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15화 – 나리오네 평원 전투

나리오네 평원 전투

나리오네시가 위치한 나리오네 평야에 양국의 주력 부대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양쪽 다 이번 전쟁에 국가의 사활을 걸고 있기는 마찬가지였기에 양군은 모두 필 사적이었다.

스바시에의 보병 4만과 기병 1만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정면에, 크라레스의 3만 보병과 기병 5천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물론 양국의 군대들은 2킬로미 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서로 간의 거리를 충분히 두는 이유는 조만간에 시작될 타이탄들끼리의 전투를 위해서였다.

아침이 되자 양군의 군세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스바시에의 중갑 보병(重鉀步兵 : Havy Footman)이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중갑 보병은 두터운 갑주(甲 胄)와 묵직한 방패, 그리고 비교적 짧은 미들 소드(Middle Sword)를 허리에 차고, 3미터 길이의 창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묵직한 무게 덕분에 기동력은 뛰어나지 못하지만 그 파괴력이나 방어력이 뛰어나기에 정면 접근전에 투입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들의 뒤편에서는 중갑 기병(重鉀騎兵:Havy Trooper)이 천천히 따라왔고, 양쪽에는 경갑 보병(輕鉀步兵:Light Footman)과 용병대가 전진했다. 기동력이 뛰 어난 기병도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중갑 보병은 막강한 힘은 있지만 기동력이 뛰어나지 못하기에 가장 앞 중심 공격선에 두고, 그 뒤에는 역시 파괴력은 뛰어나지만 통상의 기병보다는 기동력이 떨 어지는 중갑 기병을 배치했다. 중갑 보병이 적의 보병과 충돌한 후에 중갑 기병을 투입하는 전술은 매우 교과서적인 것이었다.

기병은 속도는 뛰어나지만 잘 준비된 보병을 공격하기 위해 돌격했다가는 창이나 활에 절단나기 쉽다. 그렇기에 먼저 보병을 밀어 넣어 상대의 진형을 흩트린 후 기병을 투입했다.

하지만 상대의 기동력이 뛰어나다면 오히려 포위당할 위험성도 있으므로, 기동력이 뛰어나 상황 대처 능력이 좋은 경갑 보병이나 기병은 좌우 측면에 두어 적의 움직임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게 만든다.

이 같은 방식은 가장 교과서적인 전투 방법이어서 구태의연한 면도 있었지만, 정통적인 방법이니만큼 그 위력 또한 대단하다. 교과서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효율 이나 위력이 강하며 성공할 확률도 높다는 것을 뜻한다. 또 이런 넓은 평야 지대의 전투에서는 이 진형이 가지는 강점은 극대화되고 약점은 최소화된다.

상대방의 군대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상하군…….

타이탄 수는 저쪽이 월등한데 왜 타이탄을 꺼내지 않는 거지?”

그러자 공작의 뒤쪽에 서 있던 노장군 한 명이 즉각 답했다.

“예, 전하. 통상 타이탄들이 나서는 것이 정석인데, 저들이 뭔가 또 다른 계책이라도 꾸미는 게 아닐까요?”

“그래듀에이트들은 모두 어디 있나?”

“예, 명령대로 모두 이동 마법진 주위에서 대기 중이옵니다. 하지만 아직도 황궁에 적이 침투했다는 보고는 없사옵니다.”

“젠장, 토지에르.”

“예, 전하.”

“저 녀석들이 이동 마법진으로 한 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건 몇 명 정도일까?”

“예, 마법사들이 좀 있으니까 아마도 1백 명까지는 가능할 것이옵니다. 대신 그들을 전부 투입한다면 그쪽으로 한 번에 보내는 건 가능하겠지만, 마법사들이 그곳 으로 함께 이동해 갔다 하더라도, 새로이 마법진을 만들어야 하니까 돌아오려면 최소한 30분 이상의 시간이 걸리옵니다. 1백 명 정도를 이동시킨다면 그 정도는 쉬 어야 다시 한 번 마법을 쓸 수 있을 테니까요.”

“1백 명이라. 만약 40명 내외로 잡는다면?”

“20분 정도 될 것이옵니다.”

