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3화 – 내키지 않는 길을 가다
내키지 않는 길을 가다
“어서 오게나, 프로이엔 단장.”
“안녕하셨습니까? 토지에르 경.”
“여기 앉게. 몇 가지 의논할 일도 있고 해서 자네를 불렀네.”
“예.”
““자, 한잔 받게나.”
토지에르는 병을 들어 상대의 잔에 포도주를 가득히 따랐다. 이곳 크라레스에서는 포도주만이 생산된다. 나머지 술은 황제의 칙명에 의해 거의 대부분 생산이 중 지되었고, 외국에 수출하기 위한 토속주 몇 가지만이 생산되었다. 안 그래도 경지 면적이 좁은 탓에 조금밖에 생산되지 않는 곡물을 쓸데없이 술 만드는 데 사용하 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금 있으면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 전하께서 돌아오실 거야.”
그 말에 프로이엔은 기절할 듯이 놀라 하마터면 입속에 들어 있던 포도주를 토지에르를 향해 뿜을 뻔했다. 간신히 실수를 면한 프로이엔은 재빨리 목구멍 속에 포 도주를 밀어 넣었다.
“옛? 정말이신가요?”
“정말이네. 자네도 스승과 만나는 게 정말 오랜만이지?”
“예, 30년쯤 전인가요? 그때 선황 폐하의 죽음을 막지 못한 가책에 시달리시며 본국을 떠나셨으니까요. 저는 그분과 그때 만나 검술 수업을 받다가 10년 전에 헤 어졌죠.”
“정확히 28년이지. 폐하께서 여덟 살 때였으니까……. 제국 최고의 무사가 겨우 로메로 한 대만 가지고 나가서 고생도 참 많이 하셨겠지만, 그분이 계셨기에 우리 가 그나마 복수를 꿈꿀 수 있는 것이지.”
“예, 스승님께서 던전들을 발굴하시지 않으셨다면 청기사나 청기사에 들어갈 그 많은 돈을 조달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저도 그때 따라다니며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죠. 그때가 그립군요. 참! 그런데 언제 돌아오시나요?”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2주일 정도 후일 거야.”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빠른 건 아닐세. 2주일 후에는 청기사의 실전 테스트를 할 거야. 그것 때문에 폐하께서 공작 전하를 불러들이신 거니까.”
프로이엔이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청기사를?”
“그렇다네. 정보로는 시드미안과 코린트에서 보낸 사냥개들이 합류했어. 그래 봐야 로메로나 카로사겠지만……. 참, 시드미안의 안토로스가 있었지.
어쨌든 그 다섯 대를 완전히 박살 내기 위해서 필요한 전력은 로메로 열 대 한 대라도 도망치면 끝장이니까 이쪽에서 좀 과하게 투입하는 수밖에. 하지만 청기사 라면 다르지. 두 대만 동원해도 그놈들 쯤이야 몽땅 다 시체로 만들 수 있어. 그리고 로메로 한 대 정도는 함께 보내서 남은 잔당들 처리를 맡기면 간단히 끝나겠지.” “하지만 꼭 청기사를 투입해야만 할까요? 잘못하면 기밀이…….”
“어쩌면 기밀이 누출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네. 그놈들이 청기사의 존재를 안다 해도 변하는 건 없어. 청기사가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타이탄이 란 걸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동료들이 오는 데 당연히 마중을 가야지. 오늘 아침에 연락을 해 보니, 모두 출발 준비를 갖췄다고 하더군.”
시드미안과 스미온, 그리고 안토니는 코린트에서 파견된 무리들을 따라 이유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시 외곽으로 나왔다. 로니에 사제는 시드미안이야 마음에 들었 지만, 이들과 합류하는 인물들이 코린트 제국의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 팔시온 일행에 합류해 버렸다. 괜히 그쪽에 따라갔다가 자신의 종파가 들키기라도 하면―신 성 마법을 쓰기만 하면 들킬 게 뻔하니―곧바로 자신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약속 위치에 도착한 코린트 궁정마법사 지오네는 해를 잠시 쳐다본 후 말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군.”
그리고는 땅바닥에다 대강대강 마법진을 그렸다.
