지. 이때 검을 섞는 그 찰나 힘을 높인다면? 마법을 사용하는 시간이 아주 짧으니 마나의 소모는 크지 않지만, 상대는 예상 못한 일격을 맞고 저세상 가는 거야. 이런 비장의 물건들을 몇 가지씩 가지고 있기에 용병이나 모험가들은 아주 싸우기 피곤한 족속들이 야.”
“그런 마법을 띤 물건들이 많아요?”
“과거 마도 시대 때 만들어진 게 거의 대부분이지. 그때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마법을 지닌 물건들을 대량으로 만들었지. 방금 설명한 다크네, 힘의
반지, 불의 반지, 각종 마법 무기들…, 종류도 엄청나게 많지.
하지만 마도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어. 처음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마법을 지닌 물건들은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사용자의 마나를 너무 많이 빼앗았고, 나중에는 저주받은 물건이라며 사람들이 사용을 회피했지. 사실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흡수하는 마나는 보통 사람이 견디기에는 좀 무리가 있으니까 말일세.
그때가 아마 마법사들처럼 마법을 죽자고 익히지 않아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물건 하나만 가지고 마법을 쓸 수 있는 방법이 갓 개발된, 마법의 중흥기였지. 나중에 그 폐해가 밝혀진 다음에 사용자가 급감하고 생산이 중지되었지만 말이야.”
팔시온과 다크가 쑤군거리며 천천히 말을 몰고 있을 때였다. 먼 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다크는 이들보다 훨씬 오래전에 이 걸 눈치 채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던 것이다. 뭐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구해 줘 봐야 별로 득도 없고, 돈이야 불케인시에서 충분히 장만(?) 했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고……………. 하지만 그들은 거의 실력이 엇비슷한지 그토록 다크가 시간을 많이 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치고받고 있었던 것 이다.
그 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가스톤이었다. 사실 마법사들은 그 파괴력은 엄청나지만 주문을 외울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에 절대로 앞에 나설 수 없었다. 상대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눈치 챔과 동시에 곧바로 사망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보게 팔시온. 앞에 누군가 싸우고 있어.”
다크와 대화에 정신이 팔려 그 미세한 소리에 반응하지 못하고 있던 팔시온이 청력을 집중했고—다크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팔시온도 1사이클 정도 의 마법은 가능했기에 소리를 조금 크게 들리게 만드는 마법을 이용했다곧이어 가스톤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곧장 말을 달려갔다. 그리고 나 머지 일행도 그 뒤를 따랐고 가장 뒤에 다크가 마지못해 따라갔다.
일행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상황이 종료된 다음이었다. 사방에 시체들과 주인 잃은 말들이 널려 있었고, 그들을 죽였다고 짐작되는 회색 갑 옷에 청색 망토를 두른 인물들이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몇몇 백색 갑옷의 사람들을 확실하게 저세상에 보내 주고 있었 다.
“이런 나쁜 녀석들…………….”
다크가 봤을 때 회색 갑옷을 입은 상대는 제법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수는 부상자가 그중 태반이라고 해도 열두 명. 조금이라도 안목이 뛰어 난 사람이라면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실력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 있는 회색의 수는 20명, 백색의 수는 무려 50명이 넘 었다.
그렇다면? 여기 남은 열두 명은 죽어 있는 20명에 비해 운이 좋은 몇 놈을 제외하고는, 더욱 실력이 뛰어나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열두 명은 새로운 적의 존재를 눈치 채자 부상자들까지도 몸을 일으켜 말에 올라타고 중간에 서 있는 마차를 호위하는 형세를 취했다. 그리고 팔시 온 등 여러 인물들이 그들을 향해 돌격해 들어갈 때쯤에는 그들은 이미 굳건한 방어 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왜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공격해 들어갔을까? 다크는 그게 궁금했지만 사실은 쓰러져 죽은 자들의 갑옷에 그 해답이 있었다. 은백색의 고급스런 갑옷. 이 갑옷은 지금 다크 일행의 목적지인 샤헨을 수도로 삼고 있는 트루비아의 정예, 라칸 기사단의 복장이었던 것이다. 트루비아 땅에서 트루비 아의 기사단을 죽였다면 당연히 그놈들이 적일 것은 당연한 사실. 아마도 저 마차 안에는 저들이 노린 목표물이 들어 있을 것이다.