“예상되는 적의 타이탄은 36대 정도. 최대로 잡아도 한 40대? 우리들이 가진 타이탄은 아홉 대는 황궁에, 19대는 여기 있다. 모든 걸 무시하고 공격했을 때 놈들이 20대의 타이탄을 황궁으로 보낸다면? 최악의 경우 너 죽고 나 죽자고 40대 모두 다 보낼 수도 있고……. 지금 이대로 총력전으로 끌고 들어간다면 본국의 타격이 너무 커. 타이탄은 수리가 가능하지만 죽은 병사는 살릴 수 없지. 언데드라도 만들면 모르겠지만, 그러면 곧장 악마의 집단으로 찍혀서 멸망당할 뿐이야.”

“전하, 우선 카프록시아 몇 대를 투입해 보고 상대의 반응을 살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흐음, 그 방법 외에는 없겠군. 크로마스!”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기사 중의 한 명이 재빨리 다가왔다. 그는 다크 사냥에 참가했다가 된통 혼이 났던 미온지에 폰 크로마스였다.

“옛, 전하.”

“근위 기사단의 타이탄을 출동시켜라. 만약 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적의 중갑 보병을 먼저 괴멸시켜라.”

“옛!”

곧 크로마스가 인솔하는 아홉 대의 근위 타이탄들이 왼손에는 거대한 방패를, 오른손에는 7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창을 들고는 적진을 향해 달려 나갔다. 카프록 시아들이 적진으로 달려감과 동시에 적진 저편에서 공간을 열고 20여 대의 타이탄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즉각 카프록시아를 향해 저마다의 무

기를 휘두르며 뛰어왔다.

상대의 타이탄 20여 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공작은 재빨리 외쳤다.

“콜렌 기사단을 출동시켜라.”

마법진 주위에 모여 웅성거리던 기사들이 즉시 자신의 타이탄을 불러내어 적진을 향해 뛰어갔다. 이미 전장은 적 타이탄과 이쪽 타이탄이 얽혀 접전 중이었기에, 그들은 창을 포기하고 근접전용 무기인 도끼나 철퇴를 들고 뛰어갔다.

처음 돌격을 시작한 카프록시아들은 상대 타이탄들이 달려 나오자 먼저 거대한 창을 맹렬한 기세로 상대방에게 던진 후 곧장 허리에 꽂혀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카르록시아가 가진 그 강대한 힘으로 던진 창의 위력은 엄청났고, 제대로 막지 못한 상대 타이탄 네 대의 방패를 꿰뚫으면서 본체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들이 2차 장갑에 꽂힌 창을 뽑아내고 상처 수복을 하는 사이 이미 선두에 나선 타이탄들끼리 격전을 시작했다.

공작이 푸치니 아홉 대를 투입한 후 곧 저쪽에서도 20대 정도의 새로운 타이탄들이 공간을 열고 나왔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공작의 뒤에서는 카프록시아 한 대 가 모습을 나타냈고, 공작은 자신의 타이탄에 뛰어오르며 외쳤다.

“놈들의 타이탄은 모두 이곳에 있다. 황궁의 타이탄들도 모두 불러들여라.”

“옛!”

토지에르는 공작의 명령에 답하고, 공작의 카프록시아가 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지도 않고, 곧장 뒤쪽 마법진 앞에 서 있는 마법사를 향해 외쳤다. “황궁에 대기 중인 타이탄들을 불러들여랏!”

그 마법사는 수정 구슬을 향해 열심히 뭐라고 떠들었고, 잠시 후 황궁에서 출격 준비 중이었던 아홉 명의 기사들이 희미한 빛을 내며 이동용 마법진에 모습을 드러 냈다. 그들은 워프에 성공하자 즉시 자신들의 타이탄들을 불러낸 다음 저마다 철퇴나 도끼를 하나씩 잡고 전장으로 달려갔다. 바야흐로 40대에 가까운 타이탄과 28 대의 타이탄이 얽히고설키는 대접전이 벌어졌다.

바로 이때 세 대의 타이탄이 갑자기 크라레스군의 뒤쪽에서 나타났다. 그들의 방패에 그려져 있는 거대한 뱀의 문장이 그들이 소속된 국가를 나타내 주었다. “크악!”

