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16화 – 개선 행렬
개선 행렬
“왜 이렇게 밖이 소란스러운 거지?”
소녀의 말에 세린이 방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예, 언제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스바시에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대요. 오늘 원정군 사령관이신 크로아 공작 전하께서 돌아오시기에 개선 축제(祝祭)가 열린 답니다, 주인님.”
“그럼 토지에르도 돌아오겠군.”
“예? 토지에르 나리는 벌써 돌아오셨는데요? 일주일 전에 뵈었어요. 굉장히 바쁘신 것 같기도 하고……. 피곤한 표정으로 걸어가시는 걸 봤는데요.”
사실상 일주일 전의 대회전에서 스바시에 왕국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공작이 지금에야 돌아온 이유는 잔당들의 처리 등 점령지에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지에르는 스바시에에서 노획한 고철 타이탄들을 수거해다가 새로운 타이탄들을 제작해야 했기에 급히 돌아와 있었다.
“흐음…..”
“축제 구경 안 하실래요? 오늘 있을 개선 축제는 정말 화려할 거라고 하더라구요. 준비한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요? 빨리 가요.”
“나는 시끌벅적한 건 별로 안 좋아하니까 너 혼자 가거라.”
“에이, 주인니임. 그러지 마시고 구경 가요. 예?”
“싫다니까 그러네. 그건 그렇고 목욕물이나 받아 놓고 가.” 단호한 주인의 태도에 풀이 죽은 세린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다크가 목욕을 끝내고 나왔을 때 세린은 아직 방에 있었다.
“아직 안 갔냐?”
“할 건 하고 가야죠. 엎드리세요.”
세린은 올리브유를 손에 바르고 다크의 근육을 부드럽고도 세심하게 마사지해 주었다. 그런 후 주인에게 새로운 옷가지를 가져다주고는 옆방으로 갔다.
다크는 세린이 나갔으니 수련이나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지만, 옆방에서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아주 들으라는 듯 세린이 크게 떠들어 댔기 때문이다.
“아, 축제 구경하면 좋을 텐데, 왜 구경을 안 하시겠다고 그러셔? 뼈 빠지게 일해 주는 노예를 위해서 구경 좀 시켜 주면 어때서?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건 너무하 잖아. 주인을 놔두고 노예가 밖으로 돌아다닐 수 없다는 걸 잘 알 텐데……. 혼자서 구경하라고 하는 건 나보고 구경하지 말라는 거나 똑같잖아. 만약 내가 자리를 뜬 게 발각되면 토지에르 나리에게 죽도록 맞을게 뻔한데…….”
세린이 이렇듯 당차게 나갈 수 있는 건 노예의 혼잣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숙녀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약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대놓고 말하는 것도 아니 고 혼잣말인 경우에는 어떤 소리를 떠들어도, 실례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걸 참고 들어야만 했다. 그래야 ‘귀부인’이나 ‘숙녀’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다크도 세린이 한 번씩 그러는 걸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그것이 이곳 귀족층에서 지켜야 할 덕목에 들어간다는 걸 알았다. 얄미운 노 릇이었지만 그녀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얌전한 숙녀가 되려면 그 잔소리를 참아 줘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치명적인 논리상의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는데 다크가 숙녀였던가?
“으으윽! 도저히 못 참겠다! 세린!”
그러자 옆방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
“너 계속 떠들면 가죽을 벗겨 버린다. 알겠어?”
그러자 경악한 세린이 뛰어 들어왔다.
“어머, 어머, 세상에…. 그런 말은 숙녀로서 도저히 입에 담지 못할 천박한 말투라구요. 제발 그 상스러운 말투 좀 고치세요. 그리고 숙녀는 절대로 노예의 혼잣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죠.”
세린은 당연하다는 듯 반박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미소뿐이었다.
“나는 여자가 아니야. 그렇기에 숙녀도 아니야. 또 숙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 정말 너, 죽고 싶냐? 응?”
다크가 도저히 어린 소녀라고는 볼 수 없는 매서운 살기를 뿜어내며, 살며시 한 손으로 세린의 목 윗부분을 잡고는 슬슬 쓰다듬자 세린은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그 기세로 봤을 때 목이 비틀리든지 아니면 졸릴 가능성이…….”
“이게 귀엽다고 봐줬더니 정말 죽고 싶어? 다시는 내 앞에서 숙녀니 여자니 하는 말 하지 마. 나는 그 말을 제일 싫어하니까, 알겠지?”
세린이 겁에 질려 떠듬떠듬 대답했다.
“예, 예.”
“이만 가 봐.”
세린이 부리나케 옆방으로 도망치자, 다크는 이제야말로 수련을 하려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자신으로서는 가장 열 받는 게 여자가 된 것인데, 그걸 들고 떠들어 대다니……. 내 수련이 조금만 얕았어도 진짜 가죽을 벗겨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가 다크의 생각은 조금 더 발전했다.