50미터쯤 떨어진 뒤쪽에 마법사인 가스톤과 미네리아가 남고 나머지 다섯 명이 상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다크까지 합한다면 여섯 명이 열두 명을 상대해야 하지만, 그 열두 명의 반이 약간씩이라도 다친 부상자임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무리한 대결도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상대는 오랜 결전 으로 지쳐 있었고, 뒤에는 막강한 화력을 가진 마법사 가스톤이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가스톤이 품속에서 수정으로 만들어진 짤막한 막대기(stick)를 꺼내 들고는 주문을 외우는 사이 나머지는 상대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이때 뒤쪽 에서 주문을 외우고 있는 가스톤을 보고 회색 갑옷 중의 한 명이 외쳤다.
“마법사다!”
적도 노련하게 병력을 재배치했다. 일곱 명이 돌진해 들어오는 다섯 명을 막는 사이, 나머지 다섯 명이 마법사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 로 그 동료들 뒤를 따라 접근해 오던 다크에게 가로 막혔다. 상대는 겨우 한 명이기에 놈들은 간단하게 처치할 요량으로 덤볐고, 그들이 검을 휘두르 는 것을 보고 다크가 뒤미처 검을 뽑았다. 다크의 검은 상대의 검 두 자루를 튕겨 냈고, 그중 한 명을 두 토막으로 만들어 버렸다.
뒤이어 다크는 말에서 몸을 날려 당황하는 상대에게 뛰어올랐고, 또 다른 한 명의 목이 몸통에서 그의 검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다크의 현란한 움직 임을 본 회색 갑옷은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래듀에이트다!”
이상하게도 놈들은 그렇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저쪽에서 팔시온을 압도하며 느긋하게 공격을 퍼붓던 회색 갑옷 한 명이 여태까지와는 달리 한 방에 팔시온의 검을 날리고 검을 쫙 휘둘렀다. 팔시온은 가까스로 피하기는 했지만 갑옷의 앞부분이 길게 찢어졌고, 또 너무 몸을 뒤로 뺀 바람에 말에서 떨어졌다.
그 회색 갑옷은 상대가 말에서 떨어지자 상대의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여유도 없이 곧장 다크 쪽으로 말을 몰아 달려왔다. 다크와 상대하다 가 회색 갑옷 한 명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본, 아직까지 살아남은 세 명 중 두 명은 다크에게, 또 다른 한 명은 가스톤을 향해 말을 달렸다.
이때 가스톤이 “파이어 볼”하는 외침과 함께 불덩어리를 던졌고, 그를 향해 달려가던 녀석은 말과 함께 통구이가 되어 버렸다. 불기운이 다크에게까 지 은근한 열기를 전달할 즈음에 다크는 남은 둘을 해치웠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조금 실력이 괜찮아 보이는 녀석과 일대일로 대면할 수 있었다.
상대는 거의 1.8미터 길이에 이르는 마상용 장검(馬上用 長劍)인 바스터 소드(Burster Sword)를 휘두르며 자신 있게 다크에게 달려들었다. 말과 말 이 가까워지는 순간 상대는 엄청난 장검의 힘을 십분 이용해 다크를 내리 찍었다. 다크는 상대의 검날에 푸르스름한 검기가 형성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다크는 검을 들어 상대의 검을 간단히 막음과 동시에 말안장의 디딤대에 얹혀 있는 왼발을 지지대로 이용해서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 며 상대의 머리를 향해 오른발을 날렸다.
챙! 퍽!