“아악!”

갑자기 나타난 치레아 왕국 크라얀 기사단의 크메룬급 타이탄 세 대는 곧장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창을 이용하여 개미처럼 모여 있는 상대방의 군대를 난도 질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붙어 있는 작은 창문을 노리고 화살을 날리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타이탄의 그 작은 허점을 노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 능했다.

공작이 거느리는 28대의 타이탄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상대 타이탄들과의 싸움에서 몸을 뺄 수가 없었고, 그 덕분에 놈들은 더욱 신이 나서 설쳐 댔다. 거대한 창을 휘저으며 중갑 보병들을 짓뭉개는 타이탄을 바라보던 토지에르는 마법을 외우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마법사 다섯 명도 거기에 가세했다. 타이탄을 파괴하려면 7사 이클급의 마법이 필요하지만 옆에 있는 마법사들이 외운 5사이클급 마법 다섯 방에 자신의 6사이클 마법 한 방을 합치면 약간의 가능성도 있었다.

중얼중얼 마법을 외우는 마법사들을 처음에는 적 타이탄들도 무시했다. 타이탄이 마법 따위로 타격을 입을 수 없다는 걸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 지만 그 여섯 명의 마법사들을 중심으로 넘치고 있는 마나의 기운은 이들이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 줬고, 곧장 세 대의 타이탄들 중 한 대가 그들을 향 해 달려왔다.

이때 가까스로 마법을 완성한 마법사 한 명이 익스플로우전을 날렸다. 익스플로우전이라면 5사이클에서는 최강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주문. 하지만 대 폭발의 화 염을 뚫고, 타이탄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한 충격에 약간 주춤하긴 했지만 타이탄은 그 정도는 어린애 장난이라는 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불길 때문에 외부의 페인트는 완전히 타서 없어졌지만 미스릴을 입히지 않은 크메룬의 몸체에 새겨진 대마법 주문(對魔法呪文)이 드러나서 특이한 아 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자신의 마법에도 끄떡없이 달려오는 타이탄을 보고 그 마법사의 눈이 공포에 물들었다. 그때 주문을 완성한 남은 네 명 모두 거의 근사(近似한 시간 차이로 타이 탄에 익스플로우전을 퍼부었다. 연속되는 강력한 마법 공격의 충격으로 타이탄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을 때, 토지에르의 입에서 강렬한 마나의 울림을 담고 있는 시동어가 터져 나왔다.

“딥 스웜프(Deep Swamp : 깊은 늪)”

그와 동시에 타이탄이 서 있던 굳건한 대지가 물렁물렁해졌고, 타이탄은 그 엄청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밑으로 빠져 들었다.

대지를 물컹하게 만드는 스웜프 주문은 보통 2, 30센티미터 정도의 지표면을 질척하게 만들어 상대의 기동력을 떨어뜨리는 데 사용한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타이탄의 경우 밑에 뭔가 밟히는 부분이 있기만 해도 뛰어오를 수 있기에, 최소한 5, 6미터의 깊이로 스웜프 주문을 사용해야 했다.

토지에르는 6사이클급에 해당하는 그 한 방을 날리고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한 것에 흡족해했다. 하지만 그가 미소를 짓는 그 찰나 옆에 있던 마법사가 그를 재빨 리 붙잡아 뒤로 당기면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제각기 주문을 외우고 있었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남은 두 대의 타이탄들이 무시하지 못할 위력을 낸 마법사들을 없애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 이다. 지금 이 상황이라면 간단한 이동 마법도 못 외우고 몸이 두 토막 날 것은 당연한 이치. 하지만 그들은 달려서는 도저히 저 괴물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 기에 필사적으로 공간 이동 주문을 외웠다.

이때 엄청난 소리를 내며 대기를 가르고 날아온 거대한 검이 토지에르 일행 쪽으로 달려오던 타이탄의 목 아랫부분과 엑스시온이 위치한 부분을 꿰뚫어 버렸다. 물론 그 타이탄은 뭔가가 날아오는 걸 느끼고 대비하려 했지만, 미처 적절한 대비를 하기도 전에 검에 꿰인 것이었다.

