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12화 – 크라이드 남작
크라이드 남작
“주인님.”
“왜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빨리 준비하세요.”
“내가? 왜?”
“왜라뇨. 그분께서 하자고 하시면 무조건 해야죠. 이 옷을 입으세요. 또 신발은 저걸 신으시구요. 빨리 준비하셔야 해요. 우선 옷 입기 전에 이리 오세요.”
세린은 다짜고짜 자신보다 덩치가 작은 다크를 끌고 가 화장대 앞에 앉히고는 싫다는 다크에게 옅은 화장을 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옷을 입히고 멀찍이서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옷매무새를 정리해 준 다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문밖에 서 있던 실바르가 계면쩍은 얼굴로 그들을 흘깃 쳐다봤다.
“어디로 가냐?”
“예? 황제 폐하께서 주인님과 함께 식사를 하시겠다고 전갈을 보내 왔습니다, 나으리.”
“폐하께서? 빨리 가자.”
드리트리 실바르는 그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이 소녀를 두들겨 팬 것도 좀 미안했고, 또 갑자기 폐하가 이런 소녀와 함께 식사를 하겠다는 제안을 해 온 것에 더 놀 라서 허둥대고 있었다.
다크가 그 둘에게 끌려서 간 곳은 널찍하면서도 꽤나 아름답게 치장된 넓은 식당이었다. 그 식탁 앞에는 건장한 근육질의 잘생긴 남자가 앉아 있다가 다크가 들어 오는 것을 보고 일어서면서 그녀를 맞이했다.
“너희들은 물러가라. 어서 오게나. 듣던 것보다 더욱 미인이군. 이쪽으로 앉게.”
4미터는 되어 보이는 길쭉한 식탁의 반대편으로 걸어온 남자는 허리에 묵직한 바스타드 소드가 전혀 거추장스럽지 않은 듯 날렵하게 움직이며 의자를 조금 당겨 상대가 앉기 편하게 해 주었다. 그는 소녀가 의자에 앉자 그 의자를 살짝 안으로 밀어 준 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프랑크 폰 그래지에트라고 부르지. 자네는?”
“다크.”
“성은 없나?”
“그냥 다크라고 불러요.”
“좋아. 다크 양…….”
“그냥 다크라고 불러요. 나는 원래 여자가 아니니까.”
“좋아. 다크, 식사나 하면서 얘기를 해 보기로 하지. 여봐라!”
곧이어 황실 단골 메뉴가 식탁에 올랐다. 돼지고기 채소 스프, 쇠고기를 넣은 채소 볶음, 빵, 우유, 버터, 거기에 오늘은 특별히 손님이 왔다고 딸기잼과 포도주 한 잔이 함께 나왔다. 거의 식물성인 메뉴를 보면서 다크는 어이없다는 듯이 보고 있자 그 젊은이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소박한 음식이지만 사양 말고 들게나.”
“소박하긴 하군요. 언제나 이렇게 먹나요?”
젊은 황제는 다크가 숟가락을 드는 걸 보면서 빵을 널찍하게 잘라 버터를 발랐다.
“나야 언제나 이렇게 먹지. 내가 먹는 걸 조금만 절약하면, 그만큼 세금을 적게 거둬도 될 거 아닌가? 우리나라는 아주 가난한 나라야.”
“가난한 것 치고는 군사력이 상당하던데요? 그렇게 비싼 타이탄들을 가지고 있는 거 보면….
“그야 당연하지. 요즘은 타이탄 없으면 전쟁을 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가진 군사력으로도 코린트란 벽은 너무나도 높아. 토지에르에게 들었지. 우리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예.”
“자네는 언젠가는 여기를 떠나겠지만, 그 전까지 만이라도 나의 신하가 되어 줄 생각은 없나?”
“글쎄요.”
“언제까지 왕궁에 얹혀 살 수는 없을 거 아닌가? 또 나중에 그대가 힘을 되찾는다면, 나도 그대에게 그만큼의 대우를 해 줘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나의 신하로 들 어오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야. 사실 떠돌이 기사에게 중요한 일을 맡길 수도 없고…….”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얽매여야 하잖아요. 그건 불공평하지 않을까요?”
“뭐, 내가 마음에 안 든다면 언제든지 떠나도 상관은 없지. 하지만 나와 함께 있을 때는 나에게 충성을 다해 주면 돼. 또 사실 그대는 우리와 계약을 맺었고, 그 계
약을 제대로 행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서 높은 직위를 가지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군요.”
“어쨌든 지금 답을 해 달라는 건 아니야. 며칠 생각해 보고 대답해 줘. 아마 그때쯤 되면 우리나라는 전쟁에 승리해 있을 테고, 나도 자네에게 좀 더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겠지.”
“나에게 좀 더 많은 자유를 준다면 생각해 보겠어요. 더 많은 여유 시간을 주고 쓸데없는 일을 시키지 않는다면….
그 말에 황제는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우수한 사람을 원하는 것은 쓰기 위해서지 놀려 두기 위해서는 아니야.”