두 가지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다. 상대의 머리에 한 방 먹인 다크는 왼쪽 발에 힘을 가해 아예 말안장에서 벗어나 땅에 내려섰고, 상대는 머리가 터지면서 낙마(馬)해 반대편으로 쓰러졌다.
‘싱거운 싸움이군.’
다크는 남은 적들을 없애기 위해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때 팔시온 일행도 남은 여섯 명, 그것도 부상자 두 명을 포함한 여섯 명이었기에 간단히 세 명을 해치우고 남은 세 명을 밀어 붙이고 있었다.
팔시온 일행은 잘 몰랐지만 회색 갑옷들의 실력은 꽤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자신들의 대장이 갑옷도 입지 않은 여행자에게 간단히 머리가 터지는 것을 보고, 갑자기 사기가 극도로 떨어졌다.
그들의 대장은 용맹한 기사였으며, 아레스의 신전에서 그래듀에이트의 자격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런 대장을 저리 간단히 발차기로 저세상에 보냈 다면, 검을 쓰는 척하고는 있어도 권법을 통해 그래듀에이트의 자격을 받은 인물임이 확실했다. 그런 자의 수하들이 여기를 덮쳤으니……………. 사기는 순 식간에 땅에 떨어졌고, 그들이 순간적으로 기운을 잃었을 때 그들의 일부가 팔시온 일행의 검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때 마차의 문이 열리고 검정색으로 물들인 멋진 가죽 갑옷을 입은, 흰 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인이 말에서 내려왔다. 그는 사방에서 싸우고 있는 주변을 오만스레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크크, 가소로운 것들…………….”
그는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는 마법사였던 것이다. 그걸 눈치 채고 가스톤이 회색 갑옷을 입은 녀석에게 발사하려고 준비한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 번개 화살)를 흑색 가죽 갑옷을 입은 인물에게 날렸다. 회색 갑옷을 입은 인물들이 동료들과 얽혀서 싸우는 도중이었기에 파 괴력이 큰 마법을 외우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라이트닝 볼트가 그렇게 위력이 약한 마법은 아니었다. 오히려 좁은 범위에 위력이 집중되는 만큼 그 파괴력에서는 파이어 볼보다 앞서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간단히 매직 실드의 주문으로 이를 막아낸 다음 계속 주문을 중얼거렸다. 아마도 저 정도 긴 주문이라면 따끈따끈한 1사이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최소한 2사이클, 최악의 경우 4사이클까지도………………
흑색 가죽 갑옷을 입은 인물은 처음에는 간단히 마법을 막아내며 주문을 외웠지만 곧 표정이 굳어졌다. 검을 들고 자신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 오는 다크를 봤던 것이다. 이 정도 속도라면 주문을 완성하기도 전에 칼을 맞을 것이 확실했다. 마차 안에서 듣기로는 아무래도 저쪽에 그래듀에이트 급이 있는 모양이다. 달려오는 속도로 봤을 때 이자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렇다면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다크의 검이 상대의 목을 향해 휘둘러지기 직전, 흑색 갑옷을 입은 인물은 “워프(Waft: 공간 도약)!”라고 외쳤다. 그가 끼고 있는 반지가 순간적으 로 밝은 빛을 뿜더니 그의 몸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의 몸이 사라지는 그 순간 다크의 검이 그 빈 공간을 갈랐다. 다크가 갑자기 사람이 없어져 버린 공간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팔시온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다크가 멍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자 이미 남은 상대방을 모두 해치운 팔시온이 길게 찢어진 자신의 갑옷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다크에게 미소를 띠 며 말했다.
“자네, 공간 도약 마법을 처음 본 모양이군. 그 녀석 마법사면서 마법 반지를 끼고 있었어. 저 녀석 정도 실력이면 거의 필요 없겠지만, 마법사 혼자 외부에 활동하는 경우 목숨이 아까운 녀석이라면 그만큼 방비를 하기 마련이지.”
“그런데 어떻게 저게 마법 반지라는 걸 알았지요?”