그 타이탄이 서서히 쓰러지는 찰나 붉은색과 푸른색의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거대한 카프록시아가 나타났다. 카프록시아는 이미 검을 던져 버렸기에 방패만 들고 있었고, 상대는 무장을 갖추고 있으니 누가 위험한지는 뻔했다.

상대 타이탄인 크메룬은 덩치도 3.7미터로 카프록시아보다 훨씬 작았고, 출력도 0.7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무장을 갖추고 있다는 이점을 이용해 재빨리 쓰러진 동료의 옆으로 이동하면서 카프록시아가 자신의 칼을 회수하지 못하게 막았다.

크메룬이 창으로 찌르는 것을 두 번 다 카프록시아가 방패로 가볍게 막아 내자, 크메룬에 탄 기사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상대 타이탄은 카프록시아. 크라레 스의 근위 타이탄이며 높이 5.2미터, 출력 1.3이나 되는 강자다. 지금 검이 없을 때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일대일에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 다.

크메룬은 강력한 힘으로 창을 한 번 더 찔렀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카프록시아가 방패로 창을 튕겨 냈다. 여기까지는 크메룬이 예상한 대로였다. 크메룬 은 재빨리 파고들면서 왼손에 든 방패로 옆으로 비껴 있는 카프록시아의 방패 왼쪽 부분을 강하게 때렸고, 상대의 방패는 몸 쪽에서 벗어나 밖으로 튕겨 나갔다. 그 때 크메룬은 이미 방패를 버리고 검을 뽑아 카프록시아를 베려 하고 있었다.

이때 카프록시아의 오른손이 크메룬의 왼손을 꽉 잡았고, 그와 동시에 크메룬은 카프록시아에 밀려 거의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 라 크메룬에 탑승한 기사는 정신이 없는 상태였고, 카프록시아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 무릎 관절에 붙어 있는 거대한 강철 뿔로 크메룬의 복부 장갑을 찢어 버렸다. 그런 다음 양 팔꿈치에 붙어 있는 강철 뿔로 크메룬의 양쪽 어깨를 찍었다. 철판이 우그러져서 팔을 잘 움직이지 못하는 상대의 허리에 달려 있는 검을 슬며 시 뽑아 곧장 가슴 부분에 박아 넣었고, 그와 동시에 크메룬의 움직임이 정지되어 버렸다.

타이탄 두 대를 간단히 처치한 카프록시아가 첫 번째 재물로 다가가 자신의 검을 회수하고 있는데, 땅이 불룩하게 솟아오르면서 땅 속에 묻혔던 크메룬이 튀어 나 왔다.

크메룬은 저급 타이탄이었기에 연이은 익스플로우전의 공격에 대마법 방어진이 파괴되기 직전까지 갔다. 만약 토지에르가 6사이클급의 파괴 주문을 썼다면 아마 도 고철이 되었겠지만, 당황한 김에 정규급 타이탄의 방어력을 상상해 버린 토지에르는 그걸 파묻어 버렸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땅이 다시 굳어지자 튀어 나온 것이 었다.

흙투성이가 되어 엉망진창인 상대를 바라보며, 카프록시아는 이제 검이 있기에 저따위 타이탄쯤 겁날 것도 없다는 듯 여유 있게 다가갔다. 밖으로 튀어 나온 것까 지는 좋았는데, 눈앞에 엄청난 강적을 맞이한 크메룬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상대 타이탄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강대한 마나의 기운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 이다.

순간, 카프록시아가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자 먼지가 피어올랐고, 순식간에 크메룬의 코앞으로 접근한 카프록시아는 그 거대한 방패로 상대를 두들겼다. 막강한 힘 에 타격을 입은 상대의 방패가 위로 튕겨 오르는 순간, 카프록시아의 검은 크메룬의 가슴을 꿰뚫었다. 곧이어 크메룬의 거대한 덩치가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뒤에서 튀어 나왔던 타이탄들을 몽땅 처치한 카프록시아는 급히 이탈했던 전장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평원에서는 수많은 타이탄들이 얽혀서 각종 무기로 상대를 두들겨 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