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7권 3화 – 환골탈태
환골탈태
“수련은 오후에 하면 안 될까요? 실은 어제저녁에 하려고 했는데,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못한 게 있거든요.”
소녀는 약간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다크는 처음부터 이런 표정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한 달 동안 아르티어스 옹에 의해 실시된 감정 표현 교육은 매우 훌륭한 성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귀여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다크가 의자(養子)가 된 이후 아르티어스는 그녀에 대한 말투를 하대로 바꿨다.
“그럼, 그럼. 마음대로 하거라. 일 년이란 시간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냐?”
“일 년이요?”
“흠흠,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혼잣말이야.”
다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 차곡차곡 옷을 벗어 버린 후 알몸으로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제 마지막 관문에 도전 해야 하는 것이다. 운기조식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다크의 몸은 떠오르기 시작했고, 온몸에서 엄청난 열과 광채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엄청난 기(氣)의 회오리가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주위를 맴돌았다. 이제 바야흐로 현경으로 들어가는 두 번째의 환골탈태가 시작된 것이다.
두터운 마법책을 펴 놓고는 다크가 익힐 만한 마법이 없을까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느껴진 광폭할 만큼 거대한 마나의 존재에 경악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히 그 기운은 아들의 방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에 그는 서둘러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방문을 열 수는 없었다. 안에서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티 어스는 잠시 이놈의 문을 박살 내고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갈등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다크가 수련을 한다고 들어갔고, 또 안에서 잠겨 있다면 자신이 안으로 들 어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뭐, 다 큰 자식이니 사생활의 자유를 보장해 줘야겠지.”
그는 애써 스스로 뱉은 말에 위안을 느끼며 다시금 마법책을 읽기 위해 돌아갔다.
다크의 피부는 점점 열기가 높아짐에 따라 쭉쭉 금이 가고 찢어지기 시작했고, 바깥쪽에서 분리된 껍질은 곧 시커멓게 타 들어가 버렸다. 시커멓게 타 들어간 피부 의 갈라진 틈 사이로는 기괴할 정도로 밝은 빛과 열이 계속 뿜어져 나오며, 아직 이 작업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갈라진 금의 폭이 더 넓어지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시커멓게 타 버린 껍질이 오그라들며 넓어지는 듯 보이겠지만, 사실 그 시커먼 부분은 더 이상 오그라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 을 정도로 재가 되어 있었다. 이 현상은 진짜로 육체가 외부로 약간씩 팽창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현상이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멈췄다.
화경이나, 현경, 생사경으로 들어갈 때마다 한 번씩의 환골탈태를 거치며 기를 저장하는 단전을 키우게 된다. 물론 이때 육체도 재구성되며, 싱싱한 젊은 육체로 돌아가지만 가장 확실하게 바뀌는 부분이 단전이다. 각 환골탈태 때마다 단전의 용량은 1.5배씩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크의 경우 일반적으로 무공을 익힌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는데, 그건 다크가 육체적으로 매우 어린 상태에서 환골탈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전번의 환골탈태에서도 급격히 키가 조금 자랐었고, 또 이번에도 커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파란만장한 환골탈태는 거의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매번 환골탈태 시에 느끼는 거지만 그 시간 동안 다크는 지독한 열기를 견디느라 진이 빠져 버렸 다. 하지만 환골탈태가 끝났다고 ‘이제 해방이다’하고 모두 끝나는 건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그놈의 환골탈태를 한다고 소모한 기를 보충해야 하고, 또 더욱 많은 기를 쌓을 수 있도록 확장된 그녀의 단전에 기를 모아야만 했다.
그녀는 북명신공을 응용하여 사방에서 방대한 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자신의 마나가 갑자기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에 놀란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레어 밖으로 급히 피신한 것을 깊은 무아의 세계에 들어간 그녀는 알 수 없었고, 또 알았다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아는 한 아르티어스는 매우 강한 생 명체였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레어 밖에서 죽치고 있다가 안에서 걸어 나오는 아들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그녀는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우선 한눈에 보기에도 잘 맞던 옷이 조금 작아진 게 그새 키가 좀 자란 것 같았다. 또 키만 좀 커진 게 아니라 좀 더 성숙해진 뭔가가 느껴졌다. 그리고 좀 더 예뻐진 것 같 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 외형의 변화는 아르티어스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고, 가장 큰 변화는 다른 데 있었다. 자신이 드래곤이었기에 맞받아 줄 정도로 강렬한 마나를 지니고 있음을 대변해 주던 그 맑은 눈에서 더 이상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그 엄청난 마나의 흔적을 깨끗이 숨겨 버린 것이다. 아르티어스 는 가급적 놀라움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 때문에 약간 굳어 버린 얼굴로 물었다.
“이제 끝났냐?”
“예.”
“새 옷을 사 와야겠구나. 시장할 테니 먼저 밥부터 지어라. 나는 그동안에 옷을 사 올 테니까.”
“그럴게요.”