“그야 당연하지. 공간 도약은 4사이클 마법이야. 여러 명을 함께 운반한다면 그건 5사이클에 들어가지. 그런데 4사이클의 마법을 순간적으로 시동 어(始)만 외워 행한다면, 마력 반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지. 그때 반지에서 빛이 나던 거 자네도 봤잖아. 그건 그렇고, 자네 정말 대단한 실력이더 군. 우리들 중에서 최고겠어.”
“하하하, 운이 좋았을 뿐이죠.”
아직까지는 속셈을 숨기고 겸손한 척하는 다크였다.
이번의 싸움에서 가벼운 부상을 당한 지미와 라빈, 팔시온을 가스톤과 미네리아가 치료 마법으로 돌보는 동안 미카엘은 마차에 다가가서 문을 열었 다. 혹시나 무슨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다면 왕실에 신고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차에는 아름다운 소녀 하나만 멍청하게 앉아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미카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 소녀를 데리고 마차에서 나왔다.
“뭔가 있어요?”
미디아의 물음에 미카엘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방금 도망쳤던 마법사 녀석이 가지고 튄 모양이야. 우리도 빨리 여기를 벗어나자구. 재수 없으면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고, 아니면 성(城) 에 가서 모든 상황을 증언하고 심문(審問)받는다고 며칠이나 시달릴지 몰라.”
“스승님 성공했습니다.”
제자의 말을 들은 노마법사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이제 폐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오…, 그래. 수고했다.”
“저, 그런데 카로사 경이…………….” “카로사가 왜?”
“카로사 경이 죽었습니다.”
“그럴 리가. 정보에 의하면 알렉스 시드미안의 실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데……”
“예, 물론 알렉스는 간단히 처치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를 쫓아온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그쪽의 기사는 대단한 실력이었습니다. 카로사 경을 간단 히 해치운 후 달려들었으니까요.”
“흐음, 문제군. 어쩌면 원체 중요한 물건이니만큼 코린트에서 멀찍이서 보호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증거는?”
“하나도 남기지 않았지만, 처음 계획과는 많이 틀어져 버렸습니다. 알렉스 시드미안의 시체를 일부러 감춰 그가 내통한 것처럼 꾸미려고 했는데, 되 려 이쪽에 그래듀에이트가 있다는 걸 광고한 거나 다름없게 되어 버렸으니까요. 면목 없습니다, 스승님.”
“어쨌든 돌아가는 사태를 주시하다 보면 놈들이 어느 정도까지 눈치 챘는지 알 수 있겠지. 수고했다. 들어가서 쉬어라.”
“예, 스승님.”
제자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있는 노마법사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안피로스의 엑스시온 실험에 성공한 것은 5개월 전………. 이제 프로토타입(Prototype: 시작품, 원형)이 겨우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 복수를 향한 첫 걸음을 뗐는데, 뛰어난 기사를 그것도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를 잃다니…………. 신이시여, 불쌍한 저희 백성들과 인자하신 황제 폐하를 버리시는 겁니 까? 제발 신이시여………….”
소녀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열다섯에서 열여섯 정도로 보이는 나이에, 허리까지 오는 아름다운 금발, 겁에 질린 듯한 커다란 갈색의 눈동자, 오똑한 콧날, 붉은 입술을 가진 소녀는 눈에 확 띄는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이목구비가 적당히 어우러져 꽤 미인의 용모였다. 조금 더 크면 대단한 미인 으로 성장하리라……………
키는 1백 60센티미터 정도였지만 가녀린 몸매로 인해 청순미와 가련미까지 보태어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었다. 거기에 약간 멍청한 듯한 눈빛으로 인한 백치미까지…………. 왜 멍청한 듯하냐고? 그건 팔시온 패거리가 그 소녀를 구출한 다음 곧이어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 소녀는 기억을 상 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치열한 전쟁의 한가운데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본 충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마법에 의해 기억이 봉인(印)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 범인은 멋진 검은 가죽 갑옷을 입은 마법사 녀석일 것이다. 그녀의 옷이 보통 상류층의 여성들이 흔히 입는 나들이 옷임을 감안한다면, 그 녀의 신분을 정확히 잡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신 트루비아가 자랑하는 라칸 기사단 50여 명이 호위할 정도의 인물, 어쩌면 여자가 아닌 그녀가 가지고 있던 어떤 물건을 호위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그 정도 물건의 운반을 위임받았을 정도의 여자라면? 아마도 조금만 수소문을 해 본다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며칠만 지나고 나면 트루비아에 소문이 쫙 퍼질 테니 그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보는 게 가장 속편한 방법이었다. 괜히 그녀의 정체를 알아본답시고 돌아다니다가 재수 없으면 그 회색 갑옷 입은 녀석들에게 포착당할 수도 있고, 어쩌면 불필요한 오해를 받아 고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가만히 어 디 처박혀서 그냥 체력이나 보충하며 소문이 흘러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안전했다.