“당신은 꼭 ‘교주’와 같은 소리를 하는군요. 뭐, 좋아요. 옛날부터 해결사 노릇은 지긋지긋하게 했으니까. 여기서는 별로 할 일도 없으니까 그렇게 하기로 하죠. 당 신에 대한 첫인상은 별로 나쁘지 않으니까, 길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그 첫인상이 희미해질 때 저는 당신을 떠날 것입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젊은 황제는 생각해 볼 여지도 없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허락하네. 신하에게 존경받지 못한다면 그건 이미 일국의 군주가 될 인물이 아니지.”
“좋습니다. 저는 당신의 충성스런 신하가 되겠습니다, 폐하. 뭐 원하시는 거라도?”
그러자 젊은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경은 최대한 빨리 힘을 되찾도록 하시오. 그러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오?”
“5개월 정도는 더 필요하옵니다, 폐하.”
“5개월이라. 아마 우리 예상대로라면 그 정도 시간은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거야. 우리가 코린트를 이기기 위해서는 앞으로 최소한 5년에서 10년 동안은 코린트의 침공이 없어야 하거든. 우리는 천천히 힘을 기르면서 주위의 국가들을 포섭해 나갈 테니까. 경은 최대한 빨리 힘을 되찾는 데 힘쓰라. 우선 그대에게 귀찮게 구는 자 들을 없애기 위해 내가 작은 선물을 주지.”
젊은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일어서서는 다크의 옆으로 다가왔다.
“무릎을 꿇고 앉으라.”
뭔 짓거리를 하나 싶어 말똥말똥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다크가 무릎을 꿇었다. 젊은 황제는 바스타드 소드를 쭉 뽑아 들고 다크의 양쪽 어깨를 검 끝으로 살짝살짝 짚으며 말했다.
“나 프랑크 폰 그래지에트는 경을 크라이드 남작으로 봉하노니, 앞으로 경은 다크 크라이드라 불릴 것이다. 경은 지금 힘이 없기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경에게 작위를 내리는 것뿐이나, 경이 힘을 되찾는 날 경은 짐의 왼팔로서 짐과 함께 부귀와 영화를 함께 누리리라.”
“예? 왼팔이라면 토지에르 경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자 젊은 황제는 씩 웃었다.
“원래 황제는 있는 말 없는 말해서 신하들을 띄워 주기도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 그런가 보다 하면 되는 거지. 꼭 그렇게 집어내서 짐에게 무안을 줄 필요는 없 잖은가?”
“그도 그렇군요, 폐하.”
그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는 확실하군. 자네는 과거 자네가 살았던 곳에서도 윗사람의 미움을 많이 받았겠어. 그리고 권력에 아부하는 성격은 아닌 모양이군. 또 권력에 물들지도 않았고. 일단 힘을 되찾은 다음에는 권모술수를 좀 배워 두라구. 다른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도 그게 필요할 거야. 사람이 사는 곳은 다 그러니까 말이지. 그래, 경은 그 외에도 뭐 원하는 것이 있는가? 그대가 신하가 된 기념으로 뭔가 선물을 하고 싶다.”
“으음, 한 가지 부탁이 있사옵니다, 폐하.”
“뭔가?”
“세린이라는 노예를 저에게 주십시오.”
“그 외에는?”
“없사옵니다.”
“그대는 욕심이 없군.”
“무인(人)에게는 검 한 자루와 굶지 않을 정도의 식량, 그리고 이슬을 피할 작은 집 한 채면 족하지요.”
“참,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 검이 없군. 짐이 한 자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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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실 필요는 없사옵고, 제가 과거에 사용하던 것을 돌려주시면 되옵니다.”
“좋아. 내 즉시 조처를 취하겠노라. 이만 물러가게나.”
“예, 폐하.”
“놀라운 일이 벌어졌사옵니다, 공작 전하.”
“무슨 일이냐?”
“첩자가 보내온 영상이 있는데, 보시겠사옵니까?”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그와 함께 타이탄들이 대규모 전쟁을 벌이는 자그마한 영상이 나타났다.
“이번 크라레스와 스바시에의 전쟁 장면이옵니다. 크라레스가 꽤 많은 뇌물을 넣어 본국이 중립을 지켜 줄 것을 약속받고 시작한 전쟁이라서 그들이 이길 줄은 알 았지만, 이건 너무…….
그러자 그 젊은이는 영상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저건 카프록시아군.”
“예, 공작 전하.”
“아무리 시멘텍이 28대라고 해도 카프록시아로 무장한 근위 기사단의 적이 될 수는 없지. 크라레스가 지금은 약소국이라고 하지만 과거 대 제국의 칭호를 받았던 나라다. 대 제국 시절 근위 기사단의 힘은 고스란히 남아 있기에, 크라레스는 콜렌 기사단의 힘은 형편없지만 근위 기사단만은 세계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힘을 가 지고 있지. 그런 상대의 힘을 모르고 숫자만을 의식해서 자신들이 가진 모든 기사단을 한 곳에 모아 두지 않고 둘로 분리시켜 둔 게 가장 큰 잘못이야. 어차피 그런 배치였다면 박살 나는 게 정석이지. 별로 이상할 것도 없어. 그래, 지금 크라레스에서 스바시에 침공에 동원한 병력은?”
