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7권 18화 – 일방적인 전투
일방적인 전투
“드디어 시작인가?”
소녀의 무감정한 말에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를 표시했다.
“시작할 때도 되었죠.”
제임스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해 둔 채 그의 뒤에 서 있는 마법사 영감에게 지시했다.
“일단 부하들을 불러들여라.”
“예, 하지만…, 지금 시작하실 겁니까?”
“아니, 당연히 지금은 아니지. 저 녀석들이 포위망을 돌파해서 랜트 국가 연합으로 간다면, 전쟁은 랜트 국가 연합에서 하는 게 더 좋아. 하지만 아르곤이 이긴다면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싸우는 수밖에. 타이밍이 중요하니까 그 녀석들 보고 합류하라고 해라.”
“예.”
노마법사는 재빨리 비행 마법을 사용해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제임스는 노마법사가 어디로 날아가는지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눈은 계속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이 사용하는 타이탄에 고정되어 있었다. 제임스는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이 사용하는 거대한 신형 타이탄을 눈여겨본 결과 몇 가지 사실을 재빨리 알 아챌 수 있었다. 놀랍도록 거대한 덩치. 하지만 그 엄청난 덩치를 가지고도 저렇듯 재빠른 움직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엄청난 출력의 엑스시온을 장착한 것이 틀림 없었다. 제임스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크루마에서 정말 대단한 걸 만들어 냈군. 만약 드래곤 잡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저 녀석들이 크루마 소속이란 사실도 몰랐을 테고, 저렇게 엄청난 걸 가지고 있 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을 거야. 휴…, 덩치를 보니까 1백 톤은 확실하게 넘겠는데? 아마 역사상 최고로 큰 타이탄이겠군. 앞으로 어떻게 될지 기대되는데? 흐흐 흐.”
크로티아르 성기사단이 자랑하는 30대의 타이탄들. 평소 그들의 적은 오우거 같은 초대형 몬스터들이었다. 그들과 상대할 때는 무적의 위력을 자랑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성기사단의 타이탄들이 돌격해 들어갔을 때, 상대는 듣도 보도 못 한 거대한 타이탄 7대를 꺼냈다. 족히 1백 톤 이상은 나가 보이는 엄청난 거구의 타이탄들 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엄청난 스피드로 성기사단을 공격해 왔다.
“화물선을 파괴해랏!”
성기사단장은 부하들에게 소리쳤지만, 그건 통하지 않았다. 운하(運河)이기 때문에 제법 깊은지 몰라도 폭은 그렇게 넓지 않다. 고작 50미터 정도. 그렇기에 타이 탄이야 무거워서 못 건너가더라도 성기사들이라면 충분히 건너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의 타이탄들을 이쪽 타이탄들이 막아 줬을 때의 일이었고, 현실 은 그렇지 못했다.
푸캉!
육중한 덩치에 비했을 때 놀라운 속도로 돌진해 들어온 정체불명의 타이탄은 그 거대한 방패로 성기사단의 타이탄을 밀어붙였다. 성기사단이 가진 타이탄들과 상 대 타이탄의 무게 비율은 거의 두 배. 서로가 방패만 한 번 부딪쳐도 성기사단의 타이탄들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고, 형편없이 뒤로 밀려났다. 심지어 일부 타이탄 은 방패에 가격당하자마자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곤두박질치는 형편이었다.
단 한 번의 검 놀림으로 상대 타이탄의 방패와 팔, 방패와 몸통, 또는 검과 몸통을 동시에 잘라 버리는 괴물을 무슨 수로 상대할 수 있겠는가? 성기사단의 타이탄들 은 순식간에 고철 덩어리가 되어 나뒹굴었다. 앞쪽의 다섯 대가 주로 성기사단의 타이탄들을 상대하고 있었다면, 뒤쪽에 쳐져 있던 두 대의 타이탄은 화물선을 향해 뛰어드는 성기사들을 상대했다. 그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검기(劍氣)를 한 번씩 뿜어낼 때마다 수십 명의 성기사들의 몸통이 토막 났다. 타이탄을 사용해서 뿜어내는 검기는 보통의 그래듀에이트가 뿜어내는 검기가 어린애 장난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강력하다. 그런 검기를 아무리 강력한 신성 병기라고 하지만 오라 소 드 따위로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정말이지 상대가 안 되는 싸움. 성기사단장은 10분도 안 되는 전투를 벌인 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10분 동안에 성기사단원의 절반이 죽었고, 타이탄은 전 멸이었다. 그리고 성기사단장마저도 자신의 타이탄과 함께 생명을 마쳤다.