일단 미디아는 눈에 띄는 그녀의 옷부터 갈아입혔다. 소녀에게 입힌 옷은 다크가 여자 도둑들에게 강탈해 온 옷가지들이었는데, 조금 크긴 했지만 그런대로 보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미디아가 입던 옷은 그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소녀에게 너무 컸기에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떠오른 게 다크의 노획물 중 여자 옷이 있다는 것이었고, 그 해결책은 그런대로 괜찮은 결과였다. 일단 아무 마을에나 도착할 때까지는 맞지 않는 옷이라지만 할 수 없었다.
말(馬)은 남아돌았기에 그녀를 태우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기억 상실 때문에 말(言)도 제대로 못하는 그녀가 말(馬)을 제대로 탈 리 없었다. 어색하게 말에 탄, 아니 말 등에 얹혀 있다고 보는 게 옳은 그녀가 떨어지지 않게 모두들 조심해서 천천히 말을 몰았기에 이틀이 걸려서야 작 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쯤에는 모두들 편의상 그녀를 ‘라라’라고 불렀다. 강아지도 이름이 있어야 부를 수 있으니, 그 이름이 그 멍청한 여자 아이에게 어울리고 안 어 울리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새로운 식구 라라를 모두들 따스하게 대했다. 그 처참한 싸움터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고, 더군다 나 여자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여기에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다크였다. 모두의 눈에도 뚜렷이 느껴지도록 다크는 라라를 짐짝 취급을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무 쓸모도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다크가 대놓고 라라를 못살게 굴었다던지, 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예 말을 걸지도 않았을뿐더러 라라의 질문에 간단한 답만 해 줄 뿐 아예 무시해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팔시온이나 미디아는 위태하게 말을 타고 가는 그녀가 아래로 드리워진 나뭇가지 따위를 피하지 못할까 봐 앞서가며 잡아 주 기도 했지만, 다크는 아예 신경을 끄고 있었다.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기에 미디아가 다크에게 발끈해서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다크의 대답…………….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애를 데리고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사실 다크가 이 애송이들과 함께 다니는 이유는 그들이 최소한 전투와 관련된 사항을 제외한 모든 것에서 자신보다는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이 넓다는 점이었다. 그가 트루비아의 수도 샤헨으로 가는 것도 샤헨에 있는 왕립 학술기관인 샤헨 아카데미에 있는 쟁쟁한 마법사들에게 도대체 자신에게 일 어난 일이 뭔지, 또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사실 샤헨 아카데미 같은 많은 왕립 학술 기관들이 존재해서 수많은 학자, 마법사, 마도사(백마술 외에 또 다른 마술을 함께 익힌 자들을 정통파와 구분해서 마도사라고 부른다), 기사 등 국가에 필요한 소중한 인재들을 키운다는 사실을 이들을 통해서 알 수 있었으니 도움이 된다고 할 수밖에…………. 하지만 여행의 속도나 떨어뜨리고,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멍청한 계집애 따위는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색을 밝히지 않는 다크에게는 혐오의 대상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