“예, 4개 보병 사단, 1개 용병 여단, 2개 기병 여단, 콜렌 기사단의 타이탄 아홉 대를 제외한 총력, 마지막으로 근위 기사단이옵니다.”
“본국과의 국경선에 배치한 병력은?”
“예, 1개 보병 사단과 콜렌 기사단의 타이탄 아홉 대이옵니다. 지금 본국과의 국경선에 배치된 크라레스의 병력은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간 것으로 아옵니다. 하지 만 겨우 그 병력으로 비상경계를 해 봐야…….”
그 말에 상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흐음, 좋아. 어쨌거나 지금 크라레스는 영토 확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군. 혹시 모르니까 첩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놈들의 부대가 있는지 그 걸 세밀히 살피라고 이르라.”
“예, 공작 전하.”
“그리고 저기서 카프록시아를 타고 싸우는 녀석은 누구인가? 상당한 실력인데……..
그러자 그는 젊은이가 가리킨 타이탄을 보면서 말했다.
“그 카프록시아의 방패에 그려진 문장을 보면,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라는 인물이옵니다. 스바스 근위 기사단장이며, 지금 나이 43세. 크라레스 최고의 검객이옵니 다.”
“흐음, 대단해. 방어와 공격이 매우 매끄러워. 아직 젊은데도 저 정도라면 더욱 열심히 노력한다면 뭔가 이룩해 낼지도 모르겠군. 저런 소국에서 가지고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닌데……. 하지만 근위 기사단장이라면 포섭하기는 힘들겠군.”
“아마 그럴 것이옵니다, 공작 전하. 뛰어난 실력 덕분에 크라레스 국왕의 총애를 받는 무사라고 들었사옵니다.”
“쩝, 아쉽군. 어쨌건 이번 전쟁을 통해 크라레스가 가진 힘을 전부 다 파악해 내도록!”
“예, 공작 전하!”
“예? 이걸 가져다주라구요?”
실바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상관인 40세는 되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무사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여자용 여행복들 과 굽이 낮은 구두 등 도망치기 딱 좋은 옷가지들과 마법 장갑, 거기에다가 여성용 검인 샤벨까지 한 자루 있으니, 이건 빨리 도망치라는 말과 같지 않나?
“황제 폐하의 명이시네.”
“아무리 폐하의 명이라고 하지만…, 그때 도망쳤을 때 다시 잡아온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아십니까? 무려 열다섯 명의 그래듀에이트가 동원되었고, 용기사 열 명 에 수도 경비 사단까지 동원되어서 근처를 이 잡듯이 뒤져서 겨우 잡았다구요. 그것도 그녀의 몸 냄새가 배인 옷가지가 없었다면 잡지도 못했을 겁니다. 수소문해서 행인들이 이리 갔다 해서 가 보니 처음은 맞았지만 두 번째는 틀리고, 세 번째도 틀리더니 네 번째는 맞고……. 어찌나 기막히게 도망 다니는지 군견들의 도움이 절 대적이었죠. 그런데 도망칠 장비를 충실히 갖춰서 준다면……. 저는 또다시 그런 일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말에 상대는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그 요녀(女)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폐하께서는 그녀에게 남작의 작위를 내리셨다. 그녀의 작위가 높다 해도 사실상 힘은 없지만.. 어쨌든 그녀 는 이제 포로가 아니야. 남작이라고 해 봐야 그래듀에이트보다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폐하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게나.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까……. 또 공작 전하나 토지에르 경도 그녀를 함부로 못 대하지 않는가? 그녀에 관한 신상은 비밀이라서 도대체 어떤 배경이나,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윗사람들이 하는 일이니 자네도 잘 처신하리라 믿네.”
“남작의 칭호를 주셨다구요?”
“그렇다네. 이제부터는 다크 크라이드 남작이지. 남작 따위 작위야 별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거야. 또 세린도 그녀에게 하 사된 물품 중에 하나니까 그렇게 알고 있게. 앞으로 자네가 할 일은 그녀의 감시가 아니라 보호야. 아마도 그녀의 신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자네의 가죽을 홀랑 벗
기려는 사람이 꽤 될 테니까 조심하게나. 알겠나?”
상관의 말에 실바르는 힘없이 대답했다.
“예.”
실바르로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신경질이 난 김에 그렇게 신나게 두들겨 팼었는데. 쩝, 여자가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 린다는데, 나의 미래는 괜찮을까? 그 요녀가 침실에서 폐하의 품에 꼭 안겨서 간드러지는 비음을 섞어 “폐하아~ 실바르란 나쁜 녀석의 목을 부탁해용~”할지 누가 아느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