“샤이하드시여. 사악한 무리에게 어찌하여 저리도 강한 힘을 주셨나이까!”
성기사들은 울분을 토하며, 부상자들을 부축한 채 전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원래가 성기사들의 경우 신성 마법과 오라 소드라는 엄청난 위력의 신성 병기 덕분에 꽤 많은 득을 봤다. 하지만 타이탄끼리의 전면전에서는 오로지 마나만이 필요할 뿐, 신성 마법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타이탄을 만든 사람은 신 관이 아니라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기준(1.0) 이하의 출력을 내는 타이탄을, 그것도 간신히 그래듀에이트 정도의 마나를 지닌 인물들이 조종해서 상대의 최고급 타이탄을 조종하는 톱클래스의 마나 를 지닌 인물들과 싸웠으니 그 해답은 간단한 것이었다.
너절하게 널려 있는 성기사단 소속의 타이탄들을 바라보며 타론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제 드래곤을 잡을 때 다 타서 없어져 버렸던 외장 페인트
가 재생된 덕분에 은백색과 적색, 금색으로 산뜻하게 도장되어 있는 자신의 안티고네를 슬쩍 바라봤다. 물론 기본 색상 외부에 덧칠했던 문장(紋章)은 재생되지 않 았기에 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안티고네를 처음 지급받았을 때, 조종석에 앉아 그 녀석이 뿜어내는 엄청난 파워에 전율을 느꼈었다. 무려 2.2의 출력을 가지 는 엑스시온. 헬 프로네의 엑스시온 제작 기법을 발굴해 내어 최강의 전투용 타이탄으로 제작한 것이 바로 이 안티고네였다.
타론은 110톤이 넘는 거대한 타이탄들이 공간을 열고 사라지는 것을 보며 어쩌면 이번 임무는 아주 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르곤이 동원 가능한 성기 사단은 아마도 11개 중에서 5개 정도……. 하지만 피해가 커지면 아르곤은 어쩔 수 없이 이 먹음직한 먹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타이탄의 수는 아무리 적 어도 2백 대는 유지해야 타국이 깔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르곤의 이웃 나라는 그 광포한 코린트 제국이다. 만약 아르곤이 만만하게 보인다면 그날로 아르곤은 지 도 상에서 사라질 가능성도 있었다.
이때 타론의 뒤쪽에서 루엔 공작이 비웃듯 이죽거렸다.
“대제국 아르곤의 힘이 겨우 이것밖에 안 되나? 겨우 이따위 적 때문에 내가 와야 했다니. 안티고네의 실전 테스트치고는 너무 싱겁군 그래. 자, 랜트 국가 연합까 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랜트 국가 연합에서 랜티르강을 거쳐 바다로 나가면 임무는 끝이다. 가자.”
루엔 공작의 지시대로 근위 기사들은 화물선을 호위하듯 대형을 갖추며 운하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빠른 시간 안에 성기사단이 괴멸되자 제임스는 심각하게 증원병 파견 요청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끌고 온 병력도 웬만한 나라 하나쯤 박살 내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는 전력이었지만, 상대방 타이탄에 대한 자료가 전무(全無)한 상태에서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제임스는 슬쩍 다크 일행에게서 떨어진 후 목 소리를 낮춰 노마법사에게 말했다.
“증원을 요청해라.”
“증원을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이 정도 병력으로도 상대를 겁낸다고, 잘못하면 공작 전하께 질책당하실 우려가 있습니다.”