다크가 아름답게 살포시 미소 지었는데, 아르티어스는 그녀의 얼굴에서 여태껏 보지 못했던 강한 자신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성(性)을 제외
하고 자신이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은 것이다.
다크에게서 이상한 자신감이 보이기 시작한 그때부터 아르티어스 옹의 사랑스럽던 아들은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머리 속에 뭐가 들어갔는지 가사 일에는 도무지 발전을 보이지 않았고, 또 마법 수련도 지지부진했다. 뭐 실수를 많이 했다든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도무지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없었다.
거기에 마법은 과거 2주일 동안 1사이클 마법의 절반 이상을 마스터하고 2사이클급 마법까지 몇 개 배워 낸 그 엄청난 학습력이 어디 갔는지, 일주일을 꼬박 핏대 를 세워가며 가르쳤는데도 1사이클을 마스터하기는커녕 겨우 1사이클급 마법 네 개도 못 가르쳤다.
아무리 아르티어스 옹의 머리가 노화 때문에 돌이 되었다 해도, 그의 머리는 돌하고 거리가 멀지 않은가? 뭔가 이상함을 당연히 재빨리 눈치 챘고, 그 원인을 유추 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다크가 자신의 말을 잘 안 듣기 시작한 시발점은 기억이 회복된 때부터였다. 기억이 돌아왔던 그날, 아르티어스는 나이아드 와 흥정을 할 생각에 정신이 없었기에 다크의 마법 공부를 대강하고 치웠다. 또 아들을 얻은 기쁨에 다크의 실수는 ‘뭐, 새로이 기억을 되찾아서 좀 혼란스러울 수 도 있지’하고 그냥 너그러이 참고 넘겼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이 한순간에 어떻게 이렇게나 바뀔 수가 있을까? 그토록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소녀는 사라지고 고집 세고, 지독하게 주관 이 강하고, 흥미 있는 것 외에는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는 고집불통의 검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태껏 배운 것이야 잊지 않고 잘했지만,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게 문제였다. 가르치다가 실수해서 잘 못 한다고 꾸짖으면 무사는 그따위 것 안 배워도 상관없다고 반박하는 데야 아르티어스 옹으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마법도 꼭 마나의 응용이나 뭐 그런 부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무술과 관련지어 파악해 가려고 머리를 굴려 대니 수업 진도는 지지부진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 르티어스 옹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참아야만 했다. 생각 같아서는 엎어 놓고 말 안 듣는 그녀의 엉덩짝이라도 기분이 풀릴 때까지 패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 었다. 왜냐고? 사랑스런 소녀를 패는 게 너무 가슴 아파서 못한 게 아니라 힘에 밀려서 못했다.
한 번은 그걸 시도했다가 자신이 트랜스포메이션한 육체를 가지고는 망나니 같은 아들 녀석의 한주먹 거리밖에 안 된다는 것을 눈탱이가 퍼렇게 된 다음에야 깨달 았던 것이다. 정말이지 인간이면서, 그것도 계집애인 주제에 아들 녀석은 무지막지하게 강했다.
“아구구구. 내 팔자야. 내 사랑스럽던 아들은 어디로 갔지? 에휴.”
저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한숨을 뿜어낸 아르티어스는 지금의 사태에 대해 궁리해야만 했다. 다크의 엉덩짝을 패기 위해 틀어쥐려다가 도리어 다크에 게 한 대 맞고 나자빠질 때부터 아버지로서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권위를 보여야 해. 그 녀석과 나와의 힘의 차이를 보여 주고 존경심을 얻어 내야만 해. 저 빌어먹을 년을 통제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하지만, 그래도 안 “되면?”
아르티어스는 조금 더 궁리한 다음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뱃속에 꿀꺽해 버리고,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하면 되지.”
아르티어스가 작심을 하고 그녀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아르티어스가 만들어 놓으라던 조각보는 손도 대지 않고 뭔가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들 어오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아버지, 혹시 검 있어요?”
“아빠라고 부르라니까, 아니면 엄마라고 부르든지. 아버지는 너무 거리감이 느껴져서 싫어. 알겠냐?”
“그게 그래도…….”
다크는 난처했다. 눈 딱 감고 아빠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70여 년을 살아온 그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좋아, 어떤 검을 원하는데? 우리 아들이 원하는데 하나 장만해 줘야지.”
“그러니까 길이는 70센티미터 정도, 손잡이는 20센티미터 정도, 양날검이어야 하고, 검신은 완만하게 휘어지게 만들면 돼요.”
“흠, 별로 어려운 부탁은 아니군. 하지만 새로 만들기는 귀찮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검들 중에서 아무거나 골라 가지면 안 될까?”
“검이 있어요?”
“그럼, 한 열 자루 정도 있지. 내가 과거 인간 세상을 떠돌 때 수집해 놓은 건데 나쁜 건 아냐. 그중 한 자루는 내 친구 녀석이 선물한 것인데, 아주 괜찮은 마법검이 지.”
“드래곤이…, 친구도 있어요?”