“이미 미네온 마법사 길드에다가는 여기서 10만 기간트라급의 공간 이동 마법이 있을 테니 그리 알라고 통보해 놨네. 그놈들은 좌우간 국내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너무 민감한 게 탈이라니까…. 딴 나라에서는 아무리 강력한 마법을 써 대도 알지 못하는데, 여기서 하는 일은 귀신같이 포착해 내거든.”
지오네가 그린 마법진에서 빛이 약하게 뿜어져 나오더니 여덟 명의 인물들이 말에 탄 채로 나타났다. 그들 중 한 명이 시드미안에게 아는 체하며 인사를 건네 왔 다.
“시드미안 경, 오랜만입니다.”
“오, 도미니크 아닌가? 자네가 파견되어 왔나?”
“예, 시드미안 경을 도와 드리라는 분부를 받고 왔습니다.”
도미니크의 말을 들은 시드미안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 분부는 분명 국왕 전하로부터 내려졌겠지만, 국왕 전하도 그 망할 코린트의 황제에게 압력을 받았 을 것이다. 이로써 트루비아에 남은 안토로스급 타이탄은 겨우 두 대. 근위 기사단 인원의 반이 국외에 나와 있다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코린트 패거리들도 서로 인사를 주고받더니 곧장 지오네가 말했다.
“이제 모두 다 모였으니 이동하기로 하지. 상대방에 흑마법사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해괴한 그림의 주인이 마신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본국의 마법사 길드에서 조사 중이다. 하지만 이게 드래곤과 상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나왔어. 청색하면 블루 드래곤! 원래 블루 드래곤의 뿔은 하나지. 하지만 그 블루 드래곤 중에 변종이 나왔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또 드래곤 중의 한 마리가 해괴한 모양의 키메라(Chimera : 접목 등에 의해 만든 마법 생물로 여러 종의 특성을 함께 가진다) 를 만들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하기는 힘들다. 또 그 흑마법사 녀석이 키메라를 만들었을 수도 있지. 어쨌거나 여러 가지로 추측이 가능하다.”
“그럼 어떻게?”
“우선 미테오, 자네는 코네리와 함께 알카사스 내에 있는 키메라에 관한 권위자를 찾아라. 그런 다음 그에게 그 그림에 대해 물어보고, 키메라를 연구하는 인물들 의 명단을 입수하라. 그자가 협조하지 않는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러자 40대 마법사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항한다면요? 저희들만으로는 좀…….”
“좋아, 갈로네 자네가 도와주게.”
그 말에 기사 한 명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그럼 우리는 멀리 가서 딴 블루 드래곤을 찾을 필요 없이 그레이시온 산맥에 산다는 놈을 만나러 가기로 하지. 그놈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그러자 시드미안이 정색을 하며 외쳤다.
“너무 위험합니다. 블루 드래곤은…….”
“조용히 하게. 내가 물어보기 전에는 닥치고 있으라구. 알겠나?”
도대체 4천 살이나 먹은 드래곤을 만나러 가다니……. 자신도 그때는 무슨 정신에 그곳을 헤매고 다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친 짓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걸 말할 수도 없으니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드미안은 상대에게 공손하게 대답하는 것으로 대화를 끝냈다.
“예.”
“드래곤 따위야 큰 도마뱀하고 다를 게 뭐가 있나? 존경하는 척 사탕발림을 해서 물어보면 멍청한 것들이니까 대답을 해 줄 거야. 그 녀석은 과거에는 광룡(狂龍) 이란 칭호를 받았던 놈이지만, 한 2백 년 조용했으니까 요즘은 성질이 많이 죽었겠지. 빨리 가세나.”
지오네는 품속에서 두터운 책을 꺼내 들었다. 그 책에는 각국에서 워프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워프에 방해가 되는 나무나 풀 따위가 자라 지 않고 넓은, 뭔가와 부딪칠 가능성이 없는 그런 지점들의 좌표가 적혀 있었다.
그는 좌표를 보면서 거대한 마법진을 그렸다. 그가 그린 마법진은 보통 이동 주문에 사용하는 마법진에 비해 엄청나게 복잡했다. 지오네는 6사이클급의 강력한 마 법사였고 또, 그 목적지의 지도를 보고 지표 높이를 대강 참고해서 낙하지점을 정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반대편에 마법진이 있다면 이쪽의 마력이 약해질 때 반대편 마법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지금은 그나마도 어렵기에 안전한 이동을 위해서는 매우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 다.