“질책을 당해도 내가 당한다. 일단 숫자는 맞아야 싸울 거 아냐?”
“그러시다면…….?”
노마법사는 통신용 마법진 따위는 그릴 필요도 없다는 듯 곧장 품속에서 주먹만 한 수정 구슬을 꺼내어 제임스 앞에 내밀었다. 곧이어 노마법사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수정구슬 안에 사람이 한 명 나타났다. 그는 제임스를 알아보고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
“아버님은 어디 계시냐?”
<공작 전하께서는 폐하와 담소를 나누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형을 불러 줘.”
<후작 각하께서는 근위 기사단 연습 훈련차 밖에 나가 계십니다.>
“제길, 그렇다면 근위기사단 녀석 아무나 바꿔!”
<잠시 기다리십시오.>
약 10분 정도 기다리자 수정 구슬 안에 또다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화려한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화염을 토하는 붉은색의 드래곤이 그려진 문장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그 드래곤의 몸통에는 ‘I’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
“오, 자네군, 증원이 필요해. 상대방에 강력한 타이탄이 일곱 대나 있다. 흑기사급을 상회하는 파워, 그리고 1백 톤이 넘는 거구를 가진 괴물이야. 그리고 마스터급 까지 한 명 있으니까 아무래도…….?”
제임스의 말에 상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정말이십니까?>
“이 녀석이! 속고만 살았나? 내가 이 시점에서 농담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아?”
<알겠습니다. 공작 전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쪽의 좌표를 알려 주십시오.>
“저 녀석들은 지금 계속 이동 중이야. 빨리 보내 달라고 전해.”
<예. 하지만 한 시간 이내로 증원이 도착하지 않으면 증원군 파견은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알겠어.”
“왜 증원군은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거야?”
상관의 말에 부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도착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카쟈르 성기사단에서도 왜 공격을 시작하지 않는지 계속 전령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요??”
부하의 말에 크로미아 성기사단장인 레가르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크로미아 성기사단은 예정 시간보다 거의 두 시간이나 빨리 도착했지만, 크로미아 성기사
단을 기다린 것은 묵사발이 나 버린 크로티아르 성기사단의 생존자들이었다.
10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거의 괴멸당했다는 것은, 상대가 최소한 크로티아르 기사단의 몇 배 이상 강하다는 소리였다. 상대의 발목을 잡아 지연작전을 펴기로 되어 있던 크로티아르 성기사단이 허무하게 거의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지금, 구닥다리 타이탄들을 끌어 모아 만든 성기사단 두 개로 공격해 봐야 결과는 뻔했 다. 크로티아르 성기사단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놈들은 그야말로 최고 정예였다.
‘보나마나 어떤 망할 국가의 근위 기사단 놈들이겠지. 도대체 저렇게 간 큰 짓을 하는 놈들이 누굴까? 코린트? 크루마? 그것도 아니면 알카사스? 모두 다 수상하니 짐작을 할 수가 있어야지. 저 정도 괴물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그 셋 중의 하나일 게 뻔한데……. 휴~ 어쨌든 타리아 성기사단이 도착해야 싸우든지 말든지 하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레가르는 2개 기사단 60대의 타이탄이라고 해도, 상대를 정면 공격해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 만약 패한다면 60여 대의 타이탄이 고철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본국 타이탄의 3분의 1에 가까운 수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타국과 힘의 균형 따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무조건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는 게 옳겠지만, 잘못해서 이 싸움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경우 더욱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레가르는 한숨을 푹 쉰 후 부관에게 말했다.
“카쟈르에 전령을 보내라. 타리아가 도착할 때까지 놈들을 일정 거리에서 계속 추적한다. 절대로 상대와 정면충돌을 벌이지 말라고 전해라. 그리고 트라팔시(市) 에 전령을 보내 해군을 출동시키라고 일러라. 놈들이 랜트 국가 연합을 통과해서 바다로 나가면 바로 격침시켜 버리라고 해.”
“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