‘전에 팔려고 내놓은 묘인족 소녀는 분명히 꼬리가 있었다. 하지만 세린은 꼬리가 보이지 않아. 꼬리는 어디 갔을까? 허리에 돌돌 말고 있나? 아니면 저 긴 치마 안 에서 축 늘어져 있나? 그때 묘인족 소녀의 꼬리와 귀에 돋아난 털이 꽤 뽀송뽀송하니 부드러워 보이던데 몸에도 그런 털이 있을까? 털이 있다면 가죽을 벗겨 놓으면 따뜻할지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수련, 수련…….’
태허무령심법의 구결에 따라 천천히 기를 돌리자 몸의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다. 더욱 깊이 수련에 들어가면 정신이 집중되면서 외부의 자극이 차단되겠지만, 그 직전의 상황에서는 매우 예민해지게 된다. 이때 그녀의 예민해진 귀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또 짜고 있군. 무시하고 수련을. 으윽! 제기랄 못 참겠다. 공력이 얕으니 귀를 틀어막을 수도 없고, 저년을 죽여 버리든지 팔아 버리든지 해야지 원……..
씨근거리며 다크는 옆방으로 쫓아갔지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처량하게 훌쩍거리고 있는 세린에게 튀어 나간 말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또 울고 있구나. 너 계속 울어 대면 팔아 버린다.”
세린의 물기 어린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이 주인은 맨날 할말이 궁색해지면 팔아 버린다고 위협하는데, 그게 말뿐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엉? 웃어? 주인의 말이 같잖게 들리냐? 이게 아직도 맛을 다 못 본 모양이군……. 에휴, 그래, 네 마음 내가 알지. 너도 참 성질 더러운 주인 만나서 고생이 많지?” 다크는 세린을 토닥여 주었다.
“그만 울고 같이 구경이나 가자. 아이고, 내 팔자야.”
다크가 세린과 함께 밖으로 나오자 언제나와 같이 실바르도 멀찌감치 따라왔다. 왕궁의 모양이 약간 달라져 있었다. 궁이야 변한 게 없었지만 궁으로 들어오는 정 문 주위의 좌우에 다섯 대씩 열 대의 거대한 덩치의 타이탄들이 서 있었다. 붉은색과 푸른색을 화려하게 칠했으며, 방패와 그 두터워 보이는 갑옷 여기저기에는 여 러 가지 문장들이 그려져 있었다.
“와! 주인님, 정말 멋지죠? 저게 타이탄이에요.”
언제 울었느냐는 듯 한껏 들떠 있는 세린을 씁쓰레하게 바라보며 다크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나도 알아.”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넘쳐났고, 여자들은 저마다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그 바구니 안에는 꽃잎이 들어 있었는데, 아마도 저거 딴다고 산골짜기를 꽤나 돌아다녔을 것이 분명했다.
세린에게 이끌려 한참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이윽고 개선군(凱旋軍)들이 당당하게 도로를 가로질러 행진해 들어왔고, 사방에서 여자들이 바구니의 꽃잎을 그 들에게 뿌렸다. 주민들이 환호하자 갑주를 걸친 군인들은 더욱 자신들의 전공을 자랑하듯 굳건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행진했다. 이번 전쟁에 자신들이 없었다면 승 리할 수 없었다는 듯…….
전쟁에 투입되었던 군대의 대부분은 점령지나 국경으로 보내졌고, 개선 행진에 동원된 병사는 5천도 되지 않았다. 특히나 점령지의 불순분자들, 즉 게릴라들과 험 한 지형에서 싸울 때는 중장갑을 지닌 군대는 필요가 없었기에 개선 행진에 동원된 병사들은 대부분 중갑주를 착용한 병사들이었다. 중갑 기병, 중갑 보병이 지나가 고 나자 마지막으로 제각각의 무장을 갖춘 용병대가 지나갔다. 다크는 혹시나 하고 용병대를 쭉 훑어봤지만 아는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팔시온 일행은 어디로 간걸까? 토지에르의 말로는 용병대에 있다고 했는데, 아직 점령지에 남아 있나? 나중에 토지에르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봐요, 아가씨.”
“예?”
다크가 상대를 바라보자 상대는 김샜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어린 애잖아. 눈이 삐었나? 아무리 뒷모습이지만 내가 착각을 하다니.”
다크는 투덜거리고 있는 상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상대는 여행자들이 흔히 입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망토 안에는 잘 손질된 반들반들한 가죽 갑옷이 보였고, 허 리에는 제법 근사한 롱 소드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다크의 시선을 잡고 있는 것은 상대의 제법 잘생긴 외모와 황금색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호색한을 가장하고 있 는 저 눈동자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느낌. 고수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그 힘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봐,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는 어린 애는 안 건드린다구. 너 혹시 언니 없냐? 너 얼굴만 봐도 네 언니는 보증 수표일 텐데..
“없어요.”
“쳇! 좋다 말았군. 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오! 저쪽에 괜찮은 아가씨가 있군. 꼬마야, 만나서 반가웠다. 안녕!”
다크는 사람들을 헤치면서 멀어지고 있는 상대의 등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렇듯 상당한 실력을 갖췄을 것으로 짐작되는 인물들이 한 번씩 보이는 걸 보면, 이 나라
가 꽤나 대단한 나라인지도…….
“주인님, 왜 그러세요?”
세린이 옆에서 말을 걸었기에 다크의 상념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구경 다 했으면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