지오네는 마법진이 다 그려지자 말에 올라타고는 품속에서 작은 수정 지팡이를 꺼내 주문을 외웠다. 마법진이 거의 발동되기 시작했을 때, 지오네는 말을 몰아 마 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말이 마법진을 밟았지만 일단 발동되기 시작한 마법진의 글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마법진 안으로 들어와라”
모두 말에 탄 채로 마법진 안으로 들어서자, 지오네는 시동어를 외치기 전에 일행에게 주의를 줬다.
“강물 위로 워프할 것이다. 워프가 완료된 후에 갑자기 물속에 빠진다고 당황하지 마라. 알겠나? 워프!”
그와 동시에 그들의 몸은 뿌연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지오네 일행이 워프한 후 남은 세 명은 그 마법진을 지워 버리고,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동했 다.
그들이 사라지고 30분쯤 지나자 그들을 멀찌감치 숨어서 감시하던 인물이 마법진이 그려졌던 위치로 다가왔다. 그는 대지의 기억에 물었고, 그 얼굴들을 자세히 기억해 두었다. 그런 후 마법진을 그리고 그 위에 수정 구슬 하나를 놓고는 또 다른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 작은 수정 구슬에는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 다.
“무슨 일이냐?”
“추격자 일행이 오늘 아침에 이리로 이동해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워프해 온 여덟 명의 인물들과 합류했습니다. 이제부터 대지의 기억에 나타난 영상을 전송하 겠습니다.”
그는 수정 구슬 위에 손을 올려놓고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수정 구슬은 아련한 빛을 내뿜었다. 아마도 수신받는 인물의 수정 구슬에는 방금 자신이 대지의 기억에 물어서 알아낸 인물들의 정확한 영상이 나타나고 있을 것이다. 또 그는 멀리서 관찰한 모든 광경까지 전송했다.
“어떻게 할까요?”
“놈들은 추격을 피하기 위해 공간 이동 문을 사용하지 않고 곧바로 워프한 것 같다. 그러니 괜히 큰 주문을 써서 위치를 발각당하지 말고 그 세 놈의 감시나 잘해 라.”
“옛!”
“그런데 전송된 영상에는 시드미안과 함께 다니던 인물들이 많이 빠진 것 같은데?”
“예, 그들은 다른 여관으로 옮겼습니다. 리엔이 감시하고 있지만 그쪽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알겠다. 세 놈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해라.”
수정구 안의 인물은 곧 사라져 버렸다.
여기는 화장실. 변기에 한 소녀가 앉아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제길! 이제는 아주 화장실에 들어오면 자동적으로 치마를 올리면서 주저앉게 되는군. 으윽! 빌·어·먹·을!”
갑자기 화장실 안에서 “빌어먹을”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자 밖에서 얘기를 나누던 인물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장실에서 저런 소리를 지를 이유가 없는데 말 이다.
“소변보러 들어가더니, 저 녀석 왜 저래?”
미카엘의 말에 지미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바퀴벌레라도 본 거 아닐까요?”
“설마! 좀 징그럽게 생기기는 했지만, 저 녀석 자아는 남자라구. 바퀴벌레 보고 욕설 퍼붓는 남자는 없어. 뭐, 그건 그렇고 얼마나 받았냐?”
미카엘의 물음에 팔시온이 말했다.
“응, 시드미안이 미안하다고 하면서 한 사람당 월급 25골드로 계산해서 450골드를 줬어. 나머지 돈은 술이나 한잔하면서 기분 풀라고 하더군.”
“로니에 사제님은 어떻게 한대?”
“한동안은 우리들과 함께 여행하고 싶다고 하시더군. 그런데 앞으로 뭘 하지?”
“뭘 하기는……. 일단 여기 왔으니 무투회에 참가한 후 다음 계획을 의논해 보자. 참, 전에 미디아가 어딘가에서 용병을 모집한다고 하지 않았어? 거기서 싸우면 서 돈 버는 것도 좋지. 단련도 되고…….”
“아직도 용병을 모집할까?”
그러자 미디아가 대답했다.
“내가 시간 내어 용병 길드에 가서 알아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