“드래곤은 친구가 없는 줄 아냐? 그 녀석은 여행 도중에 만난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라는 녀석인데 콧대 높기로 이름 높은 레드치고는 쓸 만한 놈이었지. 그 녀 석과 헤어지면서 기념으로 서로가 직접 검을 한 자루씩 만들어 교환했는데, 제법 쓸 만하더라 이거지.”
“한번 봐요.”
‘짜식! 검하니까 눈빛이 달라지는군.’
아르티어스는 그녀를 자신의 보물 창고로 인도했다. 문을 열자 한쪽 벽에는 검이나 활, 창 등 무기류와 방패, 갑옷 등이 걸려 있었고, 그 반대쪽에는 금은보화가 쌓 여서 거대한 방의 거의 절반을 메우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이 수집품들을 자랑스레 바라봤다. 이 금들의 3분의 1은 드워프들을 협박해서 뺏은 것이고, 3분의 1은 인간 세상을 떠돌며 갖가지 일을 해서 벌어들인 것이었고, 또 3분의 1은 장난 삼아 몇몇 나라의 국왕들을 드래곤인 상태로 찾아가서 자신의 거대하면서도 위압적인 자랑스런 몸매를 구경시켜 주고 얻은 (?) 것들이었다.
사실 드래곤인 자신에게 보석이나 금은 따위는 별로 필요한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그러하듯 그 반짝거리는 영롱한 광채가 보기 좋아서 끌어 모은 것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 보물의 산을 쳐다보기만 해도 다리의 힘이 빠져 주저앉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아들 녀석은 그렇지 않았다. 엄청나게 쌓여서 영 롱한 광채를 뿜어내는 보석 따위는 본체만체하고 곧장 검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들 녀석이 검을 고르는 데 들어간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냥 쭉 훑어보더니 곧장 한 개를 선택했다. 과거 아르티어스가 여자 마법사로 활동하던 시절 멋으로 차 고 다녔던 여성용 격투검 샤벨이었다.
“이게 좋겠어요.”
그 샤벨은 보통의 샤벨들이 그러하듯 검신의 길이 60센티미터, 폭 3센티미터 정도의 매우 짧지만 예리하고 날카로운 여성용 검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멋으로 차 고 다녔던 거라 마법검도 아니었고, 그냥 금은 따위로 모양을 내고 손잡이에 붉은 보석까지 붙어 있는 정말 겉멋뿐인 검이었기에 아르티어스는 그녀의 선택에 반대 했다.
“그건 아무런 위력도 없는 검이야. 내가 왕년에 멋으로 좀 차고 다녔던 건데, 그런 걸 차고 다닐 수야 없지. 방금 내가 말했던 브로마네스가 선물했던 검은 이거야. 얼마나 근사하냐?”
그러면서 아르티어스 옹은 요즘 들어 회의가 좀 일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소녀를 향해 벽에 높직하게 걸려 있던 1.5미터가 넘는 호화롭게 장식된 바스터 소드 를 손수 꺼내 들고는 그녀에게 권했다. 확실히 드래곤이 마법으로 검신을 직접 만들었고, 거기에 아르티어스 옹의 협박에 굴복한 드워프들이 손잡이와 검집을 만들 어 붙였기에 너무나 화려하면서도 완벽한 검이었다.
아르티어스가 내부를 보여 주기 위해 검신을 밖으로 조금 꺼내자 검신에 새겨진 수없이 많은 기하학적인 주문과 레드 드래곤의 뼈다귀ᅳ뼈와 드래곤의 외피는 같 은 성분이다—만이 가지는 찬란한 붉은색이 검을 더욱 멋있게 해 주었다.
“어때? 이 정도면 최고의 예술품이지? 그런 쓸모없는 검보다야 이게 낫지. 이건 마나만 주입해 주면 5사이클급까지 화염 마법을 사용할 수 있거든. 내가 과거 이 검을 들고 대륙을 돌아다닐 때 정말 끝내 줬었단다.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냐?”
“전혀. 그렇게 큰 걸 귀찮게 어떻게 들고 다녀요? 이 정도 크기가 딱 맞아요.”
양보할 줄 모르는 소녀의 말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벌컥 화를 냈다.
“이런 제기랄! 그런 쇠붙이로 만든 건 약해 빠져서 못 쓴다니까. 좋다, 그럼 조금만 시간을 다오. 내가 하나 만들어 줄 테니.”
“검 한 자루를 어느 세월에 만들겠어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다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에잉, 그게 아니라니까. 마법으로 검을 만드는 건 금세 끝나지. 지금 여기서 검을 만들 건데 너도 한번 볼 테냐?”
“그러죠.”
이 음흉하신 아르티어스 나으리는 이제 바야흐로 본체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당연히 드래곤 본을 이용해 검을 만들기 위해 그 뼈의 성분을 몸에서 뽑아내려면 드 래곤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작업을 망나니 아들 녀석 앞에서 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아들 녀석과 위대하 신 아버님 사이의 힘의 차이를 확실하게 느끼게 해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